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도끼
금요일마다 돌아오는 성북의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 [금도끼 #199] 동시대 예술가들을 발굴하는 성북동의 전시 공간
- 성북구는 예전부터 수많은 문화 예술인들과 인연 맺은 공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동시대 작가들의 활발한 예술 활동을 지원하는 공간으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따뜻한 4월을 맞이해 한성대입구역부터 근처 걸어 다니기 좋은, 동시대 예술가들의 작품을 볼 수 있는 전시 공간 세 곳을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1. 00의 00 (땡땡의 땡땡)
이 달의 마을아카이브
이 달에 기록된 성북 마을이야기를 만나봅니다.
- 박남옥
- 영화감독이다. 광복 후 서울로 올라와 조선영화사 광희동 촬영소에 들어가 편집을 배웠다. 1940년대 돈암동에 거주하며 주변에 살던 영화인들과 교류했고, 1953년 극작가 이보라와 결혼하고 이듬해 남편이 쓴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미망인』을 촬영했다. 제작비 부족 등으로 어렵게 완성하여 개봉하였으나 흥행을 거두진 못했다. 1960년 도쿄에서 열린 제7회 영화제에 참가했다. 1997년 제1회 서울 여성영화제가 『미망인』을 상영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의 존재가 알려졌고, 2008년 여성 영화인에게 수여하는 '박남옥상'이 제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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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재삼
- 시인이다. 도쿄에서 출생하여 1936년 어머니의 고향인 삼천포로 이주하여 성장하였다. 1953년 시 「강물에서」가 모윤숙의 추천을 받았고, 1955년 『현대문학』에서 서정주와 유치환의 추천을 받아 본격적인 문단생활을 시작했다. 첫 시집 『춘향이 마음』(1962) 이후 20여 권에 이르는 시집과 시선집을 간행하며 왕성한 활동을 했다. 연이은 투병 생활로 인해 삶과 죽음에 대한 연민과 애상의 주제가 반복되고, 달관적·허무주의적인 색채가 작품에 드러난다. 1967년 고혈압으로 쓰러진 후에는 정릉에서 건강을 회복하면서 「정릉 살면서」라는 작품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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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성우
- 성북동에서 활동했던 화가이다. 호는 우송(雨松)으로 간송 전형필의 장남이다. 1934년 서울에서 출생하였고, 어릴 때부터 보화각(현 간송미술관)을 찾는 예술가들을 통해 그림을 보는 안목과 지식을 익히고 교육받았다. 서울대학교 미대에 입학했다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현대미술을 접하고 추상화의 세계에 빠져들어, 해방 후 1세대 추상화가가 되었다. 부친의 사망을 계기로 귀국하여 1966년 전형필의 지인들과 함께 한국민족미술연구소를 설립하고 보화각을 간송미술관으로 새롭게 개편시켰다. 서울대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의 교수를 역임하고, 보성고등학교 교장을 맡기도 하였다. 퇴직 후에는 미국 유학 시절부터 주제로 삼았던 「만다라」를 이어 「청화만다라」 연작을 발표하였고, 국내외에서 많은 개인전과 초대전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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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9 혁명
- 1960년 4월 19일 학생들의 시위로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확산된 반정부 민주주의 혁명이다. 성북구 지역은 혁명의 발화점이자 경찰 발포에 의한 희생자가 나온 곳이었다. 4.19혁명은 이승만정권의 3.15부정선거와 독재에 저항하는 운동이었다. 직접적인 계기는 4월 초 마산 앞바다에서 김주열이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시신으로 떠오른 것과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시위를 벌이던 중 경찰의 비호를 받는 반공청년단이 습격하여 많은 학생이 다친 사건이었다. 4월 19일 3만 명의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경찰의 발포로 당일 서울에서만 130명이 죽고 1,00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당시 삼선동에 있는 한성여자중학교 2학년 진영숙(14세)도 불의를 참지 못하고 나갔다가 죽은 어린 희생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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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성북
이야깃거리와 기록을 주제별로 묶어 관심 있는 주제를 한눈에 둘러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