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도끼#233] 보문동 역사의 산증인 박춘화 이야기
작성자 김지훈
금도끼 <성북 사람들의 구술생애사> 시리즈, 이번 주 소개해 드릴 분은 1947년 보문동에서 태어나 현재까지 그곳에 생활 터전을 두고 계신 박춘화 님입니다. 박춘화 님은 보문동의 변화 모습과 인생 이야기를 덤덤하게 들려주셨습니다. 지면상 모든 이야기를 공개할 수 없기에 보문동 일대의 변화와 지역 이야기를 중심으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종암초등학교 졸업식(©박춘화)

종암초등학교 졸업식(©박춘화)

3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박춘화 님은 유복한 환경에서 큰 어려움 없이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종암초등학교를 다닐 때, 고려대학교 자연계캠퍼스의 과거 모습을 상세히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거기에 우리들이 부르는 ‘애기능’이라고 어떤 왕족의 능이 큰 게 있었어요. 양쪽으로 무밭, 배추밭 있었고, 여름에 비가 오면 맹꽁이가 많이 보입니다.”
인명원터 표지석(©성북문화원)

인명원터 표지석(©성북문화원)

애기능은 정조의 후궁인 원빈 홍씨의 무덤이었던 인명원지(仁明園址)를 달리 부르던 말이며, 1950년에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의 후궁 묘역으로 이장되었습니다. 지금도 고려대에는 인명원 터 표지석이 있으며, ‘고대애기능생활관’으로 이름 붙인 건물도 있어 과거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1960년 4월에 일어난 4.19혁명 목격담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4.19때는 중학교 2학년이었습니다. 담임선생님이 수업을 중간에 끊으시고, 아무것도 하지 말고 곧장 집으로 가라고 하셨죠.”
휘문중학교 졸업식(©박춘화)

휘문중학교 졸업식(©박춘화)

당시 박춘화 님은 자세한 사정까지는 잘 몰랐고 안국동 일대에서 많은 인파를 확인하고, 혜화동을 지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때 서울대병원 쪽에서 다친 학생들을 목격하기도 했습니다.

“다쳐서 피를 흘리는 걸 처음 본 거죠. 걸어서 성북경찰서 앞에 오니깐 큰 청소차가 길에 누워있는 거예요. 당시에는 그곳이 아스팔트가 아니었었거든요. 그냥 흙길이었어요.”

한편, 북악산에서 시작되어 돈암동·보문동을 지나 용두동에서 청계천과 합쳐지는 성북천 주변은 박춘화 님의 생활권이었습니다. 성북천은 예로부터 마전터로 이용되었으며, 물이 맑아 아이들의 놀이터로 사용되었습니다. 마전터란 옷감을 삶거나 빨고 표백하는 곳을 뜻하며, 조선 영조 때에 농토가 적고 시장이 멀어 살기에 불편했던 이 지역 백성들의 생계를 위해 도성 안 시장에서 파는 포목을 마전질, 즉 표백하는 권리를 주었습니다. 그로부터 성북동 양쪽 골짜기의 물이 합류되는 부근의 냇가를 마전터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단계적 복원 공사를 진행하여 대부분의 구간이 복원되어 깨끗한 산책로가 되었지만, 과거에는 지금과 다른 풍경이었습니다.
성북천의 봄(©박춘화)

성북천의 봄(©박춘화)

성북천의 봄(©박춘화)

성북천의 봄(©박춘화)

“어린 시절 성북천은 놀이터였어요. 당시에 하수처리가 안돼서 대부분의 생활용수가 흘러들었죠. 그러다보니 위생은 참 말씀드리기가 어려울 정도였었어요.”

서울의 판자촌은 광복 후 서울 이외의 지역으로부터 들어온 주민들의 주거를 다수 차지했습니다. 평지에다가 한적한 농촌의 풍경을 지닌 성북천 일대에 많은 판자촌이 늘어섰습니다. 박춘화 님은 당시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1976년 보문동 한옥 전경(©서울역사박물관)

1976년 보문동 한옥 전경(©서울역사박물관)

“하천변을 끼고 판자촌들이 들어섰었어요. 보문시장 쪽으로는 무허가 점포들이죠. 전부 상점 또는 무허가 건물이고, 염소도 기르고 했어요.”

박춘화 님은 50년대를 무질서했다고 기억하셨지만, 그래도 명절에는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성북천 일대 주민들의 일상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사실 50년대만 해도 참 무질서했었어요. (중략) 정월 보름 기억이 있어요. 그때 시장 사람들이 성북천 주변으로 나와서 술 먹고 윷놀이하고 그랬어요. 그러다가 취하면 싸움하고, 저는 어렸으니 그런 거 구경하는 거죠.”

1950-60년대를 지나 1970-80년대 보문동의 변화에 대한 생각들은 실제 생활과 맞닿아 있기에, 박춘화 님의 가치관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당시 서울의 일반적인 생활환경의 변화로 볼 수 있겠지만 개발에 대한 인식 차이는 존재합니다.
1990년 보문동 한옥 전경(©서울역사박물관)

1990년 보문동 한옥 전경(©서울역사박물관)

“80년대 지나면서는 가스(gas)를 사용하기 시작했고요. 그러면서 한옥의 구조는 이런 생활 변화와 맞지 않으면서 연립주택이 생겨나기 시작했죠. 앞날을 내다보는 계획 없이 무질서하게 개발이 되는 바람에 보기에는 좋지 않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네요.”

박춘화 님은 보문동 한옥에서 45년간 생활했기에 한옥에 대한 남다른 느낌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현재에도 보문동 일대를 걷다 보면, 높게 올리지 않은 단층에 기와가 눈에 띄고 서까래와 처마가 있어 옛 기와집 같은 모습의 가옥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책에서 보던 옛 기와집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형태의 주택을 ‘도시형 한옥’이라고 하는데, 보문동 일대의 도시형 한옥 주거지는 일제가 시작한 돈암지구 개발로서 대개 1930년대 말부터 1950-60년까지 형성되었습니다.

“건축물 한 울타리에서 자연이 함께 존재한다는 거죠. 주거 안에 자연과 인공이 한 곳에 이루어진 데는 없거든요. 온돌문화와 마루문화가 함께 있는 곳이죠. (중략) 부엌과 거주하는 방이 분리되어 있어서 밥을 나르는 불편이 있지만 장점이 많은 집입니다. 우리가 ‘한옥은 불편한 점이 많아’ 이렇게만 알고 있는데 우리 조상들의 지혜가 묻어있는 게 한옥이에요, 아무튼 저는 한옥이 참 좋습니다.”
최근 보문동 한옥의 모습(©성북문화원, 2023)

최근 보문동 한옥의 모습(©성북문화원, 2023)

최근 보문동 한옥의 모습(©성북문화원, 2023)

최근 보문동 한옥의 모습(©성북문화원, 2023)

사실 도시형 한옥은 지금까지 존속하고 있더라도, 처음 지어진 지 오랜 기간이 흘렀기에 내부, 외부 모두 많은 변화가 있습니다. 성북구는 2013년 관내에 위치한 도시형 한옥에 대한 전수조사를 진행하고, 한옥 보전을 위해 다양한 지원사업을 펼쳤습니다. 조사에서는 ‘한옥’이란 주요구조부가 목조구조로서 한식 기와를 사용한 건축물 중 전통미를 간직하고 있는 건축물과 그 부속시설로 정의하였으며, 이에 지붕, 서까래, 추녀, 기둥, 창호 등에 주목하여 성북구 일대의 한옥을 살펴본 바 있습니다.
한양대학교 고고학 발굴 현장(©박춘화)

한양대학교 고고학 발굴 현장(©박춘화)

직장의료보험조합 근무(©박춘화, 1981)

직장의료보험조합 근무(©박춘화, 1981)

주거 건축은 당대의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합니다. 박춘화 님의 구술을 통해서 보문동 도시형 한옥의 생활과 지역 분위기 등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박춘화 님은 위에서 소개해 드린 이야기 이외에도 보문동의 한옥과 전차에 대해서 본인이 직접 경험한 내용뿐만 아니라, 대학 생활과 졸업 후 다녔던 직장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특히 1960-70년대 유행했던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음악감상실인 ‘세시봉’을 실제로 드나들었던 일화는 인상 깊었습니다. 이후 마지막 직장이었던 직장의료보험조합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고, 취미로 시작한 사진촬영이 나중에는 공모전 수상으로 이어졌던 일도 들려주셨습니다. 아직 소개해 드리지 못한 박춘화 님의 인생이야기가 많이 남아있습니다. 보문동에서 나고 자란 박춘화 님의 삶의 기록들이 궁금하시다면 성북마을아카이브를 방문해주세요.

https://archive.sb.go.kr/isbcc/home/u/item/view/16392.do
낙산에서 바라본 성북동(©박춘화)

낙산에서 바라본 성북동(©박춘화)

흥천사(©박춘화)

흥천사(©박춘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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