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도끼 #228] 온기를 배달해 드립니다. 석관동살이 50년 권춘자의 삶
작성자 김나연
<성북 사람들의 구술생애사> 시리즈, 두 번째로 소개해 드릴 분은 석관동에 따뜻함을 나눠준 권춘자 님입니다.

2021년 발간된 다섯 번째 구술생애사의 주인공 권춘자 님은 석관동에서 약 20년간 연탄 장사를 하며 골목 구석구석 온기를 나누고, 약 15년간 버스 기사님들에게 따뜻한 밥을 지어주며 네 남매를 키웠습니다.
1945년 경상북도 영주에서 태어난 권춘자 님은 칠 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종종 부모님 농사일을 도와드렸습니다. 스물두 살에 지금의 남편분을 만나 마당에서 결혼식을 올린 이후에도 시댁에서 어르신을 들을 모시며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러다 1970년대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서울로 상경을 결심했다고 합니다.
권춘자 님, 2021, 남윤중 촬영 ⓒ성북문화원

권춘자 님, 2021, 남윤중 촬영 ⓒ성북문화원

“‘내 자식은 잘 가르치겠다.’라는 생각으로 서울로 온 거예요. 우리 남편 집안 큰집이 그때 서울에 먼저 와서 이문동에 자리 잡고 살고 있었거든. 농사일하는 것보다는 서울 와서 일하는 게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우리도 올라왔지. 애들을 잘 가르칠 수 있다고 해서…. 숱한 고생은 다 했지만, 그때는 ‘애들 가르쳐야 한다.’라는 생각만 했어요.”

하지만 서울에 와서 일하면 고생은 해도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거라는 권춘자 님의 기대와 다르게 서울에 정착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하다 하다 안 되니까 양은 장사도 해 보고, 쌀장사도 해 보고. 그 이후에는 석관시장(돌곶이 시장)으로 와서 양은 가게도 해 보고 옥수수도 쪄 팔고 고구마도 구워 팔고 해 보다가 안 돼서 이거 연탄, 마지막으로 연탄을 시작한 거야. 그게 한 1975년쯤이지.”
돌곶이 시장 입구 ⓒ성북문화원

돌곶이 시장 입구 ⓒ성북문화원

돌곶이 시장 내부 ⓒ성북구청

돌곶이 시장 내부 ⓒ성북구청

연탄 장사를 하면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석관동에서 시작한 연탄 장사는 시작부터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이쪽으로 이사 와서, 연탄 가게를 시작하려고 상진운수 뒤쪽 건물에 가서 가게 운영하게 자리 하나 달라고 하니까 주인이 안 준다고 해요. 시커먼 연탄 장사한다고 하니까 싫었나 봐요. 그래서 내가 길가를 깨끗하게 할 테니까 가게 좀 달라고. 그렇게 사정을 했어요.…그래서 가게 운영하면서는 항상 그 앞을 깨끗하게 청소해 줬어요.”
첫 번째 연탄 가게 자리, 2021 ⓒ성북문화원

첫 번째 연탄 가게 자리, 2021 ⓒ성북문화원

두 번째 연탄 가게 자리, 2021 ⓒ성북문화원

두 번째 연탄 가게 자리, 2021 ⓒ성북문화원

“연탄이 무거워요. 타고 나면 가벼운데 시커먼 거는 무거워. 막 울면서 갔었죠. 그땐 여기가 전부 벌판이었어요. 길도 너무 안 좋아서 리어카가 잘 안 따라오는데…. 처음에는 이리로 갔다가 저리로 갔다가, 리어카가 똑바로 안 와요. 힘이 달려서. 그래도 어떻게든 배워서 일했어요.”
1978년 칠표연탄 공장 작업 모습 ⓒ서울사진 아카이브

1978년 칠표연탄 공장 작업 모습 ⓒ서울사진 아카이브

1979년 정상천 서울시장, 연탄공장 방문 ⓒ서울사진 아카이브

1979년 정상천 서울시장, 연탄공장 방문 ⓒ서울사진 아카이브

구술생애사 속 연탄 가게 이야기를 들어보면 고된 세월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합니다. 하지만 권춘자 님은 이야기 내내 연탄 가게를 운영하며 만난 좋은 사람들을 회상했습니다.
처음 연탄 가게가 들어오는 걸 반대하던 주인은 약속처럼 항상 가게 앞을 깨끗이 청소하자 다음 계약에는 세를 올리지 않았습니다. 연탄 들여놓기 어려운 집에 연탄을 놓아주면 고생한다며 지하실에서 음료수를 꺼내주기도, 천 원씩 더 쥐어 주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겨울이 오기 전 외상 준 연탄값을 어려운 살림에도 꼬박꼬박 주던 사람들을 기억하며 권춘자 님은 떼먹힌 연탄값보다 따뜻한 사람들을 더 많이 돌아보고 있었습니다.

“진짜 착한 사람 너무 많아. 못된 사람이 조금이고 착한 사람이 많아서 지금껏 잘 살지 안 그러면 절대 못 살아요.”

그렇게 긍정적인 마음으로 20년을 장사하며 네 남매를 키우는 동안 연탄이 기름보일러로 바뀌었습니다. 서울에 급증하는 연탄 수요를 맞추고자 성북구 석관동과 동대문구 이문동에 조성됐던 연탄산업단지도 점차 그 수가 축소되었으며 2024년 삼천리 연탄공장을 마지막으로 현재 서울에 모든 연탄공장은 문을 닫았습니다.
1990년대 연탄공장 약도 ⓒ성북문화원 (경향신문, 올초 폐쇄된 연탄공장 부지 8곳 아파트 단지 탈바꿈, 1994.05.27. 참고)

1990년대 연탄공장 약도 ⓒ성북문화원 (경향신문, 올초 폐쇄된 연탄공장 부지 8곳 아파트 단지 탈바꿈, 1994.05.27. 참고)

며느리를 볼 무렵이 되면서 연탄 가게를 정리한 권춘자 님은 이후에는 식당 일을 하며 손주를 돌봐줬으며, 석관동에 위치한 상진운수에서는 약 15년 동안 기사님들에게 아침밥을 지어줬다고 합니다.

“난 아침에만 밥을 해주고 10시에 아줌마 두 명이 더 왔어요. 나는 아침만 하고 돌아왔어요. 우리 며느리가 아기를 낳아서 내가 아기를 봐야 했거든. 며느리가 직장을 나가니까 내가 오면 나한테 아기 맡기고 출근하고, 그 이후에는 내가 애를 보고. 그래서 나는 아침 장사만 했어요.”
석관동에 위치한 상진운수 ⓒ성북문화원

석관동에 위치한 상진운수 ⓒ성북문화원

“지금도 저기 가다 보면 버스 세우고 문을 탁 열면서 “아줌마!”하고 부르고 가는 사람 많아요. … 지금도 나를 보면 다들 잘해요. 진짜 기사들 착한 사람 많아요. 못된 사람도 있지만, 좋은 사람이 더 많아요. 내가 그래서 먹고산 거 같아요. 진짜 나한테 잘해줬던 사람들이 많아요.”

이처럼 구술생애사를 통해 만난 권춘자 님은 항상 선한 마음으로 주변을 돌아보고 따뜻함을 나누는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이 책이 발간된 2021년까지도 그 마음을 전하고자 한천마을에서 주민공동체 활동을 하며 여전히 따뜻함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동네에서 활동한 지는 한 5, 6년 됐지. 내가 어렵게 살았기 때문에 아직 돈으로는 남을 못 도와줘요. 그래도 힘 닿는 데까지는 다 도와줘요. 내가 힘 닿는 데까지는.”

권춘자 님, 2021, 남윤중 촬영 ⓒ성북문화원

권춘자 님, 2021, 남윤중 촬영 ⓒ성북문화원

이상으로 책에 담긴 이야기를 모두 담을 수는 없었지만, 설을 앞두고 마음이 따뜻해지는 이야기를 전해드릴 수 있어 더 뜻깊은 이번 주 금도끼였습니다.

※ 권춘자 님의 이야기가 담긴 책은 추후 성북마을아카이브에서 공개할 예정입니다.

관련 마을아카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