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도끼#151]두 명의 성북구 독립운동가, 김의한, 유우석
작성자 박수진
성북구는 많은 독립운동가들과 인연이 있습니다. 최용덕처럼 성북동에서 태어난 분도 있고, 노은 김규식처럼 돈암동에 거주하다가 만주로 가서 청산리대첩에 참여한 분도 있습니다. 그리고 해방이후 성북구에 자리 잡은 독립운동가도 많이 있습니다. 이분들 모두를 기억하면 좋겠지만 며칠 전 지난 3.1절을 기념해서 이번 금도끼에서는 그 중에서도 두 분을 소개해보겠습니다.

첫 번째 소개할 분은 김의한입니다. 그는 조선말-대한제국 당시 고관(高官)을 지냈던 동농 김가진의 아들입니다. 김가진은 높은 관직에 있었기 때문에, 일제는 그를 회유하기 위해 남작의 자리를 주었지만, 그는 일제의 회유를 마다하고 상하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 참여했습니다. 아들인 김의한은 이때 아버지를 모시고 함께 망명을 떠납니다. 그리고 해방이 될 때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발하게 활약합니다.

상하이에서 김의한은 1934년에는 김구, 안공근, 이동녕 등과 함께 한인애국단의 일원으로 활약하기도 했으며, 1940년에는 한국독립당 감찰위원을 역임하였습니다. 1945년에는 광복군 활동을 했습니다. 결국 광북군이 활약하기도 전에 일본이 패망을 했지만, 김의한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마지막까지 지킨 사람 중 한명이었습니다.

해방 이후에는 귀국하였는데, 그의 아들인 김자동 前 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의 증언에 따르면 가족들과 함께 돈암동 178-1번지(현 동선동 3가 130-7)의 한옥에서 거주하였다고 합니다. 이곳에서도 김구 선생과 함께 활발하게 정치활동에 참여하였으며, 남북협상에도 참여하였습니다. 하지만 결국 6.25 전쟁 당시 북한에 의해 납북되었으며, 북에서 1964년 10월 9일에 사망했다고 전합니다.
김의한, 정정화 집터 ⓒ성북마을아카이브

김의한, 정정화 집터 ⓒ성북마을아카이브

다른 한 명은 유우석입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이 분은 3.1운동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 중 한 명인 유관순의 오빠입니다. 그는 3.1운동 당시 공주의 영명학교에 재학 중이었는데 1919년 4월 1일 공주의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습니다.


3.1운동 당시 유우석의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습니다. 부모님이 모두 만세 시위도중 일본군에 의해 살해당했으며, 동생 역시 옥에서 고문으로 순국했습니다. 살아남은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끈질기게 독립운동을 계속 하는 것 밖에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일까요? 출옥 이후에도 독립운동은 계속되었습니다. 1927년에는 원산청년회를 조직, 활동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4년형을 구형받았습니다.

해방 이후에는 성북구 정릉동에 거주하였습니다. 그는 해방 이후 매우 가난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정릉에 그가 살던 집이 남아 있었는데, 그의 며느리인 김정애 유관순 열사기념 유족장학회 회장에 따르면 밖에 벽돌을 쌓아 단열을 한 것도 그의 사후의 일이라고 합니다. 그가 살던 집은 지금 아파트가 들어서며 사라졌습니다.
유우석 선생 ⓒ공훈전자사료관

유우석 선생 ⓒ공훈전자사료관

유우석, 조화벽이 살았던 집(2013) ⓒ성북마을아카이브

유우석, 조화벽이 살았던 집(2013) ⓒ성북마을아카이브

다른 한 명은 유우석입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이 분은 3.1운동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 중 한 명인 유관순의 오빠입니다. 그는 3.1운동 당시 공주의 영명학교에 재학 중이었는데 1919년 4월 1일 공주의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습니다.


3.1운동 당시 유우석의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습니다. 부모님이 모두 만세 시위도중 일본군에 의해 살해당했으며, 동생 역시 옥에서 고문으로 순국했습니다. 살아남은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끈질기게 독립운동을 계속 하는 것 밖에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일까요? 출옥 이후에도 독립운동은 계속되었습니다. 1927년에는 원산청년회를 조직, 활동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4년형을 구형받았습니다.

해방 이후에는 성북구 정릉동에 거주하였습니다. 그는 해방 이후 매우 가난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정릉에 그가 살던 집이 남아 있었는데, 그의 며느리인 김정애 유관순 열사기념 유족장학회 회장에 따르면 밖에 벽돌을 쌓아 단열을 한 것도 그의 사후의 일이라고 합니다. 그가 살던 집은 지금 아파트가 들어서며 사라졌습니다.
정정화 ⓒ공훈전자사료관

정정화 ⓒ공훈전자사료관

조화벽 ⓒ공훈전자사료관

조화벽 ⓒ공훈전자사료관

두 분 모두 공통점이 있습니다. 부인들이 모두 굉장히 유명한 독립운동가라는 점이죠. 김의한의 부인 정정화는 임시정부의 안주인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조선을 오가며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했습니다. 유우석의 부인 조화벽은 강원도 양양의 3.1운동을 주도한 사람 중 한 명이였습니다. 독립운동 집안이라고 할 수도 있겠죠.

이 중 한 분은 원치 해방된 조국이 분단되는 것을 막으려다, 가족과 강제로 이별 당하고 북에서 눈을 감았고, 다른 한 분은 평생을 가난에 시달리며 살았습니다. 그들이 꿈꾸던 나라는 무엇이었을까요?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당연하지 않을 때가 있었습니다. 우리의 대표를 우리가 선출할 수 없었고, 우리가 사는 땅에서 국적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을 받았으며,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면 잡혀가던 그런 시절이 말이죠. 이제 우리는 우리의 대표를 우리가 선출하고, 우리가 사는 땅에서 국적 때문에 차별 받지 않습니다. 대한민국 만세를 외쳐도 아무도 우리를 잡아가지 않죠. 이럴게 될 때까지 수많은 희생이 있었음을, 그 희생 속에서 우리가 자유롭게 살 수 있음을 3.1절이 있는 이 주간만이라도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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