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도끼 #158] 허병섭과 동월교회
작성자 백외준
이촌향도는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특징적이고도 오래 지속된 사건입니다. 1950년대 후반부터 농어촌에서 초중등 이상의 교육을 받은 청년들은 대개 뚜렷한 계획도 없이 서울로 왔습니다. 성북구의 인구도 빠르게 늘어 1953년 57,916명에서 1955년에 131,549명, 1960년에 264,981명, 1970년에는 무려 963,692명을 헤아렸습니다. 하지만 성북구는 물론이고 서울의 주택 공급량은 급증하는 인구를 수용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국·공유지로 남아 있던 성북구의 산지와 언덕에는 ‘하꼬방’이라 불렀던 판잣집이 수도 없이 들어섰습니다. 미처 집의 형태를 갖추지 못해 흙바닥에 몸을 눕혀야 하는 움막도 많았습니다. 서울시와 성북구는 이런 움막과 판잣집을 불법으로 간주해 수시로 강제철거를 단행했지만 주민들의 정착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이에 철거가 능사가 아니라고 판단한 정부와 서울시는 불량주택 양성화 정책을 시행하여 이미 지은 주택과 그 대지에 대한 거주자의 소유권을 인정해 주었습니다. 이후 판잣집은 점차 사라지고 블록과 슬레이트를 사용해 지은 집들이 빼곡히 들어섰습니다. 그리하여 성북구의 낮은 산과 언덕마다 새로운 동네들이 생겨났습니다. 평지의 질서정연한 주택가와 산비탈의 무질서해 보이는 산동네가 대비를 이루는 풍경은 1970~80년대 성북구의 특징적인 경관이 되었습니다.

1980년 10월부터 1981년 9월까지 TV로 방영되어 아역배우 김민희가 ‘똑순이’로 전국민의 사랑을 받았던 일일연속극 《달동네》는 이 무렵 산동네 사람들의 삶의 풍속도를 그려낸 드라마였습니다. 유튜브에서 찾아보니 드라마 오프닝 화면에는 40여년전 돈암초등학교와 그 뒤편 동소문동 일대의 산동네가 흑백으로 잠깐 흘러갔습니다. (https://youtu.be/IEbEBi_bUUw) 드라마 주제가의 가사는 이와 같습니다.

하늘 안고 옹기종기 모여 사는 우리들 / 기쁠 때는 같이 웃고 괴로울 때에 한마음 / 걸어온 길목들은 서로 달라도 앞으로 가는 길은 크고 환한 길 / 새벽부터 한밤까지 근심 잘 날 없어도 / 마음만은 부자라네 우리 동네 달동네

가난한 형편에 고향도 출신도 다르지만, 이웃 간의 정을 나누며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았던 산동네의 사람들의 생활과 감정을 잘 담아낸 노랫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TV 드라마 <달동네>

TV 드라마 <달동네>

《달동네》가 시대상과 서울 하층민의 애환을 잘 녹여낸 드라마이긴 했지만 여기에 산동네 사람들의 생활상이 있는 그대로 담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텔레비전 화면 속 방과 골목은 넓고 밝고 깨끗합니다. 배우들의 외모도 산뜻합니다. 때때로 가족간 이웃간 오해와 다툼이 있지만 그럭저럭 평화가 유지됩니다. 그러나 매스컴에 보여지는 것과 실제 산동네 사람들의 생활 현장은 많이 달랐습니다. 산동네 사람들이 겪고 있던 주택난, 경제난, 교육난, 위생난, 사회적 차별, 과도한 노동 실상은 드라마의 소재로 잘 다뤄지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1970~80년대 산동네의 생활 실상을 알기 위해서는 TV드라마가 아닌 다른 자료들을 봐야 합니다. 우선 신문, 잡지, 영화, 소설 등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더 깊이 들어가기 위해서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구술자료들과 당시 산동네 사람들이 남겼던 기록물을 수소문해봐야 합니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성북구 하월곡동에는 동월교회가 있어서 우리는 이 교회와 관련해 남아 있는 글과 기록물을 찾아 읽어볼 수 있습니다. 이 덕분에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까지 하월곡4동 돌산마을 산동네 사람들의 주택 사정, 이웃 간의 관계, 마을 사람들의 걱정거리 등을 비교적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당시 지역 주민과 교회가 함께 만들고자 했던 마을, 더 나은 삶을 만들기 위한 지역 공동체의 고민과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동월교회는 허병섭 목사(1941~2012)가 1976년 12월 하월곡동 산2번지(1980년대 초 주소가 하월곡동 77-677번지로 변경되었고 2000년대 초부터 마을 전체가 철거 후 재개발되어 지금은 두산위브아파트단지가 들어서 있다.)에 조그만 집 한 채를 사서 개척한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마을이 재개발되자 상월곡동으로 교회를 옮겼고 이후에는 석관동으로 옮겼습니다. 현재는 강건수 목사가 허 목사의 뜻을 이어받아 지역과 함께하는 교회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1941년 경남 김해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허병섭 목사는 한국신학대학(현 한신대학교)과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1974년부터 ‘수도권 특수지역 선교위원회’ 활동에 참여하면서 신설동 청계천변 판자촌에 들어가 빈민선교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뒤 이 마을이 강제 철거되자 성북구 하월곡동 동덕여대 뒤쪽 돌산마을로 들어와 교회를 설립하며 빈민선교를 계속해나갔습니다. 돌산마을 사람들의 생활을 관찰한 허 목사는 그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TV드라마에는 나오지 않는 장면들입니다.

2, 3평의 방에서 어린이와 부모, 청소년·할머니·할아버지까지 함께 산다고 상상을 해보라. 물론 대가족이 함께 사는 경우는 얼마 되지 않지만 그들은 두 개 이상의 방을 쓰고 있으나 좁은 방에서 평균 4~5명의 식구가 살고, 가재도구까지 있다. 이와 같은 생활환경 속에서 자란 유아들은 부부생활 흉내가 보통이며 어린이들은 조숙하고 공부랑 놀이기구가 없어 골목길·야산을 누비고 있다. 청소년들은 집안이 싫고 부모의 근심과 탄식이 자기들에게 몰려오면 집을 나와 방황하고, 고등학교를 힘겹게 졸업하지만 고정된 일터가 없어 방황한다. 해외취업 나간 남편을 기다리는 부인은 고독과 유혹 그리고 자녀를 잘 키워보려는 안간힘으로 살아간다. (허병섭, 『스스로 말하게 하라-한국 민중교육론에 관한 성찰』(2009), 171쪽)

허병섭 목사는 돌산마을 사람들이 가난하고 절망적인 환경 속에서도 자립과 자활을 길을 찾을 수 있는 교회를 세우고자 했습니다. 허 목사는 자신의 목회 방침을 세 가지로 요약해 설명합니다. 첫째, 지역 주민들이 주인이 되는 교회. 둘째, 교회 운영을 민주적으로 하는 교회. 셋째, 민족적인 성격을 띠는 교회입니다. 그는 “나는 또 하나의 교회를 세우려는 것이 아니었다. 민중의 교회가 가능한지 아닌지를 실험하기 위해 동월교회를 세웠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그의 교회관, 민중관은 훗날 그가 빈민선교활동을 민중교육이론으로 발전시켜 저술한 책 『스스로 말하게 하라-한국 민중교육론에 관한 성찰』(1987년 한길사에서 초판 발행, 2009년 학이시습에서 복간)에도 자세히 밝혔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교회는 더 이상 민중에게 설교할 것이 없다. 교회는 교회당을 민중의 놀이판으로 내놓고 민중이 스스로 말할 수 있도록 모든 여건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앞의 책, 245쪽) 지식인이나 목회자의 영웅주의, 독선적인 지도는 오히려 민중, 즉 교인들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해 나갈 힘을 빼앗고 만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처음 동월교회를 설립할 때만 해도 교회를 찾는 주민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넓은 마당은 늘 열려 있었기 때문에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교회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허 목사는 교회에서 처음 생활했던 아이들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이 마을에서는 가장 넓은 땅(47평)이었으므로 어린 아이들의 놀이터로 이용되었고 어린이 교회학교로 찾아온 어린이들과 함께 교회를 시작하였다. 그 다음으로 찾아온 교인층으로는 고등학생들과 청소년들이었다. 이들 역시 놀이 장소가 없어 항상 열려 있는 교회가 그들의 회동장소로는 안성맞춤이었다. 뒷켠에 두 사람이 누우면 꼭 맞고 반쯤 일어서면 천정이 닿는 목회자의 방도 열려 있어 이들은 목회자와 더불어 바둑, 장기를 두고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언젠가 목회자의 생일에 이 청소년들이 비스켓 몇 알과 사탕 그리고 막걸리와 김치를 들고 와서 생일 축하를 받은 기억이 있다. 갈 곳이 마땅치 않아 야산보다는 교회로 찾아와서 잠을 잤으며, 장용근 전도사 부부가 헌금하여 둘러놓은 휘장을 걷어서 이부자리로 하는가 하면 월담하여 문을 부수고 들어와 노는 일도 있었다. 더욱이 술을 먹고 대낮에 소주병으로 위협을 하였던 이 마을 청소년들이었다. 지금은 이 청소년들이 자라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발을 디딘 지 어언 5년째. 그동안의 방황을 나름대로 정리하고 열심히 살고자 노력하고 있다.” (동월교회 청년회, 동월 1983년 여름호, 3쪽)

위 글에서도 볼 수 있듯이 허병섭 목사의 빈민선교는 교회가 기독교의 가르침을 전하는 것보다도 우선 지역과 교회가 함께 공동체를 형성한 뒤 지역 사람과 지역공동체의 자립·자활에 목표를 둔 것이었습니다. 허 목사는 하월곡4동 돌산마을 아이들이 처한 환경을 늘 안타깝게 여겼고, 교회가 그 아이들을 품고 길러주는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놀이터로 개방했고 공부방을 만들었으며 야학 프로그램을 운영했습니다. 주부교실을 통해 자녀교육에 관한 강의를 하고 부모들끼리 토론할 수 있게도 했습니다.
맞벌이 부모들의 양육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는 탁아소 ‘똘배의 집’을 만들어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못생겼지만 단단한 돌배처럼 가난한지만 씩씩하게 자라라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었습니다. 아이를 하루 종일 맡길 데가 없어 아이를 집안에 가둬놓고 일을 나가는 부모들에게 교회의 탁아소는 반가운 존재였습니다. 2살에서 7살까지 서른 명 정도의 아이들을 12시간까지 맡아준 똘배의 집은 국내에서 처음 시도한 탁아시설이었습니다. 그러나 똘배의 집은 얼마 안 돼 자금난에 봉착했고 부모들은 스스로 자모회를 만들어 자립 기반을 만들어 갔습니다.

“‘우리가 언제까지나 교회 신세를 질 수 없다. 우리가 자립을 하자.’ 해서 후원금을 모으기로 했어요. 바자회도 열고 지역으로 다니면서 가게 같은 데에서 2, 3천원씩 후원금을 받았어요. 폐품을 수집하기도 했고요. 애들 데리고 대공원 같은 데 간다 하면 우리는 거기서 노는 게 목적이 아니라 쓰레기통의 캔 같은 거 주워서 교회로 가져와 팔았어요. 그렇게 조금씩 기금을 모았어요.” (똘배의 집 자모 박선녀의 말, KBS 인물현대사 64회-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꼬방동네 허병섭 2004.12.24. 방송)

이렇게 똘배의 집은 교회와 마을 사람들이 힘을 모아 자립 기반을 만들어갔고 이는 전국 탁아시설의 모태가 되었습니다. 똘배의 집은 1991년 ‘탁아법’ 제정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1980년대 동월교회 교인, 돌산마을 주민들의 생생한 목소리는 동월교회에서 발행한 주보나 문집에도 실려 있습니다. 동월교회에 다니는 청년 노동자는 자신의 일터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 청년회 문집에 실린 글 중의 한 대목입니다.

일당 4천원에 하루 11시간 노동. 바쁘면 야간 작업을 하는데 3시간에 일당 절반, 7시간에 하루 일당을 받는다. 얼핏 생각하면 야간 작업이 돈벌이 될 것 같고 괜찮겠다 싶겠지만 실상은 사람 죽이는 게 야간 작업이다. 쉬는 시간 없이 3시간이나 7시간을 하려면 지옥이 따로 없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나기 때문이다. (윤호, 「세팅공의 하루」, 동월 1983년 여름호)

허병섭 목사는 이렇듯 마을 사람들이 어디서든 자신들의 목소리를 솔직하게 내기를 바랐고 교회가 그 목소리를 담아 전달하는 창구가 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지금의 삶을 더 낫게 바꾸기 위해서는 스스로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동월교회는 예배 형식도 다른 교회와는 많이 달랐습니다. 목사와 교인 모두 바닥에 앉아 예배를 봤습니다. 판소리로 설교하고 국악 찬송가를 부르고 심지어 굿을 하면서 예배를 보기도 했습니다. 이를 통해 허병섭 목사는 한국의 문화적 전통을 계승한 민족성을 띤 예배와 교회를 만들어가고자 했습니다. 교회에는 판화가 이철수(교회에 벽화를 그렸다.), 판소리꾼 임진택, 영화감독 이장호, 배창호, 영화배우 안성기, 국악인 김영동 등 문화예술인들이 많이 모여들기도 했습니다. 교인들은 찬송가도 직접 지어 불렀습니다. 다음은 〈돌산마을〉이라는 제목의 노래 가사입니다.

(1절) 엄마아빠 일 나가고 누나는 공장 가고 / 꼬불꼬불 골목길을 뛰노는 아이야 / 돌보는 이 없어도 혼자서 놀지라도 꿋꿋하게 자라거라 / 고운 꿈을 키워라
(2절) 걸음걸음 힘을 주며 울엄마 올라오네 / 야밤 중에 피곤하게 문턱을 넘어서면 / 외톨박이 개구장이 꿈나라를 헤매는가 초라한 꿈이라도 / 이불 덮는 부모 사랑
(3절) 좁디좁은 단칸방에 책이 있나 책상 있나 / 부모에게 꾸중 듣고 학교 가서 야단맞고 / 일터가 따로 있나 막노동판 포장마차 업치락뒤치락 / 거칠게 살아가네
(4절) 허스름한 우리 교회 강단 있나 걸상 있나 / 세상 사람 외면하고 멸시천대 당하지만 / 하나님의 약속 믿고 끈질기게 버텨가네 / 우리 모두 힘을 모아 주의 나라 이룩하리
(5절) 돌산마을 사람들이 하느님의 사랑 받아 / 진리의 빛 온 세상에 비추이는 마을 되리 / 바리새인 율법학자 무력하고 부끄럽게 / 사람 세상 만들면서 새세상을 이룩하리
(후렴) 사람 세상 좋은 세상 일하며 땀 흘리네 / 꿋꿋하게 일어나서 내일에는 승리하리
(한국기독교장로회 동월교회 주보 제6권 23호 1982년 6월 6일 8~9쪽)

앞서 제시한 TV 드라마 주제가의 건전가요 같은 노랫말과는 사뭇 결이 다릅니다. 하월곡4동 돌산마을 사람들의 있는 그대로의 생활상이 반영된, 함께 좋은 마을을 만들어보겠다는 더 나은 삶을 살아보겠다는 마을 사람들의 의지가 담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1988년 허병섭 목사는 결국에 목사직까지 버리고 미장이가 되었습니다. 그는 목사라는 신분이 가지는 마지막 권위를 끝내 벗어버리고 진정한 민중으로 살기 위해 막노동판에 뛰어들었습니다. 1년 동안 미장이 일을 배운 허병섭은 1990년 하월곡동 노동자 15명과 함께 최초의 막노동꾼 공동체 ‘건축일꾼 두레’라는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일종의 마을 협동조합이었던 것입니다. 건축노동자들이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건축주와 노동자들 사이에서 중간 알선업체들이 공사비의 40~50%를 가져가는 다단계 도급체계 때문임을 알고 이를 건축주와 건축노동자들의 직거래를 통해 극복하고자 했습니다. 비록 ‘건축일꾼 두레’는 오래 가지 못하고 몇 개월 만에 실패하고 말았지만 당시 여기에 참여했던 마을 사람들은 정말 살맛나는 시간이었다고 회상합니다. 그들은 두레 활동을 하면서 생전 처음 아침에 일어나는 게 기다려지고, 일당만 받다가 매달 월급을 받았던 게 정말 큰 기쁨이었다고 말합니다. 짧은 기간이나마 자신이 하는 일의 주인이 되어 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1976년부터 1990년대까지 허병섭이 하월곡4동 돌산마을에서 펼쳤던 빈민선교와 민중교육의 실험은 그렇게 끝이 났습니다. 그리고 허병섭은 1996년 전북 무주로 가서 농부가 되었습니다. 거기서도 그의 실험은 그치지 않아서 생태교육을 실천하는 대안학교를 세우고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2012년 허병섭 목사는 돌아가셨고, 예전 동월교회가 있었던 하월곡4동의 돌산마을도 사라져 그 주민들도 흩어졌습니다. 하지만 지난 세월 허 목사와 동월교회 교인들이 우리 지역에 뿌린 자립과 자활의 씨앗은 계속 싹을 틔우고 자라고 있습니다. 석관동의 동월교회가 다시 지역에 뿌리내리며 지역민의 자립과 자활을 돕고 있습니다. 또한 교회는 아니지만 성북구의 저층주거지에는 주민협의체가 만들어져 운영되고 있습니다. 이들은 그들 스스로 의견을 말하고 교환하며 스스로 더 나은 주거환경, 공동체를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들도 지난 시절 허 목사와 돌산마을 주민들처럼 일종의 사회적 실험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실험은 언제나 위험부담이 따르지만 아예 하지 않는다면 지식은 새로운 단계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지금 이뤄지고 있는 성북구의 곳곳의 마을 만들기 실험이 성과를 내고 성공할 수 있기를 바라며 그 과정에서 허병섭과 하월곡 돌산마을 주민들이 남긴 경험과 지혜가 요긴한 참고 자료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뿐 아니라 지금 스스로 힘을 내어 자신의 삶을 개척하고자 시도하는 한 사람 한 사람도 돌산마을의 사례에서 용기를 얻으면 좋겠습니다. 이상 158번째 금도끼였습니다.

<참고한 자료>
허병섭, 『스스로 말하게 하라』, 학이시습, 2009.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오픈아카이브 (https://archives.kdemo.or.kr/main)
- 한국기독교장로회 동월교회, 《주보》 제6권 23호, 1982.6.6.
- 동월교회 청년회, 문집 《동월》 1983년 여름호, 1983.
유튜브
- TV 다큐멘터리 〈KBS 인물현대사 64회-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꼬방동네 허병섭〉 2004.12.24. 방송 https://youtu.be/olstF0lOx80
- TV 드라마 〈달동네 42화〉 1980.11.12. 방송 https://youtu.be/IEbEBi_bUU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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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관동 동월교회(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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