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도끼
금요일마다 돌아오는 성북의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 [금도끼 #201] 나무로 조각된 탱화, 경국사 목각탱
- 성북구에는 미타사, 보문사, 흥천사, 개운사, 봉국사, 경국사와 같은 많은 전통사찰이 있습니다. 그와 더불어 다양한 불교 유물이 성북구 안에 위치해 있기도 하죠. 여러분은 불교와 관련된 유물로 무엇이 가장 먼저 생각나시나요? 탑이나 불상, 경전에서부터 비롯하여 여러 종류가 있지만 탱화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 달의 마을아카이브
이 달에 기록된 성북 마을이야기를 만나봅니다.
- 미타사 지장시왕도
- 미타사 대웅전에 봉안되어있는 불화이다. 이 지장시왕도는 시주자인 계유생 이씨 부인이 아버지 전주 이씨, 어머니 문의 이씨, 남편인 정축생 남씨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발원한 것이다. 신중도와 양식·화풍이 동일한 것으로 보아 신중도와 같은 해인 1873년 4월에 삼각산 미타사에서 함께 제작·봉안된 것으로 추정된다. 채색은 붉은색과 녹색이 주조색으로 사용되었으며, 전체적으로 필선이 매우 섬세하며 얼굴에 음영을 표현하여 입체감을 주고 있다. 서울·경기지역 지장시왕도의 형식을 따르고 있으며, 섬세한 필선과 탄탄한 구성 등 경선당 응석의 화풍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2014년 7월 3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59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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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래현
- 동양화가이다. 일본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초기에는 사실묘사를 기초로 한 화조, 인물, 산수 등을 그렸으나 1950년대부터 동양화의 전통적 관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조형실험을 전개하였다. 운보 김기창과 결혼한 후 1954년 성북동 55-1번지(현 운우미술관)에 집을 마련하였다. 1962년에는 성북동 집에 30여 평인 화실을 짓고 작품 활동에 전념하며, 10여 차례의 부부전과 개인전을 가졌다. 1966~1967년 성신여자사범대학(현 성신여자대학교)의 교수를 역임하였다. 19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중반까지 판화 수업 등으로 뉴욕 등에서도 활동하였다. 1976년 성북동 자택에서 타계하였다. 작품으로 「부엉이」(1953), 「노점」(1956), 「작품 19」(1965)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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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남옥
- 영화감독이다. 광복 후 서울로 올라와 조선영화사 광희동 촬영소에 들어가 편집을 배웠다. 1940년대 돈암동에 거주하며 주변에 살던 영화인들과 교류했고, 1953년 극작가 이보라와 결혼하고 이듬해 남편이 쓴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미망인』을 촬영했다. 제작비 부족 등으로 어렵게 완성하여 개봉하였으나 흥행을 거두진 못했다. 1960년 도쿄에서 열린 제7회 영화제에 참가했다. 1997년 제1회 서울 여성영화제가 『미망인』을 상영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의 존재가 알려졌고, 2008년 여성 영화인에게 수여하는 '박남옥상'이 제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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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9 혁명
- 1960년 4월 19일 학생들의 시위로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확산된 반정부 민주주의 혁명이다. 성북구 지역은 혁명의 발화점이자 경찰 발포에 의한 희생자가 나온 곳이었다. 4.19혁명은 이승만정권의 3.15부정선거와 독재에 저항하는 운동이었다. 직접적인 계기는 4월 초 마산 앞바다에서 김주열이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시신으로 떠오른 것과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시위를 벌이던 중 경찰의 비호를 받는 반공청년단이 습격하여 많은 학생이 다친 사건이었다. 4월 19일 3만 명의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경찰의 발포로 당일 서울에서만 130명이 죽고 1,00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당시 삼선동에 있는 한성여자중학교 2학년 진영숙(14세)도 불의를 참지 못하고 나갔다가 죽은 어린 희생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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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아리
- 1963년 4월에 쓴 것으로 김환기의 항아리 사랑이 드러나는 글이다. 그는 한때 집안이 온통 항아리로 가득 찰 정도로 청춘기를 항아리열(熱)에 바쳤다고 말한다. 행여 항아리가 혹시 망가질까 노심초사하던 그가 이 취미를 그만 둔 계기는 피난살이를 마치고 올라온 때라 한다. 그는 성북동 집 뜰 속 수많은 항아리 파편들을 보고 자신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재난으로 항아리들이 없어진 것에 대해 적잖은 충격을 받은 듯하다. 하지만 그는 과거의 행동을 후회하지 않으며 아직도 항아리를 조형미의 극치로 생각한다. 김환기는 그의 미에 대한 개안(開眼)은 우리 항아리에서 비롯되었다고 고백하며 항아리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며 글을 마무리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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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성북
이야깃거리와 기록을 주제별로 묶어 관심 있는 주제를 한눈에 둘러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