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도끼
금요일마다 돌아오는 성북의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 [금도끼 #219] “여성국극,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뛰어”, 여성국극과 임춘앵
- 여러분은 ‘여성국극’에 대해 들어보셨나요? 여성국극이란 전통연희자들이 무대 위에서 역할을 나누어 연기, 춤, 소리를 펼치는 공연인 창극의 일종으로 모든 배역을 여성이 담당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성국극은 1950년대 선풍적 인기를 끌었지만, 짧은 전성기 이후 급격한 쇠퇴기 맞이하면서 우리 기억 속에서 점점 멀어져 갔습니다. 그런데 요즘 웹툰 <정년이>가 창극, 드라마 등 다양한 콘텐츠로 변주되면서 이야기의 주요 소재인 여성국극에 대한 관심이 다시 커지고 있습니다.
이 달의 마을아카이브
이 달에 기록된 성북 마을이야기를 만나봅니다.
- 유봉영
- 장위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평안북도 철산 출신으로 1919년 철산의 명흥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3.1운동에 앞장섰다. 경찰과 충돌한 후 2,000원을 가지고 상해로 망명했다. 임시정부 재무부에서 일하면서 재정지원을 하다가 여러 차례 수감되어 옥고를 치렀다. 1936년 조선일보 기자로 입사하여 1940년 폐간될 때까지 재직하였고, 광복 이후 조선일보가 복간한 뒤 재입사하여 1971년 퇴사했다. 학교법인 숙명학원 이사장과 제8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정부에서는 1977년에 대통령표창을,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독립유공자 공훈록에는 주소가 성북(城北) 장위(長位) 219(현 장위동 219-3)로 표기되어 있으나, 그의 별세 기사를 통해 자택 주소는 장위동 219-403번지인 것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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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이상
- 음악가이다. 14살 때부터 독학으로 작곡을 시작하였고, 1935년 일본 오사카음악대학에서 전문적인 교육을 받는다. 해방 후 1952년까지 통영과 부산에서 음악교사 생활을 하다 서울로 올라 와 성북동128-13에 거주하였다. 이때 길 건너편에 살던 조지훈이 작사를 하고 윤이상이 곡을 붙여 노래를 짓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렇게 나온 곡 중 하나가 바로 현 고려대학교 교가다. 1967년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국제적 항의와 독일정부의 도움으로 석방되었다. 1971년 독일로 귀화하고 이듬해 뮌헨올림픽 개막축하 오페라에서 『심청』을 공연하였다. 그의 작품은 동양의 정신이 충만한 독특한 색채의 선율로 현대음악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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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춘앵
- 여성국극인이다. 전라남도 함평군에서 태어나 1936년 광주 권번에 들어가 이매방, 박모란 등과 함께 소리와 춤을 배웠다. 1939년 상경하여 1944년 조선창극단에 입단한다. 1948년 서울에서 박녹주·김소희 등과 여성국악동호회를 결성하고, 여성 창극인만으로 춘향전을 각색한 <옥중화>라는 공연을 올렸는데 이때 임춘앵이 이몽룡역으로 발탁되면서 여성국극 최초의 남장연기자가 된다. 이후 <햇님과 달님>이 크게 성공하면서 여성국극에 대명사가 되었다. 1960년대 이후 여성국극이 쇠퇴하면서 은거하였다가 1968년 조카 김진진의 도움으로 장위동에 ‘임춘앵 무용 연구소’를 열어 여성국극의 명맥을 잇기 위해 힘썼다. 1975년 뇌출혈로 인해 장위동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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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대학교
- 성북구 정릉로 77(정릉동 861-1)에 위치한 학교이다. 국민대학교는 독립운동을 하다 해방 후 귀국한 신익희가 민족의식 계몽과 인재양성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대학 설립을 추진하여 창설된 해방 후 최초의 사립대학이다. 1946년 인가를 받아 보인상업학교 건물에서 국민대학관(야간)으로 개교하였다. 1948년 종로구 창성동으로 이전한 후 야간부를 폐지하고 주간부로 전환하였다. 1959년에는 김성곤이 재단법인 국민학원을 인수하여 새롭게 정비하고 교사도 신축하였다. 1964년에 법인이 학교법인 국민학원으로 변경되었고, 1971년에는 정릉동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으며, 1981년에 종합대학으로 승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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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성북
이야깃거리와 기록을 주제별로 묶어 관심 있는 주제를 한눈에 둘러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