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도끼#145] 성북구의 농경문화와 마을규칙
작성자 백외준
마음은 벌써 고향으로 가 계신 분들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북구가 고향인 분들도 많습니다. 토박이 어르신들 중에는 유년 시절의 성북구를 아스팔트 도로가 아닌 가르마 같은 논길이 있던 풍경으로 기억하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1950년대 이전만 해도 성북구는 영락없는 시골이었기 때문입니다. 145번째 금도끼에서는 대명절 설날을 맞아 그 옛날 농사짓던 성북 사람들의 생활 방식과 마을 규칙 그리고 지금도 조상의 전통을 지키고 계승하려 노력하는 후손들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성북구의 농경문화]
성북구는 개운산을 중심으로 서쪽과 동쪽 지역으로 나뉩니다. 지금은 양쪽이 주거 환경 면에서 큰 차이가 없지만 100년 전만 해도 두 지역의 분위기와 생활방식은 많이 달랐습니다. 서쪽 지역은 벼농사를 지을 만한 농토가 거의 없어 주민들이 자주 성안을 드나들면서 생활했던 반면에 동쪽 지역은 정릉천과 우이천을 따라 넓은 충적지가 펼쳐져 있어 널따란 논과 밭이 있었고 여기에 의지해 자급자족하는 농촌 마을이 형성돼 있었습니다.

“북바위 전답을 모르면 농군 행세하지 마라.”는 옛말도 있듯이 종암동 일대 정릉천 유역의 논들은 기름지기로 유명했습니다. 왕이 제사를 지내고 쟁기질을 하던 선농단(先農壇)과 적전(藉田)이 가까이 있는 까닭도 거기에 있습니다. 지금의 정릉천을 보면 육중한 내부순환로 교각이 하중에 박혀 있고 콘크리트 제방으로 둘러쳐져 있어 옛모습을 잃었지만 100년전 만 해도 정릉천은 사시사철 넓디넓은 모래톱이 펼쳐져 있는 아름다운 하천이었습니다. 그 수량에 의지해 농사를 짓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종암동 북바위 유래비(2020) ⓒ성북문화원

종암동 북바위 유래비(2020) ⓒ성북문화원

석관동 도당(2018) ⓒ성북문화원

석관동 도당(2018) ⓒ성북문화원

성북구와 노원구의 경계를 이루는 우이천은 정릉천보다 더 길고 넓은 하천입니다. 이 때문에 우이천을 끼고 있는 장위동과 석관동에는 농사지을 만한 땅이 많았고 주변에 큰 마을이 오래전부터 형성돼 있었습니다. 지금도 터줏가리가 고이 모셔져 있는 석관동 도당집은 농촌 공동체 신앙의 일면을 보여주는 장소입니다. 이곳에는 대대손손 사는 사람들이 많아서 자연스럽게 동성촌락이 형성되었습니다. 장위동에는 해평 윤씨, 전주 최씨, 단양 우씨 들이 모여 살았고, 석관동에는 여흥 민씨들이 모여 살았습니다. 종암동에는 경주 김씨와 경주 정씨들이, 월곡동에는 밀양 박씨들이 대대로 살았습니다. 이 동성촌락들은 이들 지역에서 농업이 발달하고 그에 기반한 마을들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우이천(2020) ⓒ서울연구원

우이천(2020) ⓒ서울연구원

[장위동 마을 전통과 ‘장위리 존안’]

1960년대 들어 성북구 전 지역이 개발되고 지방에서 유입된 인구가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면서 농업에 기반한 동성촌락의 존재는 점점 희미해졌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옛 마을의 전통을 기억하고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장위2동 활량리 식당의 우덕수 사장님이 대표적입니다. 우덕수 사장님이 말씀해주신 장위동에 각 성씨가 몇 대조부터 살았는가를 측정하는 방법이 재미있습니다. 족보를 보는 게 아니라 지금 이 동네에 내 친척이 몇 촌(寸)까지 있는가를 헤아려보면 쉽게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4촌까지 있다면 할아버지 즉 2대조부터 살았다는 것이 되고, 6촌까지 있다면 증조할아버지 즉 3대조부터 살았다는 것이 됩니다. 만약 10촌까지 안다면 그 친척들은 다 5대조 할아버지의 자손이 되는 것이죠. 친족의 촌수를 헤아려 어느 성씨가 여기에 더 오래 살았나 알 수 있다는 겁니다. 뭔가 지혜로운 방법 같지 않나요? 이 방법을 알려주신 우덕수 사장님은 현재 장위동 이중계(里中契)의 총무로 활동하며 마을의 전통을 지켜나가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장위3동의 최무영 옹은 장위동에 5대째 살고 있는 어르신으로 『장위리존안(長位里存案』(이하 존안)이라는 문서를 소장하고 계십니다. 존안은 1905년(광무9년)의 장위리 마을대표 선정규칙과 자치규범을 담은 문서입니다. 이것은 1994년 서울시 정도(定都) 600년을 기념하여 ‘토박이 선정사업’의 일환으로 수집되어 알려진 것으로 2020년 서울역사박물관의 현지 조사를 통해 책자에 담겨 그 내용이 공개됐습니다. 『도시 주거 변천의 파노라마-장위동』(서울역사박물관, 2020)에는 존안의 전체 내용과 번역문이 실려 있습니다.
장위리 리중 규칙 ⓒ서울역사박물관

장위리 리중 규칙 ⓒ서울역사박물관

장위리존안의 내용과 의미
장위리존안에는 장위리에 사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따라야 할 공동체의 10가지 규범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마을 일을 관장하는 임원들의 직함과 이름도 나와 있습니다. 길더라도 ‘리중규칙(里中規則)’ 부분에 대한 번역문 전체를 인용하겠습니다.

1 리중(里中)에 규칙을 정하야 일준(一遵) 시행하되 만약 위반하는 자가 있으면 매사(每事) 논경(論警)할 것

2 리중(里中)에 상존위(上尊位)와 부존위(副尊位), 영좌(領座), 소임(所任)이 대소 사무를 관할할 것

3 상존위는 즉 동장이시니 지위가 높고 명망이 중한 이로 일동(一洞)이 경봉(敬奉)함이니 체임(遞任)이 없고 부존위와 영좌와 소임은 교체하되 신선(新選)할 때에 일반 동민이 제회(齊會)하여 명예가 있는 사람으로 투표 선정하되 다수를 따라 시행할 것

4 상존위는 부존위 이하 제(諸)임원을 지휘 감독하여 리중 대소사를 관할하고 부존위와 제임원은 상존위 명령을 받아 리중 사무에 종사하되 만약 중대사가 아니면 상존위 댁에 품의(稟議)하기 전에 제임원만 상의처변(商議處辨)하기도 할 것

5 리중 인민 중 혹 수화(水火), 기근, 동아(凍餓), 질병의 폐(弊)가 있거든 일동(一洞)이 동심(同心) 협조하여 환산빈사(渙散濱死)에 이르지 않게 할 것

6 리중 재정(財政)에 관하여 기본금 식리전(殖利錢)을 매년 10월 15일로 약속하되 정한 일자에 불납할 경우에는 일(一)에 이(二)를 가봉(加捧)할 것

7 리중 인민 중 불효부제(不孝不悌), 술주정과 노름, 부녀음간, 과부유협, 자제 유인(誘人), 기타 구타 등 제반 불법행위가 있는 자는 제위원이 회석하고 동회(洞會)를 청하여 중범자(重犯者)를 수의징계(受議懲戒)하되 사유를 상존위 댁에 아뢰고, 만일 패륜멸상과 생명재산에 중범자는 즉각 훼가축출(毁家逐出)할 것

8 효우(孝友) 돈목(敦睦)에 특이한 덕행이 있는 사람에게는 별반(別般) 표창을 가(加)하여 긍장표준(矜獎表準)으로 삼을 것

9 매년 추성(秋成) 후 관결(官結) 수납 시에 정한 일자를 넘겨 불납하면 스스로 관청에 납부케 하고 리중에서 관여하지 않을 것

10 리중에 오예물(汚穢之物)을 적치(積置)하지 못하게 하여 거처를 필수 청결케 하고 도로 교량을 수축(修築)하여 왕래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불편의 목소리가 없게 할 것

상존위 윤용구 / 부존위 박창근 / 영좌 이창묵 / 통감 우창익 우정식 / 소임 최용준 / 서기 류재정

우(右)는 광무 9년 을사 10월 15일 쓰다〔書〕

상존위(上尊位)는 윤용구(尹用求, 1853~1939)입니다. 그는 알려진 대로 장위2동 부마가옥의 주인이었습니다. 순조의 부마 윤의선의 양자로 고종 연간에 이조판서를 지낸 분으로 1895년 을미사변 이후 관직을 버리고 장위동에 은거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은거가 고립된 은둔 생활이 아니었음을 이 문서는 말해줍니다. 존안은 윤용구가 상존위, 그러니까 마을의 큰 어른으로서 마을을 대표하고 마을살이의 중심을 잡아주는 그런 존재로 활동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평범한 농촌 마을에 전직 이조판서, 그것도 왕의 측근으로 있었던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은 그 마을의 위상이 엄청나게 높아짐을 이야기합니다. 전해오는 말에 “장위동에 도둑이 숨어들더라도 반드시 윤용구 대감의 허락을 받고서야 풀어주었다.”는 말이 있는데 존안을 보면 충분히 근거 있는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상존위 아래 임원 명단도 눈여겨봐야 할 대목입니다. 상존위가 마을을 대표하는 상징적 존재라고 한다면 부존위(副尊位)는 실질적으로 임원들을 지휘하며 마을 일을 관장하는 사람입니다. 영좌, 통감, 소임, 서기는 부존위를 보좌해 세세한 실무를 처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마을 임원 가운데 최씨, 우씨들이 많은데 이들은 모두 장위동에 3대 이상 거주한 토박이입니다. 1913년부터 이장을 지낸 최명선 님은 최무영 옹의 할아버지입니다.

인용문에서는 확인할 수 없지만 존안을 뒷장까지 넘겨보면 마을의 실질적 수장인 ‘부존위’의 명칭은 두 차례 변경됩니다. 1911년에는 ‘동수(洞首)’가 되었다가 1914년부터는 ‘이장(里長)’이 됩니다. 여기에는 일제의 지방행정구역 개편의 역사가 스며있습니다. 일제는 한국을 병합하고 조선시대의 행정단위와 마을 단위 공동체 전통을 지우고 식민지 경영과 수탈을 위해 필요한 명령체계를 구축하고자 했습니다. 장위동도 예외는 아니어서 마을 임원의 명칭도 조선총독부의 방침에 따라 바꿔야만 했습니다. 행정구역 또한 숭인면 장위리가 되면서 면사무소와 면장의 힘이 세져 자치 규범의 구속력도 약화되었을 것입니다.

장위리존안에 명시된 10가지 마을 규범은 오늘날 성북구의 주민공동체 활동, 주민자치 활동에서 참고할 만한 것이 많습니다. 당장 그대로 성북구의 마을들에서 시행해도 고개 끄덕일 만한 내용들도 더러 있습니다. 사람이 함께 모여 살면서 일어나는 일들, 갈등들이 예와 지금이 크게 다르지 않은 까닭입니다. 비록 오늘날에는 풍속이 변하고 법치주의가 정착되면서 똑같이 적용하지 못할 조항도 있긴 하지만 그래도 재해석하고 변용시킨다면 오늘날 현실에 맞는 규범으로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마을 임원을 마을 사람(리중 인민)의 투표로 선출했다는 사실도 눈여겨봐야 할 대목입니다. 투표를 했다는 것은 마을에 민주주의 원리가 정착되어 있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조선시대가 신분제 사회였기 때문에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사회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학교에서 역사를 민족 국가 단위로 거시적으로만 배우고, 지역 단위 실제 사람들의 풍속과 생활에 대해서는 소략하게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어느 사회든 명령과 복종만으로 굴러갈 수 없고 법과 처벌만으로는 평화를 유지하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옛사람들은 소수의견에 대한 존중, 토론과 협의, 자율적으로 따를 수 있는 작은 규범들이 없이는 사회 안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충돌을 해결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 마을을 어떻게 탈 없이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갈 것인가 하는 옛 장위동 사람들의 고민이 존안에 담겨 있습니다.
장위동 옛집 부엌 앞에서 찍은 가족사진(1937)  ⓒ성북구청

장위동 옛집 부엌 앞에서 찍은 가족사진(1937) ⓒ성북구청

장위리존안이 지금껏 완벽한 상태로 남아있다는 것은 우리 성북구민들에게 큰 행운입니다. 함무라비 법전이나 단군의 홍익인간 이념을 4000년이 지난 지금 산업사회의 인간관계에도 가져와 적용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100년 전 장위리 존안의 10가지 규범들을 곱씹어 보면서, 난항을 겪고 있는 주민자치의 방법과 규칙을 모색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참고문헌
서울역사박물관, 『도시 주거 변천의 파노라마-장위동』,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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