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 사람들의 구술생애사> 시리즈, 이번 주 소개해 드릴 분은 일생동안 삼선동에 거주하며 삼선동의 변화를 지켜본 이재환 님입니다. 이재환 님은 IT 전문강사로 전성기를 맞이한 후, 현재는 펜 드로잉, 트럼펫 연주 등 다양한 예술 활동을 통해 제2의 인생을 살고 계십니다. 그가 살아온 이야기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956년 서울시 성북구 삼선동에서 태어난 이재환 님은 어릴 적 삼선동의 풍경에 대해 많은 것을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통행금지가 시행되던 시절, 통금을 알리기 위해 ‘딱딱이’를 치며 거리를 돌아다니던 사람, 개천가 근처에 자리 잡고 운영됐던 동도극장 등 삼선동에 관한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려줬습니다. 그러고는 성북천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했습니다.
“1960년대까지 삼선교를 지나는 성북천 물은 맑았습니다. 개천가에는 복숭아나무가 많았고, 냇가에서 빨래하고 친구들과 고기도 잡으며 놀았습니다. 제가 이곳에서 초등학교 4학년, 그러니까 1967년쯤까지 수영하고 놀았다면 이해되실까요?”
“그런데 60년대 말쯤부터 갑자기 물이 더러워졌어요. 삼선교 성북천을 복개하고 건물이 들어서면서부터였죠. 아마 1968년일 겁니다. 복개를 시작한 해가. 그리고 그 위에 아파트 건물을 지었습니다. 1층은 상가이고 2, 3, 4층은 시민아파트였습니다.”
동도극장 광고
성북천 (Ⓒ성북구청)
이재환 님은 학창 시절 역시 성북구에서 보냈습니다. 그는 교육 제도의 잦은 변화 속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는데요. 초등학교 6학년 때는 ‘중학교 무시험 추첨제도’, 일명 ‘뺑뺑이’가 도입되었고, 중학교 재학 중에는 해마다 학군이 조정되어 학교를 옮겨 다니기도 했습니다.
“경동고등학교 강당에 모여서 물레처럼 생긴 기계를 오른쪽으로 두 바퀴 돌리고 다시 왼쪽으로 한 바퀴를 샤아악 돌리면 은행알 같은 것이 나왔어요. 거기에 번호가 쓰여 있었는데 지금도 생생한 것이 제 번호가 22번이었어요.”
“우리 학년이 새로운 입시 바람을 자꾸 불어오는 거예요. 중학교 올라갈 때 입학시험이 폐지되고 추첨제로 바뀌면서 뺑뺑이를 돌렸고, 다시 중학교에서 고등학교 입학하는 시험이 무척 어려웠고, 또 고등학교에서 대학교 들어가는 바람이 엄청 컸던 세대였어요.”
삼선중 교복 (Ⓒ이재환)
이후 아주대학교에서 전자공학과를 전공한 이재환 님은 유성전자공업고등학교(현 서울디지텍고등학교)에서 짧은 교사 생활을 보낸 뒤 1983년 가을, 학원강사의 길로 들어섭니다. 그는 서울정보처리학원에서 ‘정보처리기사’ 과목을 가르치며 큰 인기를 얻었고, 1990년 학원이 문을 닫은 뒤에는 노량진 학원가에서 전산직과 컴퓨터공학 강의를 이어가며 스타강사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제가 노량진 학원가에서 열심히 노력한 결과 어느 날부터 컴퓨터 분야의 스타강사, 명강사로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밤하늘의 수많은 별 중에 가장 반짝이는 강사의 한 사람으로 뜨게 된 거죠. 그때부터 저를 찾는 곳이 많아지고 강사 활동도 더욱 바빠졌습니다.”
이재환 님은 40여 년간 강의를 진행해 오며 약 20권의 책을 집필했습니다. 『C 월리를 찾아라』를 비롯해 자격증과 공무원 시험 대비를 위한 다양한 교재를 발간하며 수강생들의 시험 합격을 도왔습니다.
“학원가에 오래 몸담고 있다 보니 이렇게 책도 출판하게 되고, 또 강의를 하자면 여러 가지 교재도 필요하잖아요. 그래서 한두 권씩 책을 쓰다가 꽤 많아졌습니다. 대표 저서인 『C 월리를 찾아라』를 비롯해서 『정보처리기능사 2급』, 『재미있는 알고리즘』, 『정보처리기사 실기 C언어』, 그리고 공무원수험서인 『컴퓨터 일반』과 『프로그래밍 언어론』 등 여러 권이 있습니다.”
이재환이 집필한 교재들 (성북문화원 편집)
이재환 님의 대표 저서 『C 월리를 찾아라』 표지에 등장하는 ‘월리’는 그의 호(號)에서 따온 말입니다. ‘월리(越理)’란 ‘어떤 이치를 뛰어넘는다.’는 의미로, 이 단어에는 그가 지향하는 사고방식이 담겨 있습니다.
“제가 호를 ‘월리(越理)’라고 지었어요. 서울정보처리학원 강사 시절 후반, 그러니까 거의 1980년대 후반에 만들었어요. 제가 직접 만든 조어인데, 뛰어넘을 월(越) 자에 이치(理致) 리(理) 자입니다. 글자 그대로 ‘어떤 이치를 뛰어넘는다.’는 뜻이에요. 세상의 모든 이치를 뛰어넘어 보자, 창의적인 것, 그리고 없는 것을 찾아내 보자는 것이죠. 한 마디로 ‘월리를 찾아라’는 저의 창의적인 개념이에요.”
세월이 흐르며 그는 또 다른 큰 변화를 맞이합니다. ‘자신의 청력 문제 해결’과 ‘삼선동의 재개발’이 바로 그 변화였죠. 이재환 님은 이에 대해 각각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보청기를 끼고 새로운 세상을 찾았다는 게 정말 신기하고 놀라워요. 지금부터는 무엇이든 많이 듣고 많이 보고, 그래서 그동안 못한 웬만한 교육은 다 받으려고 노력 해요.”
“시대의 변화에 따라 주차장도 새로 짓고 동네를 재개발하는 것도 좋죠. 하지만 그나마 남아 있던 옛날의 소중한 흔적들이 자꾸만 사라져가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고 더 가슴이 아픕니다.”
삼선동 재개발 현장 (Ⓒ남명희)
특히 삼선동의 한옥마을 소멸에 대해 아쉬움을 드러내며, 자신이 꿈꾸던 삼선동 탐방길을 이야기했습니다.
“제가 젊었을 때부터 꿈꾸어오던 삼선동 꿈의 한옥 탐방길이 있어요. 제가 그렸던 삼선동 탐방코스는 낙산에서 시작하는 거예요. 낙산 정상에서 멀리 펼쳐진 북한산의 아름다운 풍경과 삼선동 동네를 눈으로 한 바퀴 휘둘러 보는 거예요. 그러고 나서 한양도성을 끼고 걷다 그 아래의 정각사와 장수마을로 내려와서는 수백 년 세월의 역사가 쌓인 삼선동 한옥마을 가운데를 느리게 걷는 거죠. 그러다가 삼군부 총무당을 지나면서는 조선 말기에 힘없는 약소국가였기에 당해야만 했던 뼈아픈 우리의 과거도 되돌아보는 거지요. 그렇게 마을을 쭉 따라서 내려가면 성북천이죠.”
삼선동 탐방길 지도 (Ⓒ이재환)
삼선동 한옥 (Ⓒ성북구청)
오늘날의 이재환 님은 ‘독락당(獨樂堂)’이라 이름을 붙인 자신의 방처럼 즐거운 삶을 즐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밴드 활동과 더불어 트럼펫 연주, 서각(書刻), 목(木) 조각, 캘리그라피, 펜 드로잉 등 다양한 예술 활동을 통해 말이죠.
서재에 걸려 있는 독락당(獨樂堂) 서각 (Ⓒ이재환)
이재환의 서각 작품, ‘반야심경’ (Ⓒ성북문화원)
이처럼 많은 활동을 즐기며 살아가고 있는 이재환 님에게는 두 가지 목표가 있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200살까지 사는 것이며, 두 번째는 교육장을 설립하는 것입니다. 특히 그는 트럼펫 교육을 과학과 접목하여 아이들을 교육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더해 폐교를 활용한 교육장을 설립해 보다 효율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할 것이라는 포부를 밝혔습니다.
“나중에 제가 폐교를 구하면 교육장 이름을 삼락서원(參樂書院)이라고 할 겁니다. 세 가지의 즐거움이 있는 서원이란 뜻이죠. 그 세 가지 즐거움이란 먹는 것, 듣는 것, 보는 것, 이 삼락(參樂)에 맞춰 각각 세 개의 방을 두고서 하나는 귀가 즐거운 이락당(耳樂堂), 그다음 은 입이 즐거운 구락당(口樂堂), 또 그다음은 눈이 즐거운 안락당(眼樂堂)이라고 할 겁니다. 그러고 나서 이들 세 가지 즐거움의 교육을 할 거예요. 이렇게 제 인생 60 이후 후생(後生)의 콘셉트는 교육입니다.”
서각 작품, ‘삼락서원’ (Ⓒ성북문화원)
삼선동 토박이 이재환 님의 이야기, 어떠셨나요? 그가 살아온 열정적인 삶이 독자님들께 그대로 전해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그의 삶 일부만을 소개했을 뿐입니다. 더 많은 이야기가 궁금하시다면 구술생애사 시리즈 <삼선동 토박이 이재환의 삶과 꿈>에서 확인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