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도끼 #160] 안암과 함께한 여름, 나운규의 <아리랑>
작성자 김나현
여름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몸소 느끼는 나날들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한 세기 전, 이 늦봄부터 4개월간 성북구 안암동까지 땀을 흘리며 걸어와 뜨거운 여름을 보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많은 사람들의 뜨거움이 모여져 만들어진 것이 바로 조선 최고의 영화, <아리랑>입니다. 오늘 금도끼에서는 성북구 안암에서 촬영된 영화이자 한국영화사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꼽히는 <아리랑>을 소개해보려고 합니다.
아리랑 포스터 Ⓒ한국영상자료원

아리랑 포스터 Ⓒ한국영상자료원

영화 <아리랑>의 감독이자 각본가이면서 주연 배우였던 나운규를 소개하며 이야기를 시작해보겠습니다. 나운규는 1902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나, 3.1운동이 일어난 당시 북간도의 명동중학교를 다니고 있었습니다. 명동중학교는 민족의식을 가진 학생들이 많아 많은 이들이 3.1운동에 참여했고, 일제의 눈 밖에 난 학교는 폐교됩니다. 학교의 폐교로 나운규는 북간도와 만주 지방을 떠돌게 되는데, 이때 독립운동 단체에 들어가 청진-회령 간 철도를 파괴하려는 계획에 가담합니다. 계획은 성사되지 못한 채 발각되었고, 나운규는 1년 6개월의 수감생활을 겪습니다. 출소 후 나운규는 고향인 회령으로 돌아오고, 극단 예림회의 공연을 보게 됩니다. 공연에 마음이 사로잡힌 나운규는 극단에 합류하고, 이후 경성에 상경해 조선키네마주식회사에 들어가 영화배우로서의 삶을 시작합니다. 윤백남프로덕션에 합류하여 이경손이 감독한 <심청전>의 심봉사 역을 맡아 본격적으로 배우로서 각광 받기 시작하고, 조선키네마프로덕션에서 이규설 감독의 <농중조> 주연을 맡으며 대중적으로 크게 주목받습니다. 배우로서 인정받은 나운규는 나아가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의 두 번째 영화를 연출할 기회를 갖습니다. 나운규는 수감생활 때부터 생각했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드는데, 이것이 바로 <아리랑>입니다.
나운규 Ⓒ한국영상자료원

나운규 Ⓒ한국영상자료원

영화 <아리랑>은 1926년 4월 말부터 약 4개월 동안 안암동에서 촬영되었습니다. 당시 안암동의 촬영지는 기와집 한 채와 초가집 십여 채가 있는 산골짜기였습니다. 수백 명에 이르는 스태프와 출연진들이 조선키네마프로덕션에서 역까지 걸어가 전차를 탄 후, 종점인 동대문에서 내려 다시 안암동까지 20리를 걸어가야 했습니다. 나운규가 간신히 영화 촬영을 허락받았던 신일선 배우만이 유일하게 인력거를 타고 촬영장에 갔다고 합니다. 영화의 마지막 촬영지는 한 고개였는데, 영화 개봉 이후 이 고개가 아리랑고개로 널리 알려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옵니다.
영화 아리랑 출연진 및 관계자 단체사진 Ⓒ한국영상자료원

영화 아리랑 출연진 및 관계자 단체사진 Ⓒ한국영상자료원

영화 아리랑 출연진들 Ⓒ한국영상자료원

영화 아리랑 출연진들 Ⓒ한국영상자료원

여기서 잠깐, 현재 행정구역상 성북구 돈암동에서 정릉동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인 아리랑고개는 언제부터 ‘아리랑고개’로 불렸을까요? 본래는 정릉동으로 가는 관문이라고 하여 정릉고개로 불렸던 이 고갯길은 앞서 언급했다시피 영화 <아리랑>의 배경이 되면서 아리랑고개로 명명됐다는 설이 있지만, 이외에도 두 가지의 또 다른 설이 있습니다. 먼저 1929년 상춘원이라는 음식점을 연 김기택이라는 인물이 당시 가정교사인 홍봉진에게 식당을 홍보하기 위한 광고문을 지어달라고 부탁했고, 이에 홍봉진이 식당으로 가는 길을 안내하기 위해 ‘신흥사(흥천사) 옆 아리랑고개’라는 문구를 사용하면서 아리랑고개로 알려졌다는 설이 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1930년대에 일본인들이 정릉 일대를 고급 음식점 단지로 만들면서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아리랑’이라는 이름을 길목에 붙여 아리랑고개로 불리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럼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와서, <아리랑>의 줄거리를 소개하겠습니다. <아리랑>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일을 계기로 정신이 나가버린 영진(나운규 분)은 여동생 영희(신일선 분),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영진의 대학 동창인 현구(남궁운 분)가 영진의 가족이 사는 마을에 찾아오고, 영희와 현구는 서로 사랑하게 됩니다. 하지만 마을 부호의 마름인 기호가 영진과 영희의 아버지가 진 빚을 빌미로 협박하며 영희와의 결혼을 강행하려 합니다. 기호와 현구는 크게 싸우게 되고, 이를 보던 영진은 낫으로 기호를 쓰러뜨립니다. 기호가 죽는 순간 영진은 정신을 되찾지만, 경찰에 붙잡힌 영진은 포승줄에 묶인 채 고개를 넘어갑니다. 마을 사람들은 이를 지켜보며 아리랑을 부릅니다.
영화 아리랑 스틸컷(1), Ⓒ한국영상자료원

영화 아리랑 스틸컷(1), Ⓒ한국영상자료원

영화 아리랑 스틸컷(2), Ⓒ한국영상자료원

영화 아리랑 스틸컷(2), Ⓒ한국영상자료원

1926년 10월 1일 단성사에서 개봉한 <아리랑>은 5년 넘게 상영될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습니다. 당대 일제강점기 영화들은 일본 신파극이나 고대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반면, <아리랑>은 일제강점기 현실을 반영한 농촌의 삶을 다뤘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다음은 영화의 첫 장면에 나오는 글귀입니다.

살찐 전답과 / 아름다운 산천을 / 자랑하던 백성들이 / 길고긴 세월에 쌓인 / 설움의 시를 읆프려 한다.

6.10 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에서, 관객들은 영진을 고문받은 독립운동가로, 영희와 현구를 평범한 민중으로, 기호는 민중을 괴롭히는 일제로 받아들였습니다. 주인공 영진이 경찰에게 잡혀가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주제가 ‘아리랑’이 흐르는데, 구슬프고 애달픈 멜로디로 민중의 마음을 더욱 동요시켰습니다. 극 중에 사용된 노래 ‘아리랑’은 나운규가 소학교 시절 청진-회령 간 철도 공사를 하던 인부들로부터 듣곤 했던 ‘아리랑’을 토대로 하여, 직접 작사하고 <단성사악대>에 작곡을 의뢰해 만든 것이었습니다. 노래 ‘아리랑’으로 민심이 동요할 것을 우려하여 일제가 영화 전단지를 압수하기도 했지만, 영화의 흥행과 함께 주제가 ‘아리랑’은 시대의 유행가로 퍼져나갔습니다.
주제가 아리랑의 가사를 나운규 작품으로 기록한 영화소곡집 표지 Ⓒ문화원형백과

주제가 아리랑의 가사를 나운규 작품으로 기록한 영화소곡집 표지 Ⓒ문화원형백과

또한 영화 <아리랑>은 당시 조선 극장가에서 흥행하던 빠른 템포의 서구 영화 스타일을 모방하여 형식적으로도 기존의 조선 영화와는 다른 방식을 취했습니다. 이런 까닭에 영화가 개봉한 지 10년이 지난 1935년에도 ‘누구든지 오늘날 조선 영화를 말하는 사람은 아리랑 이전에 아리랑이 없었고 아리랑 이후에 또한 아리랑이 없었다고 한다.’라고 평가받았습니다. <아리랑>은 1945년 광복 이후에도 서울을 포함한 지방 여러 곳에서 재상영되었으며, 6.25전쟁 중이었던 1952년에도 상영되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오랫동안 조선/한국인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아리랑고개 경관(1)(2020) Ⓒ서울연구원

아리랑고개 경관(1)(2020) Ⓒ서울연구원

아리랑고개 경관(2)(2020) Ⓒ서울연구원

아리랑고개 경관(2)(2020) Ⓒ서울연구원

현재, 영화의 마지막 촬영지였던 아리랑고개는 고개의 일부가 잘려나가고, 일대에는 대형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서 영화 <아리랑>이 담았던 과거 농촌의 모습은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아리랑고개로 불리며, 조선 최고의 영화가 제작되었던 예술의 중심지로서의 역사를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1997년에는 아리랑고개 일대가 아리랑 문화거리로 선정되어 아리랑 쉼터, 나운규 소공원 등이 만들어졌으며, 현재는 아리랑시네센터, 아리랑 도서관 등의 다양한 문화 공간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무더운 여름, 고개를 오르며 영화를 향한 뜨거운 열정을 나누었던 나운규와 배우들, 스태프들을 상상하며 아리랑고개를 천천히 걸어보는 것은 어떨까요? 아리랑시네센터에서 재밌는 영화를 관람하며 고개를 오르며 흘린 땀을 시원하게 날려 보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 각자의 열기가 영화 <아리랑>처럼 빛나는 무언가로 마무리되길 바라며, 이상 오늘의 금도끼를 마치겠습니다.
[참고문헌]
김기성, 송양섭, 임성수,『서울 동의 역사 성북구 제2권 삼선동·동선동·돈암동』, 서울역사편찬원, 2018.
박수진 외 7인,『보문동·안암동』, 성북문화원, 2017.
서울역사편찬원,『서울의 영화』, 2019.
김종원, 「전설이 된 무성영화 시대의 명작 <아리랑>」, 한국영상자료원, 2011.01.07.
정종화, 「<아리랑>과 나운규의 신화를 묻다」, 한국영상자료원, 2016.10.27.
「걸작 한국영화 ‘아리랑’개봉 1926년 10월 1일」,『조선일보』, 1999.03.22.
「영화는 얼마나 이를 보나」, 『삼천리』, 7, 1935.06.01.
성북마을아카이브, https://archive.sb.go.kr/isbcc/home/u/story/view/792.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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