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도끼 #190] 한양 도성의 교외지역 - 조선시대 미아리 사람들의 삶
작성자 이승호
돈암동과 길음동 사람들이 매일같이 지나가는 고개는 미아리 고개라 불립니다. 지금은 미아라는 이름이 북쪽으로 옮겨가 강북구 송중동, 미아동 일대에 미아사거리역, 미아역이라는 역명이 보이지만, 본래 미아리라는 이름은 오늘날의 돈암1동 및 길음동 일대까지 아우르는, 미아리고개와 수유현 사이를 칭하던 명칭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소장중인 사산금표도 중 한양도성 북부 권역. '호유현'이 미아리고개이다(출처 : 서울역사박물관 소장유물정보 ‘사산금표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소장중인 사산금표도 중 한양도성 북부 권역. '호유현'이 미아리고개이다(출처 : 서울역사박물관 소장유물정보 ‘사산금표도’).

우리말로는 되너미고개라 하고, 이를 한자로 옮겨 호유현(胡踰峴) 또는 적유현(狄踰峴)이라 불리기도 하던 미아리고개 및 그 일대는 도성 동북쪽의 중요한 군사구역이자 정릉 관리에 밀접한 연관이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만기요람』에서는 어영청 관할하의 금송구역을 서술하며 혜화문에서 호유현까지, 그리고 호유현에서 안암동과 제기현까지를 언급하였고, 『승정원일기』에서는 영조 10년 5월 11일, 예조의 실수로 정릉 인근의 나무들이 벌채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나무를 다시 심고 기르는 임무를 장위리, 청량리, 미아리 등에 거주하는 백성들에게 맡길 것을 건의하는 기록이 보입니다. 순조 10년(1810)에 순조가 사관들과 선전관들을 시켜 근교 지역의 작황을 살피게 할 때 동북지역을 맡은 관원은 오늘날의 성북구, 강북구, 노원구 일대를 조사하였는데, 이는 한양과 영주 사이를 잇는 지역에도 교외 농촌지대가 조성되어 사람들이 거주하며 농사를 지었음을 보여줍니다.

미아리 지역은 한양 사람들의 교외 공간이자, 한양 및 근교 사람들이 산림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삶의 공간이었습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로 정조·순조 연간에 있었던 정종(定宗, 재위 1398〜1400) 후손들의 조상 묘소 정비 운동을 들 수 있습니다.

“한성부가 아뢰기를,
(중략)
‘충주(忠州)의 유학 이진하(李鎭夏) 등의 상언에
‘저의 10대조인 명선대부(明善大夫) 석보정(石保正) 이복생(李福生)은 우리 정종대왕(定宗大王)의 아홉째 아들로, 묘가 미아리(彌阿里) 동부 자내(字內 :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도성 안의, 각 군영이 나누어 맡아 경호하던 구역을 이른다. 미아리는 한양도성 밖에 위치해 있으나 한성부 동부의 관할구역이기에 자내라 칭한 것으로 보인다.)에 있습니다. 저희는 멀리 떨어진 곳에 흩어져 살아 지키고 돌볼 여력이 없었는데, 서울에 사는 상놈 최윤태(崔潤泰)가 국내(局內) 백호(白虎) 30여 보 되는 곳으로 앉으나 서나 모두 보이는 곳에 몰래 매장하였습니다. 한성부에 정소(呈訴)하였지만 전혀 이장할 계획이 없는 그를 두둔하였습니다. 담당 관사로 하여금 적간하여 파서 이장하게 해 주소서.’
하였습니다. 이진하 등이 방금 본부에 송사를 제기하였는데, 적간하기도 전에 이러한 상언을 하니 매우 온당치 않습니다. 동부의 관원을 파견하여 도형을 측량하게 한 뒤에 처결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여, 윤허하고 전교하기를,
‘별도로 부의 관원을 정하여 적간하게 하고 적간하여 온 뒤에 초기하라.’
하였다.”(『일성록』 정조 19년(1795) 윤2월 19일 24번째 기사)

시작은 1795년에 있었던 충주 유학 이진하의 상소였습니다. 상소에 의하면 미아리 일대에는 이진하의 10대조이자 정종의 9남인 명선대부 석보정 이복생의 묘소가 있었는데, 그 묘역 안, 봉분에서 서쪽으로 30여보 떨어진 곳에 상민 최윤태가 묘지를 조성하였습니다. 이에 이진하는 한성부에 송사를 제기하고, 조사가 시작되기 전에 정조에게 상소를 올렸습니다. 이에 한성부는 관원을 파견하여 조사한 후 처리할 것을 제안하고, 정조는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한성부가)또 아뢰기를,
‘동부 영(東部令) 조용진(趙用鎭)을 파견하여 적간하고 도형을 측량하게 하니, 최윤태가 새로 매장한 곳은 석보정의 묘와 43보 되는 거리로 앉으나 서나 모두 보이는 곳이었습니다. 법리(法理)로 따지면 마땅히 금해야 하는 곳입니다. 이것은 이진하 등이 먼 고을에 흩어져 살면서 제대로 돌보지 않자, 최윤태가 이곳이 100여 년간 전매(轉買)되어 온 전지(田地)라는 이유를 들어 법을 어기고 매장하는 짓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무단으로 몰래 매장한 것과는 다릅니다. 그러나 패소하는 쪽에 둔다 하더라도 굳이 논죄할 것까지는 없으니, 최윤태에게 날짜를 정하여 다짐을 받고, 즉시 파서 이장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여, 윤허하였다.”(『일성록』 정조 19년(1795) 윤2월 19일 24번째 기사)

조사 결과, 최윤태가 묘를 조성한 위치는 석보정의 봉분에서 43보 떨어진 곳으로, 법리에 따르면 마땅히 묘를 쓸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한성부는 관원을 파견하여 조사한 결과 석보정 묘소는 후손들이 흩어져 돌보는 이가 없었고, 묘소 주변 지역들이 지난 100여 년 간 소유권이 자주 변경된 농지였기에 최윤태가 이 땅에 묘지를 조성한 것은 무단 암매장과는 다르다고 보았고, 이에 최윤태를 처벌하지 않고, 대신 이장을 확약, 묘소를 옮기기를 제안하였습니다. 정조는 이를 윤허하였고, 사건은 이렇게 일단락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미아리 일대에 조선 초기 종실들의 무덤이 조성되었다는 점과, 17세기 말부터 해당 지역에서 농업이 이루어지고, 농지거래가 활발하였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정조 연간의 석보정 묘소를 둘러싼 분쟁은 우선 한성부의 조사와 최윤태의 묘소 이전 약속으로 정리되었지만, 이후에도 미아리 일대의 묘소들을 둘러싼 산송은 계속되었습니다. 12년 후인 1807년, 이번에는 사대부들과 서민들 뿐만 아니라 총융청까지 엮인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또 아뢰기를,
‘동부의 유학 이시용(李始容) 등의 상언에
‘정종대왕(定宗大王)의 일곱 번째 아드님인 수도정(守道正) 이덕생(李德生)의 후손입니다. 수도정은 그 장자인 어산부정(語山副正) 이검(李儉)과 함께 미아리(彌阿里)에 매장되었는데 후손 이중미(李中微)에 이르러 제사가 영원히 끊겼습니다. 작년 겨울에 비로소 표석(表石)을 발견하여 양대(兩代)의 분산(墳山)을 동시에 찾아내었습니다. 이에 나무뿌리를 베어 내려고 하니, 총융청의 산지기(山直)들이 와서 말하기를 「여기는 금표(禁標)의 자내(字內)로 마음대로 나무를 벨 수 없다.」라고 하였으며, 상인(常人)의 무덤을 옮겨 파내게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미루고 있습니다. 삼가 특별히 예조에 명하여 보수(步數)를 떼어 주게 하고 멋대로 가까이 있는 상인의 무덤을 즉시 파서 옮길 수 있도록 해 주소서.’
하였습니다.
친왕자(親王子)를 매장한 땅은 다른 곳과는 자별하지만, 허다한 백성들의 무덤을 일시에 파내는 것은 곤란한 점이 있습니다. 한성부에서 한번 적간하여 처리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여, 윤허하였다.”(『일성록』 순조 7년(1807) 3월 17일 11번째 기사)

정종의 7남 수도정 이덕생의 후손인 동부 유학 이시용은 1807년, 한성부에 조상의 묘소 문제로 소송을 제기하였습니다. 이시용에 의하면 수도정 이덕생과 그 아들 여산부정 이검은 미아리에 매장되었는데, 그 후손 이중미 대에 이르러 제사가 끊긴 후 당시에 이르렀습니다. 1806년 겨울에 이시용을 비롯한 후손들이 표석을 발견하고 묘역을 정리하고자 하였으나, 나무가 우거지고 주변에 상민들의 무덤이 들어선 상태였습니다. 이에 후손들은 무덤들을 이전하고 나무를 베어내려 하였으나, 상민들의 묘소 이전은 미루어지고 있었고, 묘역 정리도 총융청 산지기들이 해당 지역이 금표 이내임을 들어 반대하여 정체된 상태였습니다.

이에 이시용은 한성부에 상언하여 묘역을 정비하고 상민들의 무덤을 옮겨낼 것을 청하였고, 해당 상소를 살펴본 한성부가 종친의 묘소에 대한 관리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해당 묘역에 소재한 다수의 무덤들을 한 번에 파내는 것은 어려움을 들며 조사 후 처리하겠다고 제안하자 순조는 이를 윤허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3년 뒤인 1810년(순조 10)에 제기된 석보정 묘역 관련 상언에서 석보정의 후손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는 선례로 거론됩니다.

1810년, 석보정 묘역을 두고 또 다시 상언이 제출되었습니다. 순조 연간에도 여전히 충주 지역에 거주하던 석보정의 후손들은 다시 한 번 조상의 묘소를 정비할 수 있도록 상언을 올리는데, 이 때 미아리의 임야지대가 어떠한 방식으로 사용되는지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한성부가 아뢰기를,
‘충주의 유학 이익주(李翊周) 등의 상언에
‘저는 곧 정종대왕(定宗大王)의 아홉 번째 아들인 석보정(石保正) 이복생(李福生)의 후손입니다. 석보정을 혜화문(惠化門) 밖의 미아리(彌阿里)에 장사 지냈는데 그 뒤로 몇 차례의 병란을 겪으면서 자손들이 뿔뿔이 흩어져 그대로 실전(失傳)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갑신년(1764, 영조40)에 비로소 표석(表石)을 찾고는 곧바로 무덤을 만들고 흙을 쌓아 올렸습니다. 그런데 땔나무하거나 가축을 기르는 일로 좌우에서 침범하고 상인(常人)들의 무덤이 계체석( : 건축물의 기단석, 계단석, 섬돌 등으로 사용되는 장대석, 혹은 산릉 조성시 무덤 앞의 평평한 땅에 놓는 장대석)까지 어지럽게 붙어 있었으므로 그중에 가장 가까운 무덤은 경조에 정소하여 먼저 파서 옮기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단청룡(單靑龍)과 단백호(單白虎) 안을 보수하고 금양(禁養)하려 하자, 상놈들이 자신들의 원림(園林)이라고 하면서 마음대로 금양할 수 없게 하였습니다. 수도정(守道正)의 분묘는 몇 해 전에 그 자손의 상언으로 인하여 특별히 성상의 은혜를 입어 묘소에서 사방 80보까지 곧바로 찾아 주었습니다. 바라건대 수도정 분산의 전례대로 특별히 한성부로 하여금 법전의 규정대로 80보를 떼어 주어 수호하게 해 주소서.’
하였습니다. 수도정의 자손이 상언하였을 때 본부에서 많은 백성의 무덤을 한꺼번에 파내는 것은 곤란한 점이 있으므로 적간한 뒤에 처결하겠다는 내용으로 회계하였습니다. 이번에도 이렇게 거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여, 윤허하였다.”(『일성록』 순조 10년(1810) 9월 3일 3번째 기사)

사료에 수록된 한성부의 보고에 따르면 1807년 수도정 묘역의 경우 그 후손들이 해당 묘소 주변을 정비할 권리를 인정받았고, 묘소 주변 80보 범위를 묘역으로 지정하여 나무를 베어내고 상민들의 무덤을 옮긴 것으로 보입니다. 석보정의 후손들은 이를 근거로 삼아 묘역 내에 위치한 무덤들을 옮겨내고 석보정 묘역 내에 자란 나무들을 베어낼 수 있게 허가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 때 석보정 묘소 주변의 상황을 통해 미아리가 어떠한 공간으로 사용되었는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석보정의 후손들이 올린 상소에 따르면 미아리 일대에는 상민들의 무덤이 여럿 존재하고, 땔나무 채취나 가축 사육이 이루어지는 등, 한성 내 주민들의 수요를 충족하기 위한 임업 및 축산업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고지도 상에는 호유현, 또는 적유현이라는 세 글자로만 나타나는 미아리 고개와 그 주변이 여러 사람들이 살아가던 공간이었음을 보여줍니다.

한양 도성 밖이지만 동시에 한양이었던 성저십리 일대는 때로는 익숙한 공간이지만, 때로는 낯선 공간입니다. 한성부의 관할 영역이지만 성벽 밖에 위치하였던 지역들은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지나가는 공간 정도로 여겨졌던 공간입니다. 하지만 그런 공간에서도 사람들은 나름의 삶을 살아갔고, 때때로 그 삶을 엿볼 수 있는 사건들은 켜켜이 쌓인 시간의 먼지를 털고 우리 앞에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나타난 삶을 우리의 일상과 비교해 보면,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또 다른 시선으로 스스로를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품고 미아리 고개를 올려다보니, 새로 맞이한 한 해가 조금 다르게 보이는 것 같습니다.

참고문헌

『만기요람』
『승정원일기』
『일성록』
서울역사박물관 소장유물정보 ‘사산금표도’(https://museum.seoul.go.kr/www/relic/RelicView.do?mcsjgbnc=PS01003026001&mcseqno1=000242&mcseqno2=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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