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도끼#150] 채동선을 기억하다
작성자 배인지
지금으로부터 약 90년 전, 1930-40년대에 성북동은 근대 신문화운동의 거점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신문화운동(新文化運動)은 한말과 일제강점기에 밀어닥치는 근대 서구 문명에 대한 우리 문화인들의 대응 방식이었습니다. 외래 문명을 어떻게 수용하고 소화할지, 그리해서 어떻게 열강들에 종속되지 않고 새로운 문화공동체, 민족공동체를 이루어낼지는 당시 문화인들의 숙제였습니다. 신문화운동의 한 축을 담당했던 일급 문화인들의 다수는 성북동에 거주했었는데요. 오늘은 그중에서도 성북동발 신문화운동의 흐름 가운데 음악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인물에 대해 알아보려 합니다. 바로 2023년, 올해로 서거 70주기를 맞이한 채동선(蔡東鮮, 1901-1953)입니다.
작곡가 채동선 탄생 117주년 기념 행사 ‘성북동 시민과 시인의 노래’ 포스터

작곡가 채동선 탄생 117주년 기념 행사 ‘성북동 시민과 시인의 노래’ 포스터

채동선은 1901년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채중현은 성공한 사업가로서 독립운동가를 후원하는 등 민족운동에도 관심이 많았으며,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란 채동선은 민족의식이 강했습니다. 그는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잠시 잡혀 투옥되기도 했습니다. 한편 3·1운동 1년 전인 1918년, 홍난파의 바이올린 연주를 듣고 감명받은 채동선은 그에게 바이올린을 배웠습니다. 이후 일본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독일에서 바이올린과 작곡을 배운 채동선은 1929년에 귀국하였습니다. 귀국 후에는 바이올린 연주가이자 작곡가로서 네 번의 바이올린 독주회, 작곡 발표회, 그리고 현악 4중주단을 만들어 실내악 발전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또한 1938년 동아일보사 주최 제1회 전조선 창작곡 발표 대음악제에서 <환상곡 D단조>를 자신의 바이올린 연주로 발표하였습니다.
동아일보,1929.11.21. 채동선의 귀국에 관한 기사.(출처:한국사데이터베이스)

동아일보,1929.11.21. 채동선의 귀국에 관한 기사.(출처:한국사데이터베이스)

채동선·이소란 가옥(출처: 성북마을아카이브)

채동선·이소란 가옥(출처: 성북마을아카이브)

1931년 피아니스트 이소란(李小蘭,1909~1992)과의 결혼은 그의 인생에 또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이들 부부가 결혼 직후 자리 잡은 보금자리는 고양군 숭인면 성북리 183의 17번지였습니다. 채동선이 손수 설계한 2층 양옥이었던 주택은 당시 일반적인 문화주택의 형태를 갖추었지만, 마당이 매우 넓었다는 점이 달랐습니다. 특히 그는 작곡을 위해 특별히 마련했던 2층 방에서 작곡에 몰두했습니다. 부인 이소란 여사의 회고에 따르면, 밤에 작곡할 때면 아이들이 피아노 소리에 잠에서 깨는 것을 염려하여 휘파람으로 가락을 찾았다고 합니다. 이는 성북동에서 단란한 가정을 이루며 살았던 그의 모습을 상상하게끔 합니다.

1930년대부터 채동선은 한국 음악계를 이끄는 역할을 하며 민족의 정서를 가곡에 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정지용과 김동명의 시에 곡을 붙여 만든 <고향>·<내 마음은>·<바다>와 같은 가곡들이 그 예입니다. 특히 그는 나라를 빼앗긴 작곡가의 임무가 서양의 음률을 빌려 새 노래를 작곡하는 것에만 있지 않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식민 지배의 시대 상황에서도 우리의 노래들을 찾아 거두어 보전하는 일 또한 음악하는 사람들의 사명 가운데 하나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당시 많은 음악인이 친일의 길에 들어설 때에도 거리를 두며 예술가의 양심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일제의 강압이 심해지자 칩거하여 창씨개명에 반대하였고, 우리 민요와 국악을 채보하는 데에 열중하였습니다. 누군가는 시대의 편승하여 이익을 추구했다면, 채동선은 평범한 시민으로서의 저항이 어떠한 것인지 우리에게 알려준 것이지요.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함께 채동선은 음악계의 재건을 위해 작곡가로서 열정적으로 활동하였습니다. 고려작곡가협회 회장, 서울특별시 문화위원, 문교부 예술위원 등을 역임하며 당시 음악계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채동선 부부는 피난길에 올라야 했습니다. 피난을 떠나기 전 그는 항아리 속에 악보들을 담아 성북동 집 땅에 묻었습니다. 피난 생활 중이던 1953년, 채동선은 지병으로 부산에서 끝내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그의 가족은 전쟁이 끝난 후 다시 성북동 집으로 돌아왔지만 전쟁 후 분단의 현실은 채동선의 곡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납북된 시인 정지용의 시에 곡을 붙인 채동선의 가곡은 더 이상 부를 수 없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때문에 이소란 여사는 시인 이은상에게 남편의 곡에 다시 가사를 붙여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그렇게 채동선과 정지용의 가곡 <고향>은 채동선과 이은상의 가곡 <그리워>로 재탄생하게 됩니다. 또한 그녀는 1984년에 작고한 부군을 기념하기 위해 재산을 기부하여 ‘채동선음악상’을 제정하였으며, 부부가 살던 성북동 183의 17번지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채동선·이소란 가옥 철거 당시의 모습(출처: 성북문화원)

채동선·이소란 가옥 철거 당시의 모습(출처: 성북문화원)

2019년 채동선·이소란 가옥은 철거되어, 현재 성북동 183의 17번지에는 공동주택이 들어서 있습니다. 그럼에도 시대정신을 잃지 않았던 작곡가 채동선의 삶과 예술을 알아가고 기억하기 위한 시도는 이어져 왔습니다.
채동선 탄생 117주년 기념 공연 中 소프라노 염희숙, 테너 최종익의 가곡 공연

채동선 탄생 117주년 기념 공연 中 소프라노 염희숙, 테너 최종익의 가곡 공연

채동선 탄생 117주년 기념 공연 中 극단 더늠의 뮤지컬 <183의 17> 공연

채동선 탄생 117주년 기념 공연 中 극단 더늠의 뮤지컬 <183의 17> 공연

<183의 17>  공연  中 곡  ‘시간이 다 되어 가네’  중계 장면

<183의 17> 공연 中 곡 ‘시간이 다 되어 가네’ 중계 장면

지난 2017년 6월 16일에는 성북동 한성대입구역 분수마루 광장에서는 채동선 탄생 117주년을 맞아 “성북동, 시민과 시인의 노래” 행사가 열렸습니다. 행사에서는 소프라노 엄희숙, 테너 최종익의 가곡 공연에 이어, 바이올리니스트 최명아가 채동선의 기악곡을 연주하였습니다. 이어서 극단 더늠은 뮤지컬 <183의 17>을 선보이며 그가 이룩한 음악적 성취와 1930-40년대 신문화 운동의 본질을 짚어냈습니다. 뿐만 아니라 2021년 문화가 있는 날 ‘님을 기억하는 슬기로운 문화생활’의 첫 번째 공연은 ‘작곡가 채동선을 만나다’라는 주제로 열렸는데요. 작곡가 채동선의 이야기에 더해 앞서 언급한 극단 더늠의 창작뮤지컬 <183의 17>의 수록곡과 채동선의 가곡 공연이 성북문화원 유튜브에서 중계되어 많은 이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비록 그의 집은 사라졌지만, 그만큼 채동선을 기억하기 위한 이러한 움직임은 계속돼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도 오늘 채동선이 남기고 떠난 음악들을 들어보며 그 삶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는 것은 어떨까요? 이상으로 150번째 금도끼를 마치겠습니다.
※ 참고문헌
박수진 외 4인,2015,『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송지영·심지혜,2015,『성북, 100인을 만나다』
성북구청‧성북문화원, 2016,『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성북문화원,2017,『성북문화』 제5호
동아일보,「樂壇(악단)의 새로운 明星(명성) 提琴家蔡東鮮氏(제금가채동선씨) 獨逸(독일)에서 六年間硏究歸國(육연간연구귀국)」,1929.11.21.
경향신문,「어느生活(생활)(6) 李小蘭(이소란)여사」,1968.02.12
성북마을아카이브, https://archive.sb.go.kr/
전통문화포털,https://www.kculture.or.kr/brd/board/252/L/menu/463?brdType=R&bbIdx=8671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s://db.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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