주민기록단 활동기록

성북구에서 사는 혹은 살았던 우리가 우리의 이야기를 기록하여 성북의 역사를 만들어갑니다.

2023. 10. 06. 1990년대 미아리 성매매집결지 화장품 판매원 인터뷰 (활동자: 임진희) 2023.12.22
1990년대 미아리 성매매집결지 화장품 판매원 인터뷰

활동자 : 임진희

일 시 : 2023년 10월 6일 금요일 12:00-17:00

장 소 : 하월곡동 일대


1. 인터뷰 선정 이유
27년 전 하월곡동, 속칭 미아리 텍사스에서 성매매 집결지 아가씨들을 상대로 화장품을 판매하고 마사지를 해주며 영업을 하던 장선희 님을 인터뷰 하였다. 30대의 젊은 나이에 대담하게 그곳에 뛰어들어 일을 했던 그녀의 인생 역정과 당시 그곳에서 일 하던 아가씨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2. 인터뷰 내용
전체 내용을 6개 부분으로 나누었다. 첫 번째는 27년 만에 자신이 일하던 곳에 선 장선희 님의 모습을 서술했고 두 번째는 그녀의 출생과 성장 배경, 세 번째는 그녀가 미아리에서 영업을 하게 된 된 동기와 그곳 아가씨들 이야기, 네 번째는 그곳과 인연을 끊게 된 계기, 다섯 번째는 장선희 님의 현재와 그녀의 꿈, 마지막으로 다시 현장으로 돌아와 그녀의 소회를 들으면서 수미상관식 구성으로 마무리하였다.

3. 인터뷰 특징 등
평소에 친분이 있던 장선희 님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풀어가기 위해 넉넉하게 시간을 잡았다. 미리 인터뷰 의사를 전달하여 반 승락을 받은 상태였다. 정오에 만나 점심식사를 마치고 차를 마시면서 작성한 질문지를 보여주니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식당을 빠져나와 함께 성매매 집결지 현장을 둘러보는 사이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인근 카페에 들어가 질문지를 중심으로 인터뷰를 하며 녹음을 하였다.

**인터뷰 내용**
<그녀들 모두가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를 기원하다>

그녀는 27년 만에 다시 그 자리에 섰다. 숱한 생각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그 시절 화장품 가방을 들고 새벽에 부리나케 드나들던 곳이었다. 속칭 ‘미아리텍사스’라 불리던 그곳에는 성매매 여성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공생, 혹은 기생 관계에 있는 다양한 사람들이 더불어 살아갔다. 인근에 음식점, 약국, 슈퍼마켓 등 상주하며 생활용품을 제공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한 필요에 의해 일정 시간 드나들며 관계를 맺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 중에는 병원에 가지 못하는 그녀들에게 혹을 떼어주거나 곤지름 치료를 했다는 전직 간호사가 있고 화장품을 팔며 화장을 해주고 마사지를 해주는 방문 판매원도 있었다. 아가씨들을 감시하고 관리하는 ‘삼촌’이라고 부르는 남자들을 제외하면 주로 여성들의 비중이 높았다.

장선희(張仙熙)님은 30대 후반인 1990년대 후반 6개월 가량 그곳을 드나들며 화장품 방문 판매 영업을 하였다. 아가씨들의 일이 끝나는 오전 6시부터 홀의 빨간 불을 끄고 9시 경까지 10여 명의 아가씨들에게 마사지를 해주었다. 당시 30대 후반의 나이에 일반 사람들이 출입을 꺼리는 그곳을 일터로 잡았다는 것은 특이하기도 하고 대범하기도 했다. 이렇게 강인한 생활력을 가진 그녀 역시 예사로운 사람은 아닐 듯싶었다. 그녀는 어떤 삶의 이력을 가진 사람일까?

1959년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다문1리에서 딸 넷에 아들 둘을 둔 전형적인 농사꾼 집안에서 셋째 딸로 태어났다. 경기도 강화면이 고향인 아버지는 정식 배움은 없었으나 어깨 너머로 한자를 습득할 정도로 영리한 사람이었다. 손재주가 좋아 싸리나무나 짚으로 광주리, 바구니, 멍석 등을 잘 만들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사고무친한 고아의 처지로 처가에서 3년을 거저 머슴살이 해주고 29세 때 13년 연하의 열여섯 색시를 데려올 수 있었다. 김유정의 소설 ‘봄봄’에 나오는 이야기가 그 시절에는 실제로 농촌에서 종종 벌어지던 일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숟가락 두 개, 밥 주발 두 개로 시작한 살림이었으나 열심히 일한 덕분에 재산을 모아 집을 두 채 사고 땅도 열세 마지기를 마련했다. 곳곳에 삼태기가 널려 있던 집안은 사람을 사지 않고 가족들이 농사를 지었던 까닭에 일이 넘쳐 났다. 그녀는 부모에게서 살림이며 농사짓는 법을 배워 초등학교 시절부터 50명 일꾼들 밥을 너끈히 챙겨줄 정도로 당찬 살림꾼이 되어있었다.

다문초등학교를 졸업했지만 당장 일손이 필요했던 부모님은 중학교에 보내주지 않았다. 아들들은 땅을 팔아서라도 가르쳤으나 딸은 배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시절이었다. 공장에 다녔던 언니들은 돈을 벌어와 대접을 받았으나 그녀는 구박 덩어리였다. 집안 살림은 그녀의 차지였고 두 명의 남동생과 여동생을 돌보는 것도 그녀 몫이었다. 고집이 세고 꿈이 있었던 그녀는 집에서 십리 길 떨어진, 학비가 들지 않은 연수중학교에 스스로 원서를 냈다. 가족들 눈치 보며 어렵게 공부했다. 3년 동안 단 한 차례도 결석하지 않고 전교 3등으로 졸업하였다.

“뒤 곁에 보름달이 뜰 때 울면서 공부했어요. 쌍둥이 동생을 등에 업고 도랑에 가서 빨래를 할 때면 건너편 돌 위에 책을 펼쳐 놓고 영어 단어를 중얼중얼 외울 정도로 열심히 했지요.”

그녀는 미용과 재봉 일에 재능이 있었다. 그리하여 화장품 판매 일을 하게 되었는데 그 지역 ‘코리아나 화장품’ 대리점 내에서 최고의 실적을 올리며 팀장에 오르기도 하였다. 서울로 거처를 옮긴 그녀는 서울 인수초등학교 근처에 피부미용실과 맛사지숍을 겸한 샵인샵 방식의 가게를 차렸다. 화장품을 판매하고 피부미용실을 운영하면서 돈을 벌기 위해 새벽에 부업 개념으로 일을 시작했다. ‘백옥생’ 영업 사원을 겸해 자신의 승용차 티코를 몰고 하월곡동에 드나들게 된 것이었다.

“전단지와 화장품 샘플을 들고 명함을 뿌리며 홍보를 했는데 메이크업과 마사지 기술이 있으니 화장품을 사면 서비스를 해줄 수 있었어요. 처음에는 뻘건 불이 번쩍번쩍하고 인형 같은 애들이 앉아 있으니까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그랬어요. 그때는 남자 영업사원이 있어서 그들과 동행하면서 일을 시작했는데 나중에는 나 혼자 독립적으로 하게 되었지요. 남자 방판 사원 중 인물이 좋은 사람에게는 화장품을 많이 팔아주기도 하더라고요. 남의 지방 빼주는 일을 하다 보니 내 손의 지방이 다 빠져 버려 이렇게 쭈글쭈글한 늙은이 손이 되어버렸어요.”

화장과 마사지를 해주며 아가씨들과 친해졌고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아가씨들 수가 많아 영업이 더 잘됐다. 그녀가 본 집창촌 여성들의 모습은 어떠했을지 궁금했다.

“대부분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여성들인데, 중반쯤 되면 노처녀라고 밀리는 형편이었죠. 막상 그 세계에 들어가 보니 아가씨들이 순수했고 생활력이 강했어요. 창피하다든가 남한테 어떻게 보이느냐에 신경 쓰지 않더군요. 대부분 집안의 가장이었어요. 집에 공부하는 동생이 있다거나 부모님이 병들었거나 그런 처지가 많았고 대학 다니다 학비 벌러 들어 온 아가씨도 있었어요, 딱 한 사람, 자기를 꾸미고 싶어 성형할 돈 벌러 왔다는 아가씨도 기억나네요. ‘그랬어예’하던 대구 출신 아가씨도 생각나고요. 특별히 어둡거나 위축되어 보이지는 않았고 하나의 직업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았어요.”

화장품을 팔기 위해 청량리 588, 서울역, 천호동 등 서울 시내에 있는 다른 집창촌도 가보았는데 각각 분위기가 조금씩 다르더라고. 588에서는 아가씨들이 박스 안에 서 있는데 미아리에서는 홀에 교대로 앉아 있다 손님을 받았으니 그래도 그 세계에서는 미아리가 대우가 좋은 편이었던 것 같다고 말한다.

자신이 운영하는 피부미용실에 손님이 점점 늘고 바빠지기 시작하자 거기에 전념하려고 마음먹고 있던 중 미아리텍사스에서의 일을 접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생겼다. 특별히 기억나는 아가씨가 있었다. 얼굴과 몸매가 연예인처럼 예뻐 그곳을 나가면 얼마든지 새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아가씨가 한번은 “언니네 집에서 자면 안 돼?” 하고 물었으나 복잡한 일이 생길 것 같아 거절했다.

“그 애는 돈도 많이 벌어 놓고 그곳에서 빠져나올 준비를 하고 있었나 봐요. 주인은 몰랐는데 주방에서 일하는 언니랑 나랑은 알고 있었어요. 나는 영문도 모르고 내 차로 잠시 그 아가씨 캐리어를 실어다 줬을 뿐인데 결과적으로 내가 아가씨 도주를 도와준 상황이 되어버렸어요. 그 가게의 돈줄이 도망쳤으니 포주가 화가 나 내게 그만두라 그러더군요. 그 일이 그곳에 발을 끊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 되었지요. 한 가지 좋았던 점은 포주가 여기저기 깔린 외상값을 그날로 해결해 주더라고요.”

이런 경우는 극히 예외고 대부분의 아가씨들은 한번 들어오면 빠져나가기가 무척 어렵다. 몸에 문신을 한 삼촌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지키고 있고 옷 값, 화장품 값이 많이 들어 빚을 지게 되고, 그 빚을 갚기에도 버거울 지경이라고 한다. 설혹 그곳을 나간다 해도 비슷한 집창촌 이곳저곳 떠돌기 일쑤라고.

그녀는 그 시절 집창촌 아가씨들의 이야기를 지난해 출간한 장편 소설 <향기로운 꽃이 되었다>에 등장시키기도 하였다. 어려서부터 문학을 하고 싶었고 재능이 있었던 그녀는 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한 후 시집을 내고 장편 소설을 출간한 시인이자 작가이다. 대한문인협회 사무국장을 거쳐 현재 총무국장직을 맡고 있다. 80년대나 90년대에 어려운 환경에서도 열심히 살아온 여자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소설로 썼다. 전부 실화는 아니지만 사실과 허구를 적절히 버무려서 흥미 있게 그려 보고 싶다고 했다. 자신의 소설 <향기로운 꽃이 되었다>는 남성 위주의 가부장 사회에서 여자들이 열심히 노력하여 자신의 길을 가는 모습을 그렸다. 여자들 이야기이니까 꽃으로 비유했고 꽃이 저절로 핀 것이 아니라 자신의 노력으로 만들어 가는 삶이기에 피었다가 아닌 ‘되었다’로 표현했다고 한다. 앞으로 시는 주제를 사람 쪽으로 옮겨서 쓰고 소설은 더 깊이 들어가 삶의 현장을 연작형식으로 낱낱이 쓰고 싶다는 바람을 품고 있었다.

27년 만에 다시 미아리텍사스를 둘러본 그녀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오늘 다시 이곳을 돌아보니 예전에 내가 겁 없이 이곳에 뛰어들어 돈을 벌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네요. 그때 사는 게 무척 절박했었구나 생각되고 정말 열심히 살았다 싶어요. 그 시절 그 아가씨들은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이 들어갈지 궁금해요. 지금 그녀들을 만난다면 정말 반가울 거예요.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냥 꼭 안아주고 싶네요. 모두가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를 기원해요.”

<사진 설명>
1. 자신이 드나들던 성매매집결지 입구를 가리키는 모습
2. 예전 성매매집결지 터에 들어선 고층건물
3. 마사지를 해주며 지방이 빠져버린 손
4. 장선희님의 인터뷰 모습
성매매집결 입구에서

성매매집결 입구에서

고층건물

고층건물

장선희 님의 손

장선희 님의 손

인터뷰하는 장선희 님

인터뷰하는 장선희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