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도끼
금요일마다 돌아오는 성북의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 [금도끼 #218] 이름으로 남은 다리들
-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죠. 하지만 죽어서 이름을 남기는 건 사람만이 아닙니다. 이제는 남아있지 않지만 이름으로 우리 옆에 남아있는 것들이 성북구에도 있습니다. 성북천은 성북동과 안암동을 지나 청계천으로 흐르는 하천입니다. 특히 북악산에서 시작해 성북동을 지나는 상류 구간은 복개되기 전까지 오랜 시간 성북동 사람들의 생활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1970년~1980년대에 성북천이 복개되며 아이들이 헤엄치던 모습, 아낙네들이 빨래하던 모습과 성북천 주변의 복숭아꽃들은 이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과거의 풍경과 함께 성북천 위를 가로지르는 다리들도 사라졌지만, 그 이름들은 우리 주위에 남아있습니다. 오늘의 금도끼에서는 이름을 남기고 사라진 다리들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함께 살펴보면서 과거를 상상해 보는 건 어떨까요?
이 달의 마을아카이브
이 달에 기록된 성북 마을이야기를 만나봅니다.
- 정태식
-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이다. 경성제국대학을 졸업 후 법문학부 조수로 경제연구실에서 근무하였다. 성북동에 거주하면서 독서회, 적색노동조합, 공산주의자그룹 결성에 매진하다가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경성콤그룹에 참여하였고 해방후에는 남로당 중앙위원, 조사부장 등으로 활동하였다. 1950년 4월 체포되어 5월 육군본부에서 징역 20년을 선고받았으나 한국전쟁 당시 풀려났고, 북한에서 농림성 기획처 부처장을 지냈다. 남로당 숙청 당시 숙청되었다. 경기도 경성부 성북정 184-32(현 성북구 성북로6길8-2)에 거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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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인성
- 1912년 대구에서 출생한 서양화가이다. 1929년 제8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처음 입선한 후, 수채화와 유화 작품으로 입선과 특선을 거듭하였다. 1931년 일본으로 건너가 1935년까지 다이헤이요미술학교에서 유학하였다. 1934년 9월 7일 동아일보의 실린 이인성의 글 '향토를 찾아서'를 보면 일본에서 학교를 다니던 그가 여름방학을 맞아 잠시 귀국하여 서울을 찾았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북한산 일대를 돌며 스케치를 했던 그는 현 정릉동의 아리랑고개를 보고 「아리랑고개」라는 작품을 남기기도 하였다. 또한 1947년 9월 12일 경향신문 기사를 통해 성북회화연구소 설립 당시 지도교사로 활동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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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우미술관
- 성북구 선잠로 12-11(성북동 55-1)에 있던 미술관이다. 운보 김기창(1913~2002)과 그의 부인 우향 박래현(1920~1976)의 호에서 ‘운우’라는 미술관의 이름을 지었다. 이 미술관은 김기창과 박래현이 살던 집이었다. 부부는 1954년 무렵 군산에서 서울로 올라왔고, 박래현의 노력으로 한옥을 장만했다. 1976년 김기창은 성북동 한옥을 헐고 아내를 위해 미술관을 건립하였지만, 불행히도 미술관이 완공되기 전에 박래현은 세상을 떠났다. 김기창은 이곳에서 1984년까지 홀로 살며 작품활동을 하다가 어머니의 고향인 청원으로 화실을 옮겼다. 2001년 9월 27일 서울시 제1종 미술관으로 등록하고 2002년 3월 개관하였으나 미술관 대표가 운영상의 어려움을 이유로 폐관신청을 하면서 2015년 11월 10일 폐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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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성북
이야깃거리와 기록을 주제별로 묶어 관심 있는 주제를 한눈에 둘러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