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도끼
금요일마다 돌아오는 성북의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 [금도끼 #218] 이름으로 남은 다리들
-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죠. 하지만 죽어서 이름을 남기는 건 사람만이 아닙니다. 이제는 남아있지 않지만 이름으로 우리 옆에 남아있는 것들이 성북구에도 있습니다. 성북천은 성북동과 안암동을 지나 청계천으로 흐르는 하천입니다. 특히 북악산에서 시작해 성북동을 지나는 상류 구간은 복개되기 전까지 오랜 시간 성북동 사람들의 생활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1970년~1980년대에 성북천이 복개되며 아이들이 헤엄치던 모습, 아낙네들이 빨래하던 모습과 성북천 주변의 복숭아꽃들은 이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과거의 풍경과 함께 성북천 위를 가로지르는 다리들도 사라졌지만, 그 이름들은 우리 주위에 남아있습니다. 오늘의 금도끼에서는 이름을 남기고 사라진 다리들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함께 살펴보면서 과거를 상상해 보는 건 어떨까요?
이 달의 마을아카이브
이 달에 기록된 성북 마을이야기를 만나봅니다.
- 임규
- 성북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자 한글학자이다. 1919년 3.1운동 당시 운동의 기획과 실행에 참여한 핵심 인사 48인 중 한 사람으로 일본 정부와 귀족원·중의원에 조선독립에 관한 의견서와 통고문 및 선언서를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다. 3월 1일에 일본 도쿄에 도착하여 일본수상과 의회에 문서를 전달하고 3월 9일 귀국 도중에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압송되었다. 미결수로 1년 7개월간 옥고를 치르다가 이듬해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의 판결을 받아 출옥하였다. 말년에 성북동 미륵당(현 성북로28길 60)이라는 암자에서 약 10년간 거주했는데, 그곳에서 한시집 『북산산고』를 탈고했다. 미륵당에서 기거하며 한용운을 비롯해 오세창, 정인보 등과 시류를 논하기도 했다. 정부에서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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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봉영
- 장위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평안북도 철산 출신으로 1919년 철산의 명흥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3.1운동에 앞장섰다. 경찰과 충돌한 후 2,000원을 가지고 상해로 망명했다. 임시정부 재무부에서 일하면서 재정지원을 하다가 여러 차례 수감되어 옥고를 치렀다. 1936년 조선일보 기자로 입사하여 1940년 폐간될 때까지 재직하였고, 광복 이후 조선일보가 복간한 뒤 재입사하여 1971년 퇴사했다. 학교법인 숙명학원 이사장과 제8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정부에서는 1977년에 대통령표창을,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독립유공자 공훈록에는 주소가 성북(城北) 장위(長位) 219(현 장위동 219-3)로 표기되어 있으나, 그의 별세 기사를 통해 자택 주소는 장위동 219-403번지인 것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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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인성
- 1912년 대구에서 출생한 서양화가이다. 1929년 제8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처음 입선한 후, 수채화와 유화 작품으로 입선과 특선을 거듭하였다. 1931년 일본으로 건너가 1935년까지 다이헤이요미술학교에서 유학하였다. 1934년 9월 7일 동아일보의 실린 이인성의 글 '향토를 찾아서'를 보면 일본에서 학교를 다니던 그가 여름방학을 맞아 잠시 귀국하여 서울을 찾았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북한산 일대를 돌며 스케치를 했던 그는 현 정릉동의 아리랑고개를 보고 「아리랑고개」라는 작품을 남기기도 하였다. 또한 1947년 9월 12일 경향신문 기사를 통해 성북회화연구소 설립 당시 지도교사로 활동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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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환
- 만화가, 화가이다. 1955년부터 신문에서 4컷 시사만화인 〈고바우영감〉을 연재하면서 현대사의 크고 작은 사건들을 담아낸 현대사의 산증인이다. 한국전쟁 때 정릉동 집 다락에 석 달 가까이 숨어 지내며 전쟁의 참상을 스케치했고, 인물캐릭터 200여개를 만들었다. 〈고바우영감〉은 1950년부터 『사병만화』·『만화신문』 등의 기관지와 『월간희망』 등에 수록하다가 1955년부터 『동아일보』에서 장기연재하였다. 이후 『조선일보』·『문화일보』 등을 거치며 자리를 옮기다 2000년 9월 끝맺는다. 〈고바우영감〉은 14,139회에 걸쳐 연재한 한국 최장수의 시사만화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13년 생존작가의 작품으로는 최초로 원화가 등록문화재 제538호로 지정됐다. 박수근 화백, 박고석 화백을 이웃으로 두고 명동 모나리자 다방에서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정릉 입구 오두막 선술집에서 들러 목을 축이곤 했다는 것이 그의 회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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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일관광고등학교
- 성북구 서경로 118(정릉동 산 16-46)에 위치한 교육시설이다. 정릉여자상업고등학교는 1981년 대일고등학교 2부(야간부) 여자상과 6학급으로 출발하였다. 대일고등학교는 강서구 등촌동으로 이전하였고, 1982년 정릉여자상업고등학교로 정식 설립되었다. 1996년 대일여자정보산업고등학교로 변경되었고, 2008년에는 대일관광디자인고등학교로, 2013년에는 대일관광고등학교로 변경되었다. 2017년에 신입생을 대상으로 양천구 신정동에 교사로 우선 이전하였으며, 재학생들은 2019년 2월 재학생들은 졸업할 때까지 정릉동 교사를 이용하였다가 신정동 교사로 일원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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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성북
이야깃거리와 기록을 주제별로 묶어 관심 있는 주제를 한눈에 둘러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