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도끼
금요일마다 돌아오는 성북의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 [금도끼 #226] 상실의 시대를 노래했네
- 1990년대를 한국 대중음악의 황금기라고 하는 평자들이 많습니다. 그전까지 트로트가 주류였던 대중음악계에는 언더그라운드의 포크, 발라드, 댄스, 블루스, 민중가요, 록, 힙합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들이 여러 매체를 통해 전파되며 대중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형식뿐 아니라 노랫말로 표현하는 음악의 내용도 풍성해졌습니다. 남녀의 사랑과 이별을 노래한 것이 대다수이긴 했지만 색다른 주제의 노래들이 등장해서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이를테면 ‘그리움’ 같은 것입니다. 물론 떠나간 연인이나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한 것이 가장 많지만 개중에는 이제는 갈 수 없는 유년 시절의 장소와 시간에 대한 그리움의 정서를 담은 노래들도 있었습니다. 왜 1990년대에 그런 노래들이 등장했던 것일까요? 그 시절 우리 도시의 모습이 급격하게 변하다 보니 상실감이 컸던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예전의 집과 골목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과거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는 물질적 조건들이 사라지고 만 것이죠. 이주와 이사가 예사였던 것도 한 이유가 될 것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줄곧 한 집에서 자란 이들도 거의 없었을 테니까요. 1990년대 베스트셀러 소설 중 하나가 『상실의 시대』였던 것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즈음 발표된 노래 중에는 1970년대 성북구의 풍경을 떠올리게 하는 노래들이 더러 있습니다. 주로 1960년대에 태어나 유년기를 성북 지역에서 보낸 뮤지션들의 노래입니다. 세 곡을 골라봤습니다. 먼저 소개할 노래는 그룹 어떤 날의 멤버로 유명한 조동익(1960~ )의 곡 〈노란대문 (정릉배밭골’70)〉입니다. 1994년 발표한 그의 정규 솔로 음반 《동경(憧憬)》에 실은 노래입니다. 정릉3동 배밭골에서 보냈던 어린 시절 집 안팎의 풍경과 가족들의 모습을 시적인 가사에 담았습니다. 노란대문 (정릉배밭골’70) 작사·작곡·노래 : 조동익 맑은 개울을 거슬러 오르다 조그만 다리를 건너 동산을 오를 때면 저만치 소를 앞세우고 땀흘려 밭을 일구시는 칠성이네 엄마 집에 도착하면 숨이 턱까지 차올라 노란 대문 생각만 해도 내 입가에 웃음 짓게 하는 그 문을 두드리면 제일 먼저 날 반기던 강아지 마당엔 커다란 버찌나무 그 아래 하얀 안개꽃 해질 무렵 분꽃이 활짝 피면 저녁 준비에 바쁘신 우리 할머니 저만치 담 밑엔 누군가 살고 있을 것 같은 깊고 차가운 우물 두레박 하나가득 물을 담아 올리면 그 속엔 파란 하늘 난 행복했었지 하얗게 춤추던 안개꽃 난 사랑했었지 그곳을 떠다니던 먼지까지도 노란 대문 생각만 해도 내 입가에 웃음 짓게 하는 그 문을 두드리면...
이 달의 마을아카이브
이 달에 기록된 성북 마을이야기를 만나봅니다.
- 영성단
- 성북구 선잠로 9-6(성북동 75-12)에 있었던 제단이다. 영성단은 새해 농사가 잘되도록 곡식을 맡은 별과 농사를 맡은 별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만든 제단으로 성단(星壇)이라고도 불렀으며, 기우제를 지낼 때는 용단(龍壇)이라고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제사를 지내온 기록이 있다. 조선에서도 고려의 유제(遺制)에 따라 남교(현 한남동)에 설치하고 입추 후 진일(辰日)을 택하여 제사를 지냈다. 이후 1865년(고종 2)에 혜화문 밖 선잠단의 북쪽에 다시 설치했는데, 이때에는 매년 정월 상인(上寅)에 제향을 지내는 것을 규례로 하였다. 1897년 각 분야의 별들에게 제사지내는 의리를 폐지하면서 영성단도 폐지되었다. 현재는 작은형제회수도원이 자리하고 있는데, 마당에 영성단 표석이 세워져 있다.
- 이야기 더보기
- 김동수
- 돈암동(현 삼선교로 76)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1923년 부친을 따라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소학교와 중학교를 마치고, 중국군관학교 뤄양분교에 입학하여 훈련을 받았다. 1937년 임시정부에 합류한 뒤 ‘한국청년전지공작대’를 조직하여 부대장이 되었으며, 1941년 공작대원들이 중심이 되어 광복군 제5지대를 조직하였다. 그는 제5지대에서 시안(西安)을 중심으로 장병을 훈련시키는 동시에 선전·정보활동을 하였다. 1945년 4월 광복군 총사령부 경위대에서 제3대 대장을 역임하였다. 광복 후 1946년에는 임시정부 주화대표단 동북특파원으로 중국 당국과 교섭하여 교포 귀국의 편의를 도모하다가 1948년 6월에 귀국하였다. 정부에서는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이야기 더보기
- 한성대학교
- 성북구 삼선교로 16길 116(삼선동2가 389)에 위치한 교육 시설이다. 한성대학교는 1972년 한성여자대학으로 출발하였다. 1945년 10월 김의형(金義衡)이 돈암동에 있는 기존의 경성여자기예학교를 인수하여 다음 해 한성여학교로 교육사업을 시작하였다. 1953년에는 한성학원 설립인가를 받고 1964년 학교법인으로 개편하였다. 1978년 1월에는 교명을 한성여자대학에서 한성대학으로 변경함과 동시에 주·야간 남녀공학으로 전환함으로써 학교 발전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1986년 7월에는 현재의 위치로 교사를 확장·이전하여 대학의 발전은 본궤도에 들어서게 되었다.
- 이야기 더보기
- 선잠단지 한옥밀집지역
- 성북구 성북동 62번지 일대의 한옥밀집지역으로 지정된 거주지역이다. 2014년 12월 26일 지정되었는데 이는 사대문 밖으로 확대 지정한 최초의 사례이다. 면적은 5,868㎡이고, 한옥은 20동, 비한옥은 24동으로 한옥이 45.4%를 차지하고 있다. 선잠단지의 한옥 20동은 가 등급 2동, 나 등급 2동, 다 등급 16동으로 구분된다. 등급은 한옥의 외부에서 판단할 수 있는 보존상태의 정도를 보고 구분한 것으로 한옥의 상부(옥개부)와 하부(벽부)구조로 구분하여 판단한 것이다.
- 이야기 더보기
주제로 보는 성북
이야깃거리와 기록을 주제별로 묶어 관심 있는 주제를 한눈에 둘러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