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를 한국 대중음악의 황금기라고 하는 평자들이 많습니다. 그전까지 트로트가 주류였던 대중음악계에는 언더그라운드의 포크, 발라드, 댄스, 블루스, 민중가요, 록, 힙합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들이 여러 매체를 통해 전파되며 대중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형식뿐 아니라 노랫말로 표현하는 음악의 내용도 풍성해졌습니다. 남녀의 사랑과 이별을 노래한 것이 대다수이긴 했지만 색다른 주제의 노래들이 등장해서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이를테면 ‘그리움’ 같은 것입니다. 물론 떠나간 연인이나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한 것이 가장 많지만 개중에는 이제는 갈 수 없는 유년 시절의 장소와 시간에 대한 그리움의 정서를 담은 노래들도 있었습니다.
왜 1990년대에 그런 노래들이 등장했던 것일까요? 그 시절 우리 도시의 모습이 급격하게 변하다 보니 상실감이 컸던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예전의 집과 골목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과거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는 물질적 조건들이 사라지고 만 것이죠. 이주와 이사가 예사였던 것도 한 이유가 될 것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줄곧 한 집에서 자란 이들도 거의 없었을 테니까요. 1990년대 베스트셀러 소설 중 하나가 『상실의 시대』였던 것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즈음 발표된 노래 중에는 1970년대 성북구의 풍경을 떠올리게 하는 노래들이 더러 있습니다. 주로 1960년대에 태어나 유년기를 성북 지역에서 보낸 뮤지션들의 노래입니다. 세 곡을 골라봤습니다.
먼저 소개할 노래는 그룹 어떤 날의 멤버로 유명한 조동익(1960~ )의 곡 〈노란대문 (정릉배밭골’70)〉입니다. 1994년 발표한 그의 정규 솔로 음반 《동경(憧憬)》에 실은 노래입니다. 정릉3동 배밭골에서 보냈던 어린 시절 집 안팎의 풍경과 가족들의 모습을 시적인 가사에 담았습니다.
노란대문 (정릉배밭골’70)
작사·작곡·노래 : 조동익
맑은 개울을 거슬러 오르다 조그만 다리를 건너 동산을 오를 때면 저만치 소를 앞세우고 땀흘려 밭을 일구시는 칠성이네 엄마 집에 도착하면 숨이 턱까지 차올라 노란 대문 생각만 해도 내 입가에 웃음 짓게 하는 그 문을 두드리면 제일 먼저 날 반기던 강아지 마당엔 커다란 버찌나무 그 아래 하얀 안개꽃 해질 무렵 분꽃이 활짝 피면 저녁 준비에 바쁘신 우리 할머니 저만치 담 밑엔 누군가 살고 있을 것 같은 깊고 차가운 우물 두레박 하나가득 물을 담아 올리면 그 속엔 파란 하늘 난 행복했었지 하얗게 춤추던 안개꽃 난 사랑했었지 그곳을 떠다니던 먼지까지도 노란 대문 생각만 해도 내 입가에 웃음 짓게 하는 그 문을 두드리면...
조동익 앨범 <동경> 표지 속 가사
1970년대 시골 같았던 (지금도 시골의 모습이 남아 있는 곳이지만) 정릉 배밭골, 그 속에서 사람, 식물, 동물들이 평화롭게 한 시절을 보냈던 모습을 노랫말 속에 담았습니다. 특유의 몽환적인 사운드와 가수의 음성 덕분에 이미지의 여운은 오래 가슴 속에 남습니다.
두 번째 소개할 노래는 넥스트(N.EX.T)의 〈세계의 문 Part 1-유년의 끝〉입니다. 넥스트가 1995년 9월 15일에 발매한 정규 3집 음반 《The Return of N.EX.T Part 2: The World》의 첫 곡으로 넥스트의 리더 신해철(1968~2014)이 보낸 유년 시절의 동네 모습이 나옵니다.
세계의 문 Part 1-유년의 끝
작사·작곡·노래 : 신해철
흙먼지 자욱한 찻길을 건너 숨 가쁘게 언덕길을 올라가면 단추공장이 보이는 아카시아 나무 그늘 아래 넌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구멍가게 옆, 복개천 공사장까지가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의 전부였던 시절 뿌연 매연 사이로 보이는 세상을 우리는 가슴 두근거리며 동경했었다. 이제 타협과 길들여짐에 대한 약속을 통행세로 내고 우리는 세계의 문을 지나왔다. 그리고 너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문의 저편 내 유년의 끝 저편에 남아 있다.
신해철은 도봉구 미아4동 55-66번지에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냈습니다. 지금은 송중동이라고 이름이 바뀐 미아사거리 부근의 동네입니다. 비록 주소지가 성북구에서 약간 비껴나 있기는 하지만 70년대 미아동(현 강북구)과 성북구 지역은 거의 동질적인 생활권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어릴 적 누나를 따라 다니기 시작했던 성당은 동방고개 너머 장위동 성당이었고, 중·고등학교 시절 다녔던 음악 연습실 ‘각시탈’은 길음동 2층 목조건물의 지하에 있었다고 하니 말입니다. 신해철은 자신이 살던 곳을 ‘변두리’로 정의하고 그곳에서 생겨난 자신의 정서를 ‘중간자 정서’라 부른 바 있습니다. 그는 강북구와 성북구의 구별을 떠나서 미아리고개 너머 허름한 서울의 변두리 주택가를 유년 시절의 풍경으로 간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곳은 흙먼지 자욱한 찻길이 있고 단추공장이 있고 언덕에는 아카시아 나무가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구멍가게 옆 좁은 하천은 복개 공사가 한창이었습니다. (아마도 이 하천은 지금의 롯데백화점 미아점 뒤로 흘러서 홈플러스 월곡점 옆에서 정릉천으로 흘러드는 월곡천을 말할 것입니다. 신해철의 어머니는 아들더러 이 하천 바깥으로 나가서는 놀지 말 것을 당부했다고 합니다.) 이 언덕(이곳은 그의 어린 시절 놀이터였던 돌산으로 지금은 북서울꿈의숲으로 조성된 오패산 자락을 말할 것입니다.)에서 멀리 떨어진 서울의 도심은 ‘뿌연 매연 사이로’ 보일 뿐입니다. 유년의 끝, 이제 그는 유년 시절의 변두리를 떠나 세계의 문을 거쳐 세계의 중심으로 들어갑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인생의 도약이 세계와의 ‘타협과 길들여짐의 약속’과 맞바꾼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메탈사운드의 곡 〈Part 2-우리가 만든 세상을 보라〉에서 그는 지금 우리의 세상이 원칙과 토론 속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타협과 순응에 기대어 만든 ‘우리가 만든 세상(world we made)’이었기 때문에 다리와 백화점이 무너졌다고 이해합니다. 성수대교 붕괴 사고는 1994년 10월 21일에,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는 1995년 6월 29일에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들 앞에서 지금의 우리는 모두 ‘공범’이라 말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노래는 “발전이란 무엇이며 진보란 무엇인가 누굴 위한 발전이며 누굴 위한 진보인가”라는 가사를 반복하며 절규에 가까워집니다. 미아사거리 지나 번동 북서울꿈의숲에 가면 신해철의 노래비 겸 기념벤치가 있습니다. 그의 사후 신해철의 팬들이 정성을 모아 세운 이 기념물에는 바로 〈세계의 문 Part 1-유년의 끝〉의 가사가 새겨져 있습니다. 다른 대중적으로 알려진 노래가 많음에도 굳이 잘 알려지지 않은 강렬한 메탈곡 서두의 읖조리는 듯한 노랫말을 여기에 새긴 이유를 충분히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기념물이 서 있을 곳이 신해철이 유년 시절 자주 놀러 다녔던 언덕인 까닭에 이를 고려한 팬들의 사려 깊은 뜻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북서울꿈의숲 신해철 기념 벤치
마지막으로 소개할 곡은 한동준(1964~ )의 노래 〈내 고향 삼선교〉입니다. 1995년 〈사랑의 서약〉이란 곡으로 일약 유명세를 탔던 한동준은 이후 성대결절로 가수 생명의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그 아픔을 무릅쓰고 2년여 동안 새 음반 작업에 매달려 2003년 4집 음반을 내놓았습니다. 그는 이 음반에 그동안 하지 못했던 자신의 이야기를 노래로 쏟아냈다고 고백합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이 노래입니다.
내 고향 삼선교
작사·작곡·노래 : 한동준
내 어릴 적 살던 동네엔 작은 돌산 하나 있어 너무 좋았지 그곳에선 좋은 사람들 매일 저녁 함께 모여 얘길 나눴지
기억하는지 그 많은 추억들 잊고 싶지도 잃고 싶지도 않아 그 시절 너무 그리워 사랑했던 친구들 모두 어디 있을까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 아름답고 깨끗했던 마음 그대로 내 맘은 여전히 그곳에 있는 정든 내 고향 삼선교
생각나는지 소중했던 날들 잊고 싶지도 잃고 싶지도 않아 그 시절 너무 그리워 사랑했던 친구들 모두 어디 있을까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 아름답고 깨끗했던 마음 그대로 난 아직도 잊지 못하네 정든 내 고향 삼선교
그가 어릴 적 살았던 동네 삼선교(삼선동)의 옛 풍경과 사람들을 담백한 수채화처럼 그려냈습니다. 그는 삼선교에는 ‘작은 돌산 하나 있어 너무 좋았’고 ‘그곳에선 좋은 사람들이 매일 저녁 함께 모여 얘길 나눴’다고 회상합니다. 그 시절 삼선교의 추억들을 잊고 싶지도 잃고 싶지도 않다고 하며 아름답고 깨끗했던 마음 간직했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고 노래합니다. 그동안 가수로서 숨 가쁘게 살아왔던 시간이 그에게 여간 힘들지 않은 시간이었음을 짐작케 하는 노래입니다. 힘들 때 가끔 떠올려보는 삼선교 옛 동네의 기억은 얼마간 휴식이 되었던 것은 아닐까요?
한동준 4집 음반 표지
지금까지 1960년대에 태어나 1970년대를 성북에서 보낸 이들이 1990년대에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지은 노래들을 살펴봤습니다. 노래가 탄생한 시대의 맥락을 생각하며 노랫말을 음미해 봤습니다. 뮤지션들이 노랫말에 눌러 담은 문제의식은 아직도 유효해 보입니다. 지금의 우리들도 90년대의 사람들처럼 과거의 기억은 버려둔 채 앞만 보며 달리는 것은 아닌가 하고 성북의 옛 노래들은 되묻고 있는 듯합니다. 11월의 끝자락, 이 노래들과 함께 성북구를 산책하며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려보는 것은 어떨지요?
[참고문헌] Yellow Gate (노란 대문 (정릉 배밭골 '70)) (https://youtu.be/wpa0vHcdgfc?si=rnb7qrz8pn7L4kGS) 세계의 문 (유년의 끝) (https://youtu.be/7Ml7lwaB8h0?si=vNOfUQ8rWnznlhYV) 신해철, 「무라카미 류는 정말 대차게 사셨더군요」 (http://cromfan.com/xe/essay/486) 내 고향 삼선교 (https://youtu.be/45W-MleXhFY?si=cgJW-HmmBhgUda1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