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암동사람들” 인터뷰
기록가 : 임진희
일 시 : 2025년 6월 10일 화요일 14:20 – 15:20
장 소 : 성북구 안암동 주민센터 1층(도로명 주소 : 고려대로 16길)
<안암동사람들1>
안암동 41년의 삶
- 서울 토박이 최성림씨-
그녀 나이 또래 중 순수한 서울 사람 만나기가 쉽지 않다. 성북구에는 이촌향도 현상으로 서울로 유입된 지방 이주민이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서울 토박이다. 날렵한 체구, 또박또박한 말투로 경우 따지며 하고 싶은 말 하는 칼칼한 성미를 지닌 서울 여자다.
서울 충정로 출생
“1953년 서대문구 충정로 2가에서 태어나 일곱 살까지 지내고 평동에서 스물네 살까지 살았지요. 평동 집은 자유당 시절 부통령을 지낸 이기붕씨 집 바로 옆이었어요. 초등학교 4학년인가 5학년 때 4·19혁명이 일어났는데. 학생들이 그 집에 몰려와 물건을 집 밖으로 내던지던 기억이 생생해요. 그 뒤에 잠실에서 살았는데 그 집은 부모님이 남동생에게 물려줬어요. 현재 30억쯤 될걸요.
친가는 황해도 해주 사람들이고 외가는 암행어사 박문수를 배출한 집안이었는데 예절이 무척 엄했어요. 밥상머리 교육을 철저히 받아 상대방에게 냄새 풍긴다고 김치도 못 먹게 할 정도였으니까요. 또한 독립운동 애국장을 받으신 시아버님 김희균 유공자님은 우리 집안의 영광이며 자랑이랍니다.”
그녀의 성장기는 격변의 시기였다. 두 번의 화폐개혁과 4·19와 5·16을 겪었다. 저금리 시대였고 자루를 옆구리에 끼고 동회에서 표를 받아 안남미라 부르던 쌀과 밀가루를 받아오기도 했다.
결혼과 함께 안암동에서 41년째
그녀는 서울역에 자리한 주식회사 대우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 1984년 당시로서는 늦은 나이인 서른둘에 결혼을 했다. 열다섯 살 연상 고려대학교 중앙 실험실 과장이었던 남편의 직장과 가까운 안암동 대광 아파트에 둥지를 틀었다.
“사실 결혼하기 싫었어요. 주변 사람들이 가부장적 환경에서 억압받으며 사는 모습들을 봤거든요. 여성에게 차별적인 사회 관습에 대한 거부감도 있었고요. 그런데 다행스럽게 좋은 사람을 만나 딸을 두고 지금까지 잘 먹고 잘 살고 있네요.”
소설가 황순원 집 매입
대광 아파트는 15, 17, 20, 22평형이 있었는데 그중 20평 아파트에 입주했다. 지금은 51년 된 낡고 오래된 아파트지만 대부분 연탄보일러를 때던 시절에 중앙난방 맨션아파트여서 주부들이 살아보고 싶어 하던 곳이었다. 그녀는 대광 아파트 3동 332, 333호도 매입하였는데 소설가 황순원씨 집이었다. 15평짜리 두 채를 터서 30평으로 살고 있었다.
“지금은 아파트를 임의로 개조하는 것이 불법이지만 당시는 가능했어요.”
그 집의 명의는 황순원에서 큰아들 황동규로 나중에는 둘째 아들 황남규로 바뀌었는데 황남규 씨의 따님과 매매 계약을 했다고 한다. 그녀는 그 집을 원상복구 시킨 다음 현재까지 세를 주고 있다. 본인은 9년 전 가까운 삼익 아파트로 이사하여 살고 있다.
아쉽게도 우리 문단의 거장인 황순원 작가와 황동규 시인의 안암동 시절 이야기는 들을 수 없었다. 그 시절 두 부자의 이야기와 그 집에서 탄생한 작품들을 연구하고 조명한다면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이대로가 좋아
41년 동안 안암동에서 살아온 특별한 이유를 물었더니, “돈이 없어서”라며 거침없이 답한다. 직설적이고 솔직한 성격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개천이 있고 시내와 가까우며 고즈넉한 환경은 좋은데 변화가 적고 인프라가 없다고 평한다.
“4년 전 남편이 혈액암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겼거든요. 지금은 밥 떠먹여 주지 않아도 되고 병수발을 안 해도 되니 이대로가 좋아요. 더 나빠지지만 않았으면 싶어요.”
안분지족의 삶은 지나온 세월이 그녀에게 가르쳐 준 크나큰 지혜인 듯싶었다.
<사진 설명>
1. 면담자 최성림씨
2. 2025년 3월의 대동아파트
3. 황순원 씨가 살았던 332, 333호(아파트 전면에서 보면 1층이나 아파트 후면에서 보면 3층인 구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