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학 연구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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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차 개설에 의한 한양도성 문루 주변지역의 도시 변화에 관한 연구
    본 연구는 서울이라는 도시의 변화 과정에서 과거 물리적 경계였던 한양도성이 근대화의 동인 중 하나인 전차로 인해 어떠한 변동의 과정을 겪었는지, 또한 그러한 변동의 과정에서 도시의 조직과 공간, 체계들이 어떻게 변화하게 되었는지를 알아본 것이다. 조선 건국 이후 약 500년 동안 한양도성은 도시의 구조와 영역을 구현하는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바뀌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도 그 형상이 크게 변하지 않고 유지되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들어 한양도성은 도시의 근대화에 있어서 성곽은 골칫거리로 전락하였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새로운 교통기관의 도입은 전통도시 한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500여 년간 성곽도시였던 한양이 전차의 도입으로 변형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지금은 사라졌으나 대한제국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쳐서 1960년대까지 시민의 발이었던 전차는 도로에 궤도를 설치하고 그 위를 운행하는 노면전차로써, 전차를 운행하기 위해서는 궤도의 부설이 선행되어야 했으며, 궤도가 뻗어나가는 범위가 도시화 규모를 결정짓는 요소가 되었다. 전차는 대한제국이 선포된 다음 해인 1898년 설립되었으며, 1899년 개통식 이후 본격적으로 운행하였다. 처음으로 도입된 전차의 노선은 돈의문부터 종로와 흥인지문을 지나 청량리를 연결하였으며, 두 번째 노선은 종로에서 용산에 이르는 것이었다. 세 번째 노선은 철도역과의 연결에 주안점을 맞추어 서대문 정거장과 남대문 정거장을 연결한 의주로선이 개통되었으나 부설 후 2~3년이 지나면서 운행이 중단되었고, 네 번째 노선은 마포로 이어졌다. 전차의 등장은 한양에 큰 변화를 불러 일으켰다. 처음 전차가 개통되었을 때만 해도 한양도성은 훼철되지 않았지만, 전차가 등장하였을 때만 해도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던 한양도성이 점차 훼손되기 시작하였으며, 대한제국시기에 성문을 통해 도성 안과 밖을 연결하던 전차가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부터 훼철을 통해 절개한 한양도성 사이로 신설된 도로로 노선을 이전하면서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한양도성의 경계로서의 기능이 변화하기 시작하였음을 의미한다. 대한제국기의 도시 변화 속에서도 여전히 경계로서 여전히 그 기능을 유지하던 한양도성은 일제강점기에 들어 변동이 일어났다. 경성시구개수사업으로 인해 한양의 전통적인 가로체계를 무시하고 동서와 남북 방향으로 뻗은 직선의 도로가 주를 이루는 가로망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주요 거점을 직선으로 연결하는 격자형 도시에 대한 제안은 기존의 한양도성과 한양도성의 성문이 가지고 있던 도시 구조 형성의 역할이 사라지게 되었음을 확인시켜 준다. 간선도로의 계획과 함께 도성 내 전차 노선의 확장과 전차의 운행 방식은 당시 도성 내 시가지화가 진행되었던 지역이 어느 곳에 집중되어 있는 가를 잘 보여준다. 대한제국기에 신설된 전차노선은 모두 조선인 주거지를 지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지만, 한일 병합 이후에는 경성부의 간선도로 계획과 맞물리면서 노선의 성격이 바뀌게 된다. 이러한 발전 형태는 시구개수사업에서 공사가 진행된 순서와 비슷한 양상인데, 당시 전차노선이 이미 개설된 도로 위에 철로를 놓는 방식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폭원의 정비가 이루어진 도로가 우선적인 노선 확장의 대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전차 교통의 확장 과정을 통해 기존의 한양이 가지고 있던 도시 구조와는 다른 경성이라는 도시의 구조로 변해가는 배경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양도성과 전차의 형성과정을 살펴보는 연구의 과정 속에서 한양도성이라는 도시의 물리적 경계가 전차라는 도시 변화의 동인을 만나 어떻게 변해갔는지를 한양도성의 문루 주변지역에서 나타나는 도시적 변화에 대해 궤도와 지형, 도시조직의 세 가지 시각으로 분석하였다. 세 가지 분석의 시각은 모두 시간과 장소의 개념을 통합하여 도시를 바라보는 관점을 통해 서울이라는 도시의 변화에 대한 해석을 위한 방법으로 사용되었다. 돈의문은 정동 일대의 시구개수사업으로 인한 계획도로의 개설 및 확장으로 인해 훼철되었다. 전차의 개통과 정비된 도로로 인해 돈의문 일대는 교통의 중심지로 전환되었으며, 교통의 발전을 기반으로 하여 1920년대 이후부터 신시가의 창설 및 기성시가가 확장되어 돈의문 밖으로 도심의 영역이 확장되었다. 돈의문 주변지역의 한양도성의 변동을 궤도와 지형, 필지를 통해 살펴보는 과정에서 궤도 혹은 도로의 형성이 권력의 주체에 따라 새로운 도시구조로 이뤄지는 과정과 함께 궤도와 도로의 확장을 통해 한양도성이 가지던 경계로써의 기능이 사라져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또한 궤도의 확장의 과정에서 지역이 가지고 있던 지형이 변하기도 하였으며, 경계가 사라지면서 필지의 이용행태가 변하여 성 안팎이 하나의 도시 영역으로 확장되어 지역의 경관이 변하게 되었다. 광희문은 1913년 왕십리선을 부설하는 과정에 성벽이 훼철되었으며, 1921년 장충동 일대에 문화주택지 개발을 위해 일대가 철거되었다. 경성 시내의 인구 과밀화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경성의 동쪽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광희문 주변지역의 성곽이 훼철된 것이다. 장충단까지의 도로 개통, 전차노선의 연장, 새로운 대중교통수단의 등장과 경성시가지계획에 의한 경성의 확장과 맞물리면서 광희문 주변지역이 도심에 근접한 새로운 주거지로 개발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주택지의 조성을 위해 도시의 중심과 연결되는 간선도로와 주택지에 접근하는 도로를 형성하기 위해 성곽을 훼철했고, 이 과정에서 차량 통행이 가능한 도로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성곽을 절단하고 지형의 변화가 일어났다. 광희문 주변지역은 도시 변화의 과정에서 도로의 개설과 새로운 주택지를 형성하는 과정에 지형적 변화가 크게 동반되었으며, 원래 가지고 있던 지형적인 특성이 모두 사라졌다. 광희문 주변지역은 새로운 필지 형성을 위해 선결되어야 하는 궤도의 형성과 지형의 변화를 수반하고 있는 지역이다. 혜화문 일대의 성곽의 훼철은 도로의 개설로 인하여 일어났는데, 1915년에 형성된 도로로 인해 한양도성의 일부가 절단되었고, 1939년에는 혜화동과 돈암동 사이의 전찻길을 내면서 혜화문 역시 훼철되었다. 혜화문 주변지역은 혜화동까지의 전차 운행으로 필지의 분화 등이 변화를 보이긴 하였지만, 도성 바깥까지 그 영향이 전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돈암정까지 연결되는 교통여건이 개선되고 1940년대 돈암지구가 주거지역으로 형성되면서 이 지역을 통하는 버스와 전차의 노선의 영향으로 자연적으로 도심과 돈암지구를 연결하는 혜화문 주변지역에도 필지의 분화를 통해 도시의 영역이 확장되었다. 혜화문 주변지역은 도로의 형성이나 지형의 변화의 영향으로 지역의 성격이 변했다고 하기 보다는 돈암지구의 형성을 통해 도성 외부 지역의 필지부터 도성의 방향으로 변해왔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돈의문과 광희문, 혜화문의 도시 변화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전차라는 요인이 도시의 변화에 작용하는 과정들을 살펴보았지만, 세 지역에 같은 방식으로 작용하지 않았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돈의문 주변지역의 경우에는 전차가 운행하면서 한양도성의 경계로써의 기능이 흐려져 도시의 영역이 외부로 확장되어 갔고, 그에 따라 필지와 지형의 변화가 수반되었다. 광희문 주변지역은 새로운 주택지라는 도시구조의 변화를 위해 지형과 도로가 선결되어야 하는 요소로 작용하였으며, 혜화문 주변 지역의 경우에는 도로의 형성이나 지형의 변화의 영향으로 지역의 성격이 변한 것이 아니라 도성 외부 지역의 변화로부터 도성 쪽으로 그 변화가 확장되어 왔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같은 변동의 요인인 궤도의 형성, 지형의 변화, 도시 경관의 변화를 중심으로 살펴본 돈의문, 광희문, 혜화문 주변 지역들의 분석 과정 속에서도 그 중심이 되는 요인과 배경이 되는 요인이 있으며, 전과 후, 원인과 결과로 이뤄지는 요인들이 있었다. 또한, 문루 주변지역의 변화는 이전 시대의 흔적을 바탕으로 진행된다는 점 역시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연구의 결과를 바탕으로 도시를 이해하는데 있어 단편적인 시각으로는 한계를 가질 수 있으며, 사료들의 나열을 통해 단면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시각을 통합적으로 적용하여 도시가 가지고 있는 연속성 속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이 연구를 통해 서울이라는 도시를 이해하고, 도시를 인식하는 범위를 확장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데 본 연구의 의의를 찾고자 한다.
  • 학술자료
    헤테로토피아적 장소에 나타난 문화적 기억과 작품연구 -미아리고개와 주변 공간을 중심으로-
    본 연구는 과거 미아리고개라는 장소가 오늘날 어떻게 이질적 공간으로 배척되고 있었는지를 미셸 푸코의 헤테로토피아라는 관점에서 분석해보고, 오늘날 그 터의 의미와 집단의 장소 기억이 변화된 양상을 살펴보기 위함이다. 이를 위해 미아리고개와 주변 공간들에서 영감 받은 순수미술작가들의 작품을알라이다 아스만이 말한 문화적 기억 관점에서 분석하였다. 특히 본 연구에서 중점적으로 다룬 공간은미아리 공동묘지, 미아리 점성촌, 그리고 미아리 고가 하부공간에 형성된 복합문화예술공간 미인도이다. 위 공간들에서 영감 받은 작품과 실제 미인도에서 진행된 기획전시 작품을 토대로 미아리고개와주변 공간이 오늘날 새롭게 정립하고 있는 문화적 기억을 환기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작품분석을 통해서 미아리고개라는 헤테로토피아적 장소가 오늘날 더는 타자화된 공간이 아닌, 생동감 있는 공간이자다양한 실험의 장으로 재생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런 점에서 미아리고개와 주변 공간에서 실시하는 다양한 프로젝트와 작업은 오늘날 대중에게 다양한 문화적 기억을 심어준다는 점에서 과거와 현재를 잇는 연결 다리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과적으로 본 연구는 오늘날 무분별하게상실되어가는 장소 기억에 대한 기록과 더불어 상징적인 장소들을 새로운 매체를 통해 기억하는 작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에 궁극적인 목적을 두고 있다. 따라서 본 연구를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장소들과 그 장소가 가진 기억의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해볼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 학술자료
    서울 미아동의 문학지리학- 도시개발사와 문학적 재현
    이 논문은 일제하부터 1990년대까지 미아동의 구체적인 지명과 행정구역의 변동을 문학지리학적 관점에서 되짚어봄으로써, 미아동이 실제 행정구역으로서의 미아동과 심상적 지리로서의 미아리가 중첩되고 혼재된 동네였음을 분석하였다. 또한 이광수, 김동명, 서정주, 김소진, 윤대녕 등의 문학텍스트에 재현된 도시공간과 실제 도시공간의 개발사를 연관시키면서, 일제하 공동묘지 형성부터 난민정착지 사업을 통해 만들어진 달동네의 모습까지 도시개발의 역사에 따라 시기적으로 변화해온 미아동의 문학적 재현이 가진 역사적 의미를 보여주고자 하였다.
  • 학술자료
    소수자 배제에서 포용으로의 사회공간적 변화 연구: 서울시 동선동 점복촌의 시각장애인 역학사를 사례로
    본 연구에서는 서울시 성북구 동선동 점복촌을 사례로 시각장애인 역학사에 대한 배제와 포용으로의 관계적 변화의 사회공간적 의미를 해석함으로써 포용도시 구현의 가능성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조선시대 판수라 불렸던 시각장애인 역학사는 국가의 지원 하에 점복·독경을 행하였으나 일제강점기에 미신타파의 대상이 되었다. 6·25 전쟁 후 서울 남산 자락과 종로 3가 등에 점복촌이 형성되었으나 도시정비사업으로 철거되고, 1970년대에 지가가저렴하고 유동인구가 많던 미아리 고개 주변에 점복촌이 형성되었다. 1990년대 말까지 동선동에서 점자도서관설립 반대, 전통거리 조성 사업의 무산, 역학원 운영에 대한 주민과의 마찰과 같은 사회공간적 차별과 배제가 나타났다. 2010년 이후에는 시각장애인의 점복·독경에 대한 법적·제도적 지원이 이루어지고, 도시재생활동을 통해 점복촌이 역사·문화적 가치를 지닌 장소 자산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지역 통합과 포용으로의 관계적 변화는, 배제를 극복하기 위한 공간적 전략으로서의 점복촌 형성 등 시각장애인 역학사 개인 및 집단 차원에서 전개한 주체적노력과 지역공동체 중심의 재생활동에 의한 것으로서, 이는 포용도시의 비전을 공유하기 위한 수행적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 학술자료
    서울의 문화유적과 콘텐츠화 방안-성북구 낙산지역을 중심으로-
    본고는 서울시 성북구 낙산지역의 역사적․문화적 위상을 검토하고 이를 토대로 낙산지역의 콘테츠화 방안을 제시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이를 위해 2장에서는 낙산지역의 문화콘텐츠화의 필요성으로서 낙산지역의 역사적․문화적 위상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조선시대 낙산지역은 도성의 동쪽을 방어하는 성곽으로서의 위상뿐만 아니라 뛰어난 경치로 인해 당시 사람들이 경치를 遊賞하던 문화적 공간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3장에서는 낙산지역의 주요 문화유적들을 점검하여 문제점을 지적하고 콘텐츠화 방안을 제시하였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하고 몇 가지 첨언을 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현재 복원하지 못한 역사․문화적으로 의미 있는 낙산지역의 문화유적들은 복원해야 한다. 이와 관련해서는 석양루가 한 예가 될 것이다. 현재 석양루터는 이화동 주민들의 주거공간에 위치하여 복원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듯하다. 하지만 서울시가 창경궁과 종묘 사이를 잇는 복원사업의 맥락에서 생각해 볼 때, 문화재의 복원은 도시의 이미지와 가치를 제고하는 길이라 생각된다. 따라서 효종대 최고의 甲第이자 사대부들의 문화공간이었던 석양루를 복원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판단된다. 둘째, 현재 복원된 문화유적들은 구체적인 의미가 드러날 수 있도록 보완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庇雨堂과 淨業院터가 예가 될 것이다. 비우당의 경우, 비교적 복원이 잘 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비우당의 구체적인 의미와 이수광의 삶과 학문을 좀더 적극적으로 소개할 필요가 있다. 정업원터의 경우는 관람공간도 협소하고 해설이 소략하여 문화유적으로서의 가치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다. 낙산지역을 방문한 관람객들이 대부분 성곽을 돌고 이화동 벽화마을만 구경하고 돌아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문화유적에 대한 구체적인 해설이 담긴 표지석과 영상 안내실 등을 갖출 필요가 있다. 셋째, 낙산공원의 산책로를 비우당․정업원․청룡사․동망봉․삼군부 총무당으로까지 확장할 필요가 있다. 현재 문화유적과 연결된 낙산공원의 산책로는 성곽 안쪽을 중심으로 조성되어 있어서 성곽 바깥쪽인 창신동․삼선동․숭인동의 문화유적들은 관람객들이 접근하기 어렵다. 그 결과 비우당․정업원․청룡사․동망봉․삼군부 총무당 등은 있는지조차 모르는 관람객들이 많다. 따라서 낙산 정상에 있는 놀이광장에서부터 창신동․숭인동․삼선동을 연결하는 역사․문화 탐방코스로서의 산책로를 조성할 필요가 있다. 넷째, 관람객들이 함께 참여할 수 있는 행사를 조직해야 한다. 2장에서 언급했던 ‘巡城놀이’는 현재 서울시에서 프로그램화하여 잘 진행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낙산지역이 조선시대 저명인사들이 많이 거처하였고 별장을 중심으로 酬唱과 풍류 문화가 이루어졌던 공간임을 착안하여 주변 한성대학교와 연계하여 문학 관련 행사를 마련하거나 국악 관련 공연을 개최하면 좋을 듯하다.
  • 학술자료
    옛 文人들이 사랑한 서울의 동북 지역
    조선 시대 文人들은 도성 생활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양의 동북 지역에 별장과 정자를 짓고 노닐었다. 吳泰周와 吳瑗은 鍾巖洞에 별장을 지어 詩酒와 書畵를 즐기며 文友들과 교유하였다. 종암의 별장을 배경으로 한 오원의 시에는 부친인 오태주를 그리워하는 내용이 잘 나타나 있다. 洪良浩는 牛耳洞에 별장을 꾸미고 독서와 사색으로 이루어진 한가한 삶을 영위하였다. 소의 귀가 지니는 의미를 철학적으로 해석하여 安分自足하는 은거를 꿈꾸었다. 石串洞에 東庄이라는 거처를 마련한 金昌業은 손수 농사를 지으며 집과 주위의 모든 사물에 대해 큰 애정을보였다. 나무, 꽃, 풀, 과일, 채소 등에 대한 연작시는 조선 후기에 새로이 나타난 주거의 양상을 보여준다는점에서 소중한 의의를 지닌다. 서울의 동북 지역에 있는 北漢山은 유명한 관광지였을 뿐만 아니라 학업에 힘쓰는 공간 등 다양한 성격을지니고 있었다. 그보다 북쪽에 위치한 道峯山과 水落山은 번잡한 도성을 떠나 은거를 실천하고자 하는 이들이사랑하였던 곳이다. 도봉산에는 趙光祖와 劉希慶, 수락산에는 金時習과 朴世堂의 자취가 남아 있다.
  • 학술자료
    서울 성북동 에코뮤지엄 조성방안 연구 : 지역정체성을 중심으로
    박물관은 시대의 흐름에 부응하며 끊임없이 변화해 왔고 박물관을 주도하는 주체나 시대적 상황의 변화에 따라 박물관이 무엇을 중요하게 여겼는지의 양상도 거듭 변해왔다. 국민주권이 실현되고 시민사회가 형성된 20세기 이후에는 박물관도 개인의 문화 향유와 또 사회적 문제에 대한 대안 제시라는 사회적 기능이 중요해 지면서 이를 신박물관학에서 다루게 되었고 에코뮤지엄은 이러 한 논의 속에서 형성된 개념이다. 시대의 변화에 따른 박물관의 변화 양상을 살펴보면 에코뮤지엄에서 특히 두드러진 요소는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박물관적 대안으로 등장한 ‘지역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개인의 삶과 사회 문제에 직면하며 지역주민이 주체가 되어 지역을 변화시키는 매개체로서의 에코뮤지엄은 지역이란 공간을 범위로 하여 자연환경과 건축물을 비롯한 유형적 자산과 무형적 자산(역사와 풍습, 생활방식, 이야기 등)을 보존, 활용하며 지역 전체를 하나의 박물관 개념으로 조성해 가는 것을 의미한다. 즉, 에코뮤지엄은 지역정체성을 기반으로 지역주민의 참여(Participation), 지역유산(Heritage), 박물관 활동(Museum)의 세가지 요소가 균형을 이루며 긴밀하게 상호작용하는 일체의 과정과 결과가 에코뮤지엄의 이상적인 모습이라고 정의한다. 본 연구는 서울시 성북구 성북동이라는 지역을 대상으로 성북동의 지역정체성을 중심으로 에코뮤지엄 조성 방안을 논의해 본다. 성북동은 북악산과 연결된 봉우리인 구준봉과 응봉 아래 산자락에 위치하며 중심에 성북천이 흘러 빼어난 산수를 지닌 지역이었다. 역사 속에서 성북이라는 지역은 한양도성의 사소문(四小門) 중 하나인 혜화문 밖을 나서면 도보거리로 연결되는 지역으로 조선시대 전기에 국가의 중요한 제단(선잠단)이 설치된 곳이었고, 18세기에 본격적으로 인구가 유입된 이래 산과 물이 어우러진 수 려한 자연경관으로 가진 명승지로 각광을 받으며 문인들의 문학작품을 비롯한 여러 문헌에 기록된 지역이었다. 현재 성북동에는 한양도성(사적 제10호), 선잠단(사적 제83호), 서울 성북동 별서(명승 제118호) 등 조선시대의 역사문화 자원이 많이 남아있다. 그러나, 서울의 많은 지역이 산업화와 도시화의 과정에서 효율과 편의의 가치 위주로 원래의 모습을 잃은 채 획일적으로 변모되어 왔듯이 성북동 지역도 유사한 과정을 거치며 18-19세기 문헌이 증언하고 있는 역사성과는 단절된 채 ‘지역의 고유한 특성’을 잃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에 성북동의 변천과정과 현재 모습을 고찰해 보고 지역주민을 대상으로 설문조사와 인터뷰를 실시하여 성북동의 지역정체성을 분석해 본다. 나아가, 본고는 ‘지역정체성’ 을 ‘지역의 고유한 특성’과 '지역주민의 자기 지역에 대한 인식’으로 정의하며 ‘지역정체성’의 현재적 의의를 살펴본다. 논의 방법은 크게 선행이론 및 문헌자료, 현장 조사와 더불어 서울시청과 성북구청의 정책자료 분석을 통해 성북동의 고유한 특성과 현재의 상황을 살펴본다. 아울러 성북동 주민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하여 성북동 지역 주민들의 성북동에 대한 인식을 분석해 보며, 성북동 주민센터 담당관과 주민자치위원회 자치위원, 전문가와 문화기관 담당자 및 지역 주민에 대한 심층 인터뷰를 통해 성북동 에코뮤지엄의 조성방안을 고찰하고자 한다. 본 연구는 성북동의 지역정체성을 기반으로 지역 내에 현재 존재하지만 단절되고 고립되어 있는 역사문화유산과 자연생태환경에 연결성과 확장성을 부여하고, ‘복원’하고 ‘재현’하는 방식으로 현재성을 부여하는 성북동 에코뮤지엄 의 모델을 제시한다. 이를 통해 지역정체성과 공동체의식을 고취하며, 대외적으로는 지역의 경쟁력을 높이며 지역경제에 기여하는 기반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 학술자료
    성북 지역의 설화 : 삼선평과 옥녀봉 설화를 중심으로
  • 학술자료
    서울의 고밀화에 따른 도시형태 변화에 관한 연구 - 20세기 초부터 현재까지 돈암지구를 중심으로
  • 학술자료
    삼선평 주민의 마전
  • 성북구 단체 발간물
    현대문학 : 이태준, 김동리, 최정희 소설에 나타나는 성북동,낙산 일대의 공간 연구
    서사문학인 소설에서 공간 문제는 시간의 문제와 함께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여기서 공간은 일반적인 장소의 개념을 넘어 작가의 주제의식 표현의 매개로 이해할 수 있다. 이태준, 김동리, 최정희는 각각 일제 강점기, 해방기, 6.25전쟁기 동안 성북동, 낙산 일대를 형상화한 소설을 발표했다. 세 명의 작가가 한국 근현대사에서 의미심장하다고 볼 수 있는세 시기를, 일정 지역을 소설의 공간으로 삼았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로운 관점을 제공한다. 즉 공간을 상수로 고정시킨 뒤 시대와 작가를 변수로 놓았을 때, 작가의 시대정신을 더 면밀히 관찰할 수 있을 것이며, 더 나아가 지정된 공간의 속성을 다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살펴볼 작품은 이태준의 < 달밤 >, < 손거부 >, < 색시 >, 김동리의 < 혈거부족 >, 최정희의 < 인정 >, < 정적일순 >, < 찬란한 대낮 >이다. 각각의 작품은 성북동 그리고 삼선교와 동숭동에 해당하는 낙산 일대를 소설의 공간으로 삼고있다. 이태준의 < 달밤 >, < 손거부 >, < 색시 >에서 성북동은 기본적으로 성 밖의 공간성을 지니고 있다. 작품의 핵심 인물인 황수건, 손거부, 색시는 모두성 밖의 공간적 속성을 상징하는 인물들이다. 그러나 이 성 밖의 공간성은 성 안의 공간성이 침투함에 따라 변하게 되고 작품의 인물들은 외면받고 추방당하게 된다. 여기서 성 밖의 공간성은 반근대를, 성 안의 공간성의 침투는 근대화를 내포한다고 볼 수 있다. 작가는 성북동의 반근대적 속성이 근대화를 통해 사라지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여기면서도작가 특유의 상고주의적 성향을 통해 애잔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김동리의 < 혈거부족 >에서 낙산은 해방 이후 귀국한 동포들과 극빈자들을 통해 형성된 달동네로 그려진다. 해방만 되면 모든 일이 잘 될 거라는 막연한 기대와는 다르게 해방 당시의 조선의 상황은 매우 비참했다. 해방이전 꿈꿔온 공간이 ‘고향’으로 나타난다면 해방 당시는 가난, 무지, 죽음이 뒤섞인 공간인 낙산으로 형상화된다. 최정희의 < 인정 >, < 정적일순 >, < 찬란한 대낮 >은 낙산 일대를 배경으로 6.25 전쟁기의 가족 상실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최작가, 노파, 길수 어머니는 모두 여성 인물로 각각 전쟁통에 사라진 남편과 아들을 기다리고 있다. 여성 인물인 이들은 상대적 약자로서 비인간적인 다른 인물들의 횡포에 고통 받게 된다. 여기서 나타나는 낙산은 전쟁터도 피난처도 아닌 공간이며 작가는 이런 허공에 뜬 공간에서의 전쟁 체험을 소설화한다. 여성인물들의 고통은 점차 가중되며 낙산 일대는 죽음의 공간으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그러나 작가는 파종이나 결혼 같은 행위를 통해 죽음의 공간에서 희망적 공간으로의 공간 치환을 시도하고 있다.
  • 학술자료
    한국 근현대소설에 나타난 성북동, 낙산 일대의 형상화 고찰
    한국 근현대 소설 가운데 서울 도심지가 배경인 소설이 상당수 있다. 그 가운데 성북동 낙산 일대가 배경으로 그려진 소설은 얼마나 있을까. 1936년 돈암지구로 형성된 성북천 일대는 한양도성의 동소문인 혜화문과 서울성곽의 동측에 있고 선잠단, 성락원 등 중요한 유적들이 있어서 현재는 역사문화 컨텐츠와 함께 한옥밀집지역으로 가치가 높다. 성북천과 이어진 삼청동이나 삼선교는 모두 도교적 명칭인데 이러한 신선 사상이 워낙 산악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만큼, 성북동 뒤의 북한산과 삼선동에서 이어지는 낙산이라는 지리적 환경이 중요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 일대에는 예술가들이 많이 살면서 당시의 모습을 그린 작품들도 있는 만큼 이 일대, 즉 한성대학교 근처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찾아 구체적으로 지역이 언급되어 있는 성북동 일대와 삼선교 일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중심으로 한성대 근처가 어떻게 형상화 되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성북동 일대를 배경으로 한 이태준의 소설과 삼선교 낙산 일대를 배경으로 한 최정희의 <인정> 연작, 김동리의 <혈거부족>이 대상이 되겠다. 이태준의 성북동이 배경인 소설들은 일제 강점기에 발표된 작품들로 1930년대 작가가 성북동에 살았던 시기가 그려져 있고, 낙산 일대가 배경인 김동리의 <혈거부족>은 해방 이후 정부 수립 전이 배경이며, 최정희의 <인정> <정적일순>은 6.25가 시대적 배경이다. 이태준은 성북동에 십여 년 이상 살면서 성북동을 배경으로 한 서민들의 삶을 그린 작품이 여러 편 있고 그의 대표작들이 대개 이때 쓰여졌다. 작가 이태준이 살았던 시절인 1930년대 성북동 일대가 그렇게 넉넉하지 않았던 서민들이 살던 곳, 아직 인정이 남아있는 성 밖 마을이었고, 작가는 배우지 못해 어리석지만 악하지는 않은 하층민들에게 애정을 느끼면서 주로 자전적인 면들을 바탕으로 관찰자의 시각에서 그리고 있다. 김동리의 <혈거부족>은 해방 후 삼선교 한성 여중 일대에 산 위에 뚫려 있는 굴에 모여 사는 사람들이 제목으로 강조되고 있는데, 이 굴은 일제말기에 미군의 공습을 피하기 위해 조선총독부에서 판 것으로, 작품 모두(冒頭) 에 공간적 배경이 삼선교 돈암교 일대라고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최정희의 <인정>은 6.25 와중의 낙산이 배경이고, <정적 일순> 은 <인정>과 연작으로 보이는 작가의 자전적인 면이 그려져 있는데 낙산의 지형적 사회적 특징이 6.25의 혼란과 함께 잘 그려져 있다. 낙산은 경복궁을 중심으로 좌청룡 우백호에서, 좌청룡에 해당하는 산으로 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내사산-북악산(백악산), 남산, 인왕산, 낙산-가운데 가장 지대가 낮아 산 주변에 서민 주거지가 쉽게 형성된 곳이다. 현재 성북동이나 낙산 일대는 과거와는 매우 다른 만큼 이곳의 변모 양상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관련 작품을 찾아보는 일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 성북구 단체 발간물
    조선시대 선잠제(先蠶祭) 정비와 시행 의미
    선잠제는 양잠의 신 서릉씨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제사는 선잠단에서 지냈다. 그 시기는 매년 3월 첫 번째 巳日이었다. 선잠제는 제사의 대상이 여성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선잠제를 지내는 것은 백성들에게 양잠을 권장하기 위한 것이며, 이를 통해 풍요롭게 살기를 바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선잠제는 조선왕조에서 국가의 의례로 정비되었다. 조선의 의례는 크게다섯 가지로 분류하고 ‘오례’라고 했다. 제사를 지내는 의례는 ‘길례’였다. 선잠제는 그 제사의 규모가 중간에 해당했고, 제사의 대상은 사람, 곧 인귀였다. 그러므로 길례의 중사로 정해졌다. 선잠제에 대한 논의는 태종대부터 시작되어 세종대 『세종실록』 「오례」에 정리되었다. 이후 수정을 하여 『국조오례의』로 법제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선잠제의 의미와 의식은 강화되었다. 선잠제를 지냈던 선잠단의 위치는 지속적으로 이동하는 것이 논의되었다. 그렇지만 옮기지 않고 현재 성북동의 ‘先蠶壇址’에서 제사를 지냈다. 선잠제는 제사의 대상은 여성이지만 제사를 지내는 주체는 국왕이었다. 그러나 제사의 규모가 중사였기 때문에 관료를 보내어 대신 지내게 하였다. 이런 것을 섭사라고 한다. 선잠제는 매년 지내야 하겠지만 기록을 보면 그렇지 못하였다. 다만 세조와 명종은 상대적으로 자주 선잠제를 지냈다. 세조는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19세기에는 선잠제가 거의 매년 시행되었다. 왕권이 약한 대신에 의례를 강화하였기 때문이다. 선잠제 시행에서 큰 변화는 1767년(영조 43)에 있었다. 이 해에는 왕비가 친잠례를 치르게 되었다. 이때 영조는 왕비가 직접 선잠제를 치르도록하였다. 이것은 조선에서는 유일한 일이었다. 이때 왕비였던 정순왕후는 직접 술을 올리는 선잠작헌례를 시행하였다. 조선시대 선잠제는 백성을위하는 민본정치를 반영한 것이다. 또한 백성들의 의생활을 걱정하고 장려하였던 정책이 의식으로 완성된 것이었다.
  • 성북구 단체 발간물
    일제시기 도시문제와 지역주민운동 : 경성(京城)지역 성북동의 사례를 중심으로
  • 성북구 단체 발간물
    이태준의 성북동 : 이태준의 단편소설 및 『무서록』에 나타난 ‘교외’와 “구석진 곳”의 의미에 대하여
    이태준은 1930년대 성북동이라는 교외의 변화 및 인정세태와 풍속의 다양한 양상을 소재로 한 다수의 소설과 수필을 썼으며 그 구체적 재현의 질과 양에 있어서 독보적이었다. 그는 성북동에 거주하고 있는 어리숙한 빈민과 반편 등의 친밀한 주민이 급속한 도시화에 따라 도태될 운명에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해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한편으로 그의 소설은 문화주택에 거주하고 있는 속물적 인간상에 대한 냉소적 시각을 유지했다. 전자에 대한 애착은 고완품에 대한 이태준 자신의 각별한 의미 부여와 무관하지 않았다. 그런 만큼 몇몇의 수필에서 성북동의 풍경과 사물을 고완품으로 간주하고자 하는 생각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한 관점은 결국 단편 「장마」에서 수연산방에 거주하는 소설가 자신과 가족 전체로 향하게 되었다. 이 소설에서 소설가와 가족은 오랜 장마 속에 녹과 곰팡이 슬어가며 운무 속에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도시화․세속화의 시류로부터 낙오되거나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는 존재로 묘사된다. 스스로를 포함한 성북동의 주민들에 대한 이와 같은 관점은 그러나 식민지 조선의 대도시 경성으로 출퇴근하는 교외 주택민 즉 도시의 생활인으로서의 감각으로부터 연유한 위계질서와 미적 거리에 의해 가능해진 것이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시골이나 전원으로만 간주되던 성북동을 다양한 부류의 주민이 유입된 신흥 주거지로서의 변모에 주목하도록 했다. 이태준의 소설과 수필에서 성북동은 민간업자들에 의해 불수의적으로 조성된 시골이면서 도시이고, 도시도 시골도 아닌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의 공간으로 재발견된다. 이태준 자신의 의도와는 별개로 그것이 성북동이라는 교외에 복합적으로 공존하고 있었던 과거와 현재, 시골과 도시, 정지와 변화의 양쪽 모두 및 그 사이의 간극을 부지불식간 의식하도록 한다. 그리고 후자로부터 전자로 소급하고자 하는 상상적 단절과 거리가 시차(時差/視差)를 발생시키고 있었다. 이태준은 성북동의 “구석진 곳”에서 역사적 유효성을 상실했거나 앞으로 그렇게 될 것(죽음)임에 틀림없는 옛 도성에 비친 석양으로 비유되는 자기동일성의 세계에 천착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그것은 애초 소멸과 파국의 운명을 내포한 것이었다.
  • 성북구 단체 발간물
    성북지역과 향토문화
  • 성북구 단체 발간물
    성락원(명승 제35호) 주변지역 필지 변화과정에 관한 연구 - 성북동 문화재 주변을 중심으로 -
    본 연구는 서울시 성북구 성북동을 대상으로 근대 이후 문화재와 주변 경관 변화과정 및 원인을 사회·문화적인 측면에서 설명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1962년부터 2010년까지 사용한 폐쇄지적도를 이용하여 필지를 분석하고, 문헌자료를 참고하여 연구하였다. 시대별 변화과정 확인이 가능한 성락원, 마포최사영고택, 서울선잠단지, 서울한양도 성을 위주로 변화과정을 추적하였으며, 문화재의 소경관(素景觀)을 검토하고 필지 변화와 함께 경관변천을 분석하였다. 성락원은 1954년에 송석정과 연못이 조성된 모습을 소경관이라 볼 수 있으며, 마포최사영고택은 2003년 이후 성북동으로 이전·복원한 것, 서울선잠단지는 1960년대 개발로 현재의 터만 남게 된 모습을, 서울한양도성은 숙종30년에 석성으로 개축한 것을 각 문화재의 소경관으로 정의하였다. 성락원은 제도적 요인에 의해 변화가 생겼고, 마포최사영고택과 주변 경관은 사회경제적 요인에 의해 변화가 생겼으며, 서울 선잠단지와 그 주변은 사회경제적·제도적 요인에 의해, 서울한양도성과 그 주변은 기술적·제도적 요인에 의해 변화가 생겼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성북동의 문화재와 그 주변경관은 대체로 제도적 요인과 사회경제적 요인에 의해 변화가 생기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근대 이후 서울의 도시계획이 성북동에도 영향을 미쳤으리라 예상되며, 자본주의 경제체제 확립이 그 배경이 된 것이라 판단된다. 따라서 문화자원으로서의 잠재적 가치를 인식한 바람직한 경관변화가 이루어지길 기대한다.
  • 성북구 단체 발간물
    동소문 밖의 사람들― 미아리일대의 역사ㆍ공간ㆍ삶
    이 글은 20세기 도시의 역사를 저장하고 있는 미아리 일대의 역사적 시간과 공간의 변화과정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 사회적 약자가 도시공간구조 속에서 어떻게 배제되고 타자화 되어 왔는지를 규명하는데서 출발하고자 한다. 조선시대까지 미아리 지역은 한성부의 성저십리에 속하는 지역으로 국왕 호위와 도성보호의 역할을 한 도심의 허파와 같은 곳이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공동묘지로 지정되면서 지역의 명암은 바뀌어 갔고 미아리 고개 넘어 지역은 산자의 공간 보다는 죽은 자의 공간으로 인식되기 시작했었다.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피난민과 전재민들은 공동묘지 근처에 살기 시작했고 1950년대 후반부터 정부는 4대문 안의 간선도로변 판잣집 강제철거를 시작으로 수재민 화재민들을 이주정착지라는 이름으로 도심 외곽으로 집단이주정책을 펼쳤다. 첫 번째 대상지역이 미아리 지역이었고 그로 인해 자연스레 달 동네가 형성되게 되었다. 1960년대 시작된 미아리 지역개발은 이 지역 경관에 새로운 변화의 상징이었다. 길음교와 미아로 확장공사 정릉천 복개구조물 공사로 인하여 정릉천과 월곡천은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로 뒤덮게 되었다. 이 공간의 한쪽에 속칭'미아리텍사스촌'도 자리를 잡게 됐다. 1990년대 재개발로 들어선 아파트는 길음동 미아동 하월곡동일대를 주거지로 만들어 놓았으며 조망권이 높아질수록 속칭'미아리텍사스촌'의 재개발문제와 더불어 환경공해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었다. 2002년 시작된 뉴타운 사업의 확대로 근현대시기 동안 미아리 지역을 살아온 서민들의 역사 공간 문화들이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져가고 있다. 도심재생사업의 본격화로 인해 원주민과 도시 빈민들은 더 열악한 곳으로 밀려나기 시작했고 또한 수십 년 동안 가부장제와 공모하여 성문화의 대명사로 각인되어 온 속칭'미아리텍사스촌' 재개발 논쟁이 본격화되면서 성북구와 강북구는 미아리라는 지명을 강제말소 함으로써 균형 잡힌 도시의 역사와 도시의 정체성을 세울 수 있는 기회는 사라져버렸다. 미아리공동묘지 원조 달동네 미아리텍사스촌이라는 감추고 싶은 부끄러운 삶의 흔적이 된 채 도시화의 상처로 남아있다. 그러나 미아리는 근현대시기 동안 도시가 만들어낸 사회적 약자들의 삶의 터전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 성북구 단체 발간물
    1930년대의 문화지형과 한용운의 삶
    본 논문은 서울이라는 특정한 공간과의 상관관계와 교우관계를 중심으로 한용운의 사회활동과 삶의 의미를 고찰했다. 정치적·사회적 지향이 강했던 한용운에게 서울은 사회적 실천의 무대이자 핵심적 공간이었다. 한용운의 서 울에서의 활동은 심우장 시기를 전후로 두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북촌시 대 한용운은『유심』이나『불교』발간을 통해 여러 방면의 저명인사와 교류하 면서 3·1운동 참여, 불교청년운동, 신간회 참여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이 기간 동안 한용운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사회활동에 매진했고, 그 결과 몸 과 마음이 극도로 쇠약해졌다. 1933년 한용운은 결혼을 계기로 성북동 심우장이라는 곳에 난생 처음으로 자신의 명의로 삶의 공간을 소유하게 되었다. 심우장에 거처를 마련하면서 한용운은 처음으로 주거공간과 사회활동(업무) 공간을 분리시킬 수 있었다. 불교도로서 초심을 잃지 않고 끊임없이 참된 구도를 통해 사회적 실천을 이 어가겠다는 의지의 표명이 심우장 이사의 중요한 동기였다. 성북동 심우장은 한용운의 주활동 무대였던 북촌지역과 도보로 왕래가 가능할 정도로 서울 도 심과 가까우면서도 참선 수행이 가능한 조용하고 인적이 드문 곳이라서 한용 운은 지론인 생활선의 실천공간으로 안성마춤이었다. 심우장시대는 한용운의 자유로운 영혼을 더 이상 허락하지 않았다. 일제의 협박과 회유로 많은 민족지도자들이 변절하고 전향했으나 한용운은 일제의 어떠한 유혹이나 협박에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지조를 지켰다. 한용운은 변절자들과 공개적으로 절교를 선언하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한 김동삼의 유해를 모셔와 장례를 지내는 등 소극적인 저항을 계속했다. 그런가 하면 일 제의 온갖 회유와 협박에도 민족의 지조를 지킨 소수의 지사들과 마음을 열 어놓고 교류하면서 엄혹한 시기 민족의 앞길에 희망을 던져주었다. 그런 의 미에서 심우장은‘전시총동원체제기’라고 불리는 일제의 마지막 수탈과 발 악의 시기에 민족지조의 상징적 공간으로서 기억되고 있다.
  • 성북구 단체 발간물
    1930~40년대 성북지역의 학생운동
    1930~40년대 학생운동은 주로, 1937년 중일전쟁 이전에는 사회주의운동의 일환으로서 ‘학생반제동맹운동’이라는 형태로 전개되었고, 중일전쟁 이후에는 다양한 형태의 ‘소규모 비밀결사운동’이라는 형태로 전개되었다. 학생들의 동맹휴교나 문화계몽운동이 1930년대 중반 이후 양적ㆍ질적으로 감소되었던 반면, 비밀결사를 통한 학생운동은 1945년까지 지속되었다. 오히려 1940년대 전반기 들어 양적ㆍ질적으로 더 확대되고 강화되어간 면이 있었다. 경성부 내 지역과 경기도 고양군 일대에 걸쳐 있었던 성북지역의 경우, 1930년대 중반 무렵까지는 학교 설립이 다소 미미한 편이었으나, 1934년 보성전문학교의 안암동 이전 이후 각급 학교들이 서울 중심부와 가까운 성북구 관내에 교사를 신축해 이전하는 사례가 늘어났다. 또한 성북에 인접한 지역에는 원래부터 각종 관공립 학교와 사립학교들이 많이 있어서 성북지역은 이 학교 학생들의 하숙촌, 즉 그 배후지로서 기능하고 있었다. 1930년대 중반 이후의 학교 이전 등으로 인해 이러한 ‘학도촌’으로서의 역할도 더욱 강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앞의 사례들에서 살펴보았다시피 이와 같은 성북지역의 조건은, 1930~ 40년대 청년학생 중심의 반제항일민족운동 과정에서도 성북지역이 그 배후지 역할을 하는 것으로 연결되었다. 1930년대 학생반제동맹운동에 참여했던 다수의 학생들이 성북지역에 거주하고 있었고, 이는 1937년 중일전쟁 이후의 소규모 비밀결사운동 참여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성북지역 내의 여러 곳, 특히 성북동과 돈암동은 이러한 결사들의 설립 장소, 모임 장소 등 활동의 근거지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 학술자료
    마을만들기를 통해 본 거버넌스의 위기와 민주적 거버넌스의 재구성: 성북구 삼태기마을과 소리마을 사례를 중심으로
    본 연구는 최근 다양한 학문분야의 관심 주제인 마을만들기 거버넌스를 민주적 거버넌스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박원순 서울시장의 당선 이후 서울시가 본격적으로 추진한 마을공동체 사업은 각 마을공동체마다 마을만들기 거버넌스를 형성하였다. 마을만들기 거버넌스는 주민참여를 통한 마을공동체의 회복과 주민자치와 분권화 등의 민주주의적 가치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국가 중심의 행정 패러다임의 전환을 함축한다. 그러나 참여민주주의적인 가치로 정당화된 마을만들기 거버넌스는 실제 마을공동체 현장에서 민주성과 비민주성이 혼재되어 실천된다. 그러나 비민주적인 거버넌스의 실천과 그로 인한 거버넌스의 위기는 거버넌스의 실패로 귀결되지 않고, 거버넌스를 변화시키는 시민으로부터의 움직임이 나타나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본 연구는 1) 서울시의 마을공동체사업과 마을만들기 거버넌스가 주민참여와 주민자치의 민주주의적 가치를 정책적으로 제도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사업 수행 과정에서 민주성과 비민주성이 혼재된 양상으로 실천되는 이유를 탐색하고, 2) 이러한 거버넌스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마을만들기 거버넌스가 행위자에 의해 민주적 거버넌스로 재구성되는가를 분석하고자 한다. 거버넌스를 정책 제도나 객관적으로 고정된 시스템으로 인식하는 기존의 제도중심적 접근은 왜 마을만들기 거버넌스가 주민참여와 주민자치의 원칙이 체계적으로 제도화되어 있음에도 현실에서 비민주적 양상으로 드러나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또한, 마을만들기 거버넌스를 지배 헤게모니의 통치 양식으로 분석하는 구조중심적 접근은 어떻게 마을만들기 거버넌스가 비민주적 한계를 극복하고, 민주적 거버넌스로 변화하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이에 본 연구는 기존의 제도중심적, 구조중심적 거버넌스 접근을 지양하고, 행위자 중심의 거버넌스 접근을 통해 마을만들기 거버넌스를 고찰할 것을 제안한다. 행위자 중심의 거버넌스 접근은 거버넌스에 대한 행위자의 해석·재인식과 다양한 거버넌스 행위자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거버넌스가 구성된다고 본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기존의 거버넌스 전통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가진 행위자의 적극적 해석과 행위를 통해 도전받으며, 변화하고 재구성된다. 본 연구는 성북구의 월곡2동에 위치한 삼태기마을과 성북구 길음1동의 소리마을에서 추진된 마을공동체사업 사례를 중심으로 마을만들기 거버넌스를 민주적 거버넌스의 관점에서 분석한다. 두 마을은 각각 서울시와 성북구의 지원을 받아 지역 공동체를 재생하는 목적의 마을공동체 사업을 약 3년에 걸쳐 수행하였다. 초기 과정부터 사업 종료 이후 시점까지 두 마을만들기 거버넌스에 있었던 주요 사건들과 당시 사업에 참여하였던 거버넌스 행위자들의 해석을 토대로 거버넌스 과정을 하나의 내러티브로 재구성함으로써 본 연구를 수행하고자 한다. 본 연구는 거버넌스 참여자와의 심층 인터뷰와 문헌 조사를 주요한 조사 방법으로 삼는다. 행위자의 행위동기와 인식에 대한 적극적 해석, 그리고 두 마을 사례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들을 해석적 접근을 통해 분석하고 두 마을만들기 거버넌스의 과정이 지닌 정치동학을 밝히고자 한다. 연구 결과, 서울시의 마을만들기 거버넌스가 주민참여와 주민자치의 민주적 가치로 정당화됨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행정주도적·관주도적인 네트워크 거버넌스의 전통이 지속되며 이는 주민의 참여를 제한하는 등의 비민주적 한계를 드러내거나 거버넌스의 위기상황을 촉발시킨다. 이에 대해 지역 주민은 참여 영역을 확장하고 행정과 평등한 협력 관계로 변화할 것을 요구한다. 민주적 거버넌스의 재구성은 주민자치조직을 중심으로 한 자발적인 마을공동체 활동을 통해 가능하다. 또한 본 연구는 각 마을공동체의 협력의 전사와 사회적 자본에 따라 다양한 거버넌스 재구성 양상이 나타남을 밝힌다. 본 연구는 오늘날 민주주의와 동일시되어 온 마을만들기 거버넌스를 참여민주적 거버넌스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고찰하는 데에 의의가 있다. 또한, 행위자 중심의 거버넌스 접근의 타당성을 경험적으로 밝혀 거버넌스 논의를 한층 심화시킨다. 또한, 현재 서울시의 마을만들기 거버넌스가 주민참여 영역의 실질적으로 확장하여야 한다는 정책적 함의를 제공하며, 미시적 단위의 마을공동체를 통한 풀뿌리민주주의의 실현 가능성을 보인다는 데에서 정치학적 함의를 갖는다.
  • 학술자료
    주민참여형 주거재생사업의 추진과정에 관한 연구 : 서울시 성북구 장수마을을 중심으로
    그 동안 서울시는 주택공급을 위하여 뉴타운, 재개발 등의 대규모 정비사업을 진행하였다. 이로 인해 우수한 자연경관의 훼손과 주민공동체가 파괴된다는 등의 문제점을 발생하였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최근 서울시에서는 뉴타운, 재개발 진퇴를 주민의사에 따라 결정하겠다는 “뉴타운․재개발 출구전략”을 발표하였다. 이는 주민 과반 이상이 반대하면 뉴타운․재개발 사업을 취소할 수 있으며, 기존 주민들의 정착을 어렵게 하는 전면철거의 주택재개발방식이 아닌 공동체 마을 만들기 중심의 주민참여형 재생사업 방식으로 기존 주거지를 유지하면서 주거환경을 개선하는 방식으로 전환된 것이다. 이에 본 연구는 2004년 주택재개발예정지역 선정되었으나, 주택재개발의 어려움을 인지한 주민들의 의해 2013년 주택재개발예정지역에서 해제되고 주민참여형 지구단위계획 구역 지정되는 등의 변천사가 있는 성북구 삼선동1가 300번지 일대의 장수마을을 대상으로 한다. 또한, 연구의 목적은 마을에 거주하고 있는 주민이 중심이 되어 마을의 물리적 환경과 사회․경제적 환경을 개선하여 지속적으로 살아 갈 수 있도록 공동체를 형성하는 주민참여형 재생사업의 진행과정에 관한 사례를 분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발생했던 문제점 및 고려사항을 도출하여 사업완료 이후에도 주민에 의해 관리, 운영될 수 있는 방안을 제안하는 것이다. 장수마을 주민참여형 재생사업은 준비단계, 계획수립, 사업추진, 관리운영단계로 추진된다. 주민참여형 재생사업의 진행과정을 분석한 결과, 사업의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참여주체는 주민이라 할 수 있다. 장수마을은 지구단위계획구역이 지정되기 전에 주민협의회 및 골목별 주민모임을 중심으로 마을 커뮤니티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는 준비단계에서는 계획수립단계까지 주민간의 갈등이 최소화되었고, 주거환경관리사업 방식에 대해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리고 계획수립 단계에서의 주민의 참여도에 따라 사업추진과정의 인지 및 주민간의 이해와 사업의 만족도가 달라짐을 알 수 있다. 이는 사업이 완료 된 이후 마을 내 조성된 시설의 관리, 운영과 주민주도의 다양한 활동의 지속여부로 연결된다. 본 연구는 장수마을의 주민참여형 재생사업의 단계별 추진과정을 정리하고, 그 과정 속에서 발생했던 문제점과 고려사항을 도출하여 사업완료 이후에도 주민에 의해 관리, 운영될 수 있는 방안을 제안하였다는데 의의가 있다. 향후 관리운영단계에서 주민이 스스로 기획하고 운영할 수 있도록 주민의식과 역량 제고를 위한 지속적인 교육과 전문가의 지원, 주민공동시설의 관리운영을 위한 자발적인 재원마련 등의 구체적인 지원방안에 대한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사료된다.
  • 학술자료
    삼선교 시장 풍경
  • 학술자료
    마을만들기에 있어서 로컬거버넌스 형성요인에 관한 연구 : -서울시 성북구 장수마을을 중심으로
  • 학술자료
    미아리 점성촌 재개발 계획안 : 시각장애인을 위한 외부공간 조성을 중심으로
    서울의 도시는 인구의 집중이 극대화되면서 도시의 확대가 필수 불가결하였다. 하지만 급속 성장으로 인한 결과 서울은 불균형한 발전이 이루어지면서 소외된 계층의 지역은 점점 슬럼화 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러한 서울에 슬럼화 된 지역이 몇 군데 존재하지만 그 중에서도 미아리 점성촌은 60년대 말에 남산에 집단거주하고 있던 맹인 점술가들이 이곳 논밭에 집단 거주하게 되었고, 택지개발사업으로 인해서 그 지역 주변의 낙후된 건물들이 개발되면서부터 미아리 점성촌은 도시 주변과 고립이 되기 시작하였다. 미아리 점성촌 지역의 슬럼화는 다른 지역과는 또 다른 특성은 두 가지 점이 두드러지고 있다. 첫 번째는 점성촌이라는 특이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 두 번째는 점성촌을 형성하고 있는 사람이 대부분 시각 장애인이라는 점으로 나누어진다. 또한 우리 사회는 시각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보통의 사람들과는 다른 계층으로 인식되면서 시각 장애인은 고립된 소외계층으로 고립되어있는 상황이다. 이와 같은 상황은 미아리 점성촌이 돈암동 일대에 아이덴티티(identity)의 한 요소로서 지금까지 자리 잡고 있다고 본다. 본 연구에서는 이 지역의 독특한 문화라고 말할 수 있는 시각장애인이 거주하는 점성촌의 외부공간을 건축적으로 계획하여 주변 도시지역과 연계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그 방법으로는 이 지역의 재개발을 통해서 시각 장애인들과 도시 주변과 교류할 수 있도록 방안을 제시하는 것으로 한다. 특히 이 계획안의 주안점은 시각 장애인과 주변의 지역주민들이 단절되어있는 것을 연계하는 방법으로서, 자연스럽게 만나서 교류할 수 있는 외부공간을 제공함으로써 상호 교류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계획안을 제시 하였다. 미아리 점성촌 재개발 계획에서 외부공간을 활성화시키는 방법으로서 시각장애인이 방향감을 가장 쉽게 인지 할 수 있는 후각, 촉각, 청각을 이용하여, 데마별 공간 개념으로 후각공간, 촉각공간, 청각공간을 계획하였다. 첫번째 후각공간에서는 간접적 치료 효과가 있는 특색 있는 향기(아로마 향기)로 구성된 식물 재배장을 계획하였다. 두 번째 촉각공간에서는 점자도서관, 지역주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도서관 및 바닥의 재질을 촉각적으로 분류하여 펀칭 메탈·나무·자갈로 구성된 길을 걸으면 다른 공간과 다른 바닥 재질로 인해 현채 공간을 인지할 수 있도록 계획하였다. 세 번째 청각공간에서는 미아리 고개에서 발생되는 소음을 감소시킴과 동시에 시각 장애인에게 공간 유도를 하는 방법으로 사운드 스케이프(sound scape)를 이용하여 소음을 해결하고, 행사장에 행사를 홍보하는 역할을 하도록 계획하였다. 각각의 외부공간은 시각장애인이 철학관으로 혼자서 진입할 수 있도록 함과 동시에 지역주민들도 외부공간을 이용하게 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상호교류(intermix)가 이루어지도록 함으로 이 지역의 슬럼화, 고립화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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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1980년대 길음동, 북아현동의 서민주택의 현황 및 공간구성방식에 관한 연구 : 길음뉴타운, 북아현뉴타운을 중심으로
    서울은 구한말 개항과 갑오개혁 및 기독교의 유입으로 본격적으로 근대화가 시작된다. 근대화로 인한 도시로의 인구 집중은 한옥의 밀집화와 대량생산에 대응한 도시형한옥을 만들어 냈다. 인구 집중에 대한 주택 정책은 계속되었지만 주택공급량은 인구증가량을 따라가기에 역부족이었고, 이에 따른 불량주거지는 계속 존재해왔다. 집을 짓는 것은 단순한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 전체적인 사회, 경제, 기술, 정치와 같은 관념들이 상호작용에 의하여 특징 지워지는 문화적 특성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또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는 서민주택은 자본가들이 서구의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하는 반면, 생활방식 자체에 전통적인 요소들은 한 번에 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평면배치라든가 형태 등이 거의 변하지 않는다. 이런 서민주택은 일제강점기라는 역사적 단절을 극복해 전통민가와의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본 논문에서는 이러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불량주거지와 노후주거지에 남아있는 서민주택을 중심으로 사회&#8228;문화적 변화에 주거환경이 대응한 공간구성방식을 분석, 이를 비교하고, 분포와 현황을 파악하였다. 2장에서는 구한말, 일제강점기, 해방이후로 시기별로 나누어 서울의 근현대 건축의 역사의 흐름을 살펴보았다. 구한말 개항부터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공간구성방식으로 전환과 공공건축에 외세가 우리나라에 준 영향에 대해 살펴보았다. 또 산업화 도시화로 인한 도시인구 밀집에 정부와 민간의 주택 대응에 대해 알아보았다. 또 조사대상인 서민주택의 특징에 대해 서술하였다. 도시형한옥은 그 원형인 전통한옥과 도시형한옥의 전반적으로 기본이 되는 상품화, 중부형민가, 문간채의 차가(借家)등의 특징을 숙지하였고, 서민주택은 그 원형이 되는 토막집과 토막집과 같은 불량주거지에 대한 영단주택의 정책을 알아보았다. 3장에서는 “길음뉴타운“ 과 ”북아현뉴타운“에 남아있는 조사대상 주택의 분포를 통해 서민주택의 도로와의 관계, 주택정책이 미치지 못한 서민주택지역의 현황과 건축물 대장, 토지대장, 실측을 통한 무허가 정도를 분석하였다. 이에 앞서 노후주택에 대한 서울시의 정책적 대응과 시책 그리고 이를 추진하기 위한 행정&#8228;재정적 조치들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가를 간략하게 기술하였다. 4장에서는 서민주택을 도시형한옥과 간이주택으로 나누어 사회&#8228;문화적 변화에 주거환경이 대응한 공간변화특성을 분석, 이를 비교하였다. 이상과 같이 현재 대장상에 남아 있는 기록과 실측을 통한 조사를 비교 분석해 보았다. 서민주택의 대부분은 무허가이거나 무허가 면적을 포함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공간구성방식의 변화는 대부분 평면확장이나, 부수입을 위한 셋방이나 상점 등으로 용도를 변경하여 사용하고 있었다. 이 연구는 건축물 조사 대상에서 일반적으로 제외되고 있는, 재개발정책의 지구수복화로 그 기록도 제대로 남기지 못한 채 무차별적인 철거에 직면한 서민주택에 관한 연구이다. 주류가 아닌 비주류 또한 이 시대를 나타내고 있는 지표로 인식되어 계속적인 연구가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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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천사의 조선후기 불교조각
    본 논문은 서울 돈암동에 소재한 흥천사의 조선후기 불교조각을 연구한 것이다. 조선 초에 조성된것으로 추정되는 천수관음보살좌상은 별도의 논문에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제외하였다. 흥천사의 주불전(主佛殿)인 극락보전에는 목조여래좌상, 목조보살좌상, 천수관음보살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목조본존불상과 우협시로 봉안된 목조보살좌상은 16~17 세기에 서로 다른 곳에서 조성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천수관음상은 조선 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본존불로 봉안된 여래좌상은 경상북도 문경에 있었던 오정사(烏井寺)에서 옮겨온 불상으로 추정된다. 관음전에 봉안된 목조관음보살좌상과 남순동자상 및 해상용왕상은 1701 년에 조성된 것으로, 전북 임실 사자산 적조암이 원 봉안처이고, 조선후기에 흥천사로 옮겨진 상들이다. 남순동자상과 해상용왕상은 관세음보살상과 함께 조선후기 불화로도 조성될 만큼 유행했던 도상이기 때문에, 관음보살의 협시로 동시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명부전에는 지장삼존상과 시왕을 비롯한 명부 권속이 총 27 구 봉안되어 있는데 1873 년의 개채기(改彩記)가 남아 있다. 조각의 기법으로 보아 17 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했으며, 현 명부전이 1855 년에 건립되었기 때문에 1701 년작 관세음보살상과 함께 적조암 또는 전라북도의 어느 사찰에서 이안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진다. 흥천사 노전(爐殿)의 석조 약사여래좌상·아미타여래좌상·지장보살좌상은 왕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을 밝혀냈다. 약사여래좌상은 1829 년에 조성되었으며, 아미타여래좌상과 지장보살좌상은 1829 년에서 1847 년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본 논문에서는 노전에 봉안된 3 구의 석조 불교조각상의 명칭과 조성 연도를 복장(腹藏) 조사를통해 밝힐 수 있었다. 또한 흥천사는 조선초기부터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왕실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었음을 조선후기 불교 조각을 통해서 밝혀냈다는 데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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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민유산 5호, 서울 성북구 동선동 권진규 아틀리에_하나밖에 모르던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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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선교의 젊은 예술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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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만들기의 추진단계별 로컬거버넌스 형성에 관한 연구: 성북구 장수마을 사례를 중심으로
    본 연구는 성북구 장수마을을 사례로 마을만들기 추진단계별 로컬거버넌스의 형성과정을 살펴보고, 마을만들기 실천을 위한 정책적 함의를 도출하였다. 이를 위해서 마을만들기의 추진과정을 초기단계, 성숙단계, 발전단계로 구분하고, 마을만들기의 로컬거버넌스 분석요소를 사회적 요인, 지역적 요인, 제도적 요인 등의 환경요인과 주요 행위자, 상호작용, 연계구조 등의 네트워크로 구성하였다. 분석결과, 주요 행위자들이 마을만들기 추진단계에 따라 급격하게 증가되며, 주도집단이 추진단계마다 지속적으로 변화하였다. 또한, 마을만들기가 추진되면서 행정과 마을주민과의 관계구도가 상호갈등 관계에서 상호협력의 관계로 변화되었다. 그리고 마을만들기가 추진되면서 협력적 거버넌스의 관계를 형성하는 주요 행위자들이 증가되었다. 마을만들기의 추진과정에서 주요 행위자간 로컬거버넌스 형성과 마을만들기의 실천을 위한 정책적 시사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마을만들기 및 마을주민에 대한 행정의 변화가 마을만들기에서의 로컬거버넌스 형성에서 중요하 다. 둘째, 지역에서 마을리더 및 주민협의회를 적극적으로 발굴 및 양성하기 위해 지방자치단체의 재정적 지원과 주민역량강화 교육이 필요하다. 셋째, 지방자치단체장의 마을만들기에 대한 관심과 의지는 마을만들기에서 참여주체간 로컬거버넌스 형성에 중요하게 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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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대문 밖 돈암지구 주거지의 형성과 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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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암지구(1940-1960) 도시한옥 주거지의 도시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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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都市型韓屋의 內外部空間構成 變化에 관한 硏究 : 서울시 성북구 동소문동, 삼선동, 안암동을 중심으로
    1930년대 중반 이후 만주사변을 계기로 일제의 식량수탈정책으로 인해 농촌으로부터의 이농인구가 도시로 몰려들게 됨으로 당시 경성의 인구는 급격한 증가를 겪게 되고 주택문제가 심각히 대두되었다. 따라서 당시에 당면한 도시의 주택문제를 완화하기 위해 새로운 도시주거지의 개발이 필요하게 되었고 이때 등장한 것이 도시형 한옥이었다. 이런 역사를 갖고 등장한 도시형 한옥은 그 형식이 과거 우리나라의 주거문화를 지니고 있으면서 좁은 대지에 밀도를 높일 수 있도록 마련된 도시형 주거라는 점에서 그리고 새로이 근대화된 주거지 구조 체계 내에서 형성된 주거환경이란 측면에서, 이전의 전통한옥과 비교해서 도시적 특성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현재까지도 우리의 주거문화를 담아 이어오고 있다. 그러나 이런 도시형한옥은 근대화와 도시화를 거쳐 많은 문화적․경제적 변화를 겪어왔다. 이런 사회구조 속에서, 기존한옥은 변화하는 사회적 상황과 주거환경에 대응하여 증개축․신축을 통해 주공간 변형과 주생활변화가 이루어 졌다. 이런 일련의 변화는 사회․경제적 요인과 물리적 환경요인에 의해 발생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거주자의 내적 요구뿐만 아니라 외부환경도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의 도시형 한옥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현거주자들이 주공간을 개조하고 변형하는 요인을 다음과 같이 분석할 수 있다. 첫째, 내부공간의 변화요인으로는 해방이후 서구식 주의식, 주생활의 도입으로 서구식 공간규범이 유입되었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주생활양식이 변화하여 설비의 근대화, 주의식의 변화, 생활의 합리화 의식 고조로 주거공간을 크게 바꾸어 왔다. 또한 주생활양식이 점차 다양해져 다양한 주택평면유형이 생겨나고 이는 결국 주거형태의 개성화로 표출된다. 이런 변화를 수용하기에 공간이 부족하다면 거주자들은 공간확장을 통해 주요구를 실현시키려고 한다. 게다가 오랜 定住性으로 가족주기가 바뀌고 생활수준도 바뀌어 거주자의 욕구와 능력에 맞게 현주거공간을 적절히 융통성 있게 변화한다. 둘째, 외부공간의 변화요인은 공간과 생활방식 사이의 갈등으로 주공간에 대응하여 처마선이 있는 외부공간까지 실로 확장․활용하였다. 그리고 공간부족으로 마당을 내실화하는 적극적 개조행위가 이루어져 거실중심의 공간이 형성되어 주생활양식이 바뀌어 갔다. 또한 이런 변화로 인해 출입구의 변화가 일어나는데 이로 인해 단계적 영역흐름이 급진적 진입으로 형성되어 다소 불안한 주거입지를 갖고 있다. 또한 생활의 서구화로 인해 마루(거실)중심의 공간이 형성되고 각 실이 개실화됨에 따라 마당 중심의 기능이 축소되어 현재 마당은 동선통로 위주로 바뀌었으며 길과 향에 대응하여 공적공간에서 주거내 진입에 변화가 발생하여 대문이 이중화되거나 진입방향이 변경되는 등의 변화가 일어났다. 게다가 경제적 사정으로 용도변경이나 부분적 공간 임대를 통해 출입방식의 변화가 발생한다. 셋째, 한옥의 증개축 등 주거조정행위가 골목형에 따라 차이를 보이며 일어났으므로 그 요인은 다음과 같이 분석할 수 있다. 1) 필지면적에 따라 한옥의 증개축의 정도가 차이가 났는데 좁은 필지의 한옥은 적극적 증개축 행위가 많이 일어났고 좁은 주공간을 확장하는 방법이 벽을 따라 가는 확장과 마당을 실로 만드는 적극적 행위의 증개축 행위가 일어났다. 그리고 큰 필지의 한옥은 유지관리 및 보수행위가 더 많이 일어났다. 2) 길의 특성과 한옥의 증개축 행위간의 관계를 살펴보면, 막힌 골목형과 루프형이 뚫린 골목형에 비해 더 활발한 증개축이 일어났다. 막힌 골목형과 루프형은 장소적 개방감이 커서 상호교류가 이루어져, 생활양식을 잘 알고 서로 비슷한 상황을 유지해나간다. 그에 반해 뚫린 골목형은 통과도로의 경향이 강해 개인화 및 집단적 영역성이 약해 밖으로 나와 서로 대화를 나누는 경우는 거의 없고 집안이나 마당에서 활동이 더 활발하였다. 이는 막힌형이나 루프보다 골목의 영역성이 보다 내부로 들어와 마당에서 개성적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길의 물리적 특성이 이웃 간의 커뮤니티에 영향을 미치며 교류의 활성화를 통해 공유된 기치관과 경험이 주택의 개보수 행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상에서 나타난 도시형 한옥의 내외부공간과 주생활의 변화특성을 분석한 결과, 여러 가지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속되는 특성을 살펴볼 수 있다. 안방의 가족생활중심공간으로서 지속성, 마루공간의 생활기능의 지속성, 한옥의 실구성방식의 지속성, 향에 대한 선호, 외부공간으로부터 대문간의 단계적 접근의 지속성을 들 수 있다. 이상과 같이 한옥주거공간의 변화특성과 지속성은 우리의 전통성을 반영한 주거계획시 그 특성을 반영할 수 있고 다양한 생활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여 주공간을 융통성 있게 변화해온 행위들은 주거공간의 적절한 사용의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으며 주거지계획시 일괄적인 街區와 길의 계획보다는 거주자들에게 보다 나은 주거환경을 제공하고 커뮤니티가 형성될 수 있는 도로의 특성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 성북구 단체 발간물
    1960년대 이후 서울시 장위동 국민주택 단지의 변화특성에 관한 연구
    한국의 경우 한국전쟁 이후 시작된 도시화로 인해 도시 거주자가 증가하였고, 이는 다시 심각한 주거 문제를 야기하였다. 이에 따라 한국토지주택공사는 소규모 근대적 도시형 주택단지를 잇달아 건설하는 등 주택난 문제를 일부 해소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계획적인 주택단지를 바탕으로 민간건설사들이 주택건설에 나서면서 주거지역이 확대되었다. 이후 무분별한 도시개발로 인해 사회변화에 적합한 주변 편의시설이 부족해지면서 주거환경이 점차 악화되었고, 서울시는 여러 재개발 사업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업들은 주민들의 친숙한 생활 환경을 파괴하고 도시 역사를 단절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본 연구는 한국토지주택공사 주관으로 개발되고 있는 여러 도시형 택지지구 중 하나인 장위동을 중심으로 국민주택개발단지의 물리적 특성을 조사하고 분석하기 위하여 수행되었다. 본 연구는 1960년대 이후 형성된 도시주택단지의 건축적 변화 특성도 조사하였다. 본 연구결과는 기존 도시주거지역에 적용 가능한 주택유형을 제시하는 근거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 성북구 단체 발간물
    지역 개인 미술관 사례를 통한 미술관 건립계획에 관한 연구 : 윤중식과 성북지역의 연관성을 중심으로
    과거 신성시 되었던 예술은 현대에 와서 대중성을 지니게 되면서 하나의 문화로 변화하였다. 후기 자본주의 사회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문화 예술적 욕구는 과거 의식주와 같은 생명유지의 필연적 조건이 되었다. 문화강대국이란 말이 생겨날 만큼, 현대사회에서 문화는 욕망과 경제의 교차점에 위치한 핵심 요소로서 자리매김 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해방 이후 급속하게 진행된 계획 경제발전으로 인해 모든 문화 예술적 인프라가 서울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방자치제도가 시행되면서 각 지역은 미술 전시, 공연과 같은 문화 예술 행사들을 지역이 지니고 있는 역사,문화와 어우러진 문화자본으로 개발하여 그 지역의 경제를 이끌고 있다. 일반인들 역시 다양한 전시나 문화 프로그램 등에 참여하고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 그 지역 내에서 소통하고 문화 지식을 향유하는 것이다. 본 연구는 이러한 흐름에서 지역 작가 미술관 역시 지역문화의 일환으로 전시뿐 아니라 다양한 프로그램을 실시함으로써 일반 대중들이 미술작품과 작가, 그리고 미술사적 지식을 향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역할을 하고 있음에 주목하여 이루어졌다. 본 연구에서는 국내·외의 작가 미술관 가운데 지역을 대표하는 성공적인 작가 미술관 네 곳을 선정하여 미술관과 작가와의 연계성, 미술관 건축물과 지역성, 미술관이 지역에 미치는 영향 등을 연구 조사하였다. 이 같은 조사 연구를 통해 우리나라 2세대 서양화가로서 중요한 위상에 있으나 연구가 미흡하여 미술사 연구에 하나의 잃어버린 고리와도 같은 화가 윤중식의 작가 미술관 건립 계획에 관한 안을 제시하였다. 또한 문화지리학적 장소성과 지역 작가 미술관 콘텐츠가 형성하는 공간의 문화자본 생산 메커니즘에 대해서도 제안하였다. 국내 작가 미술관은 지역자치단체가 설립·운영하거나 개인 및 재단이 설립·운영하고 있으나 최근에는 개인이나 재단이 설립한 후에 지역자치단체에 도움을 받는 경우도 있다. 본 연구에서 선정한 작가 미술관은 국내의 경우 서울 부암동에 있는 환기미술관과 경북 통영의 전혁림미술관이다. 이 두 곳 모두 사립 미술관의 성격을 지니고 있으나 운영방식에서는 많은 차이가 있다. 환기미술관은 재단과 미술관 내의 조직으로 많은 인원들이 분야별로 나뉘어서 활동하며 지원금이나 기부금으로 운영된다. 전혁림미술관은 환기미술관과 마찬가지로 작가의 유지를 이어서 설립되었지만 재단이 아닌 개인이 운영을 맡고 있다. 이 두 미술관은 운영체계나 규모 면에서 차이가 보이고 있지만, 특정 지역에 위치함으로써 지역 문화 기반에 구조를 형성하며 지역뿐 아니라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미술관으로서의 위상을 지닌다. 해외의 작가 미술관으로는 피츠버그의 앤디 워홀 미술관과 뉴멕시코 산타페에 위치한 조지아 오키프 미술관을 선정하였다. 미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인 워홀과 오키프가 현재 미술관이 있는 지역과 어떤 연관성을 가지며, 미술관의 운영 방안과 프로그램 등이 지역의 문화와 경제에 어떤 영향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지를 중점적으로 살펴보았다. 이러한 특정 지역에 위치한 작가 미술관의 성공사례를 바탕으로, 본 연구에서는 우선 윤중식 미술관의 부지로 계획된 작가 자택이 위치하고 있는 서울 성북동 지역의 장소성에 관해 고찰하였다. 성북 지역은 한국 근현대미술이 태동할 무렵부터 우리나라 미술계를 주도하는 많은 작가들이 거주하며 작품 활동을 전개해왔던 문화적으로 특이성을 갖는 공간이다. 한국 미술사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 성북동의 역사와 이 지역에서 활동한 작가들, 그리고 미술관과 다양한 전시 공간들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어 성북 지역에 60년이라는 오랜 세월을 거주하였던 윤중식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고찰하였다. 이를 토대로 윤중식의 자택을 개조하여 작가 미술관의 설립 계획을 물리적 공간, 운영방식과 같은 시스템,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계기인 콘텐츠 등으로 나눠 살펴보았다. 계획의 핵심은 작가가 몸을 담아 살고 작업했던 공간을 그대로 전시공간으로 안배함으로써 문화를 몸으로 향유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소통이다. 이것은 성북 지역의 특정한 장소성으로 인해 자연스레 문화자본의 생산과정으로 편입되며 미술관과 공간이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사례 연구를 통하여 추출된 다양한 프로그램 기획을 일반 대중들의 참여와 체험이 가능하도록 운용함으로써 지역 내의 중요한 문화공간으로서 기능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작가 미술관은 그 지역의 문화자원으로서 한 예술가의 생애를 그대로 반영한다. 특히 윤중식미술관은 작가의 소장품, 유품, 그리고 다양한 자료 등을 활용하여 윤중식과 동시대의 미술가들의 입체적 전시와 연구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 윤중식미술관의 건립과 함께 그것이 우리나라 미술사 쓰기와 후대의 작가 발굴에 힘을 보탤 뿐 아니라, 성북 지역의 문화자본 생산에 하나의 결절점 혹은 변곡점이 될 것이다.
  • 성북구 단체 발간물
    서울 한양도성 성곽마을 창출에 관한 연구 : 서울시 성북구 북정마을을 중심으로
    본 연구는 서울 한양도성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추진을 계기로 주변 마을에 나타난 변화에 주목하고, 평범했던 주변 마을이 ‘살아있는 유산’인 성곽마을로 창출되는 양상을 고찰하는 데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 서울시 성북구 북정마을의 마을 만들기를 중심으로 새롭게 창출된 성곽마을로서 북정마을의 현재적 의미를 파악하고자 하였다. 최근 서울시는 서울 한양도성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시키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에 따라 서울 한양도성의 세계유산적 가치와 관련한 다양한 분야의 연구가 진행되고 있으며, 그 중 도성의 인문학적 가치가 주목받고 있다. 도성의 인문학적 가치를 대표하는 성곽마을은 1930~60년대 성곽 주변에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마을로, 도성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주민들의 생활문화로서 가치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성곽마을의 가치는 유네스코 등재 추진 이후 새롭게 조명된 것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의 등재 기준에는 해당 문화유산에 관한 법적・제도적 관리 정책이 수립되어 있어야 한다는 조항이 있는데, 이는 해당 문화유산을 국가와 지자체가 얼마나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있는가에 관한 부분이다. 따라서 등재 시점까지 성곽마을은 지속적인 보존・관리의 대상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한편 성곽마을의 보존・관리에 있어 마을공동체는 대단히 중요한 기제로 활용된다. 서울시의 적극적인 지원 하에 활성화 되고 있는 마을 만들기는 공동체의 참여와 지속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살아있는 유산’으로서 성곽마을의 성격과 관계가 있다. 북정마을은 서울 한양도성의 북악산 자락에 위치한 무허가 주거지로 최근 축제를 통한 마을 만들기를 시도하였다. 북정마을의 마을 만들기에 관계된 주체로는 북정마을 주민, 서울시, 성북구와 성북문화재단 등이 있으며 각각의 주체를 중심으로 마을 만들기 전개 양상을 살펴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우선 북정마을 마을 만들기의 실질적 주체인 주민들은 서울 한양도성과 성곽마을에 대한 외부의 시선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으며 이를 마을 만들기에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능동적 태도를 보인다. 서울시는 서울 한양도성과 성곽마을을 ‘역사도시 서울’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으로 보고 있으며 이를 보존 및 관리의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성북구와 성북문화재단은 ‘역사문화’를 강조한 성북의 정체성에 부합하는 대표적인 역사문화자원으로서 이를 성북의 관광문화로 활용하고자 한다. 이상의 내용을 통해 필자는 북정마을이 마을 만들기를 통해 ‘살아있는 유산’인 성곽마을로 창출되었으며, 그 결과 보존 및 활용의 문제를 수반하게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제 성곽마을은 서울 한양도성과 함께 지속적인 보존・관리의 대상이자 관광자원화의 대상이 되었다. 성곽마을의 창출 과정에서 각기 다른 주체들은 북정마을과 주민들의 생활문화 일체를 객체화하였으며 이를 적극적으로 유용하였다. 분명한 것은 마을 만들기를 통해 성곽마을로 창출된 북정마을이 현 시점에서 ‘살아있는 유산’이자 서울 한양도성을 둘러싼 ‘문화적 경관’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점이다. 본 연구는 북정마을의 마을 만들기에 관계된 다양한 주체들의 의도와 목적을 분석함으로써 새롭게 창출된 성곽마을로서 북정마을의 현재적 의미를 이해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북정마을의 정체성은 고정된 형태가 아닌 끊임없이 변화하는 가변적 속성을 지니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북정마을의 사례를 통해 확인한 가변적 속성은 다른 성곽마을에도 적용될 수 있다. 향후 서울 한양도성 주변 곳곳에서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성곽마을 창출 양상에 대한 지속적 관심이 요구된다.
  • 성북구 단체 발간물
    1980년대 이후 성북동 주거지역 건축물의 용도변화 특성 연구
    건축물의 용도 변화는 최근 국내의 저층 주거지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변화 중 하나다. 특히 저층 주거지의 용도 변화는 2000년대 이후 특정 주거 지역이 지나치게 상업화됨에 따라 학계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왔다. 하지만 성북동의 용도 변화는 상업화라는 부정적인 의미 외에도 도시의 다양성과 적응성 측면에서 긍정적인 의미도 있다. 성북동은 한양 도성에 면하여 위치한 주거 지역으로 과거 사대문 밖으로 도시가 확장되면서 형성된 주거지다. 특히 1970년대 시행된 성북천 복개공사 이외의 대형 개발이 없고 일부 지역의 주택재개발사업이 무산되면서 도시형 한옥을 비롯한 지난 80여 년간의 도시조직과 구성원이 남아 있는 역사문화지역이다. 성북동은 1980년대부터 주거지의 용도 변화가 시작되었으며 200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서서히 진행되었다. 역사문화자원의 가치 상승으로 인한 상업화의 영향과 재개발구역 설정 등 물리적인 개발 제한 속에서도 변화는 지속적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그 변화는 대규모 개발 과정에서도 급격하게 일어나지 않았으며 거주자 이탈, 무분별한 신축, 골목 상권 파괴 등의 일반적인 도시적 문제점 역시 두드러지게 발생하지 않았다. 건축물의 용도 변화는 성북동의 기존 물리적 환경을 유지한 채 다양한 업종으로의 변화를 수용하였고, 변화 과정에서 독특한 공간 활용 방법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양상은 삼청동, 홍대 인근 등의 저층 주거 지역의 용도 변화가 지나친 상업화 혹은 문화 주도적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인한 지역 고유의 매력 퇴색, 부작용 초래 등과는 다르다. 본 연구의 목표는 성북동 건축물 용도 변화의 물리적 특성을 도시 맥락적 특징과 건축정 특징으로 나누어 밝히는 것이다. 도시 맥락적인 특징은 용도 변경 건축물의 지역 내 균형적 분포현황, 상업화와 커뮤니티 밀착형 용도의 공존이다. 성북동 건축물의 용도 변경은 1980년대 초 이면가로에서부터 시작되었으며 상업가로변과 더불어 이면가로변에서도 54%가 진행되었다. 상권의 변화가 가장 활발한 성북로 30m 구간의 업종과 용도 변화 대상이 다양하여 가로환경에 다채로움을 유지하고 있다. 그중 지역 주민을 위한 생활근린업종이 상업시설 사이에 분포하여 남아 있는 것은 급진적인 상업화를 막고 지역 주민의 가로 이용률을 높이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성북동 이면 가로는 대부분 4m의 보차혼용가로이며 입지 목적에 따라 세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개인적인 목적의 용도 변경은 종교시설, 고급주택 주변에서 진행되며 공통적인 특징이 없다. 골목상권 형성의 가능성이 있는 중고등학교 인접 가로변, 교차로와 한옥밀집구역에 용도 변화가 일어났다. 마지막으로 임차료가 저렴한 곳을 찾는 새로운 계층을 중심으로 한 재개발구역이다. 성북동의 건축적 변용은 역사문화자원 주변의 개발 제한, 재개발구역으로 인해 신축, 증·개축이 제한되는 제도적 제어 아래 있었다. 이는 신축보다 창의적이고 다양한 공간감을 느낄 수 있는 요인이 되었다. 건축물 단위 성북동의 공간적 특성으로는 총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유휴 공간의 활용이다. 성북동은 2010년부터 인근의 혜화동의 지가가 상승하면서 연극단이 유입되었다. 극단은 기존 창고로 쓰이거나 비어 있던 지하 공간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또한 한옥의 유휴 공간 활용이다. 한옥의 앞, 뒷마당 공간으로 수평 증축은 대부분의 개조 과정에서 일어나고 있지만 옆 건물과 다양한 형태의 민원 문제가 쉽게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둘째, 인접 건축물과의 연계다. 이면거리에 위치한 오래된 목구조 주택, 한옥은 건물 간의 이격거리가 짧고 층수가 낮아 멸실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개조 시 인접 건물과 연계하여 수평, 수직 증축을 하면서 특색 있는 공간을 연출하였다. 개조 과정에서 과소평가되었던 인접 공간을 연계하여 증축하는 방식은 저층 주거지의 이면가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80년대 이전의 목구조 주택을 유지하고 가치 상승 가능성을 보여준다. 셋째, 탄력적 공간 이용이다. 성북동의 2015년 일부 재개발구역이 해제되며 개발의 가능성이 높아졌다. 특히 신축 시 적용되는 건축법에 따른 면적 제한으로 인해 건축주가 개조방식을 선호하는 추세에 따라 이에 대한 세부 연구와 제도 정립이 필요하다. 또한 성북동은 오래된 목구조 건축물이 많이 남아 있고 개조를 통해 가치를 상승시킨다는 것을 중요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성북동은 상업화의 속도가 급진적이지 않고 대형 개발이 없어 시대적 변화를 수용하며 다양한 방식으로 용도 변화가 진행된 대표적인 저층 주거지다. 그 물리적인 특징은 성북동과 유사한 골목, 구릉지 등을 가지고 있는 지역과 더불어 급격한 변화로 인해 지역의 독특한 정체성을 유지하지 못한 지역의 공간관리계획에 시사점을 줄 것이다.
  • 성북구 단체 발간물
    1960년대 서울 정릉동의 도시한옥에 관한 연구
    도시한옥이란 전통주거유형인 한옥이 도시화와 근대화라는 사회적 변화에 적응한 주거유형이다. 이런 도시한옥은 근대 이후의 급격한 변화속에서 시기와 지역에 따라서 유형의 특성이 조금씩 다르다. 경제개발이라는 급격한 변화를 갖는 시기에 지어진 60년대의 도시한옥은 이전 시기의 도시한옥이 보편적인 주거유형으로 도시에서 보급되었던 것과 다르게 적응하였다. 본 연구는 정릉동 372-20번지일대 도시한옥주거지를 중심으로 1960년대의 도시한옥에 대해서 연구하였다. 서울은 1914년 이후 1936년, 1949년, 1963년에 행정구역을 크게 확장하였다. 이 중에서 1949, 1963년 확장된 행정구역은 1960년대 도시계획을 통해서 주거지로 개발 되었다. 이렇게 개발된 주거지에는 주로 민간건설업자들이 단독주택을 지어 보급하였다. 1960년대의 도시한옥은 확장된 주거지에 지어지던 단독주택의 한 유형으로 새로운 주거유형과 경쟁속에서 지어졌다. 60년대의 정부 정책과 건축산업, 제도는 목구조가 주구조체인 도시한옥에게 불리하게 작용하였다. 첫번째 민간건설을 지원하는 융자지원제도에서는 내화구조나 방화구조가 아닌 목조건축물이 배제되었다. 두 번째 부동산투기억제책의 일환으로 제시된 건물시가기준표준안은 목조건축물의 가치를 낮추었다. 세 번째 당시에 산림녹화사업으로 인해서 벌채가 억제되어 대부분의 목재 공급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어 목재의 단가는 다른 건축 재료에 비해서 두 배 가까이 상승하고 있었다. 하지만 도시한옥의 건설량은 전체 주택의 건설량 증가와 함께 증가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60년대의 주거생활방식이 좌식생활, 기능의 미분리, 유교적 의례, 작업공간인 외부 공간 등으로 대표되는 전통적인 주거생활방식이 유지되고 있었고 도시한옥은 이런 1960년대의 주거생활방식을 수용하기에 적합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전의 도시한옥과 같이 보편적으로 보급되기에는 경쟁력이 부족하였고 집을 구매할 때 자신이 선호하는 생활방식을 선택할 수 있는 경제적 여유를 가진 사람들을 중심으로 도시한옥은 특화된 주거유형으로 자리 잡았다. 정릉동은 1960년대 대표적인 도시한옥 밀집지역 이었다. 정릉동은 1949년에 서울의 행정구역 안으로 편입된 지역으로 대부분의 지역은 토지구획정리사업과 같은 택지개발사업 없이 택지 개발부터 주택 건설까지 모두 민간에 의해 개발된 지역이다. 본 연구의 대상지역인 정릉동 372-20번지일대의 도시한옥주거지는 경신학교가 1954년 정릉동에서 혜화동으로 이전하면서 남겨진 공지에 1967~68년에 민간건설업자에 의해서 계획적인 격자형 주거지로 필지가 분할되고 도시한옥이 건설, 분양되었다 주거지구조는 80x90m의 폭 6m의 접근로에 둘러싸인 장방형의 블록을 폭4m의 진입로가 관통하여 6열의 필지를 2열 분할 방식으로 나누고 있다. 이런 주거지구조는 모든 주호가 차량접근성이 확보되고 주거환경이 균일하다는 장점이 있어 1960~70년대에 토지구획정리사업지구인 화양지구, 영동지구에서 많이 나타난다. 필지의 규모에 있어서도 정릉동 도시한옥주거지의 필지가 9.2~12x14m로 128~169㎡의 면적을 갖는다. 돈암지구를 비롯한 도시한옥주거지나 60년대의 면목 지구 등 대부분의 토지구획정리사업지구에는 필지 면적 100㎡내외로 소형 필지로 대상지역의 필지가 비교적 큰 필지임을 알 수 있다. 대상지역과 유사한 필지규모는 1960년대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이루진 지역 중 동남부 권역의 중심지역으로 대규모로 사업이 이루어진 지역으로 다른 지역에 비해서 준수한 주거환경을 가지고 있었다. 정릉동의 도시한옥은 6열의 필지에 38채가 지어졌다. 모든 주호는 진입방식과 필지의 규모의 차이가 없어 동일한 구성을 갖는다. 그리고 그 구성은 ㅡ자의 문간채와 ㄱ자의 안채가 결합된 ㄷ자형 도시한옥을 바탕으로 1960년대의 주거생활방식을 반영하여 과시적인 경향과 기능을 중요시하는 평면계획을 보여준다. 첫 번째로 도시한옥의 의장부재는 가로와 마당에 면한 부분을 중심으로 과시적으로 사용되었다. 전통한옥에서 사용되던 관습적인 부재의 위계보다는 대청과 마당 그리고 가로를 비롯한 외부에서 보여지는 시각적 위계를 중요시한다. 이런 과시적인 경향으로 굴도리, 원주, 장식적인 기단의 위치를 문간채의 바깥 면 그리고 안채의 마당에서 보이는 면에만 사용되고 있다. 두 번째로 관습적인 채 간의 위계질서에 의해서 안채와 문간채가 구조적인 분리가 이루어지고 차가(借家)와 주거생활이라는 문간채와 안채의 기능 차이에 의해서 두 채가 영역이 분리되며 문간채의 계획에서 관습적인 안채와의 관계를 무시하고 문간채의 면적을 확장하는 계획을 보인다. 이는 문간채가 안채의 부속채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차가의 기능을 가진 독립된 채로 분리되는 것이다. 세 번째로 새로운 계획의 요소들이 도입된다. 문간방과 부엌의 면적을 늘려 기능적으로 필요한 공간을 확보하고 이렇게 화보된 공간에는 문간방의 앞에 현관과 부엌과 안방을 연결하기 위한 복도를 두어 채의 기능을 개선하고자하는 노력을 보인다. 이런 동선은 새로운 주거유형에서 나타나는 동선체계로 도시한옥에서 주거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이를 수용한 것이다. 정릉동 도시한옥은 단순 필지 구획의 개발방식에어서 벗어나 계획적인 개발방식이 적용되어 대형 블록 안에 공지와 주거지를 함께 계획하고 있다. 그리고 평면의 계획에서 전통적인 주거생활방식을 유지하며 새로운 계획요소를 수용함으로서 더 나은 주거환경을 만들었다. 이런 정릉동의 도시한옥주거지의 주거지 구조, 공간의 구성은 1960년대의 도시한옥이 기존의 보편적인 도시주거유형에서 벗어나 구매자들에게 새로운 접근방식으로 기존의 도시한옥이나 당시에 지어지던 단독주택에 비해서 더 나은 주거환경을 제공하는 고급 주거지를 지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한식목구조가 가지는 구조적 한계를 벗어나려고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 성북구 단체 발간물
    휴먼라이브러리에 관한 연구 - 서울시 성북구의 휴먼라이브러리를 중심으로 -
    새로운 형태의 도서관으로 휴먼라이브러리는 도서나 인쇄매체가 아닌 사람이 정보자료가 되어 이용자와 직접 커뮤니케이션을 통하여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는 도서관서비스의 개념이다. 휴먼라이브러리는 ‘사람책(휴먼북)’을 통하여 정보를 교환하기 때문에 기존의 도서관서비스와는 다른 특성을 내포하게 되며 새로운 도서관 형태로서의 의의를 지니게 된다. 이에 본 연구는 서울시 성북구에서 실시된 휴먼라이브러리에 관하여 연구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본 연구는 휴먼라이브러리에 대한 이론적 배경과 성북구의 휴먼라이브러리의 배경을 살펴본 후, 이를 바탕으로 2012년과 2013년에 진행된 성북구의 휴먼라이브러리에 대한 사례분석을 통해 구체적인 내용과 실태 및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을 분석∙제시함으로써 휴먼라이브러리에 관한 이해 증진에 일조하고자 한다.
  • 성북구 단체 발간물
    필지 변화를 통해 본 근대 이후 문화재 주변의 경관변화에 관한 연구 : 성북동 문화재 주변을 중심으로
    본 연구는 근대이후 서울시 성북동의 문화재와 주변 경관 변화과정과 원인을 분석하고자 하였으며 시대별 폐쇄지적도를 이용한 필지 분석과 문헌자료를 참고하여 연구하였다. 경관은 대체로 제도적 요인과 사회경제적 요인에 의해 변화가 생기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근대 이후 서울의 도시계획이 성북동에도 영향을 미쳤으리라 예상되며자본주의 경제체제 확립이 그 배경이 된 것이라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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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역사회 문화유산의 재조명과 새로운 도시경관의 창출-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을 사례로-
  • 성북구 단체 발간물
    이태준과 도자기 : 일본어 수필 「破片的な話(파편적인 이야기)」와 성북동을 중심으로
    본고는 이태준과 도자기의 관계를 새로 발굴된 일본어 수필 「파편적인 이야기」와 관련 자료를 중심으로 살펴본 것이다. 1930년대 본격적으로 창작 활동을 시작한 이태준은 소설가인 동시에 편집자로서 문학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와 동시에 도자기를 중심으로 이태준을 조명할 필요가 있는데 본고는 그것을 발굴 자료를 중심으로 검토하였다. 수필 「파편적인 이야기」에 따르면 이태준은 부친의 연적을 계기로 도자기에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본고는 그것을 계기로 이태준이 쓴 도자기 관련 글을 세 편 확인하였다. 이 글에서는 또한 이태준이 1930년대 중반 이화여자전문학교 박물관 주임으로 수집 활동을 하였고 성북동을 중심으로 형성된 수집가 네트워크에도 참여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이처럼 도자기는 이태준의 생애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전기적 사실은 기존의 연구에서 간과되었던 문학사와 미술사가 새롭게 마주치는 지점을 부각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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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릉 일원의 입지와 공간구성특성에 관한 연구
    본 고는 조선시대 왕릉 중 중요한 역할을 점유하고 있는 서울 성북구 석관동에 위치하고 있는 의릉의 정원건축적 특성을 파악하기 위하여 입지 및 공간구성특성을 중심으로 고찰한 바, 집약된 결론은 다음과 같다. 첫째, 입지는 당시 궁궐로 사용한 창덕궁으로부터 약 6.4km, 도성 사대문 밖 흥인지문을 기준으로 의릉까지의 거리는 약 5.5km로 보아 조선시대 능원묘제에 따른 거리기준(40km)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둘째, 능의 공간구성과 용도에 따라 진입공간, 제향공간, 능침공간으로 구분하는 바, 공간위계에 따라 홍살문, 정자각, 명등석, 혼유석, 봉분으로 공간 축을 형성하고 있는 바, 이는 자연에 순응하면서 조화로우며, 왕권의 권위적인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셋째, 공간구성요소에는 석물의 경우 상계에는 능침, 석양, 석호, 혼유석, 망주석이. 중계에는 문석인, 마석, 명등석이, 하계에는 무석인, 석마 등이 위치하고 있으며, 건조물의 경우 정자각은 이익공의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익칸이 있으며, 참도는 신도와 어도로 구분되며, 수공간인 연지와 재실은 멸실되고 없으나 관련 고증자료를 통해 그 위치, 규모, 형태 등을 파악할 수 있다. 식생은 능상 주변의 경우 소나무 군락이 조성되어 있으며 능하구역은 느티나무, 전나무 등 64종이 분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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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우장(尋牛莊)의 정체성 확립과 보존관리 방안에 대한 연구
    서울의 목조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국보 제1호 숭례문이 화마로 사라지고 말았다. 이 참사는 정부의 안일한 문화재 관리 의식과 태만이 빚은 결과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문화재관리 전반에 걸친 총체적인 점검과 방화뿐만 아니라 도난, 훼손 등 위험에 노출되어있는 문화재에 대한 철저한 관리감독과 보다 새로운 관점에서 우리 문화재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보다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보존관리방안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만해 한용운 선사는 민족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요 불교사상가이다. 그가 말년을 살았던 서울 성북동의 심우장은 민족의식을 고취시킨 문화재로서의 소중한 가치가 있음에도 지금까지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해 왔다. 사실상 지금까지 만해 선사에 대한 수많은 연구는 주로 그의 문학적인 측면에 집중되어 왔다. 만해 선사가 조선총독부와 마주보게 되는 것이 싫어 북향으로 집을 지어 생을 마감한 곳이 심우장이다. 다시 말해 우리 민족 주체성 회복의 공간이요, 자존의 역사적인 의미가 내재된 공간이 심우장이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심우장의 그 기능을 오늘날의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하고 민족문화 창달의 공원으로 거듭나게 해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간 심우장이 우리의 민족사에 있어 귀중한 문화재로서의 정체성을 잃고 우리의 관심 밖에 있어 왔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은 심우장이 단순한 문화유산의 한 부분일 뿐 우리의 내면세계를 움직이는 문화역량으로 살아 움직이지 못해 왔음을 반증해 준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일제 강점기에 올곧은 정신으로 자유와 평등사상, 그리고 생명사랑을 실천한 만해 선사의 생애와 불교사적 위치, 민족정신 고취의 공간으로서의 심우장의 의의와 현재의 보존관리 상황을 살펴보고, 마지막으로 향후 심우장의 보존관리방안과 그것의 성역화 사업을 통한 우리의 문화 창달의 한 방안을 모색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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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북지역의 문화예술자료 관리에 관한 연구
  • 성북구 단체 발간물
    서울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주변경관의 시각적 특성연구
    본 논문은 성북동의 역사문화자원 주변경관을 대상으로 경관 형용사 분석에 의한 시각적 특성을 분석하고, 시각적 특성과 선호도와의 관계를 파악하고자 하였다. 연구는 성북동에 위치하고 있는 역사문화자원 주변 경관사진 30장을 선정하여 설문조사를 실시하였으며, 경관 선호요인을 파악하기 위하여 16개 형용사를 척도화하여 요인분석을 실시하였다. 마지막으로 이미지 요인이 시각적 선호도에 미치는 영향을 파악하기 위하여 분산분석과 회귀분석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성북동 내 역사문화자원이 분포하고 있는 주변에 나타나는 경관에 대한 30장의 사진을 대상으로 16개의 형용사 어휘에 대한 선호도 평균분석을 실시한 결과, 전체적인 선호도 평균치는 3.72로 분석되었는데, 이들 중 4.5점 이상의 사진은 VP8번, VP9번, VP10번, VP12번, VP15번의 순으로 높게 나타났으며, 전체적으로 높은 선호를 보인 곳은 마포 최사영 고택과 성락원 주변경관으로, 이는 역사문화자원 주변에 대한 서울시 경관계획에 의해 고도를 제한함으로써 역사문화환경보존지역에서 문화재와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북한산에서 북악산으로 이어지는 조망경관이 양호하게 확보되고 있는 것이 중요한 이유로 판단된다. 둘째, 역사문화자원 주변경관에 대한 시각적 특성을 요인 분석한 결과, 요인 1(심미적 요인), 요인 2(문화적 요인), 요인 3(물리적 요인) 등 3가지 요인으로 요약되어 구분할 수 있었으며, 시각적 선호도와 이미지 요인에 대한 회귀분석 및 분산분석 결과는 심리적 요인이 성북동의 역사문화자원 주변경관에 대한 시각적 선호 이미지를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나타났다. 이는 역사문화자원에 대한 조망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역사문화자원 주변에 위치한 주거지역에 대한 심미적 요인이 높은 것으로 분석된 것이다. 셋째, 역사문화자원 중 정비되지 않은 주거지역 주변경관에서는 부정적인 측면의 인자가 부각되고 있으며, 역사문화자원과 조화될수록 물리적, 문화적, 심미적 특성의 3가지 영역에서 긍정적인 측면의 인자가 높게 부각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향후, 본 연구에서 표출된 인자에 대한 요인을 분석함으로써 역사문화자원 주변의 경관관리에 있어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할 요인을 도출하기 위한 다각적 분석이 필요하다.
  • 성북구 단체 발간물
    근대인물 문화재 가치창출을 위한 스토리텔링 방법 : 서울특별시 등록문화재 268호 최순우 옛집을 사례로
    본 연구는 서울시 등록문화재 268호 최순우 옛집을 사례로 하여 근대인물 문화재 가치창출을 목적으로 인물사와 문화재를 연계로 한 스토리텔링의 기초검토와 작성방법을 제시하였다. 문화재의 문화콘텐츠 가치 분석 결과, 미술사학자 최순우의 미학사상이 옛집의 공간(사랑방 · 뒤뜰)과 유물 (현판 · 예술품 · 전통수목)에 핵심적으로 반영되어 있음을 파악하였다. 그리고 본고에서 제시한 스토리텔링 작성 5단계 즉, 취지 알리기, 인물 소개하기, 인물과 문화재 연결하기, 인물을 통해 문화재 보기, 문화재와 대중 연결하기 기법을 통해 ‘최순우의 한국미(美)를 통해 본 옛집’의 이미지를 창출하였다. 나아가 보존주체인 내셔널트러스트 시민단체의 역사계승운동을 문화재 현대적 가치로 주목하여 스토리텔링에 반영, 이를 대중의 자발적 보존활동의 유도기제로 설정하였다. 본 연구의 의의는 한 문화재 사례를 통해 근대인물의 특징과 문화재인 문화콘텐츠 가치의 상관성을 효고적으로 추출한 점 그리고 이를 스토리텔링으로 가공하여 해당 문화재의 고유한 이미지를 창출하고 새로운 문화자원으로서의 가능성을 모색한 점에 있다.
  • 성북구 단체 발간물
    1950년대 한국 영화산업과 미국의 원조 : 아시아재단의 정릉 촬영소 조성을 중심으로
    미국의 민간원조 기구인 아시아재단은 1953년부터 한국 영화산업을 지원하기 위한 조사를 시작했다. 찰스 태너(Charles Tanner)는 1953년과 1954년에 각각 한국 영화산업에 대한 아시아재단의 지원 계획안을 작성했으며, 1955년에는 아시아재단 도쿄 사무소에서 영화를 담당하고 있던 존 밀러(John Miller)가 한국을 방문하여 산업의 현황을 조사하고 계획안을 제출했다. 찰스 태너와 존 밀러는 전후 한국의 영화산업이 직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로서, 첫째, 영화를 제작할 물적 기반의 파괴, 둘째, 영화산업에 대한 정부의 강력한 지배를 지적한다. 이와 같은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아시아재단은 민간의 비영리, 비정치 조직으로서 한국영화문화협회를 설립했다. 아시아재단이 총 50,000달러를 들여 마련한 영화 제작 장비를 맡아 운영하면서 한국영화문화협회는 1950년대 말 한국 영화산업이 활성화되는 데는 기여하였다. 하지만 정부가 영화를 지배하는 상황을 타개한다는 아시아재단의 애초 목표는 이루어지지 못했는데, 이는 공보와 선전의 수단으로 영화를 중시했던 한국 정부에 대규모의 원조가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이 글에서는 스탠포드 대학교 후버 인스티튜션 아카이브에 소장되어 있는 아시아재단의 영화 프로그램 관련 파일들을 검토하여 한국영화문화협회의 설립과 활동 과정을 재구성함으로써 전후 한국의 상황과 영화에 미친 미국의 구조적인 영향을 밝히고자 했다.
  • 학술자료
    도시 속의 비화(1) : 갈 곳 모르는 비둘기의 고장/성북동
  • 학술자료
    김환기와 성북동 수향산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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