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도끼 #155] 안감리 전차 투석 만세운동
작성자 민문기
성북천 산책로에 설치된 전차 투석 만세운동 기념벽화 (출처: 성북마을아카이브)

성북천 산책로에 설치된 전차 투석 만세운동 기념벽화 (출처: 성북마을아카이브)

1919년 3월, 서울과 평양을 중심으로 시작된 만세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많은 이들이 모여 대규모 만세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일본 군경은 만세운동에 ‘엄중한 경계’로 대응하여 해산 및 진압하였다고 밝혔습니다. 실상은 폭력 진압이었습니다. 한국에 머무르던 미국인 선교사 매티 윌콕스 노블(Mattie Wilcox Noble)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경찰과 헌병들이 총검으로 [시위대를] 베고, 체포했다. 우리 집 요리사가 돌아와서 그의 친구도 칼에 찔려 경찰서로 끌려갔다고 얘기했다. 헌병들이 경사가 급한 제방으로 사람들을 밀어 떨어뜨리는 것을 몇몇 외국인이 목격하였다. 해럴드[Harold, 노블의 아들]가 살펴보려고 내려갔지만 이미 일이 끝났고, 그가 본 것은 피를 흘리며 경찰서로 끌려가거나 의식을 잃은 채 인력거에 실려 가는 사람들이었다."
- 매티 윌콕스 노블 지음, 강선미 이양준 옮김,『노블일지 1892-1934』, 이마고, 2010; 정병욱,「낯선 삼일운동」③, 한국역사연구회 웹진 역사랑 6호, 2020 재인용.


일본 군경의 폭압에도 만세운동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서울 곳곳에서 소수의 인원들이, 해가 진 어두운 시간 기습적으로 만세운동을 펼쳤습니다. 마치 ‘게릴라 작전’과도 같았지요. 이러한 만세운동은 우리 성북구 지역에서도 몇 차례 일어났습니다. 오늘은 이중 하나의 만세운동에 관하여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3월 26일 수요일 해가 진 밤이었습니다. 안감리(지금의 안암동)에 몇몇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어느덧 모여든 사람은 약 200여 명에 달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만세를 외쳤습니다. 인근을 지나는 전차에 돌을 던졌습니다. 돌을 던져 전차의 유리창을 파손하였고, 타고 있던 승객들에게 하차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에 일본 군인 5명이 출동하여 이들을 해산시켰습니다. 이 만세운동에 관한 기록은 아래와 같습니다.


"3월 27일, 독립운동에 관한 건(제28보) / 경성. 안감리에서 3월 26일 밤 약 200명의 군중이 만세를 부르고 전차에 투석하여 유리창을 파괴하고 승객의 하차를 협박하는 등 폭행을 연출했으나 피해는 없었고 얼마 안 되어 해산시켰다."
-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 고등경찰과, 독립운동에 관한 건(제28보), 1919년 3월 27일.

"3월 26일, 경기 안감리, 시위운동이상, 군중수 200명, 출동군대 5명"
- 조선헌병대사령부・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 소요사건 경과 개람표(1919.3.1.-1919.4.30.), 1919년 5월 10일.
1919년 3월 27일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 고등경찰과 「독립운동에 관한 건(제28보)」 보고 문서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1919년 3월 27일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 고등경찰과 「독립운동에 관한 건(제28보)」 보고 문서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당시 안감리 일대를 지나는 전차는 동대문에서 청량리까지 이어지는 노선이었습니다. 단선으로 설치되었기에 선로는 하나였지요. 전차 노선 설치 현황을 감안할 때 당시의 만세운동과 전차를 향한 투석은 아래와 같은 위치로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1916년 제작된 전차궤도거리도 한글 음을 덧씌운 것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의 전차』, 서울역사박물관, 2019, 99쪽.)

1916년 제작된 전차궤도거리도 한글 음을 덧씌운 것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의 전차』, 서울역사박물관, 2019, 99쪽.)

1929년 당시 전차노선도 한글 음을 덧씌운 것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앞의 책, 2019, 107쪽.)

1929년 당시 전차노선도 한글 음을 덧씌운 것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앞의 책, 2019, 107쪽.)

전차 노선(붉은색), 만세운동 추정 위치(노란원)(1915년 조선총독부 제작 지도)(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총독부박물관 문서 지도)

전차 노선(붉은색), 만세운동 추정 위치(노란원)(1915년 조선총독부 제작 지도)(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총독부박물관 문서 지도)

우리나라에 전차가 처음으로 다니기 시작한 것은 1899년 5월 4일 전차 개통식부터입니다. 원래는 5월 1일 개통식을 열 예정이었으나 발전 시설의 미비로 인하여 다소 늦어졌지요. 이후 본격적으로 운행을 시작한 것은 5월 20일부터였습니다. 당시 도보 중심으로 생활하던 사람들은 무척 신기해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집을 저당잡아 돈을 빌려 전차를 타는 일까지 일어났었다고 하지요. 마치 교통기관의 역할보다는 신문물의 도입과 경험의 측면으로 인식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머지않아 이러한 인식은 점차 변화하게 되고, 급기야 전차를 향해 돌을 던지는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전차개통식(1) 동대문 전차차고지와 전차, 이를 보기위해 성곽에 올라간 인파가 눈에 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앞의책,2019,28~29쪽.)

전차개통식(1) 동대문 전차차고지와 전차, 이를 보기위해 성곽에 올라간 인파가 눈에 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앞의책,2019,28~29쪽.)

전차개통식(2)(출처:최인영,「서울지역 전차교통의 변화양상과 의미(1899~1968)」,서울시립대 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2014,21쪽.)

전차개통식(2)(출처:최인영,「서울지역 전차교통의 변화양상과 의미(1899~1968)」,서울시립대 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2014,21쪽.)

3월 26일의 만세운동에서도 전차를 향해 투석을 했습니다. 그것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독립만세를 외치면서요. 왜 이날 안감리에서는 전차를 향해 돌을 던졌을까요? 질문에 대하여 명쾌한 해답은 없습니다. 그당시 사람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볼 수는 없으니까요. 다만 몇 가지 이유를 열거해볼 수는 있겠습니다.

1) 전차가 갖는 상징성
전차가 처음 운행될 때에는 한양도성을 훼손하지 않고 통과하는 방식으로 설치되었습니다. 하지만 일제가 교통 혼잡을 이유로 1907년부터 성곽을 훼철하고 도로를 개설하면서 전차 노선도 확장되기 시작하였지요. 도로 확장과 선로 신설을 위한 한양도성 훼철은 조선 왕조에 대한 권위의 박탈과도 같은 의미였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당시 조선인들은 전차에 대한 반감을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고종이 홍릉 참배를 위해 전차를 이용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종로를 지나 홍릉까지 이동하는 모습을 백성들에게 보여주었지요. 이로 인해 사람들은 전차만 보면 일제에 의하여 무참히 시해된 명성황후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또한 전차 노선 대부분은 당시 경성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의 편의를 고려하여 개설되었습니다. 1910년대까지의 전차 노선은 일본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경성 남부를 중심으로 설치되었지요. 일본 전차회사인 경성전기(주)의 독점 경영으로 일본인 주거지 중심의 노선 편성 양상은 이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따라서 전차는 당시 일본인들을 위한 존재이자 일본 경영인의 것, 나아가 일본제국의 상징처럼 여겨졌을 것입니다. 더불어 당시 전차 요금은 형편이 좋지 않은 조선인들이 이용하기엔 턱없이 비쌌지요.
동대문을 지나는 전차 (출처: 최인영, 앞의 논문, 2014, 29쪽.)

동대문을 지나는 전차 (출처: 최인영, 앞의 논문, 2014, 29쪽.)

동대문을 지나는 전차와 전차노선 (출처: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사진으로 보는 서울1』, 서울특별시, 2002, 193쪽.)

동대문을 지나는 전차와 전차노선 (출처: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사진으로 보는 서울1』, 서울특별시, 2002, 193쪽.)

2) 구름을 빨아먹는 전차
전차가 개통된 이후 공교롭게도 날씨가 많이 가물었습니다. 수십일간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아 민심이 뒤숭숭했지요. 이러한 가뭄이 계속되자 “전차가 구름을 빨아먹어서 날이 가문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이처럼 ‘가뭄은 전차가 하늘에 있는 물의 기운을 모두 흡수해버리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널리 확산되자, 비를 애타게 기다리던 일반 민중들 사이에서 전차에 대한 반감이 커져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3) 잇따라 일어난 인명사고
전차가 개통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종로2가에서 다섯 살 아이를 치어 사망에 이르게 한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이에 아이의 아버지가 광분하여 도끼를 들고 전차에 달려들었고, 주변의 민중들도 함께 분노해 전차의 파괴를 돕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후에도 사고는 점점 늘었습니다. 매월 평균 15건 내외의 인명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나게 되었지요. 이 때문에 전차 이용과는 거리가 먼 민중들에게 전차는 우리 이웃의 목숨을 앗아가는 괴물처럼 여겨졌을런지도 모릅니다.

4) 노동자 관련
3월 9일 전차 차장・운전수 등 120여 명이 파업을 단행하자 전차 회사는 일본인 사원들을 투입하여 전차를 임시 운행케 하였습니다. 또한 일제 경무 당국과 결탁하여 한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회유와 협박을 하여 분열을 불러일으켰지요. 노동자들은 여기에 격분하여 투석・전차 파괴 등을 통해 전차 운행을 방해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진행된 노동자들의 파업과 전차 투석 등의 행위는 독립만세운동의 일환인 한편, 노동자들의 권리를 찾기 위함이었습니다. 3월 22일 진행된 노동자회의에서 노동자들은 ‘독립만세’를 외치는 한편, 일본인들과 동일한 시간・동일한 노동을 하는 자신들에게 동일한 임금과 권리를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따라서 당시 그들에게 전차는 조선인 노동자들을 차별하고 착취하며, 그들의 결속을 방해하는 일제와 일본인 경영인・전차 회사로 여겨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전차 투석으로 인한 피해를 나타낸 그림(1919년 3월 24일)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전차 투석으로 인한 피해를 나타낸 그림(1919년 3월 24일)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전차 투석으로 인한 피해를 나타낸 그림(1919년 3월 24일)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전차 투석으로 인한 피해를 나타낸 그림(1919년 3월 24일)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이후 성북 지역에서는 더 이상 전차를 향한 투석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종종 발생했습니다. 사실 투석이라고 하면 시쳇말로 ‘짱돌’같은 것을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사실 길가에 널려있는 자갈이나 조약돌, 기왓조각 정도였다고 합니다. 일본 군경이 거머쥔 총포에 비하면 보잘 것 없지만 우리 민중에게는 일제에 대항할 수 있는 무기나 다름없었겠지요. 아무튼 전차 투석 만세운동에 관한 마지막 기록은 4월 28일입니다. 4월 28일 밤, 용산에서 10~13살 남짓의 조선 아동 약 28명이 모여 전차에 투석을 하여 유리창 한 장을 파손했다고 합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이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독립만세운동의 열기가 나이와 관계없이 모두에게 퍼져나갔기 때문일까요.

이상으로 3월 26일 안감리, 지금의 안암동에서 일어났던 전차 투석 만세운동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성북 지역에서 일어났던 다양한 만세운동 이야기, 그리고 독립운동에 관한 이야기에 대해 궁금하시다면 성북마을아카이브, 그리고 성북마을발견+독립운동을 찾아주시기 바랍니다.
참고문헌
성북마을아카이브 (https://archive.sb.go.kr/)
성북마을발견+독립운동 (https://archive.sb.go.kr/isbcc/town/815/timeline.do)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총독부박물관 문서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서울교통사』, 서울특별시, 2000.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사진으로 보는 서울1』, 서울특별시, 2002.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서울항일독립운동사』, 서울특별시, 2009.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의 전차』, 서울역사박물관, 2019.
최인영, 「서울지역 전차교통의 변화양상과 의미(1899~1968)」,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4.
정병욱, 「낯선 삼일운동」 ③, 한국역사연구회 웹진 역사랑 6호,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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