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도끼
금요일마다 돌아오는 성북의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 [금도끼 #218] 이름으로 남은 다리들
-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죠. 하지만 죽어서 이름을 남기는 건 사람만이 아닙니다. 이제는 남아있지 않지만 이름으로 우리 옆에 남아있는 것들이 성북구에도 있습니다. 성북천은 성북동과 안암동을 지나 청계천으로 흐르는 하천입니다. 특히 북악산에서 시작해 성북동을 지나는 상류 구간은 복개되기 전까지 오랜 시간 성북동 사람들의 생활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1970년~1980년대에 성북천이 복개되며 아이들이 헤엄치던 모습, 아낙네들이 빨래하던 모습과 성북천 주변의 복숭아꽃들은 이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과거의 풍경과 함께 성북천 위를 가로지르는 다리들도 사라졌지만, 그 이름들은 우리 주위에 남아있습니다. 오늘의 금도끼에서는 이름을 남기고 사라진 다리들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함께 살펴보면서 과거를 상상해 보는 건 어떨까요?
이 달의 마을아카이브
이 달에 기록된 성북 마을이야기를 만나봅니다.
- 안석응
- 돈암동에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인 유여대 등과 함께 의주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했다. 3월 1일 오후 2시 읍내 교회에 8백여 명의 교인을 중심으로 한 시위군중이 모이자, 대형 태극기 2개를 교회에 세워놓고 종이로 만든 백여 개의 작은 태극기를 군중에게 나누어주었다. 유여대의 독립선언서 낭독이 끝나자, 시위군중과 함께 만세삼창을 외치고 행진을 했다. 그는 일제의 검속 때 체포되어 보안법 위반 혐의로 옥고를 치렀다. 그는 출옥 후 의주에서 상해임시정부의 군자금모집을 위해 활동하였고, 1928년부터 1929년까지 신간회 진천(鎭川)지부장으로 활약하며 독립사상 고취에 노력하였다. 정부에서는 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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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북회화연구소
- 성북구 보문로39길 34(동소문동3가 65-2)에 위치했던 연구소이다. 태화장모텔 자리이다. 성북회화연구소는 서양화가인 이쾌대(1913-1965)에 의해 해방 이후 1947년에 창립되었으나, 실제로는 이미 전해인 1946년 봄부터 학생들을 모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연구소는 위치는 1946년 돈암동에 있다가, 1948년에는 명륜동으로 이사하였다. 연구소는 1949년 말까지 지속되다가 해체되었으며, 1950년에는 남산시립미술연구소로 이어가게 되었다. 성북회화연구소는 해방공간에 설립된 미술연구소 중 가장 크고 활발하게 교육이 이루어졌으며 다수의 작가를 배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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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삼선초등학교
- 성북구 보문로 29길 106(삼선 3가 30-4)에 위치한 공립초등학교이다. 1949년 9월 1일 개교하였다. 1950년 2월 신축 교사를 준공하였고, 1966년과 1967년에는 별관을 준공하였다. 1976년 병설유치원을 개원하였다. 1983년 본관 목조건물을 철거하고 이듬해 본관 교사를 개축하고 동관을 신축하였다. 2017년 장애인식개선 백일장대회 보건복지부장관 표창을 받았고, 2018년 12월 청렴 우수학교 교육장 표창을 받았다. 교훈은 ‘건강한 몸으로 바르게 자라며 슬기롭게 배우자’이다. 2019년 2월 제66회 졸업식을 진행하고 누적졸업생 28,121명을 배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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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광에 고인 그리움
- 권혁웅 시인의 시집 『마징가 계보학』(창비, 2005)에 수록되었다. 1967년에 태어나 성북구 삼선동에서 성장기를 보낸 그는 재개발로 사라져가는 삼선동 산동네의 흔적과 기억을 시에 담았다. 구불구불 이어진 골목길을 인체의 내장에 비유한 이 시는 가난하고 남루했던 과거 풍경에 재치와 해학을 더하였다. 작가는 지난날 겪었던 아픔과 상처를 극복하거나 회피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그는 어린 시절을 함께한 산동네에서의 삶을 자신의 근본이라 여기고 시를 통해 보통 사람들의 '소문자 역사'를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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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성북
이야깃거리와 기록을 주제별로 묶어 관심 있는 주제를 한눈에 둘러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