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도끼 #192] 혜화문은 왜 언덕 위에 있을까
작성자 백승민
1906~1907년 사이 헤르만 산더가 촬영한 동소문 Ⓒ 국립민속박물관

1906~1907년 사이 헤르만 산더가 촬영한 동소문 Ⓒ 국립민속박물관

도심에서 성북구로 진입하는 길목 옆 언덕배기에는 혜화문(惠化門)이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현존하는 다른 한양도성의 성문들은 모두 주변 지형과 고저차가 크지 않은데 혜화문은 언덕 위에 위치한 것이 특이한 점입니다. 오늘은 그런 혜화문에 대한 이야기를 드려보고자 합니다.
조선 태조 5년(1396) 한양도성의 축조와 함께 지어진 혜화문은 본래 홍화문(弘化門)이라고 칭해졌습니다. 그러나 성종 14년(1483) 창경궁을 짓고 그 정문의 이름을 홍화문이라 불러 혼선을 빚자, 중종 6년(1511) 들어 혜화문으로 개칭되었습니다. 혜화문은 동쪽의 소문(小門)이라 하여 조선 초부터 동소문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동소문동, 동소문로는 바로 여기서 따온 이름입니다. 혜화문은 한양도성 동북방향의 관문 역할을 해왔습니다. 도성 북쪽의 대문인 숙정문(肅靖門)이 풍수지리적 이유로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세종대부터 흥인지문과 숭례문의 예에 따라 호군(護軍)으로 하여금 관부 직숙(關符 直宿)케 한 장소이기도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던 혜화문은 그 역사가 오랜만큼 부침도 또한 겪어왔습니다. 성문 위의 누각인 문루(門樓)가 사라지거나, 문이 파손되는 등 다양한 사건들이 사료에서 발견됩니다. 겸재(謙齋) 정선(鄭歚, 1676~1759)의 회화에서 문루가 없는 옛 혜화문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겸재 정선, 동소문도 Ⓒ 고려대학교 박물관

겸재 정선, 동소문도 Ⓒ 고려대학교 박물관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으로 보이는 혜화문 문루는 150년 이상 방치되다 영조 20년(1744)에 들어서야 어영청에 의해 문루를 다시 짓고 편액을 걸게 됩니다. 앞서 보신 겸재의 혜화문 그림은 그림에 70대 후반의 특징이 보인다고 하여 시기가 맞지 않는데, 이미 문루가 완공된 뒤에 옛 그림을 참고삼아 그렸다고 보고 있다고 합니다.

혜화문에 옛날에는 문루가 없었는데, 임금이 어영청에 명하여 이를 창건하게 하고 편액을 걸었으니, 곧 세속에서 일컫는 바 동소문이었다.『영조실록』 20권, 영조 20년 8월 6일 경술 2번째 기사(1744년)
혜화문 내측 전경 Ⓒ 국립중앙박물관

혜화문 내측 전경 Ⓒ 국립중앙박물관

그러나 영조 대 들어 다시금 문루를 올렸지만 관리가 잘 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1900년대에 접어들며 혜화문의 문루는 다시금 기왓장이 탈락하는 등 훼손이 진행됩니다. 일제는 문루가 퇴락되었다는 이유로 1928년 들어 혜화문의 문루를 완전히 허물었습니다. 1928년 7월 5일 중외일보에 당시의 일을 비판하는 기사가 실려있습니다.
혜화문 동면 Ⓒ 국립중앙박물관

혜화문 동면 Ⓒ 국립중앙박물관

혜화문 누각 초석 전경 Ⓒ 국립중앙박물관

혜화문 누각 초석 전경 Ⓒ 국립중앙박물관

그러나 마침내 이곳에도 파괴의 곡괭이가 침범할 날이 오고야 말dkT다. 큰 길을 문 위의 산비탈로 돌리어낸지 이미 오래되는 오늘날에 이 문을 그대로 둔다 할지라도 아무 교통상의 장애는 없을터이오. 별로 이 문을 헐어야만 될 이유도 없지만은 총독부 당국에서는 그대로 두면 무엇하느냐 돈 안들일 이유는 없다는 이유로 수일 전부터 아주 훼철 공사에 착수하였다 한다! 가련한 혜화문! 다정다한한 혜화문! 옛 회포 자아내는 혜화문! 더욱이 경치좋은 혜화문은 이제 영영 서울사람의 눈 앞에서 사라져가는 중이다. 그리고 그 대신 이곳에는 현대식 살풍경이 우리의 눈을 거슬리게 할 것이다.
중외일보, 1928년 7월 5일

기사를 보면 ”큰 길을 문 위의 산비탈로 돌리어 낸지 오래인데“ 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사실 혜화문 인근에 대한 훼철은 1928년 문루가 훼철되기 이전인 1915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일제의 식민지 도시계획인 ‘시구개정사업’으로, 혜화문 주변의 성곽을 훼철하고 산을 둘러서 도로를 낸 것입니다. 아래의 사진 혜화문 우측에 보이는 창경궁로35길이 바로 그 도로입니다.
혜화문, 창경궁로35길 Ⓒ 한양도성 혜화동 전시안내센터

혜화문, 창경궁로35길 Ⓒ 한양도성 혜화동 전시안내센터

지난 168번째 금도끼에서 ‘성북정회’의 활동에 대해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성북정회가 버스의 운영시간을 혜화정이 종점이었던 전차시간에 맞춰 연장해달라는 요구를 일제 식민지 당국에 했었다는 일을 기억하시는지요. 당시 창경원과 종로5정목, 혜화정을 거쳐 돈암정까지 갔던 버스가 창경궁로35길을 통해 운행되었습니다.
다시금 문루가 사라진 혜화문은 1938년에 들어서는 그나마 남아있던 홍예마저 헐리게 됩니다. 1936년 시작된 ‘대경성계획’에 포함된 ‘돈암지구 구획정리사업’으로 돈암지구에 대규모 주거지와 대로(大路)를 조성하게 된 것입니다. 혜화문을 완전히 해체하고 건설된 대로, 지금의 창경궁로에는 전차노선이 설치되고 돈암정까지 이어진 전차가 달리게 됩니다.

경성부의 도시게획사업으로 창경원 앞에서 동소문까지 폭원이십오미돌의 시가도로개수공사가 착공되어 경성명물의 하나인 동소문이 드디어 방금 헐리고 있다. 이 동소문은 본 이름을 혜화문이라고 하여 이태조 삼년에 장안팔대문의 하나로서 건립된 것으로 오백사십여년의 오랜 역사에 비바람을 맞고 온 것인데 도시계획으로 장안팔대문이 하나씩 둘씩 허물어저가서 이제 이 동소문마저 없어져서 동대문 남대문 북문의 세 문 밖에 남지 않게 되였다.
조선일보, 1938년 5월 25일.

외국문물이 아직 조선에 들어오기 전 서울 장안을 보호하기 위하여 쌓은 성곽의 일문 동소문 일명 혜화문은 지난 24일로 드디어 헐리고 말았다.
동아일보, 1938년 5월 25일.
시기별 도로 및 노선 Ⓒ 김대한(좌 대경성전도1936, 우 지번입서울특별시지도1958)

시기별 도로 및 노선 Ⓒ 김대한(좌 대경성전도1936, 우 지번입서울특별시지도1958)

일제는 전차노선의 설치를 위해서 혜화문 일대 주변 지형도 함께 정리했습니다. 혜화문과 인접 성벽을 허물고, 과수원과 밭이 있던 언덕을 절토하는 등 지면을 평평하게 고른 것입니다. 앞서 보신 혜화문 내측 전경 사진에서 혜화문이 주변의 가옥보다 전반적으로 높은 지대인 오르막길에 위치한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해방 후에도 혜화문은 한동안 철거된 상태를 유지하나, 1989년 복원계획이 세워지고 1993년 공사가 시작되어 원래의 위치보다 북서쪽으로 약 13m정도 옮겨진 언덕 위에 복원되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본래 혜화문이 있던 자리는 일제가 대로를 조성한 이후 서울 도심과 동북방향을 이어주는 중요 간선도로가 되어있었기 때문입니다.
혜화문 복원공사 1 Ⓒ 서울기록원

혜화문 복원공사 1 Ⓒ 서울기록원

혜화문 복원공사 2 Ⓒ 서울기록원

혜화문 복원공사 2 Ⓒ 서울기록원

그렇기에 혜화문의 원형 복원은 본래 한양도성의 성벽이 세워져있던 인근 언덕에 진행되었습니다. 1993년 진행된 혜화문 복원공사 초기 단계 사진을 보시면 창경궁로 옆 절토된 언덕의 축대를 보강하는 사진과 옛 한양도성의 체성(體城) 원형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당시 보고서에는 옛 도성 성벽을 주택의 축대로 사용하는 등 여러 흔적들이 확인되었다고 합니다.
2014년의 혜화문 Ⓒ 서울연구원

2014년의 혜화문 Ⓒ 서울연구원

위와 같은 과정을 거쳐 ”다정다한하고 옛 회포를 자어내며 더욱히 경치조은“ 혜화문은 복원이 완료되었습니다. 그러나 혜화문의 현판은 아직 제대로 복원이 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제작된 혜화문 현판은 옛 현판과는 글씨의 모양이 전혀 다르고, 방향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도록 작성되어 비판을 받은 바 있습니다.
현판 교체 이후 혜화문 Ⓒ 성북마을아카이브

현판 교체 이후 혜화문 Ⓒ 성북마을아카이브

혜화문 현판은 2019년 들어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소장중이던 옛 혜화문 현판을 근거로 삼아 교체가 완료되었습니다. 영조 20년(1744) 문루를 재건할 때 편액한 현판으로 테두리와 장식 일부분은 소실되었지만, 글씨가 잘 남아있어 그 원형을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앞서 올린 사진들과 비교해보시면, 힘이 없어 보이는 2014년 사진과는 달리 첫 번째 혜화문 사진과 같이 힘 있는 글씨의 원형을 회복한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비로소 혜화문은 그 복원이 완료되었습니다. 비록 위치는 과거와 달라지고 더 이상 사람이 드나들진 않으나, 모습만은 원형의 복원을 통해 우리에게 옛 기억을 전달해주고 있습니다. 이상으로 금주의 금도끼를 마칩니다.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

국립민속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서울기록원
서울연구원
성북마을아카이브
한양도성 혜화동 전시안내센터

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외일보

김대한, 전차 개설에 의한 한양도성 문루 주변지역의 도시 변화에 관한 연구, 2015, 서울시립대학교 석사학위논문.

관련 마을아카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