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도끼
금요일마다 돌아오는 성북의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 [금도끼 #203] 새로운 길을 찾는 청년들을 위해, 청년공간 길:이음
- 오은 시인은 시 〈1년〉에서 5월엔 정체성의 혼란이 찾아온다고 표현합니다. 근로자도, 어린이도, 어버이도 아닌 나는 나의 어떤 면을 축하해 줄 수 있냐고 말입니다. 아직 어떤 이름표를 찾지 못한 사람 중 상당수는 청년들일 것입니다. 오늘은 자기 앞에 놓인 많은 길을 고민하는 청년들을 위한 공간인 길이음에 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청년공간 길이음은 청년 창업자, 문화예술인, 구민을 대상으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복합문화공간입니다. 길이음이 위치한 길음역에서 미아초등학교까지 삼양로 구간은 몇 해 전만 해도 소위 ‘맥양집’이라 불리는 불법 유해업소가 곳곳에 있던 지역이었습니다. 성북구는 2019년부터 단속 전담반을 꾸려 점검을 시행하고 길 건너편에서는 점포를 볼 수 없게 현수막으로 가리는 등의 유해업소 근절을 위해 노력을 해왔습니다. 또 유해업소가 떠난 자리에 청년들이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 달의 마을아카이브
이 달에 기록된 성북 마을이야기를 만나봅니다.
- 장기영
- 장위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강원도 영월 출신으로 1924년 상해임시정부에서 안창호, 김구의 권유로 미국에 건너가 인디애나대학을 졸업했다. 1932년 이승만의 부름을 받고 워싱턴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위원부의 위원으로 임명되어 독립자금을 모집하고, 교민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키는 등의 활동을 했다. 1943년 미국과 일본의 전쟁이 확대되자 미군에 자원입대하여 충칭[重慶]에 있던 임시정부의 연락원으로 활동했다. 광복 후에는 강원도 영월에서 무소속으로 초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이후 체신부장관, 서울특별시장, 신민당 운영위원, 국민당 사무총장, 민중당 총재 등을 역임했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받았다. 주소는 '서울 성북(城北) 장위(長位) 246-396'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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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육사
- 종암동에서 거주한 민족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이다. 본명은 이원록이다. 1925년(혹은 1926년)에 중국에 건너갔다가 1927년 여름 중국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같은 해 10월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가 1년 7개월 뒤에 석방되었다. 이때 받은 수인번호 '264'는 '이육사'라는 필명의 유래가 되었다. 1932년 중국 난징에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교육생으로 입교하여 훈련을 받았다. 1933년 7월 조선으로 돌아온 그는 군사활동이 아닌 문학활동을 시작하였고, 1939년 종암동 62번지로 이사하여 이 곳에서 「청포도」, 「절정」 등 대표작을 발표하였다. 그는 1944년 1월 16일 베이징[北京] 감옥에서 옥중 순국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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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경리
- 소설가이다. 본명은 박금이(朴今伊)이며 필명인 ‘경리’는 김동리가 지어준 것이다. 1955년 김동리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계산」을 발표하고, 다음 해 「흑흑백백」을 게재하며 문단에 등단하였다. 1950년대 후반에 돈암동 셋방에서 정릉동 골짜기 한적인 곳인 768-2번지로 집을 옮겨갔다.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이후까지 대장정을 담은 『토지』는 정릉동 집에 살던 1969년부터 집필하였다. 1980년 강원도 원주로 이사하여 1994년 8월 15일 탈고한 『토지』는 영어, 프랑스어, 일본어로 번역되었다. 작가들의 창작과 교류를 위한 ‘토지문화관’을 짓고, 대학에서 후학들과 만나며 말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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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성북
이야깃거리와 기록을 주제별로 묶어 관심 있는 주제를 한눈에 둘러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