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도끼
금요일마다 돌아오는 성북의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 [금도끼 #218] 이름으로 남은 다리들
-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죠. 하지만 죽어서 이름을 남기는 건 사람만이 아닙니다. 이제는 남아있지 않지만 이름으로 우리 옆에 남아있는 것들이 성북구에도 있습니다. 성북천은 성북동과 안암동을 지나 청계천으로 흐르는 하천입니다. 특히 북악산에서 시작해 성북동을 지나는 상류 구간은 복개되기 전까지 오랜 시간 성북동 사람들의 생활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1970년~1980년대에 성북천이 복개되며 아이들이 헤엄치던 모습, 아낙네들이 빨래하던 모습과 성북천 주변의 복숭아꽃들은 이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과거의 풍경과 함께 성북천 위를 가로지르는 다리들도 사라졌지만, 그 이름들은 우리 주위에 남아있습니다. 오늘의 금도끼에서는 이름을 남기고 사라진 다리들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함께 살펴보면서 과거를 상상해 보는 건 어떨까요?
이 달의 마을아카이브
이 달에 기록된 성북 마을이야기를 만나봅니다.
- 조소앙
- 돈암동에서 거주하고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일본 메이지대학에서 공부한 후 경신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다가 1913년 중국에 망명하여 항일단체 대동당을 조직하였다. 1918년 무오독립선언서를 기초하여, 독립운동 지도급 인사 39인의 공동성명으로 발표하였다.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민주공화제헌법의 기초를 비롯한 임정의 이론정립 등 전반에 걸쳐 주역을 맡았고, 해방 후에는 임시정부의 정통성 고수를 주장하였다. 성북구 돈암동에 거주하면서 1950년 5.30 총선에 사회당으로 서울 성북구에서 출마하였다. 선거에서 전국 최다득표로 조병옥을 꺾고 당선되어 제2대 국회에 입성하였다. 그러나 6.25전쟁 당시 납북되어 1958년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198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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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인성
- 1912년 대구에서 출생한 서양화가이다. 1929년 제8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처음 입선한 후, 수채화와 유화 작품으로 입선과 특선을 거듭하였다. 1931년 일본으로 건너가 1935년까지 다이헤이요미술학교에서 유학하였다. 1934년 9월 7일 동아일보의 실린 이인성의 글 '향토를 찾아서'를 보면 일본에서 학교를 다니던 그가 여름방학을 맞아 잠시 귀국하여 서울을 찾았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북한산 일대를 돌며 스케치를 했던 그는 현 정릉동의 아리랑고개를 보고 「아리랑고개」라는 작품을 남기기도 하였다. 또한 1947년 9월 12일 경향신문 기사를 통해 성북회화연구소 설립 당시 지도교사로 활동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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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춘앵
- 여성국극인이다. 전라남도 함평군에서 태어나 1936년 광주 권번에 들어가 이매방, 박모란 등과 함께 소리와 춤을 배웠다. 1939년 상경하여 1944년 조선창극단에 입단한다. 1948년 서울에서 박녹주·김소희 등과 여성국악동호회를 결성하고, 여성 창극인만으로 춘향전을 각색한 <옥중화>라는 공연을 올렸는데 이때 임춘앵이 이몽룡역으로 발탁되면서 여성국극 최초의 남장연기자가 된다. 이후 <햇님과 달님>이 크게 성공하면서 여성국극에 대명사가 되었다. 1960년대 이후 여성국극이 쇠퇴하면서 은거하였다가 1968년 조카 김진진의 도움으로 장위동에 ‘임춘앵 무용 연구소’를 열어 여성국극의 명맥을 잇기 위해 힘썼다. 1975년 뇌출혈로 인해 장위동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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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성북
이야깃거리와 기록을 주제별로 묶어 관심 있는 주제를 한눈에 둘러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