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금도끼 #2]형평사 창립 100주년과 서광훈
작성자 이승호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요 애정은 인류의 본양이라. 그래서 우리 등은 계급을 타파하며 모욕적 칭호를 폐지하며 교육을 장려하여 우리도 참 사람이 되기를 기함이 본사의 주지이다.”

지금으로부터 딱 100년 전인 1923년 4월 24일 경남 진주의 백정들이 모여 형평사를 결성하고 백정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자는 취지로 형평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전국에서 이에 호응하여 형평사의 지사 및 분사가 빠르게 설치되었고, 창립 1년 만에 전국에 12개 지사와 64개 분사를 갖춘 거대 조직으로 성장하였습니다. 형평사는 이후 백정들에 대한 차별을 개선하기 위해 여러 활동을 수행하였습니다.

오늘은 형평사 운동을 주도 했던 인물 중 한 명을 소개하려 합니다. 사회운동가 서광훈(徐光勳)[1901-1938] 입니다. 서광훈은 1901년에 태어나 1938년에 임종할 때 까지 형평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형평운동 외에도 신간회부터 고려혁명당까지 다양한 활동에 참여하였습니다.

서광훈은 1901년, 숭신방 동소문외계 성북동에서 태어났습니다. 어의동 공립보통학교와 오성학교, 철원잠업전습소에서 수학하고, 운송점을 개업하였다가 이후 성북리 삼산학교 교사로 활동하였습니다. 형평사 운동이 시작되던 1923년에는 성북구락부 창설에 참여하여 성북지역 주민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자치조직 활동에 나섰습니다. 이후 성북구락부는 서광훈의 주도로 한양청년동맹에 가입합니다. 이 외에도 서광훈은 형평사 중앙본부 상무위원이었던 방인영과 함께 영화잡지 <시조>를 발간하기도 하고, 신간회 강릉지회에서 활동하기도 하는 등 다양한 방면의 사회운동에 널리 참여했습니다.

이렇게 다방면에서 활동하였기에 서광훈은 일제 당국과의 충돌로 여러 번 고초를 겪었습니다. 경찰에서는 서광훈을 두고 “사회주의적 언사를 일삼고 형평운동에 관여하여 다른 사람들을 선동할 우려가 있다”며 경계하였으며, 1925년에는 형평운동과 관련된 불온한 격문을 배포하였다는 이유로 종로경찰서에 두 번이나 소환되었고, 27년 1월에는 고려혁명당 사건으로 체포되어 1년이 넘는 법정공방 끝에 28년 10월에야 증거불충분으로 무죄 판결을 받고 석방되었습니다. 이후에도 서광훈은 형평청년전위동맹 사건으로 큰 옥고를 치렀습니다.

서광훈은 다양한 사회운동에 참여하였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오랫동안 적극적으로 참여한 운동이 바로 형평운동이었습니다. 서광훈은 형평운동 초기부터 정위단 총무, 형평본부 서기 등등의 직책을 역임하였고, 형평사의 중앙간부로써 형평사원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활발히 활동하였습니다. 만년에는 형평사 내부에 사회주의 비밀결사를 조직하다가 체포당하여 옥고를 치렀으니, 앞서 언급한 형평청년전위동맹사건이 바로 이 사건이었습니다.
1933년 8월 2일 동아일보 형평청년전위동맹 검거 기사 중 서광훈 사진

1933년 8월 2일 동아일보 형평청년전위동맹 검거 기사 중 서광훈 사진

1933년에 서광훈을 비롯한 41명의 형평사 사원들이 기소되었는데, 경찰의 발표에 의하면 이들은 1929년부터 수년간에 걸쳐 형평사 내에 사회주의 운동조직을 조직하고 형평사의 운동 방향을 사회주의 투쟁으로 전환하려 하였습니다. 이후 경찰의 수사망은 확대되어, 한때는 검거된 이들만 1백여 명이 넘었습니다. 검거된 이들 중 대다수는 불기소 처분을 받고 풀려났으나, 서광훈을 비롯한 14명은 최대 6년, 최소 3년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이후 복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3년 동안 계속된 재판 후에 1938년 3월 5일, 돈암동 514번지 자택에서 생을 마쳤습니다.

형평운동의 창립 취지문은 다음과 같이 마무리됩니다.
“본사는 시대의 요구보다도 사회의 실정에 응하여 창립되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도 명백히 일천만 조선민족의 한 사람이라. 애정으로서 상호부조하여 생활의 안정을 도모하며 공동의 보존책을 기약하고자 이에 40여만이 단결하여 본사의 목적, □□ 그 주지를 분명하게 내세우고자 한다.”
법제적 신분제가 철폐된 지 30년이 흐른 뒤에도 계급간의 차별의식은 여전히 남아 있었고, 서광훈은 이를 바꾸기 위해 약자의 편에 서서 함께 투쟁하였습니다.
전조선형평사 제8회 정기대회(1930) 포스터

전조선형평사 제8회 정기대회(1930) 포스터

서광훈은 민족해방운동, 계급해방운동, 그리고 주민자치운동 등 여러 분야에서 여러 사람들의 삶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그 기저에는 능력이나 사상에 상관없이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서로 도우며 차별 없이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공정과 공평이 사회의 화두가 된 2023년, 형평사 운동의 의미와 평등한 세상을 위해 싸웠던 서광훈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참고문헌

성북마을아카이브(https://archive.sb.go.kr/)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동아일보
조선일보
박수진·백외준·남기현·한봉석·김보라·김지은, 『성북동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성북문화원, 2015.
김영미, 「일제시기 도시문제와 지역주민운동 : 京城지역 성북동의 사례를 중심으로」, 『서울학연구』 28,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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