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도끼
금요일마다 돌아오는 성북의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 [금도끼 #222] 만남의 장, 성북구의 축제
- 가을이 되면 성북구 곳곳에서 축제가 열립니다. 이 중에는 동축제도 있습니다. 2020년에는 이런 동축제를 모아서 금도끼 #33 10월 동축제라는 글이 올라오기도 했습니다(https://archive.sb.go.kr/isbcc/home/u/gold/view/33.do?page=32). 글에도 있지만 삼선동에는 <선녀 축제>, 정릉동에는 <버들잎 축제>, 종암동에는 <북바위 청포도 문화제>, 장위동에는 <부마 축제>, 석관동에는 <의릉문화 축제>가 열립니다.
이 달의 마을아카이브
이 달에 기록된 성북 마을이야기를 만나봅니다.
- 정재용
- 장위동에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1886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들이 독립선언 장소를 인사동 태화관으로 변경하며 예정된 시간에 등장하지 않아 파고다공원에서의 독립선언식이 혼란에 빠졌는데, 이때 경신중학교 졸업생인 그가 팔각정 단상으로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같은 해 8월에 체포된 정재용은 평양 감옥에서 2년 6개월 간 옥고를 치뤘다. 출옥 후에는 구국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의용단 활동에 참여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77년 12월 31일 성북구 장위동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하였다. 자택의 주소는 동아일보에서는 장위동 219-100번지, 경향신문에서는 장위동 219-195번지로 보도했다. 정부에서는 1977년에 건국포장,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이야기 더보기
- 주요섭
- 소설가이자 영문학자이다. 1921년 매일신보에 단편 「깨어진 항아리」를 발표하면서 등단하였다. 1935년 『조광』 창간호에 발표한 「사랑손님과 어머니」로 대중의 인기를 받으며 작가로서 명성을 높였다. 1954년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창립동인으로 활동하였고, 『코리아 타임즈』 주필과 한국문학번역협회 회장 등을 지내며 영문학자로 한국문학의 번역에 힘썼다. 1943년에는 일본의 대륙 침략에 협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중국에서 추방되어 귀국하였다. 이때 돈암동 254-1번지에 자리를 잡았는데 1953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길」에선 한국전쟁 전후의 돈암동 모습을 그리기도 하였다.
- 이야기 더보기
- 이인성
- 1912년 대구에서 출생한 서양화가이다. 1929년 제8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처음 입선한 후, 수채화와 유화 작품으로 입선과 특선을 거듭하였다. 1931년 일본으로 건너가 1935년까지 다이헤이요미술학교에서 유학하였다. 1934년 9월 7일 동아일보의 실린 이인성의 글 '향토를 찾아서'를 보면 일본에서 학교를 다니던 그가 여름방학을 맞아 잠시 귀국하여 서울을 찾았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북한산 일대를 돌며 스케치를 했던 그는 현 정릉동의 아리랑고개를 보고 「아리랑고개」라는 작품을 남기기도 하였다. 또한 1947년 9월 12일 경향신문 기사를 통해 성북회화연구소 설립 당시 지도교사로 활동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이야기 더보기
주제로 보는 성북
이야깃거리와 기록을 주제별로 묶어 관심 있는 주제를 한눈에 둘러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