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도끼#164] ‘수향’, 성북에 돌아오다
작성자 민문기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남침으로 인하여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많은 이들은 전쟁의 포화를 피해 남쪽을 향해, 더 남쪽을 향해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이들 중에는 자신들이 살던 성북동에 대한 애정을 숨김없이 표현하던 수화 김환기, 그리고 김향안 부부도 있었습니다.
김환기와 김향안, 파리에서, 1957. <출처: (재)환기재단∙환기미술관>

김환기와 김향안, 파리에서, 1957. <출처: (재)환기재단∙환기미술관>

참 먼 옛날 같습니다. 뒷산에 대포알이 쿵쿵 쏟아지고 주춧돌까지 찌르르 울려 왔습니다. … 나는 문을 닫고 누워서 있을 수 없었습니다. 안방에 들어가 가족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말이 없고 일제히 내 얼굴만 보았습니다. 나는 그만 가슴이 막혔습니다. 문을 닫고 그 발로 문간에 나섰습니다. 동네를 살펴보니 텅 비었고 집집마다 문은 꼭꼭 잠기었습니다. 짹 소리 안 나는 산협에 연방 쿵 꾸르릉-산울림은 계속해 오고 있었습니다. 바람이 휘휘 부는 산협에 서서 먼 산과 가까운 산봉우리를 바라보니 서럽기만 했습니다. 참 먼 옛날만 같습니다. 3년 전 정월 초사흘, 우리는 한강을 넘었던 것입니다.
- 김환기, 「의욕의 서울」, 1953년 8월.
김환기・김향안 부부는 정월 초사흘, 즉 1.4후퇴때 성북동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부산에서 약 3년간의 피난 생활을 하였습니다. 전쟁을 피해 갑작스레 이주한 타지에서의 피난 생활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을텐데요, 그래서인지 이때 성북동을 향한 그리움을 수필로 표현하곤 했습니다.
부산살이 3년에 밤마다 나는 꿈을 꾸었다.
내 살던 산장 뜨락에 산삼(山蔘)이 나고 더덕 순이 돋고…….
이 꿈도 필시 쑥대밭이 된 서울 소식이 너무 귀에 익었던 까닭일 게다.
- 김환기, 「여름 2제(題)-꽃가게」, 1952년 8월.
나도 엑스트라의 하나로 3년을 줄곧 부산 신세를 졌습니다. 아, 그러나 자나깨나 서울 생각이었고 갈수록 그리운 건 서울이었습니다.
- 김환기, 「의욕의 서울」, 1953년 8월.
밤마다 성북동 수향산방의 모습을 꿈꾸고, 자나깨나 그리워하였던 것은 아무래도 힘들고 열악한 피난 생활과 주변 환경이 자아낸 것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부부의 부산 피난 생활의 힘겨움과 열악함은 그들의 수필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청계천 아닌 시궁창 도랑을 끼고 얼마를 내려오다 머무르니 불시에 사방에서 퀴퀴한 냄새가 끼친다. 무더기 무더기로 쌓인 쓰레기에서는 금시에라도 발효될 듯 부걱부걱하는 기운이 감돌고 도랑물에서는 벌써 증기가 서리는 것 같기도 하고, 한길이나 하늘이 내려앉은 듯 답답한 대기 속에서 그만 가슴이 콱 막혀 버리려고 하였다. … 이렇듯 아름다운 서울의 봄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부산의 봄은 그저 노곤하고 가슴 답답하고 피로하기만 하다. 뿐만 아니라 오늘 이렇게 갑자기 봄이 왔다가도 내일 느닷없이 바닷바람이 휘몰아 올지도 모르는 이 고장 천후이다.
- 김향안, 「봄」, 1953년.
피난 온 이후 내 집에서 제법 소반을 받고 앉기란 처음이 아니었던가. 몇 해를 두고 우리는 방바닥이 아니면 판대기, 기껏해야 궤짝 위에다 양재기 나부랭이를 늘어놓고 밥을 먹어 왔다.
- 김향안, 「소반」, 1953년 여름.
불현듯 부산 생활이 왁자지껄 머리에 떠오른다. 방 때문에 그렇게도 불쾌했던 일들 … 두 번 다시 그러한 부산 생활을 반복하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 김향안, 「고향길」, 1953년 6월.
우리는 이러한 거리를 두고 고등어 비린내가 나는 부산의 진창거리를 얼마나 헤매었던가.
비바람, 먼지, 다다미, 다쿠앙, 멸치, 도떼기시장 ― 생각만 해도 신물이 난다.
부산엔 펑펑 솟는 우물에도 뚜껑을 닫고 쇠를 채웠다.
- 김환기, 「다시 서울에 돌아와서」, 1953년 6월.
더하여 김환기는 부산에서의 생활을 두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다방 신세만 졌던 부산살이’라거나 ‘실로 부산은 술과 욕을 배운 곳’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김환기가 허송세월을 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김환기는 부산에서 생활하는 동안 해군 소속 종군화가의 신분으로 활동하며 많은 예술인들과 함께 작품활동을 이어갔습니다.
그렇게 열악한 환경에서의 피난 생활을 이어가던 1953년 6월, 부부는 약 3년 간의 피난 생활을 마무리하고 다시 서울로 향하기로 마음 먹습니다.
얼마 후 우리도 짐을 꾸렸다. 부산을 떠나 환도하기로 했다. 서울가면 ― 하여튼 서울만 가면 살아날 것 같은 그러한 서울에 가는 것이다. … 우리 가족도 보따리를 둘러메고 저렇게 부산을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 김환기, 「곡마단」, 1953년 6월.
김향안은 그렇게 서울로, 그리워하던 성북동으로 돌아오는 여정을, 그리고 점점 펼쳐지는 서울의 풍경을 수필로 표현하였습니다.
차에 오르니 창 밖은 딴 세상이다. 3년 동안에 연선(沿線)엔 제법 수목이 무성했다. 수목 사이로 멀리서 보면 꼭 꽃밭처럼 보이는 빨간 흙빛이 아름답다. …
하루 낮이면 올 길을 자그마치 3년을 두고 별렀다. 차츰 서울이 가까워지니 가슴이 설렌다. 한 많던 한강이 보이기 시작하니 자꾸만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다리가 파괴되었을뿐 강물과 더불어 주위의 산천은 의구(依舊)하지 않은가.
그리던 고향, 비 내리는 서울역에 내려서니 우산을 안 받아도 좋았다. 그냥 내 집에 들어선 듯이 편안해진다.
서울에 들어서니 숫제 허허벌판이다. 그 사이 이렇게도 많이 부서졌는지, 서울이 아니라 어디 이국(異國)의 폐허 같다. 설움이 앞선다.
- 김향안, 「고향길」, 1953년 6월.
부부는 열차를 타고 부산을 떠나 서울로 향했습니다. 김향안은 열차 안에서 마주하게 된 서울의 모습을 보며 여러 상념에 젖기도 하고, 또 서울역에 내리자 편안함을 느끼는 한편, 폐허가 된 서울을 보며 서러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후 숙박업소에서 여독을 풀고 다음날 성북동 집으로 향합니다.
이튿날 아침, 씻은 듯이 갠 맑은 하늘 아래를 걸어서 아름다운 북악, 삼각(三角)의 연봉을 바라보며 가로수가 우거져 터널을 이룬 돈화문 구름다리 밑을 지나 성북동 산협을 찾았다.

길이 넘는 잡초를 헤쳐 돌층대를 올라가서 큰 대문을 연다. … 대문을 들어서니 지붕을 넘는 잡초에 가려 대청도 안방도 아무것도 안 보이고 그저 쑥대밭이다. 우리는 다시 대문 밖으로 나가 돌층대에 걸터앉아 두루 동리를 바라다보며 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대서 치울 것인가 생각해 본다.
우리집 대문 여는 소리에 동리분들이 달려나온다. 어찌 그리도 서로들 반가웠으랴.
끝내 집을 버리고 나가지 않았던 분들도 있다. 나는 진정 이런 이들한테 미안했다. 집도 동리도 다 버리고 나갔던 우리들이 무슨 낯으로 집이며 동리를 대할 수 있으랴. 집이 남아 있어준 것만이 고맙고 동리를 지켜 준 분들이 고마울 뿐이다.
- 김향안, 「고향길」, 1953년 6월.
부부가 성북동 집에 도착해서 목도한 것은 엉망이 된 성북동 집이었습니다. 이를 어떻게 정리하여야 할까 새로운 고민에 빠져있던 중, 성북동에서 함께 살던 이웃들이 와서 반겨주었습니다. 성북동으로 돌아온 직후의 생활은 김환기의 수필에 얼핏 드러나 있습니다.
부산살이 3년에 나는 이렇게 멍하니 보내는 무위의 시간을 가져보지 못했다. 실속 없이 바쁘기만 했던 것이다. … 서울 우리 집 산방에 돌아와서 한 달이 가깝도록 그저 좋기만 하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이 상태가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르나 그렇게 서두르고 싶지 않다.
- 김환기, 「서울에 돌아와서」, 1953년 6월.
집구석이 온통 잡초에 파묻혀서 그대로 도깨비집이다. 우물에는 개구리가 살고 하늘에는 왕거미 줄이 번쩍인다. 함부로 발을 잘못 디뎌 놨다가는 구렁이 대가리를 밟을 것만 같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치우고 살아야 할지 정신이 없다. … 풀을 뜯고 먼지를 털고 지금 나는 개척자가 된 것이다. 문 안에 들어가 괭이, 삽, 호미, 낫 ― 연장을 마련해 와야 한다. … 난 지금 분명 서울에 돌아왔다. 하루에 너댓 번 냉수욕을 한다. 밤이면 월광과 소쩍새 노래를 들으며, 아직도 서울에 돌아오지 못하고 부산에 남아 있는 친구들을 생각하며 대청에 누워서 잠들곤 한다.
- 김환기, 「다시 서울에 돌아와서」, 1953년 6월.
이렇게 김환기・김향안 부부는 성북동에 돌아와 잠시 쉬기도 하고, 또 엉망이 되어버린 집과 앞마당을 정리하면서 시간을 보냅니다. 그리고 종종 「산방기(山房記)」(김환기), 「산(山)에 사는 맛」(김향안) 등의 수필을 통해 성북동을 다른 이들에게 추천하기도 하고, 성북동에서 사는 즐거움을 표현하기도 하였습니다.
김환기・김향안 부부가 살았던 두번째 성북동 집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자리 <출처: 성북마을아카이브>

김환기・김향안 부부가 살았던 두번째 성북동 집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자리 <출처: 성북마을아카이브>

김향안이 피난을 떠난 부산에서 성북으로 돌아오는 길을 ‘고향길’이라 칭한 것처럼, 비록 김환기・김향안 부부가 태어난 곳이 성북동 집은 아니었을 테지만, 어느덧 진정한 고향으로 여기고 있던 것은 아닐까 합니다. 부부가 피난을 떠나기 전에 살았던, 그리고 다시 돌아온 ‘고향집’은 수향산방(성북동 274-1)에 거주한 이후 자리잡은 두 번째 성북동집, 성북동 32-1번지(선잠로 56) 부근으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옛 모습이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어 아쉬움이 남습니다.
김향안에게 보내는 김환기 편지로, 그림의 집은 시기상 성북동 두 번째 집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55. <출처: (재)환기재단∙환기미술관>

김향안에게 보내는 김환기 편지로, 그림의 집은 시기상 성북동 두 번째 집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55. <출처: (재)환기재단∙환기미술관>

지금까지 김환기・김향안 부부가 전쟁을 피해 서울을 떠난 이후부터 3년간의 피난 생활을 마친 뒤 성북동으로 다시 돌아오기까지를 기록한 수필을 통해 당시의 모습과 그들의 생각을 살펴보았습니다. 둘의 작품을 각각 살펴보아도 좋지만, 함께 모아두고 보니 피난 생활의 고달픔과 성북동을 향한 그리움이 더 깊게 느껴지는듯 합니다.
김환기와 김향안 수필집 표지 사진 <출처: 성북문화원>

김환기와 김향안 수필집 표지 사진 <출처: 성북문화원>

김환기와 김향안의 이야기, 그리고 그들의 작품을 더 알고싶으시다면 성북마을아카이브(https://archive.sb.go.kr/)와 성북마을발견+문학(https://archive.sb.go.kr/litmap)을 방문해주세요.


<참고 문헌>
김향안, 『월하(月下)의 마음』, 환기미술관, 2016.
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환기미술관, 2016.
박수진 외 4인,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2015, 성북문화원.
성북마을아카이브, https://archive.sb.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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