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도끼 #185] 영조, 능행으로 백성의 소리를 듣다
작성자 이승호
돌곶이마을 유래비(2023년 8월 17일 촬영)

돌곶이마을 유래비(2023년 8월 17일 촬영)

6호선 돌곶이역에서 내려 돌곶이 유래비를 지나면 골목 수 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의 삶이 얽힌 석관동 골목길이 펼쳐집니다. 굽이굽이 골목길을 들어가 보면 한국예술종합학교 너머로 푸른 녹음이 비칩니다. 푸른 잔디밭 위에는 홍살문 너머로 정자각과 비각이 보이고, 다시 그 너머로 두 기의 봉분이 앞뒤로, 상하로 조성되어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이 곳은 조선의 21대 임금 경종과 그 부인 선의왕후 어씨의 왕릉인 의릉입니다. 의릉은 1724년 8월 경종의 붕어 이후 9월에 조성을 시작하여 12월에 경종을 안치하였습니다. 이후 1730년 6월에 선의왕후 또한 세상을 떠나자, 7월에 의릉 능역에 왕비릉을 조성하기 시작하여 10월에 선의왕후를 의릉에 안치하였습니다. 이후 의릉의 봉분은 현재와 같은 동원상하릉 형태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의릉 정자각(2023년 10월 22일 촬영)

의릉 정자각(2023년 10월 22일 촬영)

이복형인 경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영조에게 의릉은 특별한 의미를 가진 공간이었습니다. 영조는 즉위 이후 첫 능행으로 의릉을 찾아갔고, 이후에도 의릉에 자주 거행하였습니다. 영조는 52년 동안 재위하며 77번의 능행을 거행했는데, 이 중 숙종릉인 명릉 능행이 25번으로 가장 많았고, 그 다음이 의릉 능행으로 15번이었습니다. 잦은 의릉 능행을 통해 영조가 한편으로는 경종과의 우애를 깊이 생각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효종-현종-숙종’으로 이어지는 ‘삼종의 혈맥’인 경종과 영조의 관계를 강조하며 스스로의 정통성을 강화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1761년에 있었던 마지막 의릉 능행에서 영조는 큰 비가 내리는 와중에도 의릉 앞에 엎드려 일어나지 않는 모습을 보이며 형제간의 우애를 드러내고 신하들에게는 국왕을 향한 충성심을 보일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습니다(『영조실록』 98권, 영조 37년 8월 24일 경인 1번째 기사(1761)).

이날 임금이 환궁하다가 길가에 연을 멈추고 양주의 나이 많은 사람을 불러서 본읍의 폐단을 물었다. - 『영조실록』 7권, 영조 1년 8월 27일 임진 2번째 기사(1725)

영조의 의릉 능행은 형제간의 우애를 표현하는 기능만 수행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영조는 능행 과정에서 지방관 및 백성들의 소리를 들고, 지역민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였습니다. 1725년 8월 27일에 진행된 능행에서는 의릉 재실에서 경기감사 유명홍과 광주부윤 어유룡, 양주목사 홍승주를 접견하여 경기도의 문제를 듣고 이에 대한 대응을 하도록 명하였습니다. 이후 의릉에서 돌아오는 길에서는 양주의 노인들을 불러서 지역의 문제와 조정에 대한 백성들의 요청을 들었습니다. 이후에도 영조는 의릉 능행 과정에서 지방관들을 통해 지역 백성들의 상황을 듣고 문제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거나, 조정에 이를 전달하여 해결할 것을 명하였습니다. 이러한 능행 중의 소통을 잘 보여주는 사례로 1750년에 있었던 사건을 들 수 있습니다.

임금이 의릉(懿陵)에 거둥하였는데, 돌곶이 고개를 지나갈 때 한 어린아이가 길가에서 호소하여 금오가 붙잡았다. 임금이 승지 조명채에게 유시하기를,
“그의 내력을 물어서 아뢰라.”
하였는데, 어가가 능 아래에 이르자, 조명채가 말하기를,
“그 아이에게 자세히 물었더니, 말하기를,
‘태종 대왕(太宗大王)의 7대손으로 본디 금천(金川)에 살았는데 걸식을 하며 양천(陽川) 땅에 이르러 부모가 모두 죽어 풀로 덮어두기만 하고 장사하지 못했다.’
라고 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길가의 한 어린아이가 왕실의 후예라 하는데, 이는 바로 사민 가운데서 고할 곳이 없는 사람이다. 양천 현감은 지난번 신칙한 후에 잘 받들어 거행하지 못해 현 안의 고할 곳이 없는 아이로 하여금 관(官)에 호소하지 못하게 하여 길가에서 슬피 울부짖게 했으니, 단속하지 않아서는 안된다. 해당 부서로 하여금 처리하게 하고, 감사는 법에 따라 엄하게 추고하며, 그 고아는 해당 관청에서 음식을 넉넉히 지급할 것이며, 그 부모 역시 본현으로 하여금 돌보아 묻게 하라.”
하였다.” - 『영조실록』 72권, 영조 26년 8월 20일 경인 1번째 기사(1750)
2017년 제1회 의릉문화축제 당시 공연 모습(출처 : 성북마을아카이브)

2017년 제1회 의릉문화축제 당시 공연 모습(출처 : 성북마을아카이브)

이와 같이 영조의 의릉 능행은 왕실만의 행사가 아니라 백성들과 함께 소통하며 백성들을 위해 덕을 펼치는 장이었습니다. 그러한 정신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져서, 지난달 21일에 열린 제5회 석관동 의릉문화축제에서도 의릉부터 석관초등학교까지 1.3km에 달하는 구간에서 영조 어가 행차 퍼레이드가 열리기도 하였습니다.
영조가 경종에 대한 우애와 백성들에 대한 사랑을 품고 찾아가던 의릉은 1960년대에 중앙정보부가 석관동에 들어오면서 크게 훼손되었지만, 서서히, 그리고 꾸준하게 옛 모습을 되찾아 가고 있습니다. 의릉에 얽힌 여러 이야기들을 알아보기 위해서 오랜 세월 그 자리를 지켜온 의릉과, 올해 새로이 개관한 역사문화관을 직접 찾아가는 것이 좋겠지만, 점점 날이 쌀쌀해지는 가을날에는 성북마을 아카이브에서 의릉에 얽힌 이야기들을 찾아보는 것 또한 좋지 않을까요. 해는 점점 짧아지지만, 달빛 아래 깊어지는 밤이 성북의 역사와 문화로 더욱 풍성해지기를 기원하며, 여기서 펜을 내려놓습니다.
의릉 역사문화관(2023년 10월 22일 촬영)

의릉 역사문화관(2023년 10월 22일 촬영)

의릉 역사문화관 내 석호상 모조품(2023년 10월 22일 촬영

의릉 역사문화관 내 석호상 모조품(2023년 10월 22일 촬영

<참고문헌>

성북마을아카이브, https://archive.sb.go.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s://db.history.go.kr/

『경종실록』
『영조실록』
『승정원일기』

박수진·백외준 외, 『성북구 역사문화산책 5 – 장위동·석관동』, 성북문화원, 2019.
이왕무, 『조선후기 국왕의 능행 연구』, 민속원,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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