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학 연구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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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술자료
    문학 연구와 인식적 로컬리티, 그리고 지역 내러티브 - ‘성북문학’을 중심으로
    이 글은 ‘성북문학’을 사례로 하여 문학 연구에 개입할 수 있는 ‘인식적 로컬리티’의 개념을 고찰하고, 문학 연구와 그것을 통한 ‘지역 내러티브’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순간을 포착한다. ‘성북’은 ‘성북문학’이라는 말이 어울릴 만큼 문인과 관련 문학작품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 지역이다. 그와 관련하여 성북 문학은 성북 내의 여러 기관과 관련하여 다각도로 발굴되었고, 조명되었으며, 또한 호명되었다. 의욕적으로 문인과 작품을 호명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관점들이 동원되었고, 이에 따라 지역의 문학 현상에 접근하는 것이 기존의 방식을 넘어서는 특징을 보인다는 것이 논의되었다. 이른바 ‘로컬리티’가 인식적으로 호명되는 과정이며, 이에 따라 ‘인식론적 로컬리티’와 ‘심상지리’, ‘지역 내러티브’가 가능하게 되었다. 로컬리티를 밝히는 것이 지역 내의 관련 사실을 찾아내고 증명하는 것을 넘어서, 지역과 관련된 인식을 찾아내는 것, 거기에서 나아가 인식을 창출하고 재생산하는 것까지 닿아 있는 일이라는 것을 성북 문학의 사례를 통해 서술하였다.
  • 학술자료
    자치분권의 시작, 성북마을아카이브
    성북마을아카이브는 성북구청과 성북문화원이 협력하여 지역의 고유성과 특수성을 담고자 구축한 마을아카이브이다. 공동체의 기록물을 보존하는 공동체 아카이브이자, 원천자료의 디지털화를 통해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가는 디지털 아카이브이다. 민⋅관 거버넌스로 연차적⋅단계별 추진을 거쳐 관리시스템과 홈페이지를 구축하였다. 성북마을아카이브의 시스템은 고도화된 마을기록 표준분류체계를 바탕으로 자료축적과 개별 기록물 간의 연결이 원활히 이루어지도록 설계되었다. 성북문화원은 이를 바탕으로 기록물을 온⋅오프라인으로 연계하면서 융합문화콘텐츠를 생산하려고 노력하였다. 또한 기록물의 보존뿐 아니라 콘텐츠 생산 및 활용을 위해 홈페이지에 보여지는 항목 구성을 다양화했다. 성북의 역사문화자원을 어떻게 하면 이용자들에게 그 생성 및 존재를 맥락과 함께 보여줄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 끝에 만든 구조이다. 또한 다채로운 큐레이션과 주민기록단의 활동을 통해 보다 풍부한 아카이브 플랫폼을 구축하였다.
  • 학술자료
    존 듀이의 경험예술론 관점으로 본 성북구립최만린미술관의 가치 - 개관전 ‘흙의 숨결’ 전시 공간 사례를 중심으로 -
    뮤지엄은 여가 시설을 넘어 사회 공동체에 필요한 보편적 담론을 공유하는 민주 사회 실현의 공간으로써 기능하길 요구받고 있다. 존 듀이의 경험예술론도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이 존중받으며 소통하는 민주 사회를 중시하는 프래그머티즘(pragmatism)의 배경에서 등장했다. 기존의 교조적인 분위기의 뮤지엄 전시공간을 탈피하고 예술이 공감될 수 있는 미술관으로 나아가야 하는 인식이 확산되며 이러한 패러다임이 형성되었다. 성북구립최만린미술관은 조각가 최만린이 30여 년간 거주하며 작품을 창작하고 그와 관련된 일상 흔적들(traces)이 남아있는 장소이다. 감상자가 작업 과정과 작품까지 경험할 수 있는 ‘작가가옥미술관’의 한 유형이다. 이러한 ‘작가가옥미술관’에 속하는 ‘권진규 아틀리에’, ‘최순우 옛집’, ‘종로구립 고희동 미술관’, ‘종로구립 박노수 미술관’을 선행 조사하였다. 그 결과 위 사례들은 장소성과 작가의 미적 의도의 유기적 관계보다는 복원과 보존에 집중하고 있었다. 따라서 본 연구는 성북구립최만린미술관의 사례를 경험예술론 구조로 분석하고 존 듀이가 말하는 예술과 장소의 유기적 관계가 무엇이며 어떻게 이뤄지는지 이해해보고자 한다. 예술이란 미처 성숙되지도 조직화되지도 않은 일상적 경험들이 하나의 의미로 완결된 닫힌 단위이다. 예술은 일상의 경험에 미적 정서가 교차되며 이것을 예술가가 매개체로 표현함으로써 이뤄진다. 존 듀이가 말하는 예술의 원리와 과정에 착안하여 뮤지엄의 공간 요소들을 실제 구조 즉 예술의 매개체로 보았다. 매개체에 담기는 미적 의도는 추상구조이며, 실제구조와 추상구조의 간극은 인터뷰 영상이나 작품 설명 텍스트와 같은 언어구조를 통해 감상자에게 전달될 수 있다. 따라서 이 세 가지 구조로 최만린미술관의 경험예술적 가치를 분석하고자 한다. 분석한 결과 세 가지의 가치를 도출할 수 있었다. 첫째, 작가의 일상과 예술을 연결시키는 구조를 생각해 봄으로써 작가가 부재한 경우에도 경험예술을 전시 공간에 구축할 수 있는 토대를 제안할 수 있다. 둘째, 작가의 일상 흔적들을 증거물로 삼아 관객이 능동적으로 작가의 작품세계를 탐미해볼 수 있도록 보조하는 데에 작가 가옥의 장소성을 활용할 수 있다. 셋째,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이후 망실된 한국예술연구의 열악한 상황에 작가가옥을 기반으로 한 경험예술적 뮤지엄은 당대를 다채롭게 증거하는 연구의 거점이 될 수 있다. 이를 통해 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술에 공감하며 시민의 일상이 예술로 고양될 수 있도록 보조하는 경험예술의 뮤지엄 공간을 연구하고자 한다.
  • 학술자료
    서울시 성북동 성낙원과 독립운동가의 활동-화사(華史) 이관구(李觀求)를 중심으로-
    이 글은 20세기 초부터 1945년 해방 전후에 이르는 시기에 성낙원이 위치했다고 고려되는 의친왕 별업(別業)을 중심으로 독립운동가 화사 이관구의 활약을 설명하는 것이 목적이다. 동시에 대표적인 근대 문화유산인 성낙원이 지니는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하는 것이 부수적인 의도이다. 이 글을 통하여 성낙원이 일개 문화재라는 차원이 아니라 조선시대부터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해방 정국에 이르는 장대한 시간 속의 흐름에서 시대적 문화상을 지니던 역사적 기념 공간으로 조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의친왕과 이관구가 교유하던 해방 조국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물들의 궤적을 살필 수 있는 토대라고 할 수 있다.
  • 학술자료
    거버넌스레짐을 통한 협력적 거버넌스에 관한 탐색적 분석 - 성북구 지역사회혁신계획 사례를 중심으로 -
    본 연구의 목적은 협력적 거버넌스 현장에서 드러나는 현상과 내부 구조의 영향을 파악하여 총체적인 이해를 시도하는 것이다. 사례로 성북구 지역사회혁신계획을 선정하고, 협력적 거버넌스 통합모델을 변형하여 적용하였다. 이를 위해 문헌연구와 관계자 26명을 인터뷰하여 자료를 수집하였다. 인터뷰 내용을 기반으로 민관의 협력 인식을 비교하고, 운영형식을 통해 주요 구성원 파악 및 구조적 특성을 파악하고, 거버넌스 레짐을 통해 구성원 간의 연합 구성과 특성을 분석하였다. 분석 결과, 첫 번째로 성북구 공무원과 시민사회 사이에는 리더십과 인센티브 확보 지점에서 주된 협력 형태가 나타났다. 두 번째, 운영 형식에서는 성북구 외부의 서울시장과 서울시 공무원도 중요한 구성원으로 나타났으며, 내부적으로는 민과 관의 역할이 분절되여 갈등구조가 나타났다. 세 번째, 거버넌스 레짐의 측면에서 정치계 연합, 정치계-시민사회 연합, 정치-계층제 임시 연합 그리고 계층제의 작동 가능성을 확인했고, 이 구조를 통해 협력이 유지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네 번째, 공무원과 시민단체 간 연합이 형성되지 않는 이유로 계층제와 시민사회의 특성 차이, 파트너십 형성 부재, 대면 논의 부족, 자원 투입 및 성과에 관한 인식 차이, 공무원의 인센티브 인식, 공무원의 시민사회에 대한 맹신 또는 불신을 들 수 있다. 결론적으로 성북구의 협력적 거버넌스는 겉으로 드러나는 민관의 협력 형태는 약하나, 내부 구성원 간 연합을 통해 협력적 거버넌스가 유지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 학술자료
    흥천사 扁額(편액)·懸板(현판) 연구
    본 논문은 서울 성북구(城北區)에 위치한 흥천사(興天寺)에 소장된 편액과 현판의 전반적인 현황을 검토하고 편액 글씨의 서예사적 의미를 밝히고자 하였다. 우선 서울의 전통사찰 가운데 가장 많은 편액·현판을 보유한 흥천사는 기존 궁궐 건축의 편액 위계 상, 모든 전각의 편액이 형식상 가장 높은 위계를 표시하는 사변형 현판으로 조성되어 왕실 원찰로서의 사격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는 흥천사가 신덕왕후(神德王后) 정릉(貞陵)의 능사로서 현재의 위치에서 중창한 이후에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같은 왕실인사와 세도가들의 원찰(願刹)로서 위상이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편액 사례 중에서도 드문 세로로 긴 붉은 색 복판에 테두리 끝에 용두형(龍頭形) 봉으로 장식한 명부전(冥府殿) 편액은 유교식 장례에서 사용하는 명정(銘旌)의 형식을 차용한 사례로 보았다. 특히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인근 봉국사(奉國寺) 명부전 편액도 붉은 색의 세로형 복판에 유사한 형식으로 조성되어 당시 이 지역에서 유행한 형식일 가능성이 있다. 또한 흥천사 명부전 편액의 용두형 봉 장식이 시왕(十王)의 어좌 장식과 유사한 도상과 방향으로 조성되어 있는 사실에 착안하여, 조선 후기 사변형 편액의 봉 장식 기원에 대해 규명하였다. 즉 고려부터 조선 전기의 편액이 중국 현판의 형식적 특징을 그대로 수용하여 조성된 반면, 조선 후기의 편액은 판재형 테두리 끝에 목각 봉 장식을 붙인 간소화한 형태로 나타난다.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조선후기 편액 형식의 기원으로는 임란 이후 소실된 궁궐과 주요 건축을 대규모로 중건하는 과정에 많은 물량의 편액을 조성하면서 어좌(御座)나 교의(交椅) 같은 의자의 권두형 장식을 차용하여 간소화하였다고 추정하였다. 마지막으로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모연(募捐)하여 1869년 조성된 흥천사 대방(大房)에 그가 쓴 예서 편액이 게시된 사실에 주목하였다. 정치적 야망을 이루기 위해 집권 이전부터 불교의 원력에 의지하였던 그가 집권 이후에도 흥천사를 비롯, 화계사(華溪寺), 운수암(雲水庵), 흥국사(興國寺) 등 근기(近畿) 지역 사찰에 중창을 주도하면서 대방 건축을 조성하고 스승인 추사 김정희(金正喜)의 영향을 받은 고예체(古隷體) 편액을 게시한 사실은 스승과의 서예적 사승(師承)을 뚜렷이 하고 자신의 집권을 알리려는 정치적 의도가 있었다고 보았다.
  • 학술자료
    조선전기 능침사의 설치와 변화 - 서울 지역 능침사를 중심으로
    본 논문은 조선전기에 설치된 능침사 가운데 오늘날 서울 지역에 소재한 능침사의 현황과 특징, 변화상을 분석한 연구이다. 서울에 소재한 조선전기 능침사는 정릉(貞陵) 의 흥천사, 경릉(敬陵)과 창릉(昌陵)의 정인사(수국사), 선정릉(宣靖陵)의 봉은사 등 총 3곳이다. 조선전기 서울 지역 능침사의 특징은 세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서울의 세 능침사는 왕실의 대표적인 추복도량이었을 뿐만 아니라 왕실의 정치 적 위상을 제고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서울 지역 능침사들이 도성과 인접한 곳에 위치해 왕실 불사의 설행이 용이했고, 불교행사를 통한 민심 결집에도 효과적이었기 때문에 왕 실의 정치적 기구로 활용될 수 있었다. 둘째, 서울 지역의 능침사 건립을 주도한 인물들은 당대 최고의 권력층이었다. 도성 인근에 대규모 가람이 설치되었던 것은 상당한 자금과 막강한 정치력이 요구되는 사안이 었다. 이 사찰들은 왕실의 전폭적인 재정 지원을 받아 조성되었고, 왕의 사액을 받음으로써 명실상부한 왕실사찰로 자리매김했다. 셋째, 서울 지역의 능침사는 왕실불교의 거점이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유학자들의 표 적이 되었다. 정동의 흥천사는 유생들의 두 번의 방화에 의해 결국 폐사되었고, 정인사는 부녀자들의 음란하고 부도덕한 불사의 장소라는 지탄을 받았다. 봉은사는 왕릉과 너무 가까워 불경소리가 들린다는 이유로 연산군대에 능역 밖으로 이전하였고, 명종대에는 부도덕한 대비와 요승 보우로 인해 국가기강을 흩트리고 민심을 어지럽힌다는 등의 갖가 지 비판을 받았다. 서울 지역의 능침사는 유학자들의 비난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조선말까지 서울 지역의 불교문화를 주도하는 사찰로 명맥을 이어갔다. 여기에는 왕실의 정치경제적 지원과 더불 어 조선전기부터 구축된 공고한 종교적 기반이 자리 잡고 있었다. 또한 능침사의 제사 기능이 사라진 조선후기에도 세 사찰의 승려들이 능침 관리와 산릉 제사 준비에 적극 협력하면서 불교의 존립 기반을 스스로 확대하였다. 능침사가 수행하던 불교식 추천의례 과 내세추복신앙은 조선시대 서울의 불교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 학술자료
    개경과 한양의 사찰 – 도성사찰의 역할과 의미
    이 논문은 고려시대 개경과 조선시대 한양에서의 사찰 조성 계기와 변화 그리고 위상을 살펴보고 비교해 봄으로써 조선초 신왕조의 도읍인 한양에서의 사찰 건립의 역사적 의미를 파악하고자 하였다. 고려시대 개경의 사찰은 919년 개경 건립과 함께 조성되어 신앙의 구심점이자 궁궐, 관청 등과 함께 공적인 공간으로서 왕도 개경을 장엄하며 고려 문화와 사상의 중추가 되었고, 사람들의 생활과 밀접한 공간이었다. 개경의 사찰운영에는 불교가 국가를 운영하고 왕실의 권위를 높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 기대했던 고려사회의 관념이 반영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비해 조선시대에는 1394년 한양 천도가 결정된 이후 궁궐, 성곽, 종묘 등 주요 시설과 함께 한양 도성 안에 사찰을 세우거나 혹은 사찰 건립에 대해 고려했던 모습은 확인되지 않는다. 불교를 비판하며 건국한 신왕조의 도성임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1396년 정릉(貞陵)과 함께 그 능침사로 태조가 흥천사(興天寺)를 지으면서 한양 도성 안에 처음으로 절이 들어섰다. 흥천사는 애초 도성 계획에는 없었던 것으로 고려말 이래의 왕릉 제도의 영향을 받아 정릉의 부속시설로 조성된 것이었지만 이후 태조가 도성안에 사찰을 짓는 계기가 되었고, 조선전기 국왕이 세운 사찰이 도성에 운영되던 시발이 되었다. 그러나 이는 과도기적 현상이자 구시대의 유습이었다.
  • 학술자료
    풍광 좋은 명소이자 수많은 예술인이 살던 서울 정릉동 골목
  • 학술자료
    로컬리티 관점에서 본 지역문화공간으로서 대학박물관의 활성화 방안 연구 : 성북구 국민대학교 명원박물관을 중심으로
    지방자치제도가 본격화되고 각 지역의 구체적 현상과 특성을 다방면으로 이해하기위한 방법으로서 로컬리티에 관한 논의가 발전하게 되었다. 로컬리티는 중층적이며 관계적이고 복합적 함의를 갖는 개념으로, 본 연구에서는 로컬 지리적 공간 위에 그 공간을 영유하는 주체인 지역주민이 향유하는 문화와 그들이 쌓은 역사와 사회라 정의하였다. 로컬리티 관점에서 지역문화공간은 지역사회에서 다양한 문화행위를 주고받으며 지역주민의 정체성을 고취하고 강화하는데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는 공간으로 인식된다. 본 연구에서는 성북구 지역의 로컬리티와 성북구 지역문화공간 중 전시시설인 대학박물관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성북구 지역은 서울시에서 세 번째로 많은 지역문화자원을 보유하고 있으며, 한국 근현대 예술인들의 주거지이자 작품 활동의 근거지로, 로컬리티가 잘 드러나는 지역이다. 게다가 성북구는 서울시에서 가장 많은 대학과 대학박물관이 위치하고 있다. 대학박물관은 전통적 기능인 발굴조사를 통해 지역문화 연구의 거점 역할을 수행해왔으며, 전시와 교육을 통하여 지역사회에 기여해왔다. 그러나 대학박물관의 전통적 기능이 축소되고 오늘날 박물관의 역할이 유물중심에서 지역사회 체험과 교육중심으로 변화함에 따라, 대학박물관이 전통적 기능에 치중되어 있던 역량을 현대사회 박물관의 사회적 역할 변화에 맞추어 지역문화공간으로서 활성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본 연구의 방법론은 성북구 지역문화공간의 거시적 환경을 분석하고, 이를 통해 적합한 전략을 수립할 수 있는 방법론인 PEST-SWOT 매트릭스 분석과 사례연구, 전문가 인터뷰 방법을 활용하였다. PEST-SWOT 매트릭스 분석은 외부적인 요인이 미치는 광범위한 측면의 요소를 파악하고 이를 연계하여 기관의 발전을 위한 전망을 제시하는 데 효과적인 분석이 가능하다. 도출된 요인을 국민대학교 명원박물관의 사례를 통하여 살펴보고, 전문가 인터뷰를 통하여 활성화 방안을 검증하였다.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지역 교육기관으로서 활성화 방안이다. 대학박물관은 고등교육기관인 대학의 특수한 교육환경 속에 존립하고 있으므로 학문적 접근성과 인력, 공간 활용이 용이하다. 따라서 대학박물관은 지역문화자원을 활용한 교육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지역사회 전문인력을 양성하는 기능을 통해 활성화 되어야 한다. 둘째, 지역문화 연구기관으로서 활성화 방안이다. 대학박물관은 국·공·사립박물관에 비해 학예인력 비중이 가장 높은 박물관이다. 게다가 대학기관의 풍부한 인적 자원과 전문성을 이용하여 지역문화 연구를 수행하고 학술 및 교육활동을 지원하여 교육 지원 시설로서 활성화되어야 한다. 셋째, 지자체 협력을 통한 활성화 방안이다. 대학박물관이 지역문화공간으로서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지자체와의 협력이 중요하다. 대학박물관은 지역사회에서 지역주민 대상의 다양한 콘텐츠를 개발하고 지자체는 정책 및 예산 지원을 통하여 상생해야 한다. 넷째, 디지털 기술과 접목한 활성화 방안이다. 오늘날 기술적 환경변화에 따라 지역문화공간으로서 대학박물관은 대학 내 다양한 전공과 협업하여 디지털 문화콘텐츠를 제작하고 지역사회의 플랫폼으로서 활성화 되어야 한다. 다섯째, 접근성 제고를 통한 활성화 방안이다. 지역문화공간으로서 대학박물관은 물리적으로는 공간 내 시설과 서비스를 모든 사람이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편의시설을 확보하여야 하며, 심리적으로는 지역주민들이 친근감을 느끼는 프로그램 개발하여 활성화 되어야 한다. 본 연구가 지역문화공간으로서 대학박물관의 구체적 활성화 방안 제시와 더불어 대학박물관의 지역사회 재정립 기회 마련에 도움이 되길 바란다.
  • 학술자료
    도시지역 장소성의 물리적 요소에 대한 연구 -서울시 정릉동 정릉10길 일대 활성화를 중심으로
    (연구배경 및 목적) 오늘날의 도시는 빠르게 변화하며 ‘장소’라는 개념이 점점 약화되어가고 있다. 또한,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3동 정릉 10길 배밭골 일대는 주변 대학의 유동인구와 문화자원을 지니고 있음에도 이러한 장소적 특성을 살리지 못하고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정릉3동 배밭골 일대 지역 활성화를 위한 장소성의 물리적 요소들에 대해 알아보고, 대상지에 맞는 활성화 계획을 제안하기 위한 기초자료를 구축하는 것을 연구의 목적으로 한다. (연구방법) 연구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이론적 고찰로써 장소성의 개념들과 선행연구들을 분석한 후, 국 ·내외의 사례들을 선정하여 지역 활성화를 위한 장소성의 물리적 요소들의 특성을 도출한다. 그리고 대상지의 선정과 분석을 진행하고 도출한 특성들을 대상지에 적용 가능한 요소들과 방향성을 제시한다. (결과) 이에 본연구에서는 사례분석을 통하여 지역 활성화를 위한 물리적 요소들을 도출할 수 있었으며 이에 따라 대상지에 적용할 수 있는 요소들과 방향성은 다음과 같다. 첫째, 도로체계의 정비와 경사를 고려한 합리적인 교통체계를 확립하여야 하며 대상지 주변의 대학자원, 자연자원 활용을 고려해야 한다. 둘째, 구릉지를 고려한 보행환경 조성과 입체 보행로와 경사 극복을 위한 레벨 계획이 필요하다. 셋째, 블록의 구획과 건물들의 배치는 정비가 필요하며 주변환경과 상호 작용할 수 있는 다양한 용도의 프로그램이 배치되어야 한다. 넷째, 구릉지에 적합한 주거단지 계획이 필요하다. 또한, 기존의 골목의 활용방안과 포켓 공원 또는 인공지반을 통한 데크공원 등을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결론) 본 연구는 활성화되지 못했던 지역의 활성화를 위한 방안에 대하여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도시지역의 장소성의 물리적 요소에 관하여 마스터플랜 조성 시 필요한 요소의 선정기준을 제시하는 것에 그 의의가 있다. 또한, 성북구 정릉3동 정릉 10길 일대의 지역 활성화에 필요한 요소들의 방향성을 제시할 수 있었다. 정릉동 배밭골에 한정하여 모든 대상지에 객관화시키기에는 한계가 있으며, 추후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대상지에 적용 가능한 실질적인 마스터플랜과 건축계획에 관한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 학술자료
    세계유산 조선왕릉 입구공간의 조성 양상
    본 연구는 방문자 편의를 위한 주차장, 매·수표소, 화장실, 전시관, 안내판, 휴게시설 등이 배치된 조선왕릉 입구공간의 조성 양상을 고찰하여 개선 방향을 제안하려는 목적으로 진행하였다.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시대의 능역(陵域)이 좁아져 기존 제례동선을 온전하게 수용하지 못하는 현재의 왕릉에서 입구공간의 입지는 당시 여건에서 최소한의 편의 기능을 수용하도록 결정되었다. 다수의 왕릉 입구공간은 그동안 세계유산으로서 완전성을 갖추고, 동선의 합리적 배치와 공간적 효용을 도모하며 위치가 이동되거나 정비되었다. 둘째, 입구공간의 규모는 서울 정릉 1,000 부터 남양주 홍릉과 유릉 16,000 에 이르며, 연간이용자수는 양주 온릉 1.2만명부터 서울 선릉과 정릉 41만명까지 크게 차이가 난다. 왕릉 16개소의 여건을 고찰하여 입구공간은 이용자 유입에 영향을 미치는 주변 토지이용과 접근성, 능역의 규모, 피장자(被葬者)의 인지도와 선호도 등을 반영하여 적절한 규모로 제공되어야 함을 제안한다. 셋째, 조선왕릉 입구공간에서 주차장의 위치, 매·수표소를 경계로 하는 외부 마당과 내부 마당의 유무와 역사문화관의 위치로 결정되는 공간구성 양상을 고찰하였다. 넷째, 왕릉마다 입구공간에 필수적인 주차, 통제, 안내, 편의 기능과 지원, 전시, 통로, 휴게 기능을 선택적으로 수용하였다. 이때 관리사무소는 지원 기능, 역사문화관은 전시 기능을 담당한다. 통로는 진입감을 제공하는 전략이 될 수 있으며, 현재 왕릉 4개소에만 도입된 휴게공간은 적절한 위치 선정과 경관적 접근이 필요함을 제안하였다. 다섯째, 입구공간의 경관 이미지를 만드는 방식으로 주차장의 이격 배치와 친화적 포장디자인, 전이공간의 식생경관, 매·수표소 내부 역사문화관 주변 오픈스페이스, 이질적 안내판들의 영역화 전략을 도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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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시화 과정에서 서울 지역 마을 공동체의 지속 요인과 변화 양상 – 성북구 정릉공청회를 중심으로
    본 논문에서는 서울시 성북구 정릉2동이라는 구체적인 지역 사례를 들어 일제 강점기 정친회(정릉친목회)에서 시작하여 해방 후 재산 형성과 재정립 과정을 거친 정릉공청회, 도시화 속에서 공적 체계인 노인회를 수용하고 이주민의 유입에 대처하여 외연을 확장한 정릉대동친목회, 그리고 지방 자치제 실시 후 전통성을 그 특징으로 내세우는 정릉공청친목회를 통하여 일제 강점기부터 현재까지 지속되어 온 정릉2동 마을공동체의 지속 전략과 변화 양상, 그리고 공동 재산과의 관련성을 살펴보았다. 정친회, 즉 정릉친목회는 정릉지역 유지들의 친목계로 일제 강점기인 1915년 9월 2일에 창건되었으나 1930년에 공청을 짓고 점차 정릉리 마을공동체 성격으로 변모한다. 해방 후 한국전쟁으로 전소된 공청을 새롭게 짓고 공청이 세워진 토지를 불하받아 기본 재산을 형성한 정릉공청회는 회칙과 규약을 새롭게 제정하면서 정릉공청회의 재건 작업을 시작한다. 비록 정릉공청회 회칙과 규약에서 회원 자격을 ‘유지’에서 ‘동민’으로 확대하였으나 이 당시 정릉공청회 구성원 자체는 이미 본토 주민, 즉 토박이 위주의 정예 회원으로 구성되었고 이들은 정릉공청회 기본 재산에 대한 재산권을 가지는데 이는 향후 정릉공청회 발전 과정에서 이주민과의 ‘구별짓기’를 형성하는 기제로 작용한다.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이주민들의 대량 유입은 전통 마을공동체 조직인 정릉공청회의 변화를 요구했다. 정릉공청회는 경비 절감을 위하여 공적 체계인 노인회를 수용하였고, 노인회와 같이 공청을 사용하면서 이주민 일부를 수용하여 외연을 확장해 나갔다. 또한 정릉대동친목회를 재정립하여 공동체 조직의 존립을 이어 나갔다. 그러나 정릉대동친목회라고 하더라도 내부에 기본 재산에 대한 재산권을 가지고 있는 정릉공청회 회원, 즉 토박이들과 이주민이 함께 존재하는 한 토박이와 이주민의 차별은 여전히 잠재되어 있었다. 2001년 이후 지역 전통문화에 대한 성북구청의 지원 속에서, 또 2018년을 기점으로 정릉대동친목회 운영진이 세대교체 되면서 정릉대동친목회는 또 한 번의 새로운 변화를 시도했다. 즉 ‘정릉공청대동회’라고 하는 명칭에서부터 예전 정릉공청회의 연속성을 강조하려고 하였고, 회칙과 운영 규칙에 산신제를 추가하거나 별도의 ‘봉제회 회칙’을 만들어 정릉공청대동회의 전통성을 강조하고 노인회에 넘어갔던 산신제 주도권을 다시 찾아와 전통을 바로잡으려고 하였다. 정릉공청대동회의 전통성 강조는 회칙뿐만 아니라 산신제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는데, 이는 정릉공청대동회가 마을의례를 지속하고 이를 제도권에 포함시키기 위한 시도로 이어졌다. 그러나 재개발 논의를 앞두고 공청의 처분 논의에 이르자 회원 내부의 토박이와 이주민 갈등은 표면화되었다. 토박이에 대한 기준도 1959년 공청 준공기를 기준으로 나뉘어 그 이후 들어온 사람들은 아무리 정릉2동 지역에 40년 이상 거주하였다 하더라도 이주민으로 취급되었다. 이는 재산권의 유무와 관련된 것으로 마을공동체에서 공동 재산의 의미가 마을공동체가 지속하게 된 요인으로도 작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측면에서는 재산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아닌 사람의 차별을 만들어 내어 마을공동체 구성원들 내부에 토박이와 이주민의 ‘구별짓기’를 만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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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역사회 공론장으로서 공공도서관 역할에 대한 연구 - 서울 성북구립도서관 사례를 중심으로 -
    본 연구는 지역사회 공론장으로서 공공도서관의 역할을 탐색하였다. 이를 위해 공공도서관이 운영한 공론장 사례에 대한 분석을 통해 공론장에서 나타나는 도서관 역할의 주요 특징과 의미를 고찰하였다. 데이터 수집은 서울 성북구립도서관의 공론장을 운영한 사서와의 면담을 통해 이루어졌다. 수집된 데이터의 주제별 분석을 위해 NVivo를 사용하여 코딩하였다. 연구 결과, 공론장에서 확인된 도서관 역할의 주요 특징과 의미는 1) 지역 주민의 만남과 소통, 교류의 장, 2) 주제에 대한 정보제공과 토론을 통한 주민의 학습과 성장 지원, 3) 지역사회의 주민 참여를 확대하고 시민으로서의 역량 강화, 4) 지역 주민의 민주주의 경험을 확대, 5) 도서관에 대한 지역 주민의 인식 개선과 주민에 대한 도서관의 영향력 확대라는 다섯 가지 유형으로 나타났다. 특히 이 연구에서는 도서관의 정보서비스를 통해 공론 주제에 대한 시민의 상호작용과 공론 확산이 강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연구의 결과는 도서관이 지역사회 공론장으로 개발되고 지원되기 위한 근거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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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활기업의 ‘자활다움’에 관한 연구: 성북구 마술빗자루 사례를 중심으로
    사회적경제 조직 중 자활기업 사업은 2인 이상의 수급자 또는 차상위자가 상호협력하여 조합이나 사업자를 형성하고 스스로 탈빈곤을 지향해 나가는 사업을 말한다. 자활기업 사업은 2006년도부터 시행되어져 현재 전 지역에 1,000여개 이상이 운영 중에 있지만 자활기업과 관련한 연구는 매우 부족한 상황이다. 이에 본 연구는 사회적경제 조직과 관련한 모든 연구들을 대상으로 대표적인 영향요인을 도출하고 마술빗자루 사례를 통해 실제 사회적경제 성공요인들이 자활기업 사업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분석해보았다. 첫째, 자활기업은 여타 사회적경제 조직과는 다른 조건 및 상황으로 인해 기업가정신을 강조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대신 기업을 이끌어 나가겠다는 기업대표의 의지 및 책임성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둘째, 사회적경제에서 강조하는 공동체성은 자활기업의 운영에 원동력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조직 구성원들이 서로를 인정하고 느리지만 이윤을 나누고 배분함으로써 공동체로서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는 그 자체로 ‘자활다움’을 설명해주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사회적경제의 일원인 자활기업의 부족분은 다른 사회적경제 조직들이 보완해줌으로써 ‘사회적경제다움’을 실현하고 있었다. 자활기업의 ‘자활다움’, 사회적경제의 ‘사회적경제다움’이 보다 확장되기 위해서는 보호된 시장을 강화하여 사회적경제의 부족분은 지방정부(지역사회)가 채우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지역사회다움’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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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실천으로서의 공공역사와 지역학의 방향 -서울 성북구 사례를 중심으로-
    본고에서는 역사 실천의 하나로 서울 성북구에서 지난 10여년간 진행해 온 사례를 소개하고 이러한 사업이 지역학과 공공역사의 입장에서 지니는 의의를 살펴보았다. 역사학을 비롯한 인문학이 지역사회와 결합하여 결과물을 만들어낸 사례로서 지역학 내지는 공공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여기서는 이러한 성북구의 역사문화자원조사, 성북마을아카이브 구축, 역사문화자원 해설 어플리케이션 개발 등을 통해 성북학으로서의 지역학과 공공역사의 한 사례가 가지는 의의를 세 가지로 제시할 수 있다. 첫째, 지역 역사문화자료의 수집과 연구를 통한 문화자원화와 스토리텔링을 통해 다양한 지역문화콘텐츠를 제작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둘째, 인문학 분야의 연구가 지역 개발 계획에 적용될 수 있는 사례를 보여주었다. 인문학 연구를 토대로 한 제안이 어떻게 지자체의 도시 개발과 문화 정책 속에서 구현되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인문학 연구의 성과를 일반 시민과 공유하는 창구를 지역사회와 결합해 만들어냈다는 의의가 있다. 향후 지역학과 공공역사의 방향성은 지역에 대한 연구 수행과 성과물의 공유를 넘어 다른 분야의 연구자, 시민, 지방정부를 포섭하고 연결하여 지역의 현안 문제를 다루는 공론 네트워크와 소통의 창구를 만들고 거버넌스를 구축하는 것이다. 이것 역시 공공역사가, 시민역사가의 책무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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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시 의류봉제 소공인클러스터의 특성요인에 따른 정책수단 차별화에 관한 연구
    본 연구는 클러스터의 특성요인을 측정할 수 있는 변수로 도출하여, 창신동, 독산동, 장위동 의류봉제 집적지의 특성을 밝히고자 하였다. 이 결과를 토대로 각 집적지별로 정부의 지원정책에 대한 수요가 어떻게 다른지를 비교분석하였다. 자료는 세 지역의 입주업체를 대상으로 한 대면 설문조사와 심층인터뷰를 통해 수집하였다. 분석결과, 창신동은 ‘혁신성장 지향형’, 독산동은 ‘네트워킹 지향형’, 그리고 장위동은 ‘전문집적 지향형’, 클러스터로 판별되었다. 정책수요에 대한 조사 결과 세 지역의 정책수요가 다르게 나타났는데, 창신동은 역량형성, 독산동은 정보제공, 장위동은 혜택의 정책수단을 선호하였다. 동일한 의류봉제 업종의 집적지 간에도 형성과정과 특성이 다르고, 그로 인해 정책수단에 대한 수요도 다르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정책적 제언으로는 주기적인 실태조사를 통한 집적지별 특성과 정책수요의 파악, 집적지의 특성에 부합하는 차별화된 지원정책의 수립과 집행을 제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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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원작품 - 성북구립 길음동 글빛도서관 인테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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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민지기 경성부 동부 교외지역의 실태와 도시개발 -고양군 숭인면에서 편입된 지역을 중심으로-
    본고는 식민지기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에서 경성부 동부로 편입된 교외지역의 실태와 도시화 과정을 살펴본 것이다. 편입이전의 동부 교외지역은 두드러진 인구 증가에 비해 도시 시설의 부족으로 공간이용도는 낮았다. 전답경작지가 많아 분산적 부락을 형성했으며, 토지 이용, 교통, 상하수도 시설 면에서 도시입접지로서의 역할보다는 농촌적 성향이 강하였다. 더욱이 오물 및 분뇨처리장, 화장장, 공동묘지 등 혐오시설이 설치되어 도시의 사각지대를 형성하였다. 경성부로 편입된 후 교외지역에서는 새로운 도시복합체로서 집중적인 개발이 진행되었다. 도심과의 연결을 위해 도로망이 확층, 개수되었고, 철도가 개설되었으며, 공장 및 주택지구도 형성되는 등 도시의 물리적 복제와 확장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부민으로서의 생활의 편의는 편입이전과 다름이 없었다. 여전히 도심과 달리 도로, 교통, 상하수도 등 도시문화시설이 여세하고 빈약하여 지역적 불균등이 존재하였고, 식가지 계획에 따른 토지구획 정리로 토막민이 번성하는 등 파행적인 도시발전이 이루어졌다. 도시화의 진행 형태 또한 동부 교외 전 지역이 동일하게 진행된 것이 아닌 분산적이고 선택적으로 이루어졌다. 돈암,신설, 용두, 청량리 등 상공업 기반이 있는 지역을 중심으로 도시개발이 치우쳐 있으며, 종암, 답십리 등 경성부 겨계지점의 지역개발은 이루어지지 않아 동부 교외지역 안에서도 개발의 지역적 불균형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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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테로토피아적 장소에 나타난 문화적 기억과 작품연구 -미아리고개와 주변 공간을 중심으로-
    본 연구는 과거 미아리고개라는 장소가 오늘날 어떻게 이질적 공간으로 배척되고 있었는지를 미셸 푸코의 헤테로토피아라는 관점에서 분석해보고, 오늘날 그 터의 의미와 집단의 장소 기억이 변화된 양상을 살펴보기 위함이다. 이를 위해 미아리고개와 주변 공간들에서 영감 받은 순수미술작가들의 작품을알라이다 아스만이 말한 문화적 기억 관점에서 분석하였다. 특히 본 연구에서 중점적으로 다룬 공간은미아리 공동묘지, 미아리 점성촌, 그리고 미아리 고가 하부공간에 형성된 복합문화예술공간 미인도이다. 위 공간들에서 영감 받은 작품과 실제 미인도에서 진행된 기획전시 작품을 토대로 미아리고개와주변 공간이 오늘날 새롭게 정립하고 있는 문화적 기억을 환기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작품분석을 통해서 미아리고개라는 헤테로토피아적 장소가 오늘날 더는 타자화된 공간이 아닌, 생동감 있는 공간이자다양한 실험의 장으로 재생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런 점에서 미아리고개와 주변 공간에서 실시하는 다양한 프로젝트와 작업은 오늘날 대중에게 다양한 문화적 기억을 심어준다는 점에서 과거와 현재를 잇는 연결 다리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과적으로 본 연구는 오늘날 무분별하게상실되어가는 장소 기억에 대한 기록과 더불어 상징적인 장소들을 새로운 매체를 통해 기억하는 작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에 궁극적인 목적을 두고 있다. 따라서 본 연구를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장소들과 그 장소가 가진 기억의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해볼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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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미아동의 문학지리학- 도시개발사와 문학적 재현
    이 논문은 일제하부터 1990년대까지 미아동의 구체적인 지명과 행정구역의 변동을 문학지리학적 관점에서 되짚어봄으로써, 미아동이 실제 행정구역으로서의 미아동과 심상적 지리로서의 미아리가 중첩되고 혼재된 동네였음을 분석하였다. 또한 이광수, 김동명, 서정주, 김소진, 윤대녕 등의 문학텍스트에 재현된 도시공간과 실제 도시공간의 개발사를 연관시키면서, 일제하 공동묘지 형성부터 난민정착지 사업을 통해 만들어진 달동네의 모습까지 도시개발의 역사에 따라 시기적으로 변화해온 미아동의 문학적 재현이 가진 역사적 의미를 보여주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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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수자 배제에서 포용으로의 사회공간적 변화 연구: 서울시 동선동 점복촌의 시각장애인 역학사를 사례로
    본 연구에서는 서울시 성북구 동선동 점복촌을 사례로 시각장애인 역학사에 대한 배제와 포용으로의 관계적 변화의 사회공간적 의미를 해석함으로써 포용도시 구현의 가능성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조선시대 판수라 불렸던 시각장애인 역학사는 국가의 지원 하에 점복·독경을 행하였으나 일제강점기에 미신타파의 대상이 되었다. 6·25 전쟁 후 서울 남산 자락과 종로 3가 등에 점복촌이 형성되었으나 도시정비사업으로 철거되고, 1970년대에 지가가저렴하고 유동인구가 많던 미아리 고개 주변에 점복촌이 형성되었다. 1990년대 말까지 동선동에서 점자도서관설립 반대, 전통거리 조성 사업의 무산, 역학원 운영에 대한 주민과의 마찰과 같은 사회공간적 차별과 배제가 나타났다. 2010년 이후에는 시각장애인의 점복·독경에 대한 법적·제도적 지원이 이루어지고, 도시재생활동을 통해 점복촌이 역사·문화적 가치를 지닌 장소 자산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지역 통합과 포용으로의 관계적 변화는, 배제를 극복하기 위한 공간적 전략으로서의 점복촌 형성 등 시각장애인 역학사 개인 및 집단 차원에서 전개한 주체적노력과 지역공동체 중심의 재생활동에 의한 것으로서, 이는 포용도시의 비전을 공유하기 위한 수행적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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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의 문화유적과 콘텐츠화 방안-성북구 낙산지역을 중심으로-
    본고는 서울시 성북구 낙산지역의 역사적․문화적 위상을 검토하고 이를 토대로 낙산지역의 콘테츠화 방안을 제시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이를 위해 2장에서는 낙산지역의 문화콘텐츠화의 필요성으로서 낙산지역의 역사적․문화적 위상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조선시대 낙산지역은 도성의 동쪽을 방어하는 성곽으로서의 위상뿐만 아니라 뛰어난 경치로 인해 당시 사람들이 경치를 遊賞하던 문화적 공간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3장에서는 낙산지역의 주요 문화유적들을 점검하여 문제점을 지적하고 콘텐츠화 방안을 제시하였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하고 몇 가지 첨언을 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현재 복원하지 못한 역사․문화적으로 의미 있는 낙산지역의 문화유적들은 복원해야 한다. 이와 관련해서는 석양루가 한 예가 될 것이다. 현재 석양루터는 이화동 주민들의 주거공간에 위치하여 복원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듯하다. 하지만 서울시가 창경궁과 종묘 사이를 잇는 복원사업의 맥락에서 생각해 볼 때, 문화재의 복원은 도시의 이미지와 가치를 제고하는 길이라 생각된다. 따라서 효종대 최고의 甲第이자 사대부들의 문화공간이었던 석양루를 복원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판단된다. 둘째, 현재 복원된 문화유적들은 구체적인 의미가 드러날 수 있도록 보완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庇雨堂과 淨業院터가 예가 될 것이다. 비우당의 경우, 비교적 복원이 잘 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비우당의 구체적인 의미와 이수광의 삶과 학문을 좀더 적극적으로 소개할 필요가 있다. 정업원터의 경우는 관람공간도 협소하고 해설이 소략하여 문화유적으로서의 가치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다. 낙산지역을 방문한 관람객들이 대부분 성곽을 돌고 이화동 벽화마을만 구경하고 돌아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문화유적에 대한 구체적인 해설이 담긴 표지석과 영상 안내실 등을 갖출 필요가 있다. 셋째, 낙산공원의 산책로를 비우당․정업원․청룡사․동망봉․삼군부 총무당으로까지 확장할 필요가 있다. 현재 문화유적과 연결된 낙산공원의 산책로는 성곽 안쪽을 중심으로 조성되어 있어서 성곽 바깥쪽인 창신동․삼선동․숭인동의 문화유적들은 관람객들이 접근하기 어렵다. 그 결과 비우당․정업원․청룡사․동망봉․삼군부 총무당 등은 있는지조차 모르는 관람객들이 많다. 따라서 낙산 정상에 있는 놀이광장에서부터 창신동․숭인동․삼선동을 연결하는 역사․문화 탐방코스로서의 산책로를 조성할 필요가 있다. 넷째, 관람객들이 함께 참여할 수 있는 행사를 조직해야 한다. 2장에서 언급했던 ‘巡城놀이’는 현재 서울시에서 프로그램화하여 잘 진행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낙산지역이 조선시대 저명인사들이 많이 거처하였고 별장을 중심으로 酬唱과 풍류 문화가 이루어졌던 공간임을 착안하여 주변 한성대학교와 연계하여 문학 관련 행사를 마련하거나 국악 관련 공연을 개최하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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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文人들이 사랑한 서울의 동북 지역
    조선 시대 文人들은 도성 생활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양의 동북 지역에 별장과 정자를 짓고 노닐었다. 吳泰周와 吳瑗은 鍾巖洞에 별장을 지어 詩酒와 書畵를 즐기며 文友들과 교유하였다. 종암의 별장을 배경으로 한 오원의 시에는 부친인 오태주를 그리워하는 내용이 잘 나타나 있다. 洪良浩는 牛耳洞에 별장을 꾸미고 독서와 사색으로 이루어진 한가한 삶을 영위하였다. 소의 귀가 지니는 의미를 철학적으로 해석하여 安分自足하는 은거를 꿈꾸었다. 石串洞에 東庄이라는 거처를 마련한 金昌業은 손수 농사를 지으며 집과 주위의 모든 사물에 대해 큰 애정을보였다. 나무, 꽃, 풀, 과일, 채소 등에 대한 연작시는 조선 후기에 새로이 나타난 주거의 양상을 보여준다는점에서 소중한 의의를 지닌다. 서울의 동북 지역에 있는 北漢山은 유명한 관광지였을 뿐만 아니라 학업에 힘쓰는 공간 등 다양한 성격을지니고 있었다. 그보다 북쪽에 위치한 道峯山과 水落山은 번잡한 도성을 떠나 은거를 실천하고자 하는 이들이사랑하였던 곳이다. 도봉산에는 趙光祖와 劉希慶, 수락산에는 金時習과 朴世堂의 자취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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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위 도시재생 활성화구역의 도시재생 사업 전후 시기 지역활동 간 인과관계에 대한 전문가 인식분석
    서울시 성북구에 위치한 ‘장위 도시재생활성화구역’은 재개발사업의 대안적 모델로 마을공동체 만들기 사업과 도시재생 사업이 순차적으로 진행되었다. 마을공동체 만들기 사업이 진행된 시기에는 주민주도의 공동체 활동이 주로 진행되었으며, 도시재생사업이 진행된 시기에는 도시재생 사업 관련된 계획활동과 공동체 활동이 동시에 진행되었다. 성격이 다른 두 사업이 연이어 진행되는 동안 다양한 주민들의 활동이 시도되었으며, 사업에 따라시기별 지역활동의 차이점이 발생되었다. 본 연구의 목적은 성격이 다른 두 사업이 진행된 두 시기의 일상활동과 계획활동 간 관계를 구조적으로 분석하고, 통합적 관점에서 마을만들기 시기의 활동이 도시재생 시기의 활동에 미치는인과관계를 사업에 참여한 활동가와 전문가 인식을 통해서 도출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지속가능한 지역공동체를 위한 공공사업의 방향성 및 시사점을 도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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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북동 일대 명승 사적을 노래한 한문학 유산
    이 논문은 성북동을 소개한 옛 문헌을 찾아 분석하고 소개한 것이다. 성북동은 도성에서 가까우면서 한적하고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갖춘 나들이 공간이다. 특히 봄철에는 복숭아꽃이 만개하여 도성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였다. 그만큼 많은 시인 묵객이 이곳을 찾았기에 적지 않은 한문학 창작이 이곳에서 이루어졌을 개연성이 크다. 그러나 기대만큼 많은 시문이 발견되지는 않는다. 이곳이 창작 공간이 된 것은 분명하나, 곧장 창작 소재로 활용되지는 않은 것이다. 이런 까닭에 성북동 지역 문화 콘텐츠 개발에 한문학 유산이 적극적으로 활용되지 못한 것 같다. 성북동을 기록한 문헌 자료가 넉넉하지는 못하지만, 과거의 문헌에서 관련 기록을 찾아내어 소개할 필요가 제기된다. 이에 부족하나마 성북동 공간을 시문으로 구현한 한문학 유산을 발굴하여 소개하였다. 먼저 여러 문헌 자료를 분석하여 성북동 일대에 존재하는 명승 사적을 조사하여 인문 지리적 성격을 알아보았고, 이어서 관련 한문학 작품 몇 편을 찾아서 소개하였다. 먼저 蔡濟恭이 1784년 봄에 기록한 「遊北渚洞記」와 나들이에 동행한 睦萬中이 기록한 「與樊巖公會游北屯」을 소개하였다. 이를 통해 성북동이 봄철에 꽃을 즐기는 나들이 공간으로 인기가 높았던 사실을 알아보았다. 이어서 鄭士龍이 1552년에 창작한 시와 尹愭가 1793년에 창작한 시 「上巳遊北渚洞」을 통해 성북동이 修禊의 장소로 활용된 사실을 알아보았다. 아울러 金鑢가 1815년경에 창작한 「晩春游覽 絶句十二首」를 통해 성북동 주변의 여러 명소가 나들이 코스로 묶여 많은 이의 사랑을 받았던 사실을 알아보았다. 여전히 부족하지만, 이를 토대로 관련 있는 소중한 역사 흔적들이 계속 발굴되고 그 속에 깃든 의미 있는 사연들이 복원되어 이 지역의 역사성이 더욱 강화될 수 있기를 바란다. 또 다양한 지역 콘텐츠가 개발되어 현대의 시민들에게도 소중한 공간으로 추억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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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지도로 보는 성북지역의 지정학적 역할과 기능
    본 논문은 조선후기와 일제시기의 지도를 바탕으로 지도 제작 당시 성북구 공간의 명칭, 자연 및 인문정보, 지역적 특성, 지역 사람들과 이 지역을 바라본 사람들의 인식을 연구하였다. 이러한 성북은 한양도성의 북쪽 방어 지역이었으며, 한양에서 출발하여 동북지역으로 나아가는 길이 시작되는 곳이었다. 성북구는 한양도성의 600년 역사와 함께 축척된 시공간적 역사・문화성, 그리고 가치를 공유해온 가장 밀접한 공간이다. 특히 수도의 배후지로서 물자와 휴식공간을 제공하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으며 일제강점기 도성 내부의 인구 증가로 제일 먼저 확장되어 나아간 곳도 성북구 지역이었다. 서울 도심과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현재의 성북구는 옛 모습을 그대로 기억하고 간직하고 있으며 또한 닮아있다. 그리고 역사 도시 서울의 역사성을 간직하고 있으며, 발전하는 현대의 모습이 중첩되어 있다. 되너미고개를 통해 중국의 동북부 지역으로 나아갔으며, 미아리고개를 통해 북쪽의 사람들이 남하해왔고, 돈암현을 통해 도성 안으로 물자를 공급하기도 했다. 이 고개를 통해 새로운 역사가 오고 갈 것이며, 역사와 함께 발전해 나아갈 미래의 성북이 그려질 지도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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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자체와 대학 간의 지속적 연계를 통한 지역사회 활성화 사례 연구 – 서울 성북구를 중심으로 -
    본 연구는 대학이 지역사회와 상생을 통해 문화생태계의 지속과 지역 경제 활성화를 어떻게 지속적으로 이끌 것인가에 대한 연구이다. 최근 한국 사회는 인구의 고령화와 저출산으로 인해 사회 전반적으로 위기를 맞고 있다. 특히 입학정원의 축소로 향후 많은 대학이 문을 닫을 것이라는 보도가 연일 나오고 있다. 교육부는 앞으로 3년 안에 33개의 대학이 문을 닫는다고 전망하고 있다. 이로 인해 앞으로 대학이 독창성을 유지하지 않는다면 생존의 갈림길에 놓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정보의 대량 유통 시대인 소셜미디어 시대의 생존은 융합을 통한 독창성에 있다. 대학 또한 융합의 코드를 도입하고, 독창성을 창출하지 않는다면 생존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대학의 융합은 학제 간의 융합은 물론이며, 지역사회와의 융합을 통해 선순환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 대학과 지역사회 연계에 대한 국·내외 사례를 분석하고, 대학과 지역사회의 협력체 수립 현황과 이를 지속적으로 발전하게 할 요소를 살펴본다. 해외 사례를 기반으로 서울시와 성북구라는 특수한 상황을 면밀히 분석하고, 이를 기반으로 향후 대학과 지역사회 간의 연계를 통한 지속성 문제를 통시적으로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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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태준 단편소설 속 타자성 인식의 한계 — 「달밤」⋅「손거부」⋅「장마」⋅「패강랭」⋅「석양」을 중심으로
    성북동ㆍ평양ㆍ경주 등을 배경으로 ‘조선적인 것’을 추구한 이태준의 단편소설을 대상으로 하는 이 연구는 1인칭 서술자와 초점화자가 다른 등장인물을 폭력적으로 동일화하는 양상을 비판적으로 분석함으로써, 문학작품 감상에서의 타자성 인식 필요성을 고찰했다. 「달밤」ㆍ「손거부」에서 근대적 질서에 속한 ‘나’는 황수건과 손거부의 좌절과 실패에서 ‘조선의 순수함’을 추출하고, 그들의 ‘반근대성’ 을 ‘음미’한다. 하지만 그들의 근대적 욕망은 자신들을 탈역사화된시공간에 박제하려는 ‘나’의 서술에 균열을 낸다. 「패강랭」은 ‘조선의 순수함’을 관조하는 것이 어려워진 전시체제를 배경으로 한다. 현은 ‘대평양’(大平壤)이라는 구호 아래 진행된 평양의 근대화 대신 평양의 유적만을 보고, 영월의 실제 삶을 보는 대신 그녀를 ‘조선문화의 고유성의 화신’으로 만들려 한다. 현과 영월 사이의 어긋난 대화는 ‘현’이 자신이 직면한 가치체계의 위기 속에서 타자를 폭력적으로 동일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태평양전쟁 이후 조선어 글쓰기가불가능해지는 상황에서 창작된 「석양」에는 이전 작품에 나타난 최소한의 현실성마저 사라지고, 매헌과 타옥의 관계는 철저히 매헌의욕망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이뤄진다. 타자를 자신의 이항대립적 가치체계 속에 배치할 뿐, 그들과의 긴장관계에서 새로운 자기인식에도달하지 않는다는 것은 주체의 타자성 인식 실패로 읽을 수 있다. 문학교육에서 텍스트의 가치체계에서 벗어나 서술 대상인 ‘타자’를낯설게 보는 것은 학습자가 자기중심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과 소통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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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역공동체 아카이브로서 아카이브 예술의 가능성 탐색 연구 - 경기아카이브 전시와 성북도큐멘타 전시 사례를 중심으로 -
    세계적으로 아카이브를 둘러싼 큰 변화로 지역 공동체 아카이브의 등장과 아카이브예술의 확산을 볼 수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카이브 예술이 지역 공동체 아카이브에 접목되는 경우들이 근래 국내에 늘고 있다. 이 연구는 아카이브 예술이 실제 지역공동체 아카이브로서 기능할 수 있는지와 기능한다면 어떠한 특징을 가지는지를 탐색해 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경기 아카이브_지금,》(2018)과《성북도큐멘타》(2014∼2020)의 3∼5회(2016∼2018) 전시 사례를 분석하였다. 경기의 지역 정체성 강화를 목표에 둔 경기아카이브와 소실될 위험에 처한 한옥이나 상가아파트에대한 아카이빙 작업이 수행된 성북도큐멘타에서 나타난 아카이브 예술 활동을 분석함으로써 아카이브 예술의 수행과 활용 과정에서 나타나는 예술가의 역할과 아카이빙 작업의 다양성을 파악하고, 지역의 정체성 구성 및 장소성 재발견의 전략과 효과를 살펴보았다. 아카이브 예술은 공동체 아카이브의 흐름을 확장하고 다양한 창작적 활용을 진작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지만, 지역공동체 아카이브로 기능함에 있어 기억의 보존체로서뿐만 아니라 새로운 지식과 담론 생산의 계기로 활용되기 위한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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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천사(興天寺) 불교 건축의 성격
    흥천사의 건축성격은 황화방 흥천사와 성북사을한 새 흥천사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황화방 흥천사의 건축의 성격은 사찰의 사상적 성격을 잘 나타내는 대웅전과 이 보다 더 중요시된 사리전이 잘 알려주고 있다. 바로 석가불과 석가불사리 신앙을 실천하는 공간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점을 밝힐 수 있었다. 또한 조계종과 선종의 도회소로써 선종 수행인 참선을 행하던 승당 이른바 참선당도 흥천사의 가장 중요한 건축공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성북 사을한 새 흥천사(신흥사=흥천사)의 건축적 성격은 황화방 흥천사의 사상과 제도를 계승했기 때문에 주불전이 석가불을 봉안한 대웅전이었다고 판단된다. 이 대웅전은 1855년 극락보전으로 개명되면서 건축의 성격도 변화가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황화방=흥천사가 조계종과 선종의 종찰이었으므로 이를 계승한 사을한 새 흥천사도 선종의 성격을 당연히 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선종의 참선 수행을 행하는 공간인 승당은 H형 대방이 그 역할을 계승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대방의 참선 수행공간은 1855년 이후에는 염불수행도 함께 행하는 공간으로 활용되었다고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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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정릉리 주민들의 6·25전쟁 경험-김성칠의 일기자료 『역사 앞에서』를 중심으로
    이 연구는 서울 성북구 정릉리(현 정릉동) 주민들의 6・25전쟁 경험을 다룬 것이다. 기본 자료는 김성칠이라는 인물이 남긴 일기자료이다. 이외에 추가로 지역 주민의 구술자료를 활용하였다. 김성칠은 역사학자이자 서울대학교 교수였다. 그는 서울 성북구 정릉동에서 1947년부터 1950년까지 거주하였다. 1950년 12월에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으며 1952년 가을에 사망하였다. 해방 이후부터 사망 직전까지 작성된 그의 일기는 유명하다. 그렇지만 마을 연구 자료로 활용된 적은 없다. 이 연구는 김성칠이 거주했던 정릉리 손가장 마을이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작성된 일기를 면밀하게 검토한 것이다. 그리고 인민군 통치 하의 서울지역 마을 주민사회의 경험을 미시적으로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밝히고 있다. 첫째, 정릉리는 6・25전쟁 발발 당시 인민군의 서울 진입로서 개전 초기부터 인민군에 의해서 점령되었다. 미아리고개뿐만 아니라 북한산이 인민군의 이동로가 되었고 일제시기 이곳으로 이전된 경신학교 건물이 인민군의 주둔지가 되었다. 둘째, 인공은 점령 직후부터 일사분란하게 마을에서 통제력을 행사하였다. 이러한 통치의 효율성을 보장했던 것은 일제시기 생활공간에 구축된 동회・애국반이라는 주민동원・통제조직이었다. 셋째, 인공의 점령은 마을의 이데올로기 지형을 변화시켰다. 인공은 마을 내의 협력자들로 마을 권력을 재구성하였다. 이들을 중심으로 인민공화국 백성 되기가 추진되었으며 의용군 입대가 강요되었다. 넷째, 인공 점령 하 마을 민심의 향배에 중요하게 영향을 미친 것은 식량문제였다. 인공 정책에 대한 주민들의 복종은 정보에 대한 기만이나 공포감의 조성과 함께 식량문제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 식량위기는 정릉리 주민사회의 민심이 이반되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다섯째, 수복은 정릉리 주민사회에 새로운 이념대립 구조를 만들었다. 잔류한 주민들은 잠재적 ‘빨갱이’로 취급되었으며, 정부와 함께 피난을 떠났다 돌아온 소수의 도강파 주민들은 마을 내의 가장 도덕적인 집단이 되었다. 정릉리 주민들의 전쟁 경험은 한국전쟁 시기 사회변동과 관련해서 중요한 내용들을 말해주고 있다. 첫째, 막연하게 이야기되었지만 구체적으로 전쟁이 정릉리의 주민구성을 변화시킨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둘째, 전쟁은 마을을 對共투쟁의 장으로 변화시켰다. 셋째, 전쟁 경험은 정릉리 주민들에게 ‘나라’에 대해 극도의 냉소주의와 피해의식을 심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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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천사 신중도의 도상 연구
    서울 성북구 돈암동에 위치한 흥천사에는 1885년작 신중도를 비롯하여 제석천도, 천룡도 등 19세기말 한 사찰에서 조성된 4점의 신중도가 남아있다. 이 중 천룡도를 제외한 3점의 신중도는 경선응석이 보문사 신중도를 시작으로 완성한 19세기 말 서울 경기지역에서 유행하던 신중도 형식을 계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1885년작 신중 도는 기존 보문사계열 신중도에서는 볼 수 없었던 팔금강을 위태천의 좌우와 화면 곳곳에 묘사 한 특징이 있음을 살펴보았다. 특히 바위를 들고 있는 팔금강 도상이 신중도에 표현되고 있어 주 목되는데 이는 화승 경선응석이 새롭게 창출한 신중도상의 하나로 19세기말 서울 경기지역 불화 의 전통을 잘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시도를 하고자 했던 흥천사 신중도의 수화승 체훈과 화승들 의 노력이 돋보인다고 할 수 있다. 이는 19세기말 다양한 신중도 형식을 시도하던 시대적 상황이 맞물린 것으로 새로운 시도를 하려고 했던 흥천사 신중도만이 가지는 특징이라 할 수 있을 것이 다. 그리고 흥천사에는 시대를 달리하는 다섯 점의 불화 화기에 ‘水月道場空花佛事’ 혹은 ‘空花佛 事’라는 특정 불사를 의미하는 명칭이 적혀있다. 16세기 이후 기록에 보이는 이 불사가 특정한 불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재를 올리는 공간, 그리고 사찰에서 행하는 불사 자체가 부처님의 진리에 비하면 보잘 것 없다는 의미로 쓰인 것으로 해석하였다. 또 화기에는 1890년, 흥천사 불화 제작 시 화승집단 사이에 이루어진 분업과 협업의 형태를 보 여주는 한 예를 살펴볼 수 있다. 1890년의 불화들은 긍조를 수화승으로 각각 ‘模像’이라는 밑그 림을 담당하는 화승을 따로 두고 있었다. 큰 맥락으로는 1890년작 신중도와 1898년의 천룡도 또 한 경선응석이 창출한 전통도상의 영향을 받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890년의 제석천 도는 이와는 전혀 다른 스타일로 이는 1890년의 불화제작시 模像을 맡았던 화승들의 역할이 무 엇보다 중요했다는 점을 알려주는 것으로 생각되어 당시 불사에서 화승집단 사이에 분업과 협업 이 잘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한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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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북 지역의 설화 : 삼선평과 옥녀봉 설화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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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문학 : 이태준, 김동리, 최정희 소설에 나타나는 성북동,낙산 일대의 공간 연구
    서사문학인 소설에서 공간 문제는 시간의 문제와 함께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여기서 공간은 일반적인 장소의 개념을 넘어 작가의 주제의식 표현의 매개로 이해할 수 있다. 이태준, 김동리, 최정희는 각각 일제 강점기, 해방기, 6.25전쟁기 동안 성북동, 낙산 일대를 형상화한 소설을 발표했다. 세 명의 작가가 한국 근현대사에서 의미심장하다고 볼 수 있는세 시기를, 일정 지역을 소설의 공간으로 삼았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로운 관점을 제공한다. 즉 공간을 상수로 고정시킨 뒤 시대와 작가를 변수로 놓았을 때, 작가의 시대정신을 더 면밀히 관찰할 수 있을 것이며, 더 나아가 지정된 공간의 속성을 다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살펴볼 작품은 이태준의 < 달밤 >, < 손거부 >, < 색시 >, 김동리의 < 혈거부족 >, 최정희의 < 인정 >, < 정적일순 >, < 찬란한 대낮 >이다. 각각의 작품은 성북동 그리고 삼선교와 동숭동에 해당하는 낙산 일대를 소설의 공간으로 삼고있다. 이태준의 < 달밤 >, < 손거부 >, < 색시 >에서 성북동은 기본적으로 성 밖의 공간성을 지니고 있다. 작품의 핵심 인물인 황수건, 손거부, 색시는 모두성 밖의 공간적 속성을 상징하는 인물들이다. 그러나 이 성 밖의 공간성은 성 안의 공간성이 침투함에 따라 변하게 되고 작품의 인물들은 외면받고 추방당하게 된다. 여기서 성 밖의 공간성은 반근대를, 성 안의 공간성의 침투는 근대화를 내포한다고 볼 수 있다. 작가는 성북동의 반근대적 속성이 근대화를 통해 사라지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여기면서도작가 특유의 상고주의적 성향을 통해 애잔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김동리의 < 혈거부족 >에서 낙산은 해방 이후 귀국한 동포들과 극빈자들을 통해 형성된 달동네로 그려진다. 해방만 되면 모든 일이 잘 될 거라는 막연한 기대와는 다르게 해방 당시의 조선의 상황은 매우 비참했다. 해방이전 꿈꿔온 공간이 ‘고향’으로 나타난다면 해방 당시는 가난, 무지, 죽음이 뒤섞인 공간인 낙산으로 형상화된다. 최정희의 < 인정 >, < 정적일순 >, < 찬란한 대낮 >은 낙산 일대를 배경으로 6.25 전쟁기의 가족 상실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최작가, 노파, 길수 어머니는 모두 여성 인물로 각각 전쟁통에 사라진 남편과 아들을 기다리고 있다. 여성 인물인 이들은 상대적 약자로서 비인간적인 다른 인물들의 횡포에 고통 받게 된다. 여기서 나타나는 낙산은 전쟁터도 피난처도 아닌 공간이며 작가는 이런 허공에 뜬 공간에서의 전쟁 체험을 소설화한다. 여성인물들의 고통은 점차 가중되며 낙산 일대는 죽음의 공간으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그러나 작가는 파종이나 결혼 같은 행위를 통해 죽음의 공간에서 희망적 공간으로의 공간 치환을 시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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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근현대소설에 나타난 성북동, 낙산 일대의 형상화 고찰
    한국 근현대 소설 가운데 서울 도심지가 배경인 소설이 상당수 있다. 그 가운데 성북동 낙산 일대가 배경으로 그려진 소설은 얼마나 있을까. 1936년 돈암지구로 형성된 성북천 일대는 한양도성의 동소문인 혜화문과 서울성곽의 동측에 있고 선잠단, 성락원 등 중요한 유적들이 있어서 현재는 역사문화 컨텐츠와 함께 한옥밀집지역으로 가치가 높다. 성북천과 이어진 삼청동이나 삼선교는 모두 도교적 명칭인데 이러한 신선 사상이 워낙 산악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만큼, 성북동 뒤의 북한산과 삼선동에서 이어지는 낙산이라는 지리적 환경이 중요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 일대에는 예술가들이 많이 살면서 당시의 모습을 그린 작품들도 있는 만큼 이 일대, 즉 한성대학교 근처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찾아 구체적으로 지역이 언급되어 있는 성북동 일대와 삼선교 일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중심으로 한성대 근처가 어떻게 형상화 되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성북동 일대를 배경으로 한 이태준의 소설과 삼선교 낙산 일대를 배경으로 한 최정희의 <인정> 연작, 김동리의 <혈거부족>이 대상이 되겠다. 이태준의 성북동이 배경인 소설들은 일제 강점기에 발표된 작품들로 1930년대 작가가 성북동에 살았던 시기가 그려져 있고, 낙산 일대가 배경인 김동리의 <혈거부족>은 해방 이후 정부 수립 전이 배경이며, 최정희의 <인정> <정적일순>은 6.25가 시대적 배경이다. 이태준은 성북동에 십여 년 이상 살면서 성북동을 배경으로 한 서민들의 삶을 그린 작품이 여러 편 있고 그의 대표작들이 대개 이때 쓰여졌다. 작가 이태준이 살았던 시절인 1930년대 성북동 일대가 그렇게 넉넉하지 않았던 서민들이 살던 곳, 아직 인정이 남아있는 성 밖 마을이었고, 작가는 배우지 못해 어리석지만 악하지는 않은 하층민들에게 애정을 느끼면서 주로 자전적인 면들을 바탕으로 관찰자의 시각에서 그리고 있다. 김동리의 <혈거부족>은 해방 후 삼선교 한성 여중 일대에 산 위에 뚫려 있는 굴에 모여 사는 사람들이 제목으로 강조되고 있는데, 이 굴은 일제말기에 미군의 공습을 피하기 위해 조선총독부에서 판 것으로, 작품 모두(冒頭) 에 공간적 배경이 삼선교 돈암교 일대라고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최정희의 <인정>은 6.25 와중의 낙산이 배경이고, <정적 일순> 은 <인정>과 연작으로 보이는 작가의 자전적인 면이 그려져 있는데 낙산의 지형적 사회적 특징이 6.25의 혼란과 함께 잘 그려져 있다. 낙산은 경복궁을 중심으로 좌청룡 우백호에서, 좌청룡에 해당하는 산으로 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내사산-북악산(백악산), 남산, 인왕산, 낙산-가운데 가장 지대가 낮아 산 주변에 서민 주거지가 쉽게 형성된 곳이다. 현재 성북동이나 낙산 일대는 과거와는 매우 다른 만큼 이곳의 변모 양상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관련 작품을 찾아보는 일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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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선잠제(先蠶祭) 정비와 시행 의미
    선잠제는 양잠의 신 서릉씨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제사는 선잠단에서 지냈다. 그 시기는 매년 3월 첫 번째 巳日이었다. 선잠제는 제사의 대상이 여성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선잠제를 지내는 것은 백성들에게 양잠을 권장하기 위한 것이며, 이를 통해 풍요롭게 살기를 바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선잠제는 조선왕조에서 국가의 의례로 정비되었다. 조선의 의례는 크게다섯 가지로 분류하고 ‘오례’라고 했다. 제사를 지내는 의례는 ‘길례’였다. 선잠제는 그 제사의 규모가 중간에 해당했고, 제사의 대상은 사람, 곧 인귀였다. 그러므로 길례의 중사로 정해졌다. 선잠제에 대한 논의는 태종대부터 시작되어 세종대 『세종실록』 「오례」에 정리되었다. 이후 수정을 하여 『국조오례의』로 법제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선잠제의 의미와 의식은 강화되었다. 선잠제를 지냈던 선잠단의 위치는 지속적으로 이동하는 것이 논의되었다. 그렇지만 옮기지 않고 현재 성북동의 ‘先蠶壇址’에서 제사를 지냈다. 선잠제는 제사의 대상은 여성이지만 제사를 지내는 주체는 국왕이었다. 그러나 제사의 규모가 중사였기 때문에 관료를 보내어 대신 지내게 하였다. 이런 것을 섭사라고 한다. 선잠제는 매년 지내야 하겠지만 기록을 보면 그렇지 못하였다. 다만 세조와 명종은 상대적으로 자주 선잠제를 지냈다. 세조는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19세기에는 선잠제가 거의 매년 시행되었다. 왕권이 약한 대신에 의례를 강화하였기 때문이다. 선잠제 시행에서 큰 변화는 1767년(영조 43)에 있었다. 이 해에는 왕비가 친잠례를 치르게 되었다. 이때 영조는 왕비가 직접 선잠제를 치르도록하였다. 이것은 조선에서는 유일한 일이었다. 이때 왕비였던 정순왕후는 직접 술을 올리는 선잠작헌례를 시행하였다. 조선시대 선잠제는 백성을위하는 민본정치를 반영한 것이다. 또한 백성들의 의생활을 걱정하고 장려하였던 정책이 의식으로 완성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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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시기 도시문제와 지역주민운동 : 경성(京城)지역 성북동의 사례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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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태준의 성북동 : 이태준의 단편소설 및 『무서록』에 나타난 ‘교외’와 “구석진 곳”의 의미에 대하여
    이태준은 1930년대 성북동이라는 교외의 변화 및 인정세태와 풍속의 다양한 양상을 소재로 한 다수의 소설과 수필을 썼으며 그 구체적 재현의 질과 양에 있어서 독보적이었다. 그는 성북동에 거주하고 있는 어리숙한 빈민과 반편 등의 친밀한 주민이 급속한 도시화에 따라 도태될 운명에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해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한편으로 그의 소설은 문화주택에 거주하고 있는 속물적 인간상에 대한 냉소적 시각을 유지했다. 전자에 대한 애착은 고완품에 대한 이태준 자신의 각별한 의미 부여와 무관하지 않았다. 그런 만큼 몇몇의 수필에서 성북동의 풍경과 사물을 고완품으로 간주하고자 하는 생각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한 관점은 결국 단편 「장마」에서 수연산방에 거주하는 소설가 자신과 가족 전체로 향하게 되었다. 이 소설에서 소설가와 가족은 오랜 장마 속에 녹과 곰팡이 슬어가며 운무 속에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도시화․세속화의 시류로부터 낙오되거나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는 존재로 묘사된다. 스스로를 포함한 성북동의 주민들에 대한 이와 같은 관점은 그러나 식민지 조선의 대도시 경성으로 출퇴근하는 교외 주택민 즉 도시의 생활인으로서의 감각으로부터 연유한 위계질서와 미적 거리에 의해 가능해진 것이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시골이나 전원으로만 간주되던 성북동을 다양한 부류의 주민이 유입된 신흥 주거지로서의 변모에 주목하도록 했다. 이태준의 소설과 수필에서 성북동은 민간업자들에 의해 불수의적으로 조성된 시골이면서 도시이고, 도시도 시골도 아닌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의 공간으로 재발견된다. 이태준 자신의 의도와는 별개로 그것이 성북동이라는 교외에 복합적으로 공존하고 있었던 과거와 현재, 시골과 도시, 정지와 변화의 양쪽 모두 및 그 사이의 간극을 부지불식간 의식하도록 한다. 그리고 후자로부터 전자로 소급하고자 하는 상상적 단절과 거리가 시차(時差/視差)를 발생시키고 있었다. 이태준은 성북동의 “구석진 곳”에서 역사적 유효성을 상실했거나 앞으로 그렇게 될 것(죽음)임에 틀림없는 옛 도성에 비친 석양으로 비유되는 자기동일성의 세계에 천착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그것은 애초 소멸과 파국의 운명을 내포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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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락원(명승 제35호) 주변지역 필지 변화과정에 관한 연구 - 성북동 문화재 주변을 중심으로 -
    본 연구는 서울시 성북구 성북동을 대상으로 근대 이후 문화재와 주변 경관 변화과정 및 원인을 사회·문화적인 측면에서 설명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1962년부터 2010년까지 사용한 폐쇄지적도를 이용하여 필지를 분석하고, 문헌자료를 참고하여 연구하였다. 시대별 변화과정 확인이 가능한 성락원, 마포최사영고택, 서울선잠단지, 서울한양도 성을 위주로 변화과정을 추적하였으며, 문화재의 소경관(素景觀)을 검토하고 필지 변화와 함께 경관변천을 분석하였다. 성락원은 1954년에 송석정과 연못이 조성된 모습을 소경관이라 볼 수 있으며, 마포최사영고택은 2003년 이후 성북동으로 이전·복원한 것, 서울선잠단지는 1960년대 개발로 현재의 터만 남게 된 모습을, 서울한양도성은 숙종30년에 석성으로 개축한 것을 각 문화재의 소경관으로 정의하였다. 성락원은 제도적 요인에 의해 변화가 생겼고, 마포최사영고택과 주변 경관은 사회경제적 요인에 의해 변화가 생겼으며, 서울 선잠단지와 그 주변은 사회경제적·제도적 요인에 의해, 서울한양도성과 그 주변은 기술적·제도적 요인에 의해 변화가 생겼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성북동의 문화재와 그 주변경관은 대체로 제도적 요인과 사회경제적 요인에 의해 변화가 생기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근대 이후 서울의 도시계획이 성북동에도 영향을 미쳤으리라 예상되며, 자본주의 경제체제 확립이 그 배경이 된 것이라 판단된다. 따라서 문화자원으로서의 잠재적 가치를 인식한 바람직한 경관변화가 이루어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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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소문 밖의 사람들― 미아리일대의 역사ㆍ공간ㆍ삶
    이 글은 20세기 도시의 역사를 저장하고 있는 미아리 일대의 역사적 시간과 공간의 변화과정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 사회적 약자가 도시공간구조 속에서 어떻게 배제되고 타자화 되어 왔는지를 규명하는데서 출발하고자 한다. 조선시대까지 미아리 지역은 한성부의 성저십리에 속하는 지역으로 국왕 호위와 도성보호의 역할을 한 도심의 허파와 같은 곳이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공동묘지로 지정되면서 지역의 명암은 바뀌어 갔고 미아리 고개 넘어 지역은 산자의 공간 보다는 죽은 자의 공간으로 인식되기 시작했었다.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피난민과 전재민들은 공동묘지 근처에 살기 시작했고 1950년대 후반부터 정부는 4대문 안의 간선도로변 판잣집 강제철거를 시작으로 수재민 화재민들을 이주정착지라는 이름으로 도심 외곽으로 집단이주정책을 펼쳤다. 첫 번째 대상지역이 미아리 지역이었고 그로 인해 자연스레 달 동네가 형성되게 되었다. 1960년대 시작된 미아리 지역개발은 이 지역 경관에 새로운 변화의 상징이었다. 길음교와 미아로 확장공사 정릉천 복개구조물 공사로 인하여 정릉천과 월곡천은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로 뒤덮게 되었다. 이 공간의 한쪽에 속칭'미아리텍사스촌'도 자리를 잡게 됐다. 1990년대 재개발로 들어선 아파트는 길음동 미아동 하월곡동일대를 주거지로 만들어 놓았으며 조망권이 높아질수록 속칭'미아리텍사스촌'의 재개발문제와 더불어 환경공해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었다. 2002년 시작된 뉴타운 사업의 확대로 근현대시기 동안 미아리 지역을 살아온 서민들의 역사 공간 문화들이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져가고 있다. 도심재생사업의 본격화로 인해 원주민과 도시 빈민들은 더 열악한 곳으로 밀려나기 시작했고 또한 수십 년 동안 가부장제와 공모하여 성문화의 대명사로 각인되어 온 속칭'미아리텍사스촌' 재개발 논쟁이 본격화되면서 성북구와 강북구는 미아리라는 지명을 강제말소 함으로써 균형 잡힌 도시의 역사와 도시의 정체성을 세울 수 있는 기회는 사라져버렸다. 미아리공동묘지 원조 달동네 미아리텍사스촌이라는 감추고 싶은 부끄러운 삶의 흔적이 된 채 도시화의 상처로 남아있다. 그러나 미아리는 근현대시기 동안 도시가 만들어낸 사회적 약자들의 삶의 터전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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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년대의 문화지형과 한용운의 삶
    본 논문은 서울이라는 특정한 공간과의 상관관계와 교우관계를 중심으로 한용운의 사회활동과 삶의 의미를 고찰했다. 정치적·사회적 지향이 강했던 한용운에게 서울은 사회적 실천의 무대이자 핵심적 공간이었다. 한용운의 서 울에서의 활동은 심우장 시기를 전후로 두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북촌시 대 한용운은『유심』이나『불교』발간을 통해 여러 방면의 저명인사와 교류하 면서 3·1운동 참여, 불교청년운동, 신간회 참여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이 기간 동안 한용운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사회활동에 매진했고, 그 결과 몸 과 마음이 극도로 쇠약해졌다. 1933년 한용운은 결혼을 계기로 성북동 심우장이라는 곳에 난생 처음으로 자신의 명의로 삶의 공간을 소유하게 되었다. 심우장에 거처를 마련하면서 한용운은 처음으로 주거공간과 사회활동(업무) 공간을 분리시킬 수 있었다. 불교도로서 초심을 잃지 않고 끊임없이 참된 구도를 통해 사회적 실천을 이 어가겠다는 의지의 표명이 심우장 이사의 중요한 동기였다. 성북동 심우장은 한용운의 주활동 무대였던 북촌지역과 도보로 왕래가 가능할 정도로 서울 도 심과 가까우면서도 참선 수행이 가능한 조용하고 인적이 드문 곳이라서 한용 운은 지론인 생활선의 실천공간으로 안성마춤이었다. 심우장시대는 한용운의 자유로운 영혼을 더 이상 허락하지 않았다. 일제의 협박과 회유로 많은 민족지도자들이 변절하고 전향했으나 한용운은 일제의 어떠한 유혹이나 협박에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지조를 지켰다. 한용운은 변절자들과 공개적으로 절교를 선언하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한 김동삼의 유해를 모셔와 장례를 지내는 등 소극적인 저항을 계속했다. 그런가 하면 일 제의 온갖 회유와 협박에도 민족의 지조를 지킨 소수의 지사들과 마음을 열 어놓고 교류하면서 엄혹한 시기 민족의 앞길에 희망을 던져주었다. 그런 의 미에서 심우장은‘전시총동원체제기’라고 불리는 일제의 마지막 수탈과 발 악의 시기에 민족지조의 상징적 공간으로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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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40년대 성북지역의 학생운동
    1930~40년대 학생운동은 주로, 1937년 중일전쟁 이전에는 사회주의운동의 일환으로서 ‘학생반제동맹운동’이라는 형태로 전개되었고, 중일전쟁 이후에는 다양한 형태의 ‘소규모 비밀결사운동’이라는 형태로 전개되었다. 학생들의 동맹휴교나 문화계몽운동이 1930년대 중반 이후 양적ㆍ질적으로 감소되었던 반면, 비밀결사를 통한 학생운동은 1945년까지 지속되었다. 오히려 1940년대 전반기 들어 양적ㆍ질적으로 더 확대되고 강화되어간 면이 있었다. 경성부 내 지역과 경기도 고양군 일대에 걸쳐 있었던 성북지역의 경우, 1930년대 중반 무렵까지는 학교 설립이 다소 미미한 편이었으나, 1934년 보성전문학교의 안암동 이전 이후 각급 학교들이 서울 중심부와 가까운 성북구 관내에 교사를 신축해 이전하는 사례가 늘어났다. 또한 성북에 인접한 지역에는 원래부터 각종 관공립 학교와 사립학교들이 많이 있어서 성북지역은 이 학교 학생들의 하숙촌, 즉 그 배후지로서 기능하고 있었다. 1930년대 중반 이후의 학교 이전 등으로 인해 이러한 ‘학도촌’으로서의 역할도 더욱 강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앞의 사례들에서 살펴보았다시피 이와 같은 성북지역의 조건은, 1930~ 40년대 청년학생 중심의 반제항일민족운동 과정에서도 성북지역이 그 배후지 역할을 하는 것으로 연결되었다. 1930년대 학생반제동맹운동에 참여했던 다수의 학생들이 성북지역에 거주하고 있었고, 이는 1937년 중일전쟁 이후의 소규모 비밀결사운동 참여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성북지역 내의 여러 곳, 특히 성북동과 돈암동은 이러한 결사들의 설립 장소, 모임 장소 등 활동의 근거지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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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천사의 조선후기 불교조각
    본 논문은 서울 돈암동에 소재한 흥천사의 조선후기 불교조각을 연구한 것이다. 조선 초에 조성된것으로 추정되는 천수관음보살좌상은 별도의 논문에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제외하였다. 흥천사의 주불전(主佛殿)인 극락보전에는 목조여래좌상, 목조보살좌상, 천수관음보살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목조본존불상과 우협시로 봉안된 목조보살좌상은 16~17 세기에 서로 다른 곳에서 조성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천수관음상은 조선 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본존불로 봉안된 여래좌상은 경상북도 문경에 있었던 오정사(烏井寺)에서 옮겨온 불상으로 추정된다. 관음전에 봉안된 목조관음보살좌상과 남순동자상 및 해상용왕상은 1701 년에 조성된 것으로, 전북 임실 사자산 적조암이 원 봉안처이고, 조선후기에 흥천사로 옮겨진 상들이다. 남순동자상과 해상용왕상은 관세음보살상과 함께 조선후기 불화로도 조성될 만큼 유행했던 도상이기 때문에, 관음보살의 협시로 동시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명부전에는 지장삼존상과 시왕을 비롯한 명부 권속이 총 27 구 봉안되어 있는데 1873 년의 개채기(改彩記)가 남아 있다. 조각의 기법으로 보아 17 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했으며, 현 명부전이 1855 년에 건립되었기 때문에 1701 년작 관세음보살상과 함께 적조암 또는 전라북도의 어느 사찰에서 이안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진다. 흥천사 노전(爐殿)의 석조 약사여래좌상·아미타여래좌상·지장보살좌상은 왕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을 밝혀냈다. 약사여래좌상은 1829 년에 조성되었으며, 아미타여래좌상과 지장보살좌상은 1829 년에서 1847 년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본 논문에서는 노전에 봉안된 3 구의 석조 불교조각상의 명칭과 조성 연도를 복장(腹藏) 조사를통해 밝힐 수 있었다. 또한 흥천사는 조선초기부터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왕실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었음을 조선후기 불교 조각을 통해서 밝혀냈다는 데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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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말기 흥천사(興天寺)와 왕실(王室) 발원(發願) 불화
    수국사에는 1907년에 일괄 조성된 불화 6점과 1908년에 조성된 괘불화 등 7점의 불화가 전하고 있다. 현존하는 불화는 1907년에 제작된 6점과 1908년에 제작된 掛佛畵 등 총7점에 불과하지만, 1907년에 大雄殿 上壇幀ㆍ大寮 上壇幀ㆍ靈山幀ㆍ獨聖幀ㆍ七星幀ㆍ九品幀ㆍ中壇幀ㆍ甘露幀ㆍ山神幀ㆍ神衆幀(2)ㆍ現王幀ㆍ竈王幀 등 13점의 불화가 일괄 조성되었다고 한다. 이 불화들은 조선 왕조 최말기 때의 작품들로서 왕실의 후원에 의해 皇帝와 皇太子, 皇太子妃, 皇貴妃, 義親王, 義親王妃, 英親王의 안녕과 천수를 기원하며 제작되어 왕실불화의 호화로운 양식을 잘 보여준다. 거대한 화폭에 그려진 불화는 그 규모 뿐 아니라 화려한 金泥의 사용과 뛰어난 양식 등으로 볼 때 가히 조선말기 불화를 대표한다. 도상적인 측면에서 볼 때 수국사의 불화는 19세기말 서울, 경기지역 불화의 도상을 대부분 답습하고 있어 전통의 계승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기적 양식을 보여준다. 물론 이러한 특징은 비단 수국사 뿐 아니라 19세기후반 서울, 경기지역 불화의 대체적인 특성이기도 하지만, 수국사의 창건과 불화제작은 왕실에 의해 대규모로, 또 드물게 이루어진 불사였다는 점에서 그 영향력은 상당했을 것이다. 화면을 2단으로 나누어 상단에는 보살과 제자 등을 배치하고 하단에는 사천왕을 강조하여 그린 아미타여래도는 이 불화보다 한 달 늦게 조성된 불암사 대웅전 아미타불화(1907년)에 그대로 계승되었으며, 극락구품도의 구도는 興天寺 極樂九品圖(1885년), 興國寺 極樂九品圖(19세기말), 奉元寺 極樂九品圖(1905년) 등 19세기말~20세기초반 서울, 경기지역에서 유행한 구품도와 동일한 구도를 보여준다. 또 구품도와 같은 화면분할식 구도를 보여주는 16나한도는 1897년 慶船 應釋이 出草하고 普庵 肯法, 梵華 潤益 등이 함께 제작한 불암사 16나한도의 도상을 거의 따랐으며, 현왕도는 1905년에 제작된 봉원사 현왕도를 가로로 조금 넓게 확장하여 그렸다. 수국사 불화는 당시 서울, 경기지역에서 유행하던 불화양식을 충실하게 받아들여 그 위에 왕실발원 불화의 화려함과 정교함을 더하여 만들어졌다. 또한 수국사의 불화에서 주목되는 점은 구한말 가장 대표적인 불교후원자인 姜在喜와 그의 아버지 姜文煥이 주축이 되어 행한 불사였다는 점이다. 1895년 명성왕후 시해사건, 1896년의 俄館播遷, 1897년 大韓帝國 성립, 1905년의 乙巳保護條約, 1907년 헤이그밀사사건 등으로 이어진 숨 가쁜 조선말기의 정국 속에서 이루어진 수국사의 창건과 불사는 왕실의 적극적인 지원과 관료들의 동참으로 이루어진 조선말기 최대의 불사였다. 거대한 화폭에 眞彩色과 金泥를 사용하여 호화로우면서도 뛰어난 양식을 보여주는 수국사의 불화는 전통불화의 마지막을 장식한 작품이자 불행한 국운을 불교에 의지하여 타개해 보고자 했던 조선왕실의 불사후원에 의한 마지막 작품이라는 점에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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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위동 김진흥 가옥 정밀실측조사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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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의 집을 찾아서: 어머니 박완서의 문학적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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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성곽과 골목이야기가 있는 장수마을 : 삼선 4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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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만들기의 추진단계별 로컬거버넌스 형성에 관한 연구: 성북구 장수마을 사례를 중심으로
    본 연구는 성북구 장수마을을 사례로 마을만들기 추진단계별 로컬거버넌스의 형성과정을 살펴보고, 마을만들기 실천을 위한 정책적 함의를 도출하였다. 이를 위해서 마을만들기의 추진과정을 초기단계, 성숙단계, 발전단계로 구분하고, 마을만들기의 로컬거버넌스 분석요소를 사회적 요인, 지역적 요인, 제도적 요인 등의 환경요인과 주요 행위자, 상호작용, 연계구조 등의 네트워크로 구성하였다. 분석결과, 주요 행위자들이 마을만들기 추진단계에 따라 급격하게 증가되며, 주도집단이 추진단계마다 지속적으로 변화하였다. 또한, 마을만들기가 추진되면서 행정과 마을주민과의 관계구도가 상호갈등 관계에서 상호협력의 관계로 변화되었다. 그리고 마을만들기가 추진되면서 협력적 거버넌스의 관계를 형성하는 주요 행위자들이 증가되었다. 마을만들기의 추진과정에서 주요 행위자간 로컬거버넌스 형성과 마을만들기의 실천을 위한 정책적 시사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마을만들기 및 마을주민에 대한 행정의 변화가 마을만들기에서의 로컬거버넌스 형성에서 중요하 다. 둘째, 지역에서 마을리더 및 주민협의회를 적극적으로 발굴 및 양성하기 위해 지방자치단체의 재정적 지원과 주민역량강화 교육이 필요하다. 셋째, 지방자치단체장의 마을만들기에 대한 관심과 의지는 마을만들기에서 참여주체간 로컬거버넌스 형성에 중요하게 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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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대문 밖 돈암지구 주거지의 형성과 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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