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도끼 #211] 1941년 7월 12일, 돈암동 전차 종점의 탄생
작성자 민문기
83년 전 오늘인 1941년 7월 12일, 경성과 돈암동(당시 돈암정)을 잇는 전차 노선이 개통되었습니다. 경성 시내에서 혜화정까지만 운행되던 전차가 돈암동까지 연장된 것입니다.
대망중의 시내 동소문 밖 돈암정(敦岩町) 전차가 금 십이일로써 개통되었다. 삼십만 인구를 포옹할 것을 목표로 경성부에서 주택지구를 설치한 이래 급격한 발전을 보인 돈암정 일대 주민의 열망이 겨우 달성되어 오월 초순부터 착수되었던 공사는 삼십만원의 공사비로 1.8㎞의 선로가 완성되었다. … 전차 운전 대수는 종전에 혜화정까지 8대이던 것을 4대 늘려 12대를 운전하게 되어 돈암정 일대의 교통난은 이로써 많이 완화된다.
- 「동경성 “발” 연장 –돈암정 전차 금일 개통」, 1941년 7월 13일, 『매일신보』.
1920년대부터 경성의 인구는 꾸준히 증가하였으나, 이들을 모두 경성에 수용할 수 없었습니다. 1937년 조선총독부는 급증한 인구를 수용하기 위하여 돈암지구에 토지구획정리사업을 실시하고 대규모 주택단지를 조성하였습니다. 다만 대중교통이라 할만한 것은 버스 뿐이었기에 돈암지구 일대 사람들의 수요를 감당하기는 어려웠고, ‘교통난’이 빈번하게 일어났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돈암정까지 전차 노선이 연장된 것입니다.
돈암정에 개통된 전차 <출처: 1941년 7월 13일, 『매일신보』>

돈암정에 개통된 전차 <출처: 1941년 7월 13일, 『매일신보』>

1935년부터 사용된 반강제(半鋼製) 보기식(Bogie式) 궤도차량 <출처: 『땡땡땡! 전차여 안녕!』, 서울역사편찬원, 2018, 13쪽.>

1935년부터 사용된 반강제(半鋼製) 보기식(Bogie式) 궤도차량 <출처: 『땡땡땡! 전차여 안녕!』, 서울역사편찬원, 2018, 13쪽.>

원래 종로4가에서 혜화정까지였던 전차 노선을 혜화정 – 삼선평 – 돈암교 – 돈암정(惠化町-三仙坪-敦岩橋-敦岩町) 노선을 신설하여 연장하였습니다. 전차 운행 대수도 8대에서 4대 증차하여 총 12대의 전차로 운행하였습니다. 더불어 돈암정 전차 종점에서 미아리 일대로 이동하는 버스 연계 방안도 마련되었습니다. 이로써 돈암정 일대의 사람들은 도심으로 보다 편히 이동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957년 전차노선도 <출처: 경성전기(주), 『경성전기주식회사육백년연혁사』, 1958, 부록.>

1957년 전차노선도 <출처: 경성전기(주), 『경성전기주식회사육백년연혁사』, 1958, 부록.>

해방 이후에도 전차는 주된 교통 수단으로 이용되었습니다. 나아가 전차를 타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연신 만원을 이루어 전차에 ‘타는’ 것이 아니라 ‘매달리는’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급기야 신문 지면에는 한 돈암동 거주 시민의 웃지 못할 기고문도 등장합니다.
… 장안에는 너무 그릇된 행동이 만행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전차를 타는 데 있어 “새치기”를 너무 남용하는 것입니다. 특히 저녁때 빳빳하게 굳은 피곤한 사람들이 장사진을 치고 을지로사가에서 돈암동행 전차를 기대리고 있노라면 서슴치않고 뻔뻔스럽게 슬쩍슬쩍 들어가는 철면피들을 볼때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저녁때 집으로 돌아가는데도 그렇게 염치없는 짓을 하고도 문화세상에서 산다할까. 새치기꾼들은 민중과 더불어 행하는 것을 민중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자신을 위해서 행해야 된다는 것을 좀 알아주십시오. (돈암동 김아무개)
- 「자유제언 “전차 새치기해서 타는 건 철면피!”」, 1949년 8월 27일, 『자유신문』.
혼잡한 전차 모습을 나타낸 신문 삽화 <출처: 1947년 3월 15일, 『동아일보』>

혼잡한 전차 모습을 나타낸 신문 삽화 <출처: 1947년 3월 15일, 『동아일보』>

이처럼 해방 이후에도 시민의 발 노릇을 하였던 전차였기에 그 전차가 향하는 마지막 지점인 종점에는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모여들게 됩니다. 또 이 지역이 만남의 광장이자 지역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전차가 왕복으로 다녔는데 (돈암동) 태극당이 종점이었어요. 바로 전 정거장은 파출소 앞이었어요. 태극당 자리는 동네 중심지였어요. 만나자고 하면 태극당에서 만났지요.
- 정수인・황희순, 「돈암동 사람들-박영민 구술기록」, 『도성 밖 신도시 ‘돈암’』, 서울역사박물관, 2022, 317쪽.
옛날 분들은 아직도 돈암동 전차종점 태극당에서 만나자고 하죠. 돈암동의 대표적인 장소였어요. 당시 다방이나 커피숍이 유행이라 전차종점 주변이 다 다방이었죠. 돈암동 종점 왼쪽은 아리랑고개인데, 그때는 집들이 몇 개 없었어요.
- 정수인・황희순, 「돈암동 사람들-조흥동 구술기록」, 『도성 밖 신도시 ‘돈암’』, 서울역사박물관, 2022, 352쪽.
한편 돈암동에 설치된 전차 종점의 존재는 일부 사람들에게는 돈암동을 삶의 터전으로 결정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돈암동에 거주하였던 사람들 가운데 많은 문인, 예술인이 있었던 것도 같은 맥락일 것입니다.
돈암동은 돈은 많이 벌지 못하지만 시내로 자주 오가야 하는 지식인들이 많이 살던 곳이었어요. 출판사에서 일하는 사람, 교사, 문인, 기자, 이런 사람들이 많았어요. 사대문하고 굉장히 가깝고, 교통이 편리하잖아요. 전차 종점도 있었고 버스 종점도 있었어요. 또 새로 개발된 동네인 데 비해 집값이나 물가가 싸니까 그런 사람들이 들어와 살기가 좋았죠.
- 정수인・황희순, 「돈암동 사람들-故 신동엽 일가 구술기록」, 『도성 밖 신도시 ‘돈암’』, 서울역사박물관, 2022, 330쪽.
더불어 돈암동 전차 종점은 박완서, 정한숙, 김내성 등 한국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작품 속 주요 배경으로 등장하기도 하였습니다.
거리는 새로 닦은 신작로 주변을 따라 개발되어 갔다. 이 무렵부터 기계 문명이 시작되었다. 신작로 위에 쇠길이 생겼으니 전차선로다. 돈암동 종점에서 종로 4가로 나가는 전차 소리에 알을 품던 산꿩과 뻐꾸기의 울음소리는 멀어졌다.
- 정한숙, 「성북구 성북동」, 『금당벽화』, 고려대학교 출판부, 1998, 232쪽.
해방을 맞이하고 한국전쟁을 경험한 이후 서울은 해마다 30만 명씩의 인구 유입으로 포화상태가 됩니다. 그리고 서울 생활권이 확대되며 시민들이 필요로 하는 교통의 수요는 전차의 운행범위를 아득히 벗어나 버리고 맙니다. 결국 1957년이 되면 버스의 수송력이 전차를 앞지르며 버스 우위의 시대가 도래합니다. 또한 시설 노후로 인한 잦은 고장 20㎞도 안 되는 느린 운행 속도, 지나친 소음, 버스 등 일반 차량의 흐름을 방해하는 등의 문제도 전차의 존재 가치에 의문을 품게 하였습니다. ‘시민의 발’ 노릇을 하던 전차가 ‘애물단지’가 되어 급기야 ‘시끄러운 우보(牛步)’ 취급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물밀 듯 밀려오는 ‘버스’・‘합승택시’ 등 「스피드」 시대에 전차를 탄다는 것은 마침내 복덕방 영감 정도의 한가한 사람들이 이용하는 것으로밖에 인식되지 않게끔 되었다.
- 「국영기업체 운영백서 (5) 경성전기」, 1961년 3월 25일, 『경향신문』.
그럼에도 전차는 1일 평균 교통기관 이용 승객 약 350만 명 가운데 52만 명이 이용하는 시민들의 주요 교통수단임은 분명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차의 운행을 멈추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1966년 ‘불도저’라는 별명을 가진 김현옥 서울시장이 취임하면서 서울 교통 완화를 위한 전차 철거 작업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1968년 11월 29일을 마지막으로 전차의 시대는 마무리됩니다.
마지막 전차 운행을 마치고 동대문 차고지에 입고된 전차를 향해 마지막 인사를 하는 기관사들 <출처: 1968년 8월 30일, 『조선일보』>

마지막 전차 운행을 마치고 동대문 차고지에 입고된 전차를 향해 마지막 인사를 하는 기관사들 <출처: 1968년 8월 30일, 『조선일보』>

전차의 운행 종료와 함께 돈암동 전차 종점도 그 역할을 다하게 됩니다. 83년 전 오늘 탄생하였던 돈암동 전차 종점이 사라지며 함께 있던 승무원 사무소인 돈암동 종점 사무소도 사라지고 맙니다.
돈암동, 그리고 그 인근에 거주하였던 사람들은 돈암동 전차 종점에 대하여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동급생들과 삼삼오오 어울려 즐겁게 전차를 타고 등하교하던 학생을, 아침부터 바삐 만원 전차에 올라타고 또 그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퇴근하기 위해 가벼운 발걸음으로 전차에서 내리던 직장인을, 친구와 연인과 가족을 만나기 위해 달뜬 마음으로 돈암동 전차 종점에서 기다리던 이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돈암동 전차 종점 표지석. 2014년 전후에 철거되었다. <출처: 「눈사람은 녹고 짠지 단지도 없네」, 2010.10.13., 『한겨레21』>

돈암동 전차 종점 표지석. 2014년 전후에 철거되었다. <출처: 「눈사람은 녹고 짠지 단지도 없네」, 2010.10.13., 『한겨레21』>

돈암동 전차 종점 표지석의 그림과 내용. <그림: 성북구청 제공>

돈암동 전차 종점 표지석의 그림과 내용. <그림: 성북구청 제공>

<참고 문헌>
성북마을아카이브 (https://archive.sb.go.kr)
성북마을발견+문학 (https://archive.sb.go.kr/litmap)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https://nl.go.kr/newspaper)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https://newslibrary.naver.com)
서울역사편찬원, 서울역사구술자료집 9 『땡땡땡! 전차여 안녕!』, 서울역사편찬원, 2018.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의 전차』, 서울역사박물관, 2019.
서울역사박물관, 『도성 밖 신도시 ‘돈암’』, 서울역사박물관, 2022.
최인영, 「서울지역 전차교통의 변화양상과 의미(1899~1968)」,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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