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도끼
금요일마다 돌아오는 성북의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 [금도끼 #199] 동시대 예술가들을 발굴하는 성북동의 전시 공간
- 성북구는 예전부터 수많은 문화 예술인들과 인연 맺은 공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동시대 작가들의 활발한 예술 활동을 지원하는 공간으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따뜻한 4월을 맞이해 한성대입구역부터 근처 걸어 다니기 좋은, 동시대 예술가들의 작품을 볼 수 있는 전시 공간 세 곳을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1. 00의 00 (땡땡의 땡땡)
이 달의 마을아카이브
이 달에 기록된 성북 마을이야기를 만나봅니다.
- 김교신
- 정릉동에서 거주한 종교인, 독립운동가, 교육자이다. 일본 유학 당시 무교회운동을 전개하던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의 영향을 받아 송두용, 유석동, 양인성, 정상훈, 함석헌 등과 함께 조선성서연구회를 조직하였다. 1927년 귀국 후 이들과 함께 『성서조선』을 창간하였고, 1930년 5월부터는 주필 겸 발행인으로 단독 간행하였다. 1936년 정릉으로 이사한 그는 『성서조선』의 간행을 이어나가며 무교회운동을 전개하였다. 1942년 『성서조선』의 머리말인 「조와」에 민족 해방을 염원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1년간 옥고를 치렀고 『성서조선』은 폐간되었다. 이후 1944년 7월 흥남질소비료공장에 입사하여 일하던 중이던 1945년 4월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2010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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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진규
- 조각가이다. 1943년 춘천공립중학교 졸업 후 미술연구소에 들어가지만 곧 비행기 부품공장에 징용된다. 다음 해 공장을 도망쳐 귀국하였다. 1947년 성북회화연구소에서 회화 수업을 받았다. 1949년 9월, 무사시노미술학교(武藏野美術學校)에 입학하여 부르델의 계보를 잇는 시미즈 다카시를 사사하였다. 1959년 귀국 후 성북구 동선동에 작업실을 짓고 1973년 생을 마감할 때까지 작품 활동을 하였다. 삼국시대 토우에 뿌리를 둔 테라코타와 건칠(乾漆) 기법을 새롭게 연구·발굴한 그는 한국적 리얼리즘 조각의 세계를 정립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홍익대 조각과와 서울대 건축과, 수도여자사범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주요작품으로는 「자각상」, 「지원의 얼굴」, 「애자」, 「땋은 머리」 등 테라코타 흉상 작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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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동엽
- 시인이다. 195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석림이라는 필명으로 쓴 장시(長詩)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로 등단하였다. 대학 졸업 후 돈암동에서 자취를 하면서 헌책방을 차려 생계를 꾸린다. 인병선과 결혼 후 건강악화를 이유로 낙향했다가 1960년 서울로 올라와 다시 돈암동에 집을 마련하였다. 2년 후 동선동 5가 45번지에 작은 한옥으로 이사하였다. 4.19혁명의 정신을 되새긴 「껍데기는 가라」(1967)와 동학농민운동을 주제로 한 장편 서사시 「금강」(1967) 등을 통해 한민족 고유의 역사인식과 민족애, 날카로운 현실인식과 민중의 저항의식을 시로 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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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8 고대학생 의거
- 1960년 4월 18일 고려대학생들이 자유당의 독재에 항거하면서 벌인 평화시위이다.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에서 온갖 부당한 일이 자행되었고, 자유당과 경찰의 반민주적이고 억압적인 행위를 규탄하는 시위가 산발적으로 진행되었다. 주로 지방도시의 고등학생들이 시위를 전개하던 가운데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대학생으로서는 최초로 서울에서 시위를 감행하였다. 18일 오후 1시 3천여 명의 고려대학생들이 교문을 나섰고, 국회의사당 앞에 도달하여 농성하였다. 시위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가던 고려대학생들은 정치깡패들의 습격을 받아 10여 명이 중상을 입었다. 하지만 김주열 열사의 죽음과 고려대학생들의 피습사건은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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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성북
이야깃거리와 기록을 주제별로 묶어 관심 있는 주제를 한눈에 둘러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