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도끼 #159] 죽은 자와 산 자의 공간의 교차, 미아리 공동묘지
작성자 백승민
공동묘지라고 하면 보통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아마 무섭다거나 피해가야겠다는 생각을 다들 하고 계실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과거에는 주거지 근처에 존재하던 ‘묘’가 꼭 공포와 기피의 대상만은 아니었기도 합니다. 예로부터 조상의 묘를 모신 곳은 일가친족이 모여 제를 지내 죽은 자의 평안을 빌고, 음복을 나누어 산 자의 복을 기원하며 그들의 공동체적 규범과 가치를 확인하는 장소로서 존재해왔습니다. 대문을 나가 텃밭 한구석에 봉분이 있고 또 마을 뒷산에 오래된 봉분이 잔뜩 늘어서 있는 모습은, 지금도 어느 시골 마을에서는 흔한 풍경이기도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110년전인 1913년 4월 1일은 ‘미아리 공동묘지’가 설치된 날입니다. 이번 금도끼에선 옛 미아리 공동묘지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합니다.
1. 미아리 공동묘지의 조성

1912년 6월 20일, 조선총독부는 조선총독부령 123호로 <묘지화장장매장급화장취체규칙(墓地火葬場埋葬及火葬取締規則)>, 소위 ‘묘지규칙’을 제정 및 공포했습니다. ‘묘지규칙’은 총 24개 조항으로서 ‘공동묘지’ 라는 새로운 구역을 설정하여 선산과 공동묘지 이외의 장소에 묘를 조성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화장(火葬)을 제도화한다는 내용입니다.
『조선총독부관보』 제544호, 1912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조선총독부관보』 제544호, 1912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임야조사부』, 1917 (출처: 국가기록원)

『임야조사부』, 1917 (출처: 국가기록원)

다음 해인 1913년 4월 1일 한적하던 경성 동북부 미아리의 임야 약 51,555평의 공간에 ‘공동묘지’가 들어서게 됩니다. 미아리 제1 공동묘지로 불린 이곳은 일제가 1917년 제작한 임야조사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19정 8,400보(65,400평) 넓이의 미아리 산25번지와 6정 9,000보(27,000평) 넓이의 산34번지가 각각 경성부, 숭인면의 공동묘지 명목으로 기재되어 있습니다. 임야조사부에서는 합계 82,400평으로 면적이 더 넓어졌는데, 이는 공동묘지가 계속 확장되었기 때문입니다.

경성은 지속적으로 인구가 유입되며 주택난과 더불어 묘지난이 벌어집니다. 기존 공동묘지 6개소의 확장을 하다 감당이 되지 않아 결국 새 공동묘지를 조성하게 되는데 그중 하나가 미아리 제2 공동묘지입니다. 미아리 산69번지 일대로 지금의 미아사거리 부근입니다. 미아리 제2 공동묘지는 약 140,000평의 거대한 넓이로 1929년 4월 착공하고 1930년 5월 완공되어 당시 부족했던 경성의 묘지공간 해소에 일조합니다.

그렇게 미아리 일대는 넓은 공동묘지가 들어서며 1930년대 경성 확장과 개발의 움직임에서 빗겨나가게 됩니다.
2. ‘북망산’에서 ‘공동묘지’로

사실 ‘공동묘지’라는 개념이 당시의 사람들에게 아주 생소한 개념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무덤이 많다는 의미로 ‘북망산(北邙山)’이나 ‘무주공산(無主空山)’이라는 표현이 주로 이를 대신하였지요. 북망산은 본래 중국 뤄양에 실존하는 풍광이 수려하고 풍수가 좋은 명산이었습니다. 그러자 고관대작들이 너도나도 묘를 쓰기 시작하여 종래에는 무덤이 많은 곳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조선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만, 선산이나 토지를 따로 마련할 여력이 없는 사람들의 묘가 가득한 곳이었을 뿐입니다. 1909년 탁지부 토지조사국은 묘지에 관한 관습을 다음과 같이 조사하였습니다.
“……적당한 묘지를 얻을 수 없는 경우에 빈민들은 보통 그 지방에 있는 공동묘지 내에 비교적 좋은 위치라고 본 장소를 골라서 거기에 시체를 매장한다. 공동묘지는 보통 북망산 내지 무주공산이라고 부르고 다소 인가가 집합한 도시나 촌락 근처에 하나 둘 씩 있는 것 같다. ……요점은 공동묘지는 묘지를 선정하기 어려운 결과 빈민들이 도저히 자기가 좋아하는 곳에 적당한 묘지를 얻지 못하기 때문에 국유지의 일부를 골라서 매장하는 것으로부터 자연적으로 발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공동묘지는 보통 국유지라고 생각해야 되고 각 지방의 한국인들에게 물어보아도 많은 사람들이 국유지라고 한다. 실제로 공동묘지를 사용하는 자들은 가까운 지방뿐만 아니라 다른 지방의 사람도 거기에 매장할 수 있는 관습이 있다고 한다.”
『토지조사참고서(土地調査參考書)』, 탁지부 토지조사국, 1909
풍수지리가 유행하던 조선 사람들에게, 집장지(集葬地)로서 ‘북망산’이 모두에게 선호되던 공간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도성 밖 성저십리(城底十里)의 금장(禁葬) 규정에도 불구하고, 광희문 밖 길가에 봉분들이 보이는 것처럼 자유롭게 망자를 모실 수 있었던 그런 공간이었던 것이죠. ‘묘지규칙’이 공포된 이후로 가난한 사람들은 죽어서도 머물 곳을 찾기가 쉽지 않아졌습니다. ‘공동묘지’를 이용하고자 하니 각종 규제를 따라야 했고, 규모에 따라선 이용료도 납부해야만 했습니다. 풍문에 시설도 썩 좋지 않아 가뜩이나 인식이 좋지 않던 공동묘지 한 기, 일곱 평의 면적을 사용하고자 40원을 납부하고 발급받은 영수증이 바로 아래 우측 사진입니다.
광희문 밖 길가의 봉분들(1907)(출처: 『東宮殿下韓國行啓記念』)

광희문 밖 길가의 봉분들(1907)(출처: 『東宮殿下韓國行啓記念』)

묘지사용료 영수증(1914)(출처: 독립기념관)

묘지사용료 영수증(1914)(출처: 독립기념관)

‘묘지규칙’이라는 법률로써 전통적인 묘지문화를 통제하고자 한 일제의 ‘공동묘지’ 정책은 큰 불만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거기에 사인(死因)이 전염병이 아닌 이상 시체를 태우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던 조선 사람들에게, 묘지 인근 화장터 가마에서 ‘효율적으로’ 시체를 태우는 행위는 굉장히 공포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요사이에는 공동묘지에 세 받는 법을 또 정하여 공동묘지에 묘를 쓰는 사람은 청원서 등 여러 가지 일에 괴로움도 많고 비용도 드는 밖에 또 세를 물게 된 고로 전국 인심이 크게 불평한다더라
『권업신문(勸業新聞)』, 1914.05.03.

……어느 따뜻한 봄날 기자는 무학재를 넘어 홍제리 화장장을 찾게 되었다……어쩐지 나 역시 ‘염라대왕’이나 만나려가는 듯하여 기분이 좋지 못하였다……기자는 “이 문이 저승길 첫 문이로구나.” 하고 생각하며 그 문을 넘어 들어가니 정면 화장실(火葬室)에는 50여 척이나 되는 큰 연돌(煙突)이 “사람의 살과 뼈를 내가 이렇게 먹소”하는 듯이 검은 구렁이 같은 연기를 허공에 뿜어내고 있다……기자는 방망이를 바라보며, “저 방망이가 몇 천 사람의 뼈를 찌었겠군요.” / “아마 근 천사람의 뼈는 찌었을 것이오.” / “아 무서운 방망이군요.”……“그래 무섭지 않소? 송장이 저렇게 불이 붙는데 귀신이나 나올듯하구려.”……
「양춘명암이중주(陽春明暗二重奏) - 화장장편」, 『조광(朝光)』, 1937.04.
1915년 2월 28일 매일신보에는 잡화점을 운영하는 한 남성이 처가 죽자 공동묘지에 매장하기 싫어 야산에 몰래 매장하였다가 발각된 사건이 실립니다. 그 남성은 엄한 취조와 함께 벌금 15원을 납부하였습니다. 1935년 4월 1일 같은 신문에는 공동묘지가 옮겨질 장소에 거주하는 주민대표 50여명이 공동묘지 이전에 대한 반대운동을 벌였다는 기사가 실립니다. 이러한 기사들은 일제 치하의 조선 사람들이 소위 ‘공동묘지’라는 것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단편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성의 묘지는 계속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고인을 모시지 않을 수는 없을뿐더러 묘지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엄한 처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불어나는 인구와 그에 비례해 증가하는 사망자 수를 감당하지 못한 것이지요. 그야말로 산 사람도 주택난, 죽은 사람도 주택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하(地下)에도 주택난(住宅難)!」, 『동아일보』, 1933.09.08.

「지하(地下)에도 주택난(住宅難)!」, 『동아일보』, 1933.09.08.

그런 상황에 공동묘지는 주거지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서울로 상경하여 마땅한 일거리를 찾지 못해 빈민이 된 사람들이 공동묘지에 굴을 파고 거주한 것이죠. 공동묘지의 빈민굴은 무덤에서 무덤 사이로 서까래를 가로친 다음 죽은 사람의 무덤자리를 파서 움을 묻은 후, 거적떼기와 양털로 지붕을 덮어 기어들어가고 기어나오는 형태였다고 합니다.

아래 매일신보 기사의 표현을 빌려보겠습니다. “생활난! 집이 없다! 밥이 없다! 옷이 없다! 이 모양이 되면 인생의 웅고한 자존심도 자취를 못찾고 주림에 빛나는 눈에는 산시체의 그것같은 처참한 빛을 보게 되며 몸 붙일 곳이 없는 알몸둥이는 백골의 난무(亂舞)를 꿈꾸는 공동묘지에라도 안식의 터를 잡게 되는 것이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묘지에 빈민굴, 비풍참우에 백골의 난무, 가련한 동포들의 애달분 생활상태」, 『매일신보』, 1926.07.01.

「묘지에 빈민굴, 비풍참우에 백골의 난무, 가련한 동포들의 애달분 생활상태」, 『매일신보』, 1926.07.01.

3. 죽은 자의 공간에서 산 자의 공간으로

기피시설이 된 공동묘지는 여느 도시든 그 확장에 따라 외곽에서 외곽으로 계속 밀려나는 모습을 보입니다. 해방 이후 미아리 공동묘지의 이전이 공론화되기 시작하여, 1950년 4월 미아리 제2 공동묘지 이전 사항이 국회에서 가결되었습니다. 당시의 기사는 위생상 좋지 못한 공동묘지의 이전이 미아리 주민들의 오랜 염원이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미아리 공동묘지, 국회서 이전 건의 가결」,『자유신문』, 1950.04.07.

「미아리 공동묘지, 국회서 이전 건의 가결」,『자유신문』, 1950.04.07.

그러나 미아리 제2 공동묘지의 이전은 부지 물색의 문제로 7년 후에나 본격적으로 추진되게 됩니다. 1957년 9월 28일 경향신문 기사는 당국이 오랫동안 부지를 물색해오던 미아리 제2 공동묘지의 이장지가 잠정적으로 결론지어졌음을 알립니다. 이장 장소는 당시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반포리로, 지금의 개포동 일대입니다.

사족을 보태자면, 이때 이장된 묘지들은 1970년대 들어 도시개발 문제로 또다시 이장 절차를 밟게 됩니다. 여하튼 이 당시 많은 언론에서는 미아리 제2 공동묘지의 이전을 촉구하였고, 그 배경에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서울의 도시개발과 위생환경 정비 그리고 택지조성 문제가 있었습니다.
서울특별시 전도(1957), 지명은 필자 수정 출처: 서울역사아카이브

서울특별시 전도(1957), 지명은 필자 수정 출처: 서울역사아카이브

인구의 증가, 증가한 인구의 활동반경 확대, 시가지의 확장, 기반시설 확보로 이어지는 택지개발압력은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문제였던 것입니다. 1958년 허정 서울시장의 미아리 제2 공동묘지 시찰 사진을 보면 언덕가에 묘비와 봉분들이 끝도 없이 늘어서 있어 당시 미아리 제2 공동묘지의 규모를 짐작케 합니다.

허정 서울시장, 공동묘지 이장관련 시찰(1958.10.06), 서울사진아카이브

허정 서울시장, 공동묘지 이장관련 시찰(1958.10.06), 서울사진아카이브

시간이 흘러 1958년 11월 18일 동아일보 기사에서 미아리 제2 공동묘지 이전과정의 마지막 편린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자진이장 기간에 연고자들이 이장한 6,000여 묘를 제외한 나머지 묘 13,215기를 지난 16일부터 발굴하여 이장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게 미아리 제2 공동묘지는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말 많고 탈 많던 미아리 제2 공동묘지의 이전이 완료되고 그 자리에는 서울의 주택난 해소를 위한 택지개발이 시작되었습니다. 1962년 분양이 시작된 미아리 공영주택은 분양가구가 100가구였기에 ‘백호주택’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그 이외에도 새로운 형태의 주택들이 옛 미아리 공동묘지 터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에 와서는 백호주택이나 다세대 주택들도 대부분 사라지고, 아파트단지가 가득한 공간으로 변모하고 있습니다.

미아리 공동묘지는 교외의 임야에서 죽은 자의 공간으로, 죽은 자와 산 자의 공간의 교차를 거쳐 이제 온전한 산 자만의 공간으로 바뀌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는 또 어떤 모습으로 변모하게 될까요? 이상으로 이번 금도끼를 마치고자 합니다.
『조선총독부관보』
『임야조사부』
『토지조사참고서(土地調査參考書)』

『경향신문』
『권업신문』
『동아일보』
『매일신보』
『자유신문』

서울역사박물관, 『길음동』, 2010.
성북문화원, 『미아리 고개』, 학연문화사, 2014.

다카무라 료헤이, 「공동묘지를 통해서 본 식민지시대 서울 : 1910년대를 중심으로」, 『서울학연구』 15, 서울학연구소, 2000.
전봉관, 「1930년대 경성의 화장장ㆍ외인묘지ㆍ 공동묘지」, 『한국현대문학연구』 11, 한국현대문학회, 2002.
한만수, 「「만세전」과 공동묘지령, 선산과 북망산 - 염상섭의 「만세전」에 대한 신역사주의적 해석」, 『한국문학연구』 39, 한국문학연구소, 2010.
정일영, 「일제 식민지기 死者공간의 배치와 이미지 형성 - 공동묘지와 화장장을 중심으로 -」, 『사림』 57, 수선사학회, 2016.
정일영, 「식민지 조선에서 죽음을 기억하는 두 가지 방식」, 『서울과 역사』 101, 서울역사편찬원, 2019.

성북마을아카이브(https://archive.sb.go.kr/)
서울사진아카이브(https://archives.seoul.go.kr/contents/seoul-photo-archive)
서울역사아카이브(https://museum.seoul.go.kr/archive/NR_index.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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