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형편없는 연기를 낮잡아 부를 때 ‘발 연기’라고 합니다. 실력이나 질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손이 아닌 발로 한 것 같다는 의미로 접두사 ‘발’을 붙인 것이죠. 오늘 소개할 ‘발탈’은 이런 은유적 표현이 아니라 진짜 발을 사용하여 연기를 합니다. 발로 연기를 한다고 하니 우스꽝스러울 것 같나요? 발탈은 재미있습니다. 하지만 수준이 떨어지는 것도, 낮잡아 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발탈은 우리의 전통 예술로, 발에 탈을 씌워 사람처럼 꾸민 탈 인형과 어릿광대, 아낙네 등이 서로 소리와 재담을 주고받는 민속극입니다. 탈 역할의 연희자는 검은 포장막 뒤에서 의자에 앉아 발에 탈을 씌우고 상반신만 있는 인형에 발을 얹고 연기를 합니다. 또 손으로는 막대기를 이용해 인형의 팔을 조종하여 인형의 다양한 몸짓을 표현합니다. 발탈은 어릿광대가 이 상반신만 있는 탈 인형의 외양에 놀라 시비조로 정체를 물으면서 극이 시작됩니다.
발탈꾼의 조종 모습 (출처: 문화재청)
발탈 중 어릿광대와 탈(출처: 성북마을아카이브)
어릿광대: 아이고 주인장, 아니, 뭐가 이렇게 밖이 이렇게 시끄러워? 에이 거참. (발탈을 보고) 이봐 당신 사람이야 뭐요? 도대체 여기서 뭐하고 있어 시방? 탈: 아 여보쇼, 내가 이렇게 쬐그맣게 생겼다고 사람이 아닌 줄 아시오? 나, 사람이요 사람. 어릿광대: 아니 글쎄, 사람인 줄은 알겠는데, 아니 도대체 뭐하는 사람이냐고, 아랫도리는 어디갔어 이거. 엿 바꿔먹었남? 탈: 에헤, 엿 바꿔 먹었다. 어쩔래? 어쩔래? 어릿광대: 아니 도대체 당신 뭐 해먹는 사람이야? 탈: 내가 이래 봬도 말이야. 조선 팔도강산을 무른 메주 밟듯 하고 다니는 유람객이요. ([성북동문화재야행] 명인 공연(VR) - 발탈(2020.12.23.)http://youtu.be/HTwDZ5yl_zI?si=gsRnVWlkZbV-DvKU)
이런 식으로 조기장수인 어릿광대와 유람객 탈이 서로 티격태격 재담을 주고받으면서 극을 이어 나가고, 중간에 아낙네가 등장하여 새로운 상황극을 펼치기도 합니다. 그리고 발탈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소리’인데요. 경기민요, 판소리, 잡가, 남도민요 등 지역적으로도, 장르적으로도 다양한 소리가 극의 중간중간 삽입되어 예술성을 더해줍니다. 이렇게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발탈 연기와 이야기, 소리가 어우러진 발탈은 1983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
발탈은 기원이나 유래가 명확하지 않고, 연희자에 따라 세부적인 연행 방식도 조금씩 다른데요. 크게 남사당패 계열과 박춘재 계열로 분류하였지만 현재는 박춘재 계열의 발탈만 전승되고 있습니다. 박춘재 계열은 이동안(1906~1995)과 박해일(1923∼2007)에서 박정임(1939∼)과 조영숙(1934∼)으로 전승되어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들 중에서 조영숙은 바로 이곳, 성북구 동선동에 거주하면서 정릉동에 있는 전수소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습니다.
국가무형문화재 발탈 보유자 조영숙(출처: 성북문화원)
아흔 살의 나이에도 여전히 현역으로 무대에 오르고 있는 조영숙은 명창으로 이름을 날린 조몽실(1902~1953)의 딸입니다. 조영숙의 어머니는 그가 선생님이 되길 바랐지만, 예인의 기질을 타고난 조영숙은 1951년 여성국극의 간판스타였던 임춘앵(1924~1975)과의 만남을 계기로 연기를 시작합니다. 조영숙은 《춘향전》의 ‘방자’, 《선화공주》의 ‘철쇠’ 등 코믹한 남성 조연 역할의 일인자였습니다. 또 임춘앵을 대신해 남자 주인공의 역할을 맡을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습니다.
조영숙 중요무형문화재(국가무형문화재) 인정서(출처: 성북문화원)
1960년대 초 여성국극의 인기가 급격히 사그라든 이후 근근이 무대를 이어가던 조영숙은 1984년 이동안 발탈 보유자에게 발탈을 배우며 다시 한번 예술가의 삶을 꽃피우게 됩니다. 2000년 전수교육조교를 거쳐 2012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인정받게 된 조영숙의 발탈은 이동안, 박해일의 발탈 연희와는 다른 특색이 드러나는데요. 그중 하나가 즉흥적인 대사와 어릿광대의 소리 비중이 높다는 것입니다. 여성 국극에서 갈고닦은 순발력과 연기력에 더해 이동안에게서 전수받은 기·예능이 빛을 발한 겁니다.
또 다른 특징은 연희의 중간과 마지막에 여러 명의 소리꾼을 등장시켜 막간 공연 같은 연출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 덕분에 2인 재담이 주는 단조로움을 피하는 동시에 발탈을 배우는 전수자들에게 무대에 설 기회를 제공합니다. 바르게 살고, 바르게 배우고, 바르게 가르치다 바르게 살다 갔다고 기억되고 싶다는 조영숙은 앞으로 전통문화를 이끌어갈 예술인들에게 이런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2019 성북동 문화재야행 발탈 공연(출처: 성북마을아카이브)
2021 성북동 밤마실(성북동 문화재야행) 발탈 공연 중(출처: 성북문화원)
예전에는 사회적으로나 인격적으로 인정을 안 해줬어도 지금은 나만 잘하면 인정받을 수 있는 세상이잖아요. 우물을 파도 한 우물을 파랬다고 힘들고 괴로워도 그 고비를 자기 일을 생각해서, 미래를 생각해서 조금만 더 참고 그 길로 쭉 파고들어 갔으면 너무 좋겠다는 생각을 하네요. 서양 문물만 좋아할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것을 배우겠다고 그러면 그 자체가 예쁘고 너무 고마워요. - 성북문화원, 2020, 「예술은 바른 마음에서 시작한다」, 『성북문화』 제8호-
무대를 베고 누운 자유인 조영숙은 오늘(2023년 9월 22일) 성북동 문화재야행 메인무대에서 공연을 올릴 예정입니다. 저녁 8시부터 9시까지 진행되는 60분의 짧은 공연을 통해 7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자신의 자리를 지킨 여성국극인으로서, 무형문화재 발탈 보유자로서 그의 예술혼과 열정을 보여줄 예정입니다. 오늘 밤 시원한 성북동 밤거리를 거닐며, 재밌고, 신명나는 우리 전통 예술에 취해보면 어떨까요?
2023 성북동 문화재야행 메인무대 공연 시간표(출처: 성북문화원)
[참고자료] ([성북동문화재야행] 명인 공연(VR) - 발탈(2020.12.23.)http://youtu.be/HTwDZ5yl_zI?si=gsRnVWlkZbV-DvKU 조영숙, 2000, 『무대를 베고 누운 자유인』, 명상 성북문화원, 2020, 「예술은 바른 마음에서 시작한다」, 『성북문화』 제8호, 성북문화원 김형근, 2021, 『발탈: 발탈 보유자 조영숙』, 국립무형유산원 박은현, 2022, 「발탈 연행 방식의 변화 양상 연구」, 『공연문화연구』 제45집, 한국공연문화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