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도끼 #200] 1960년 4월 19일, 후퇴하지 않은 성북의 밤
작성자 백외준
1. 4.19혁명은...

4.19혁명은 이승만 정권의 헌법유린, 부정부패, 부정선거에 항거하여 1960년 2월 28일부터 4월 26일까지 전국에서 전개된 민주화운동입니다. 3.15부정선거를 계기로 학생들의 시위에 시민들이 합세함으로써 혁명으로 발전했고, 경찰의 유혈진압으로 많은 희생이 발생했습니다. 그 결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했고 제2공화국이 들어섰습니다. 4.19혁명은 대한민국 최초의 전국 단위 민주화운동으로 이후 한국 민주화운동에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1960년 4월 19일 서울에서는 학생과 시민 10만 여명이 거리로 나와 독재정권에 반대하는 격렬한 시위를 벌였습니다. 도심부에 집결한 시위대는 대통령이 있는 경무대로 행진했고, 이를 막기 위해 경찰은 실탄을 발포해 많은 사상자를 냈습니다. 이후 경찰의 무력진압이 계속되자 군중은 일시 흩어졌으나 저녁무렵부터 서울 동북부 지역에서는 수 천명의 학생, 시민이 거리를 돌며 시위를 계속했습니다. 성북구는 이날 밤 시위의 중심장소였습니다. 200번째 금도끼에서는 '피의 화요일'이라 부르는 1960년 4월 19일에 있었던 낮의 시위 전개 과정과 이후 성북구를 중심으로 밤새 격렬했던 시위의 양상을 살핍니다.
2. 1960년 4월 19일 서울 도심의 낮 시위

1960년 4월 19일은 화요일이었고 서울의 아침 하늘은 대체로 흐린 편이었습니다. 봄이라지만 기온은 최저 4.5도, 최고 15.7도로 쌀쌀한 날씨였습니다.

이날 오전 서울의 동, 서, 남쪽에서 교문을 박차고 나온 학생들은 시내 중심부를 향해 행진했습니다. 전날 밤 고려대학생들의 시위 도중 피습 소식을 들은 학생들은 3.15 부정선거 항의 시위를 이날로 앞당겨 실행했습니다. 11시가 지나 국회의사당(현 서울시의회) 앞에 집결한 학생과 합세한 시민 1만 여명은 중앙청(현 광화문)을 지나 경무대로 향해 행진했습니다.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1시 30분 경 시위대가 경무대(현 효자동 구 청와대) 앞 마지막 마지막 바리케이드를 돌파하자 무장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실탄을 난사했습니다. 이때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거의 같은 시각 또다른 시위대는 ‘제2의 경무대’로 불리던 서대문 이기붕의 집(현 새문안로 4.19혁명기념도서관) 앞으로 가서 경찰과 대치하며 연좌시위를 벌였습니다. 오후 4시경에는 내무부(현 을지로 외환은행 본점) 앞에서 연좌시위가 있었습니다.

이날 시위에서 나온 구호 몇 가지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 민주주의를 사수하자
- 의에 죽고 참에 살자
- 정부통령선거 다시 하라
- 민주주의 바로잡아 공산주의 타도하자
- 대한민국 생명선이 대법원에 달려있다
- 민주 위한 학생 데모 총칼로써 저지말라
- 학원자유 보장하여 구국애족선봉 되자
- 이놈 저놈 다 글렀다 국민은 통곡한다
- 데모가 이적이냐 폭정이 이적이냐
- 권력에 아부하는 간신배를 축출하라
-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표시를 허용하라
- 경찰은 국민의 권리와 자유를 침해하지 말라
- 정부는 마산사건에 책을 지라
- 부정공개투표의 창안집단을 법으로 처단하라

오전, 학생들의 가두행진으로 시작된 시위는 정오를 넘어 경찰의 발포로 사상자가 발생하고 공간적 범위가 확대되면서 참여 군중의 수는 빠르게 불어났습니다. 대학생과 중·고등학생뿐 아니라 초등학생, 학교에 다니지 않은 청소년,다양한 계층의 시민들이 대열에 합류했습니다. 광화문에서부터 남대문까지 이르는 거리에는 10만여 명의 군중이 대로를 가득 메웠습니다.
동성중·고등학교 시위 대열 (4.19혁명기념도서관 제공)

동성중·고등학교 시위 대열 (4.19혁명기념도서관 제공)

'정부통령선거 다시하라' 현수막을 들고 걸어가는 여성 (4.19혁명기념도서관 제공)

'정부통령선거 다시하라' 현수막을 들고 걸어가는 여성 (4.19혁명기념도서관 제공)

3. 1960년 4월 19일 서울 동북 지역의 밤 시위

해가 기울자 시위 양상은 급변했습니다. 정부의 계엄령 선포에 힘을 받은 경찰은 5시 30분 경 거리에 2대의 장갑차를 앞세우고 시위대를 향한 무차별 사격과 토끼몰이식 소탕 작전에 나섰습니다. 이때에도 많은 사상자가 속출했습니다. 결국 시위대는 서울의 동쪽, 동대문과 동소문 방면으로 후퇴하기 시작했습니다.

오후 6시 40분경에는 소방차와 트럭을 나눠 탄 시위대가 동대문경찰서(현 혜화경찰서) 앞을 지나고 있었는데 경찰서 안에서 일제히 사격을 가해 10여 명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저녁 7시경, 시위대는 동소문파출소를 습격해 집기를 파손했고, 돈암동과 미아리 일대를 누비다가 성북경찰서 앞에서 6명이 총탄을 맞고 사망했습니다. 한성여중 2학년이었던 진영숙은 보문동 집을 나와 시위대의 버스를 타고 차창 밖으로 구호를 외치다가 미아리고개 부근 북선동파출소에서 쏜 총격에 희생되었습니다. (그녀는 4.19희생자 중 유일하게 유서를 남긴 분입니다.)

이후 시위대는 40여 대의 차량(버스, 트럭, 택시, 지프차)을 탈취하여 밤거리를 달리며 구호를 외쳤습니다. 이들 기동시위대는 낮보다 활동 반경을 넓혀 돈암동, 정릉, 미아리 등지를 왕복하면서 계속 시위를 이어나갔습니다. 끊임없이 거리를 향해 구호를 외치고 (이들 밤 기동시위대의 구호가 낮 도보시위대의 구호와 어떻게 달랐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경찰의 무력 진압을 규탄했습니다.

이날 밤 시위대는 무고한 시민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하는 길가의 파출소들을 거의 모조리 불태우거나 파괴했습니다.

4월 20일 석간신문의 기사에 따르면 시위대는 혜화동파출소(전소), 성북동파출소(일부파괴), 동소문파출소(일부파괴), 돈암동파출소(전소), 서선동파출소(일부파괴, 현 삼선동), 남선동파출소(일부파괴, 현 삼선동), 북선동파출소(전소, 현 미아리고개 부근), 정릉파출소(전소), 정릉2동회(일부파괴), 길음지서(전소), 수유동파출소(전소) 창동파출소(전파)를 불태우거나 파괴했습니다.

동대문~청량리의 연도에서는 신설동파출소(전소) 고사파출소(전소, 현 보문동) 안암동파출소(전소) 용두동파출소(전파) 종암파출소(전소)를 불태우거나 파괴했습니다.

시위대의 숫자는 낮보다 줄었지만 활동 반경과 시위 강도는 더욱 커졌습니다. 참여 군중의 구성도 다양해졌습니다. 중고등학생, 야간중고등학교나 공민학교에 재학 중인 어린 고학생, 학교에 다니지 않는 청소년, 구두닦이, 넝마주이 등 거리의 일꾼, 무직자와 같은 도시 하층민이 다수를 차지했고 대학생은 소수였습니다.

이들 중 일부는 성북구를 중심으로 한 서울 동북부 지역을 누비며 미아리를 거쳐 의정부 무기고 쪽으로 방향을 잡아 창동까지 올라갔습니다. 이곳에서 시위대는 창동파출소 경찰들과 한참 동안 총격전을 벌이다가 자정 무렵 계엄군과 경기도경이 협공할 기세를 보이자 안암동 고려대학교 뒷산으로 퇴각했습니다.

계엄군은 이들을 포위해 고려대 캠퍼스 안으로 몰아넣었는데 이들과 함께 고려대 안으로 밀려 들어간 시위대와 시민들은 약 1500명 정도였습니다. 계엄군은 무장한 시위대를 무리하게 무력으로 진압하지 않고 투항을 유도했습니다. 서울시 계엄군사령관 조재미 준장은 고려대 교정 안으로 직접 들어가 시위대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결국 시위대는 무기를 버리고 자진 해산했습니다.

반면에 고려대에 들어간 시위대 중 약 200명의 어린 소년들은 철조망을 뚫고 안암동 쪽으로 빠져나가 이튿날 4월 20일 아침 6시 45분경부터 신설동 로터리와 성북구청 사이에서 계엄군의 지프차 유리창을 파괴하는 등 약 30분 간 시위를 벌였습니다. 이들은 3대의 버스와 12대의 택시를 탈취해 거리를 폭주하면서 구호를 외치다가 아침 7시 20분경 출동한 성북경찰서 기동대에 의해 해산되었습니다.

성북구청 앞 시위를 끝으로 4월 19일부터 4월 20일 아침까지 이어졌던 서울의 민주화 요구 시위는 일단락되었습니다. 4월 21일 계엄사령부는 4월 19일부터 20일까지 서울에서만 94명의 사망자와 민간인 부상자 459명이 발생했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렇게 ‘피의 화요일’이 저물었습니다.


4. 후퇴하지 않은 성북의 밤

성북이라는 지역에서 바라본 4.19혁명은 분명 교과서에서 배웠던 혁명의 모습과는 또 다르게 보입니다. 4월 19일 시민, 학생들의 구호와 시위는 총탄이 날아오고 해가 저문다 해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도심의 시위는 당시만 해도 변두리였던 동대문, 동소문 밖 동북부 지역으로 자리를 옮겨 (그것은 후퇴가 아니었습니다.) 더욱 격렬하게 불타올랐습니다. 시위대는 무고한 시민, 학생의 죽음에 분노하며 차량을 타고 동서남북 움직이면서 눈에 보이는 파출소를 모두 불태웠습니다. 이날 밤 성북 지역의 시위는 사진기록 하나 없이 몇 줄 짜리 신문기사로만 전할 뿐이지만 낮의 시위 양상과는 판이하게 달랐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성북구 어딘가에 4.19혁명을 기념하는 벽화를 그려야 한다면 불타는 파출소를 배경으로 버스나 트럭 아니면 택시나 지프차에 남녀노소, 학생, 거리의 청년, 무직자 할 것없이 다양한 사람들이 나누어타고 차창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또 누군가는 소총을 들고 의기양양하게 목이 터져라 구호를 외치는 모습을 그려야 할 것입니다. 그림은 희생자의 죽음에 한없이 슬퍼하며 민주공화국 시민의 권리를 소리 높여 선언하는 장면이자 분노, 슬픔, 설렘이 뒤범벅된 밤의 축제처럼 보이기도 할 것입니다.


[참고문헌]
민주화운동사전 https://dict.kdemo.or.kr/
기상청 날씨누리 과거관측 일별자료 https://www.weather.go.kr/w/obs-climate/land/past-obs/obs-by-day.do?stn=108&yy=1960&mm=4&obs=1
《동아일보》 1960년 4월 20일 (석간) 3면
《조선일보》 1960년 4월 20일 (석간) 3면
《동아일보》 1975년 6월 2일 4면
오제연, 「4.19 전후 서울의 학생시위와 성북구」, 『4.19혁명 55주년 기념 공연이 있는 학술회의 자료집 - 성북, 4.19혁명의 북을 울리다』, 성북문화원,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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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월 20일 돈암경찰관파출소 피해상황 (서울시 제공)

1960년 4월 20일 돈암경찰관파출소 피해상황 (서울시 제공)

진영숙 유서 벽화 (보문동 성북천 산책로)

진영숙 유서 벽화 (보문동 성북천 산책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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