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여성국극’에 대해 들어보셨나요? 여성국극이란 전통연희자들이 무대 위에서 역할을 나누어 연기, 춤, 소리를 펼치는 공연인 창극의 일종으로 모든 배역을 여성이 담당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성국극은 1950년대 선풍적 인기를 끌었지만, 짧은 전성기 이후 급격한 쇠퇴기 맞이하면서 우리 기억 속에서 점점 멀어져 갔습니다. 그런데 요즘 웹툰 <정년이>가 창극, 드라마 등 다양한 콘텐츠로 변주되면서 이야기의 주요 소재인 여성국극에 대한 관심이 다시 커지고 있습니다.
창극 <정년이>(2023) 프로그램 북과 리플렛(출처 성북문화원)
성북구는 1세대 여성국극인들이 머무른 장소로서 여성국극과 연을 맺고 있습니다. 여성국극의 간판스타였던 임춘앵(1924-1975), 김진진(1933-2022)은 장위동에 거주하며, 1960-70년대에 무용연구소를 운영했습니다. 그리고 아직 현역으로 활약하고 있는 1세대 여성국극인 조영숙(1934-)도 국가무형유산 발탈 보유자로서 동선동에 거주하며, 전수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오늘 금도끼는 장위동에서 말년을 보낸 임춘앵의 생애를 중심으로 여성국극의 흥망성쇠를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임춘앵의 모습. 『평화신문』, 1955.12.07.(출처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2020년 인터뷰 당시 조영숙(출처 성북마을아카이브)
임춘앵은 1924년 전라남도 함평군에서 아버지 임성태와 어머니 김화성 사이의 이남삼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임춘앵은 예인 집안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설장고 명인인 외삼촌 김안식의 집에서 소리를 배웠습니다. 임춘앵은 딸의 재능을 키우려는 어머니의 의지로 인해 광주 권번에 들어가 15세까지 소리와 춤을 배우게 됩니다. 1939년 15세의 나이로 서울로 상경한 그는 크고 작은 연희장에 출연해 두각을 나타냅니다. 이어 1942년 부민관에서 전통소리 발전회 공연에 특별 출연하여 이름을 알리게 되고, 1944년 조선창극단에 입단하게 됩니다.
이즈음 판소리를 근간으로 극적인 요소가 가미된 창극은 광복과 맞물려 국극이라 이름으로 공연계에 활력을 불어놓고 있었습니다. 또 최초의 여성 명창 진채선(1847-?) 이후 여성 전통예술인의 활동은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극단의 활동과 운영은 남성 전통예술인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불평등한 처우에 반기를 들고 1948년 박록주(1905-1979), 박귀희(1921-1993) 등이 주축이 되어 여성 국악인들만으로 조직된 ‘여성 국악 동호회’를 결성합니다. 이때 임춘앵도 여성 국악 동호회에 입회하게 됩니다.
동호회의 첫 번째 공연인 <옥중화>는 춘향전을 각색한 것으로 여기서 임춘앵은 이몽룡 역을 맡게 됩니다. 이 <옥중화>는 비록 흥행에 실패하였지만, 여성 국극에서 남장 연기자가 최초로 등장한 작품이었습니다. 이듬해 오페라 투란도트를 각색해 만든 <햇님과 달님>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여성국극의 대명사가 됩니다. 이 작품의 성공 후 진행감독이었던 김주전의 제안에 임춘앵을 주축으로 ‘여성국극동지사’라는 단체가 결성됩니다. 임춘앵은 여기서 <햇님과 달님>의 후편인 <황금돼지>부터는 본격적으로 남장 연기를 맡게 됩니다.
여성국극동지사에서 올린 <공주궁의 비밀> 신문광고. 『마산일보』, 1952.05.04.(출처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여성국극동지사는 1953년부터는 ‘임춘앵과 그 일행’이라는 이름으로 단체활동을 이어나갑니다. 이 시기를 전후로 조카 김진진, 김경수, 김혜리 자매를 차례로 데려와 함께 무대에 오르며, <산호팔찌>, <여의주>, <구술공주> 발표하는 작품마다 흥행에 성공합니다. 이때 여성국극의 인기는 대단하여 공연이 끝난 뒤에도 극장 앞은 극장을 나서는 배우들을 보려는 팬들로 가득했다고 하며, 남성 명창들이 주도하던 정통적 창극단들이 여성을 대표로 내세워 여성국극으로 위장하는 기현상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1954년 5월 12일 『평화일보』에 실린 ‘임춘앵과 그 일행’의 공연 광고 (출처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1954년 6월 27일 『평화일보』에 실린 ‘임춘앵과 그 일행’의 공연 광고 (출처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여성국극이 이렇게 인기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기존 창극이 소리에 초점을 맞춘 것과 달리 연기와 춤, 소리뿐 아니라 화려한 분장과 무대효과로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데에 있었습니다. 여기에 여성국극에서는 일관되게 사랑을 주제로 다루며, 여성국극의 남성주인공은 강인하면서도 다정한 당대 여성들이 희망하는 이상적인 남성상을 구현하였습니다. 그래서 남역 배우의 연기와 매력은 여성국극 인기의 핵심을 담당했습니다.
『박송희 기증 무형유산 기증자료집』(2022)에 실린 여성국극단체 햇님국극단과 세한국극단의 공연 모습(출처 국립무형유산원)
그러나 이러한 인기가 무색하게 여성국극은 급격한 쇠퇴를 맞이합니다. 임춘앵의 조카 김진진이 임춘앵과 갈등을 빚으면서 1957년 두 동생과 함께 극단을 나와 별도로 ‘진경 여성국극단’을 조직해 활동합니다. 여성 주인공역을 도맡던 김진진을 잃은 임춘앵의 단체는 이후 발표한 작품들이 연거푸 실패합니다. 빚더미에 오르면서 공연의 질은 떨어지기 시작하고 점차 변두리로 밀려나 제대로 된 공연을 할 수 없게 되면서 임춘앵은 1966년 국극단체로서의 활동을 중단합니다.
실의에 빠진 임춘앵은 1967년 신경안정제에 과다복용과 연탄가스 중독으로 쓰러집니다. 김진진은 그런 임춘앵을 장위동에 있는 자기 집으로 데려와 보살폈고, 근처에 ‘임춘앵 무용 연구소’라는 학원을 차려주었습니다. 임춘앵은 이곳에서 학생들을 열심히 가르쳤다고 하는데요. 장위동은 임춘앵이 여성국극의 마지막 불꽃을 살려보려 노력했던 장소인 셈입니다. 하지만 잦은 음주로 건강을 잃은 임춘앵은 1975년 뇌출혈로 자택에서 사망합니다. 그의 죽음과 함께 여성국극은 점차 대중에게 잊혀 갑니다.
임춘앵이 사망한 장위동 273-63번지(출처 성북마을아카이브)
여성국극이 급격하게 쇠퇴한 이유로는 단체의 난립 문제가 컸습니다. 여성국극단체가 우후죽순 생겨나면서 후계자를 전문적으로 양성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지 못했고 몇몇 스타 배우에게만 의존하여 비슷한 내용의 공연이 반복됩니다. 여기에 국산영화 장려정책으로 인해 공연예술이 영화산업에 밀리면서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진 것입니다. 1960년대 공연예술계의 부흥 시도 과정에서 여성국극은 ‘여성들만의 사이비 예술’이라는 비난 속에 무형문화유산으로 인정받지 못했고, 국가의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되면서 재기할 힘을 잃게 됩니다.
지난 7월에도 <조 도깨비 영숙>에서 1인 5역을 소화하며 여성국극의 부활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조영숙은 그의 저서 『여성국극의 뒤안길』(2022)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에게는 영 놓지 못하는 예술세계가 있다. 여성국극,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뛰고, 그의 몰락에 안타까운 마음은 꿈속에서도 못 잊는다.”
여성국극은 전성기는 현재와 70여 년의 간극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90이 넘은 배우가 아직도 애틋한 마음을 품고 있고, 왜 대중은 다시 여성국극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걸까요? 여전히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성별 고정 관념을 타파하고 여성의 주체적인 목소리를 찾고자 하는 열망이 여성국극의 가치를 되돌아보게 한 것은 아닐지 생각하게 합니다. 오늘의 금도끼는 여기서 마무리하겠습니다.
송송이. 2021. 「근대 이후 여성국극의 형성과 활동에 관한 연구」. 중앙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김혜정. (감독). (2013). <왕자가 된 소녀들>[다큐멘터리]. 영희야놀자.
박돈규. (2021.02.23.). 「햄릿이 남자냐 여자냐 그것이 무슨 문제더냐」. 『조선일보』.(https://www.chosun.com/culture-life/2021/02/23/FFIQQHLEZJD7VJXDHYFKE26VVM/) 정혁준. (2023.08.26.). 「힘든 시대 위로했던 여성국극…세대 넘어 부르는 ‘부활의 노래’」. 『한겨레S』(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10586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