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도끼
금요일마다 돌아오는 성북의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 [금도끼 #219] “여성국극,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뛰어”, 여성국극과 임춘앵
- 여러분은 ‘여성국극’에 대해 들어보셨나요? 여성국극이란 전통연희자들이 무대 위에서 역할을 나누어 연기, 춤, 소리를 펼치는 공연인 창극의 일종으로 모든 배역을 여성이 담당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성국극은 1950년대 선풍적 인기를 끌었지만, 짧은 전성기 이후 급격한 쇠퇴기 맞이하면서 우리 기억 속에서 점점 멀어져 갔습니다. 그런데 요즘 웹툰 <정년이>가 창극, 드라마 등 다양한 콘텐츠로 변주되면서 이야기의 주요 소재인 여성국극에 대한 관심이 다시 커지고 있습니다.
이 달의 마을아카이브
이 달에 기록된 성북 마을이야기를 만나봅니다.
- 이인성
- 1912년 대구에서 출생한 서양화가이다. 1929년 제8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처음 입선한 후, 수채화와 유화 작품으로 입선과 특선을 거듭하였다. 1931년 일본으로 건너가 1935년까지 다이헤이요미술학교에서 유학하였다. 1934년 9월 7일 동아일보의 실린 이인성의 글 '향토를 찾아서'를 보면 일본에서 학교를 다니던 그가 여름방학을 맞아 잠시 귀국하여 서울을 찾았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북한산 일대를 돌며 스케치를 했던 그는 현 정릉동의 아리랑고개를 보고 「아리랑고개」라는 작품을 남기기도 하였다. 또한 1947년 9월 12일 경향신문 기사를 통해 성북회화연구소 설립 당시 지도교사로 활동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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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춘앵
- 여성국극인이다. 전라남도 함평군에서 태어나 1936년 광주 권번에 들어가 이매방, 박모란 등과 함께 소리와 춤을 배웠다. 1939년 상경하여 1944년 조선창극단에 입단한다. 1948년 서울에서 박녹주·김소희 등과 여성국악동호회를 결성하고, 여성 창극인만으로 춘향전을 각색한 <옥중화>라는 공연을 올렸는데 이때 임춘앵이 이몽룡역으로 발탁되면서 여성국극 최초의 남장연기자가 된다. 이후 <햇님과 달님>이 크게 성공하면서 여성국극에 대명사가 되었다. 1960년대 이후 여성국극이 쇠퇴하면서 은거하였다가 1968년 조카 김진진의 도움으로 장위동에 ‘임춘앵 무용 연구소’를 열어 여성국극의 명맥을 잇기 위해 힘썼다. 1975년 뇌출혈로 인해 장위동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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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벽정
- 고양군 숭인면 성북리 113번지(현 성북구 선잠로71로 추정)에 있던 별장이다. 명성황후의 조카이며 을사늑약에 반대하여 자결한 민영환의 별장이었다. 19세기 말부터 관료로서 활약했던 민영환은 성북동에 아름다운 별장을 지어놓고 많은 명사들과 교류하였다. 당시 청에서 파견되어왔던 위안스카이(袁世凱)도 민영환과 교류하며 음벽정을 방문하였었는데, 민영환이 순국한 후 그는 혼자 찾아와 추도하는 시를 읊기도 하였다. 민영환이 죽은 후 동생이 소유했던 음벽정은 1931년 가옥 임대업을 하던 일본인에게 소유권이 넘어갔다가 1934년 한택수에게 소유권이 이전되었다. 그때부터 요정으로 운영되어 주변 주민들의 민원이 끊이지 않았다. 한국전쟁 이후엔 불에 타서 없어졌고, 현재 그 자리에는 연화사라는 사찰이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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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성고등학교
- 성북구 길음로 63(길음동 1284-15)에 위치한 사립고등학교이다. 여성에게 가톨릭 정신을 바탕으로 한 근대식 교육을 하기 위해 여학교 설립을 신청했으나 일제의 불허로 전수학교로 개교하였다. 1944년 8월 계성여자상업전수학교 설립을 인가받았고 같은 해 9월 8일 개교하였다. 1946년 6월 6년제 계성여자중학교로 인가되었으며, 1950년 학제 개편에 따라 계성여자고등학교와 계성여자중학교로 분리되었다. 명동 지역의 학생 수 감소와 명동성당 특별계획 구역에 포함되어 이전 사업이 추진되었다. 2016년 3월 현재의 위치로 교사를 이전하고 남녀공학으로 전환하여 교명을 계성고등학교로 변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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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성북
이야깃거리와 기록을 주제별로 묶어 관심 있는 주제를 한눈에 둘러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