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도끼 #213] 주민들의 포근한 휴식처가 되어주는 개운산
작성자 장지희
성북구에는 여러 산이 있어 가까이에서 자연을 느끼기 좋습니다. 그중에서도 성북구의 중심부에 위치하여 주민들의 사랑을 많이 받는 산이 있는데요, 바로 개운산(開運山)입니다. 개운산은 북한산(835.6m)이나 북악산(342m) 등 성북구의 다른 산들과 비교하면 야트막한 134m 높이를 가지고 있지만, 그만큼 접근성이 좋아 주민들에게 친근한 공간이 되어주기도 합니다. 오늘의 금도끼에서는 개운산에 대한 몇 가지 이야기들을 소개해드리려 합니다.
안암동, 종암동 일대 전경(출처: 서울연구원)

안암동, 종암동 일대 전경(출처: 서울연구원)

개운산 산책 안내도(출처: 서울의 공원)

개운산 산책 안내도(출처: 서울의 공원)

개운산의 이름은 ‘나라의 운을 연다’는 뜻을 가진 인근 사찰 개운사(開運寺)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이 절은 1396년 현 고려대학교 이공대학 부근에 영도사(永導寺)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다가 이곳이 정조의 후궁 원빈 홍씨의 묘소 자리로 지정됨에 따라 1790년경 한차례 이전을 하였는데, 이때 ‘개운사’라는 이름으로 변경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산 인근에 오랜 세월 위치했던 사찰 덕에 지금의 이름을 가지게 된 개운산은 안암동 옆에 위치하여 예전에는 ‘안암산(安巖山)’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산 주변으로는 안암동뿐만 아니라 돈암동과 종암동도 함께 접하고 있습니다. 주변 동네의 이름을 살펴보면 바위 암(巖)자가 들어간다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개운산이 크고 작은 돌들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실제로 개운산에는 1960년대까지 채석장이 있었습니다. 이 채석장은 종암1동에 거주했던 진씨(陳氏) 성을 가진 사람의 소유였는데, 이와 같은 이유로 개운산에는 ‘진석산(陳石山)’이라는 명칭이 붙여지기도 했습니다. 진석산은 양질의 석재 산출지로 일찍부터 유명하여 채석업과 석재 가공업이 이루어져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를 지을 때도, 1958년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아파트인 종암아파트와 인근에 위치한 고려대학교 석조건물을 지을 때도 이 채석장의 돌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현재도 종암중학교 주변에 채석장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종암중학교 뒤쪽 개운산 채석장 흔적(출처: 성북문화원)

종암중학교 뒤쪽 개운산 채석장 흔적(출처: 성북문화원)

일제강점기의 기록을 통해 개운산과 관련된 독립운동 이야기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3.1운동 발발 직후인 1919년 3월 1일부터 1921년 10월까지 일본 육군성에 수시로 보고된 전보 문건들과 일자별 정리 보고 문서인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를 보면,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된 시기인 1919년 3월 27일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안감천과 돈암리 산 위 등에서 독립운동이 발생하여 주모자가 체포되고 해산되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돈암리 산은 현재의 개운산으로 추정하고 있는데요. 당시 개운산에서 발생한 만세운동에는 약 50명의 인원이 참여했다고 합니다. 이렇듯 개운산은 예로부터 많은 사람이 모이는 장소였으며 역사적 사건의 배경이 된 곳임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_독립운동에 관한 건(제29보)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_독립운동에 관한 건(제29보)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_독립운동에 관한 건(제29보)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_독립운동에 관한 건(제29보)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_소요사건 경과 개람표 (1919.3.27.)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_소요사건 경과 개람표 (1919.3.27.)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개운산 일대는 1940년 3월 12일 공원지역으로 고시된 나무가 울창한 산림이었으며 인근 동네는 주택밀집지역으로 개발되었습니다. 그러나 광복 후 월남민들이 산비탈에 정착하여 거주하기 시작하면서 벌목하고, 6·25전쟁 당시의 전투로 나무가 타버려 한때는 민둥산이 되기도 하였는데요. 이후 산책로를 조성하며 나무를 심는 등의 지속적인 관리로 이전 모습을 되찾은 개운산은 다시금 활기를 띠게 되었고, 인근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휴식처와 운동 공간으로 많이 이용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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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북구 개운산근린공원은 오전 5시 30분이면 아침운동에 나선 주민들로 북적거린다.
별다른 체육시설이 마련되어 있지 않은데도 주민들의 발길을 끌고 있는 것은 주택가에 인접해있기 때문.
개운산은 주택밀집지역인 성북구 안암‧종암1동‧돈암1동에 둘러싸여 있다.
개운산근린공원의 인기는 다른 공원보다 월등히 많은 동호인 모임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배드민턴, 테니스, 게이트볼 등 개운산근린공원과의 인연으로 주민들이 삼삼오오 모여 결성한 동호인 모임이 26개나 된다.
(후략)

경향신문, 「새벽 건강 同好人 “북적” 개운산근린공원」, 1993.08.05
1990년대 개운산 풍경(출처: 성북구청)

1990년대 개운산 풍경(출처: 성북구청)

1990년대 개운산 풍경(출처: 성북구청)

1990년대 개운산 풍경(출처: 성북구청)

개운산 테니스클럽(2001)(출처: 이석호‧성북문화원)

개운산 테니스클럽(2001)(출처: 이석호‧성북문화원)

개운산 배드민클럽(2001)(출처: 이석호‧성북문화원)

개운산 배드민클럽(2001)(출처: 이석호‧성북문화원)

1995년에는 서울시 자연환경보전기본계획 수집에 따라 개운산 일대가 근린공원으로 조성되었습니다. 이후 산책로가 정비되고 여러 운동시설이 들어서며 더욱 많은 방문객이 찾는 공간이 되었는데요. 특히 2000년에 개관한 개운산 스포츠센터에는 수영장, 헬스장 시설을 비롯하여 스포츠와 취미 관련 강좌들이 마련되어 있어 주민들의 건강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개운산 스포츠센터(출처: 성북문화원)

개운산 스포츠센터(출처: 성북문화원)

개운산 내 운동시설(출처: 성북문화원)

개운산 내 운동시설(출처: 성북문화원)

개운산 산책로(출처: 성북구청)

개운산 산책로(출처: 성북구청)

개운산 스포츠센터 바로 옆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기관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바로 1991년 개관한 성북구의회입니다. 성북구의회 건물은 지상 2층의 규모로 본회의장, 의장실, 부의장실, 사무국장실, 운영위원장실, 의회사무국, 회의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주민이 선출한 의원으로 구성된 성북구의회는 주민대표기능, 자치 입법기능, 행정감시 기능 등의 역할을 수행하며 우리 지역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성북구의회(출처: 성북문화원)

성북구의회(출처: 성북문화원)

개운산은 현재까지도 많은 인원이 모이는 장소입니다. 특히 새해 첫날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날 중 하나인데요. 이곳에서 ‘성북 해맞이 행사’가 열리기 때문입니다. 매년 1월 1일 오전 개운산 운동장에서 개최되는 이 행사에서는 주민들의 소망을 적은 풍선을 날리며 한 해의 안녕을 기원하고, 공연과 전통 놀이를 함께 즐기면서 새해의 시작을 기념합니다.
2016년 성북 해맞이 행사(출처: 성북구청)

2016년 성북 해맞이 행사(출처: 성북구청)

지금까지 언제나 주민들의 포근한 휴식처가 되어주는 개운산에 관한 이야기를 소개해드렸습니다. 장마 기간이 지나가면, 가까이에서 자연을 느끼며 건강을 챙길 수 있는 개운산을 방문해보시는 건 어떨까요?


<참고 문헌>
성북구청, 『성북구지』, 성북구청, 1993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 100경』, 성북구청, 2014
박수진 외 7인, 『보문동∙안암동』, 성북문화원, 2017
성북마을아카이브, https://archive.sb.go.kr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s://db.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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