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도끼
금요일마다 돌아오는 성북의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 [금도끼 #201] 나무로 조각된 탱화, 경국사 목각탱
- 성북구에는 미타사, 보문사, 흥천사, 개운사, 봉국사, 경국사와 같은 많은 전통사찰이 있습니다. 그와 더불어 다양한 불교 유물이 성북구 안에 위치해 있기도 하죠. 여러분은 불교와 관련된 유물로 무엇이 가장 먼저 생각나시나요? 탑이나 불상, 경전에서부터 비롯하여 여러 종류가 있지만 탱화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 달의 마을아카이브
이 달에 기록된 성북 마을이야기를 만나봅니다.
- 오세창
- 독립운동가, 서예가, 언론인이다. 『만세보』, 『대한민보』 사장을 역임하며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였고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활약하였다. 전각과 서예에도 뛰어났으며 1918년에는 서화협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우리나라 역대 서화가의 사적과 평전을 수록한 사전인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1928)을 편찬하였다. 성북동 128번지는 그가 서화류를 보관하기 위한 가옥인데, 이곳에서 골동품의 수집·감정이 이루어졌고, 간송미술관과 최순우 옛집을 오가는 사람들의 접대 혹은 객사의 공간으로 이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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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성전문학교
- 성북구 안암동에 있는 고려대학교의 옛 이름이다. 보성전문학교는 1905년 4월 이용익이 설립하였는데, 아어학교(러시아어학교, 현 종로구 수송동) 건물에서 개교하였다. 1907년 이용익이 해외 망명 중 죽은 후에는 손자 이종호가 운영을 맡았는데 역시 안중근의 의거에 연루되어 구금되자 경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천도교에서 학교를 인수했으나 손병희가 체포당하자 또다시 어려움에 빠졌고, 1921년 김병로 등이 재단을 만들어 운영하였는데 총독부의 간섭은 심했고 재정의 어려움도 여전하였다. 1932년 경성방직을 설립한 사업가 김성수가 인수하여 안암동(현 고려대학교)으로 학교를 옮기고 운영하였다. 해방 후 1946년 중앙학원으로 흡수하고, 종합대학으로 인가를 받으며 고려대학교로 이름을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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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진규
- 조각가이다. 1943년 춘천공립중학교 졸업 후 미술연구소에 들어가지만 곧 비행기 부품공장에 징용된다. 다음 해 공장을 도망쳐 귀국하였다. 1947년 성북회화연구소에서 회화 수업을 받았다. 1949년 9월, 무사시노미술학교(武藏野美術學校)에 입학하여 부르델의 계보를 잇는 시미즈 다카시를 사사하였다. 1959년 귀국 후 성북구 동선동에 작업실을 짓고 1973년 생을 마감할 때까지 작품 활동을 하였다. 삼국시대 토우에 뿌리를 둔 테라코타와 건칠(乾漆) 기법을 새롭게 연구·발굴한 그는 한국적 리얼리즘 조각의 세계를 정립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홍익대 조각과와 서울대 건축과, 수도여자사범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주요작품으로는 「자각상」, 「지원의 얼굴」, 「애자」, 「땋은 머리」 등 테라코타 흉상 작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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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남옥
- 영화감독이다. 광복 후 서울로 올라와 조선영화사 광희동 촬영소에 들어가 편집을 배웠다. 1940년대 돈암동에 거주하며 주변에 살던 영화인들과 교류했고, 1953년 극작가 이보라와 결혼하고 이듬해 남편이 쓴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미망인』을 촬영했다. 제작비 부족 등으로 어렵게 완성하여 개봉하였으나 흥행을 거두진 못했다. 1960년 도쿄에서 열린 제7회 영화제에 참가했다. 1997년 제1회 서울 여성영화제가 『미망인』을 상영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의 존재가 알려졌고, 2008년 여성 영화인에게 수여하는 '박남옥상'이 제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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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8 고대학생 의거
- 1960년 4월 18일 고려대학생들이 자유당의 독재에 항거하면서 벌인 평화시위이다.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에서 온갖 부당한 일이 자행되었고, 자유당과 경찰의 반민주적이고 억압적인 행위를 규탄하는 시위가 산발적으로 진행되었다. 주로 지방도시의 고등학생들이 시위를 전개하던 가운데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대학생으로서는 최초로 서울에서 시위를 감행하였다. 18일 오후 1시 3천여 명의 고려대학생들이 교문을 나섰고, 국회의사당 앞에 도달하여 농성하였다. 시위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가던 고려대학생들은 정치깡패들의 습격을 받아 10여 명이 중상을 입었다. 하지만 김주열 열사의 죽음과 고려대학생들의 피습사건은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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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성북
이야깃거리와 기록을 주제별로 묶어 관심 있는 주제를 한눈에 둘러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