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학 연구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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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술자료
    장소성 기반의 도시재생 건축 설계 방법에 대한 연구 : 서울시 정릉동 정릉10길 일대 적용을 중심으로
    우리가 거주하고 있는 ‘도시’라는 공간은 건축과 공간의 집합일 뿐만 아니라 그 공간을 공유하고 사용하는 다양한 주체들의 정신적, 인문적, 사회적 요소들의 유기적인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는 공간이다. 하지만 산업혁명이 일어난 후 세계적으로 도시개발과 국제주의 건축을 표방하여 무분별한 건축을 반목하였고 이는 자생적인 건축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러한 결과로 우리나라의 건축 또한 지역과 장소성의 부재로 이어졌고, 이것은 건축이 물질의 논리와 상업적인 시각으로 만들어지는 콘크리트 도시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최근 도시의 패러다임은 더 나은 도시 환경을 위하여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 개선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많은 시도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각 지자체에서는 낙후되거나 정체된 지역들을 대상으로 도시의 정체성 확립과 공동체구축, 일자리 창출 등을 목적으로 활성화를 위한 개념들을 적용하여 도시재생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국내의 도시재생 사업 진행 시 장소성은 도시 정체성 확립 및 도시의 차별성 구축 시 반드시 고려되어야 하는 사항이지만 개별적인 특색이 드러나지 못하고 국·내외의 성공적 사례들을 단순히 답습하였으며 각각의 장소에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하는 데 있어 명확한 방법에 대한 제시가 없는 실정이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도시에서의 장소성의 개념과 구성요소에 대하여 알아보고 또한 도시 정체성과 장소성, 도시재생과 장소성의 상호관계성을 고찰한다. 또한, 현재 국내 도시재생의 일환인 서울형 도시재생 사업들을 통하여 문제점과 장소성의 연관성을 도출하고 이를 중심으로 국 · 내외의 우수 도시재생 사례분석을 통하여 낙후된 지역의 도시재생에 있어 장소성이 어떤 요소들을 고려해야 하는지 도출한다. 도출된 지표로 대상지인 정릉3동 배밭골 일대 지역 활성화를 위한 장소성의 요소들에 대해 알아보고, 대상지에 맞는 활성화 계획을 제안하기 위한 기초자료와 새로운 계획안 및 마스터플랜을 제안하는 것을 연구의 목적으로 한다. 도시에서의 도시 정체성과 그에 따른 장소성은 필연적으로 생겨나며 필수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요소이다. 서울형 도시재생은 도시재생이라는 명목하에 각 도시 문제를 해결하기에 소극적인 방법으로 대응하고 있으며 장소성의 관점에서 바라보았을 때 도시에서의 장소성의 구성요소 4가지를 모두 충족하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국·내외의 우수 도시재생 사례를 분석하여 보았을 때 도시에서의 장소성의 요소 4가지와 장소성의 구성요소인 물리적 요소, 행태적 요소, 의미적 요소가 고려되어야 하며 이는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장소성이라는 개념은 변화하는 개념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연구와 고찰이 필요하다. 본 연구는 도시재생의 개념 안에서 장소성의 관점 인식의 필요성과 도시재생 및 마스터플랜 계획 시 고려되어야 할 장소성의 요소에 대한 건축 설계 방법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 학술자료
    자치분권의 시작, 성북마을아카이브
    성북마을아카이브는 성북구청과 성북문화원이 협력하여 지역의 고유성과 특수성을 담고자 구축한 마을아카이브이다. 공동체의 기록물을 보존하는 공동체 아카이브이자, 원천자료의 디지털화를 통해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가는 디지털 아카이브이다. 민⋅관 거버넌스로 연차적⋅단계별 추진을 거쳐 관리시스템과 홈페이지를 구축하였다. 성북마을아카이브의 시스템은 고도화된 마을기록 표준분류체계를 바탕으로 자료축적과 개별 기록물 간의 연결이 원활히 이루어지도록 설계되었다. 성북문화원은 이를 바탕으로 기록물을 온⋅오프라인으로 연계하면서 융합문화콘텐츠를 생산하려고 노력하였다. 또한 기록물의 보존뿐 아니라 콘텐츠 생산 및 활용을 위해 홈페이지에 보여지는 항목 구성을 다양화했다. 성북의 역사문화자원을 어떻게 하면 이용자들에게 그 생성 및 존재를 맥락과 함께 보여줄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 끝에 만든 구조이다. 또한 다채로운 큐레이션과 주민기록단의 활동을 통해 보다 풍부한 아카이브 플랫폼을 구축하였다.
  • 학술자료
    서울시 성북동 성낙원과 독립운동가의 활동-화사(華史) 이관구(李觀求)를 중심으로-
    이 글은 20세기 초부터 1945년 해방 전후에 이르는 시기에 성낙원이 위치했다고 고려되는 의친왕 별업(別業)을 중심으로 독립운동가 화사 이관구의 활약을 설명하는 것이 목적이다. 동시에 대표적인 근대 문화유산인 성낙원이 지니는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하는 것이 부수적인 의도이다. 이 글을 통하여 성낙원이 일개 문화재라는 차원이 아니라 조선시대부터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해방 정국에 이르는 장대한 시간 속의 흐름에서 시대적 문화상을 지니던 역사적 기념 공간으로 조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의친왕과 이관구가 교유하던 해방 조국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물들의 궤적을 살필 수 있는 토대라고 할 수 있다.
  • 학술자료
    흥천사 扁額(편액)·懸板(현판) 연구
    본 논문은 서울 성북구(城北區)에 위치한 흥천사(興天寺)에 소장된 편액과 현판의 전반적인 현황을 검토하고 편액 글씨의 서예사적 의미를 밝히고자 하였다. 우선 서울의 전통사찰 가운데 가장 많은 편액·현판을 보유한 흥천사는 기존 궁궐 건축의 편액 위계 상, 모든 전각의 편액이 형식상 가장 높은 위계를 표시하는 사변형 현판으로 조성되어 왕실 원찰로서의 사격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는 흥천사가 신덕왕후(神德王后) 정릉(貞陵)의 능사로서 현재의 위치에서 중창한 이후에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같은 왕실인사와 세도가들의 원찰(願刹)로서 위상이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편액 사례 중에서도 드문 세로로 긴 붉은 색 복판에 테두리 끝에 용두형(龍頭形) 봉으로 장식한 명부전(冥府殿) 편액은 유교식 장례에서 사용하는 명정(銘旌)의 형식을 차용한 사례로 보았다. 특히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인근 봉국사(奉國寺) 명부전 편액도 붉은 색의 세로형 복판에 유사한 형식으로 조성되어 당시 이 지역에서 유행한 형식일 가능성이 있다. 또한 흥천사 명부전 편액의 용두형 봉 장식이 시왕(十王)의 어좌 장식과 유사한 도상과 방향으로 조성되어 있는 사실에 착안하여, 조선 후기 사변형 편액의 봉 장식 기원에 대해 규명하였다. 즉 고려부터 조선 전기의 편액이 중국 현판의 형식적 특징을 그대로 수용하여 조성된 반면, 조선 후기의 편액은 판재형 테두리 끝에 목각 봉 장식을 붙인 간소화한 형태로 나타난다.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조선후기 편액 형식의 기원으로는 임란 이후 소실된 궁궐과 주요 건축을 대규모로 중건하는 과정에 많은 물량의 편액을 조성하면서 어좌(御座)나 교의(交椅) 같은 의자의 권두형 장식을 차용하여 간소화하였다고 추정하였다. 마지막으로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모연(募捐)하여 1869년 조성된 흥천사 대방(大房)에 그가 쓴 예서 편액이 게시된 사실에 주목하였다. 정치적 야망을 이루기 위해 집권 이전부터 불교의 원력에 의지하였던 그가 집권 이후에도 흥천사를 비롯, 화계사(華溪寺), 운수암(雲水庵), 흥국사(興國寺) 등 근기(近畿) 지역 사찰에 중창을 주도하면서 대방 건축을 조성하고 스승인 추사 김정희(金正喜)의 영향을 받은 고예체(古隷體) 편액을 게시한 사실은 스승과의 서예적 사승(師承)을 뚜렷이 하고 자신의 집권을 알리려는 정치적 의도가 있었다고 보았다.
  • 학술자료
    조선전기 능침사의 설치와 변화 - 서울 지역 능침사를 중심으로
    본 논문은 조선전기에 설치된 능침사 가운데 오늘날 서울 지역에 소재한 능침사의 현황과 특징, 변화상을 분석한 연구이다. 서울에 소재한 조선전기 능침사는 정릉(貞陵) 의 흥천사, 경릉(敬陵)과 창릉(昌陵)의 정인사(수국사), 선정릉(宣靖陵)의 봉은사 등 총 3곳이다. 조선전기 서울 지역 능침사의 특징은 세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서울의 세 능침사는 왕실의 대표적인 추복도량이었을 뿐만 아니라 왕실의 정치 적 위상을 제고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서울 지역 능침사들이 도성과 인접한 곳에 위치해 왕실 불사의 설행이 용이했고, 불교행사를 통한 민심 결집에도 효과적이었기 때문에 왕 실의 정치적 기구로 활용될 수 있었다. 둘째, 서울 지역의 능침사 건립을 주도한 인물들은 당대 최고의 권력층이었다. 도성 인근에 대규모 가람이 설치되었던 것은 상당한 자금과 막강한 정치력이 요구되는 사안이 었다. 이 사찰들은 왕실의 전폭적인 재정 지원을 받아 조성되었고, 왕의 사액을 받음으로써 명실상부한 왕실사찰로 자리매김했다. 셋째, 서울 지역의 능침사는 왕실불교의 거점이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유학자들의 표 적이 되었다. 정동의 흥천사는 유생들의 두 번의 방화에 의해 결국 폐사되었고, 정인사는 부녀자들의 음란하고 부도덕한 불사의 장소라는 지탄을 받았다. 봉은사는 왕릉과 너무 가까워 불경소리가 들린다는 이유로 연산군대에 능역 밖으로 이전하였고, 명종대에는 부도덕한 대비와 요승 보우로 인해 국가기강을 흩트리고 민심을 어지럽힌다는 등의 갖가 지 비판을 받았다. 서울 지역의 능침사는 유학자들의 비난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조선말까지 서울 지역의 불교문화를 주도하는 사찰로 명맥을 이어갔다. 여기에는 왕실의 정치경제적 지원과 더불 어 조선전기부터 구축된 공고한 종교적 기반이 자리 잡고 있었다. 또한 능침사의 제사 기능이 사라진 조선후기에도 세 사찰의 승려들이 능침 관리와 산릉 제사 준비에 적극 협력하면서 불교의 존립 기반을 스스로 확대하였다. 능침사가 수행하던 불교식 추천의례 과 내세추복신앙은 조선시대 서울의 불교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 학술자료
    개경과 한양의 사찰 – 도성사찰의 역할과 의미
    이 논문은 고려시대 개경과 조선시대 한양에서의 사찰 조성 계기와 변화 그리고 위상을 살펴보고 비교해 봄으로써 조선초 신왕조의 도읍인 한양에서의 사찰 건립의 역사적 의미를 파악하고자 하였다. 고려시대 개경의 사찰은 919년 개경 건립과 함께 조성되어 신앙의 구심점이자 궁궐, 관청 등과 함께 공적인 공간으로서 왕도 개경을 장엄하며 고려 문화와 사상의 중추가 되었고, 사람들의 생활과 밀접한 공간이었다. 개경의 사찰운영에는 불교가 국가를 운영하고 왕실의 권위를 높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 기대했던 고려사회의 관념이 반영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비해 조선시대에는 1394년 한양 천도가 결정된 이후 궁궐, 성곽, 종묘 등 주요 시설과 함께 한양 도성 안에 사찰을 세우거나 혹은 사찰 건립에 대해 고려했던 모습은 확인되지 않는다. 불교를 비판하며 건국한 신왕조의 도성임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1396년 정릉(貞陵)과 함께 그 능침사로 태조가 흥천사(興天寺)를 지으면서 한양 도성 안에 처음으로 절이 들어섰다. 흥천사는 애초 도성 계획에는 없었던 것으로 고려말 이래의 왕릉 제도의 영향을 받아 정릉의 부속시설로 조성된 것이었지만 이후 태조가 도성안에 사찰을 짓는 계기가 되었고, 조선전기 국왕이 세운 사찰이 도성에 운영되던 시발이 되었다. 그러나 이는 과도기적 현상이자 구시대의 유습이었다.
  • 학술자료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의 체계적 관리를 위한 지구단위계획 활용방안 연구 : 성북동 지구단위계획 사례를 중심으로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은 2010년 제도화된 이후 재산권에 미치는 영향이 다른 문화재 제도보다 상대적으로 커 변화 및 개선이 계속 요구되었다. 문화재청에서는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의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도시계획과 연계하는 방법을 연구하였다.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과 도시계획의 연계는 제도적인 문제를 해결할 뿐만 아니라 도시공간에 문화재의 역사문화환경 조성하는 데 효과적이지만 현 제도상에서는 분리된 대상으로 여겨져 연계성이 매우 약한 모습으로 운영되고 있다.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과 도시계획의 연계는 국토의 효율적 활용과 역사문화적 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해 필수적이다. 현 도시계획체계에서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을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방법은 지구단위계획과의 연계이다. 지구단위계획은 우리나라 도시계획체계에서 토지규제라는 평면적 규제와 함께 주택과 시설 등의 건축계획의 수직적 작용 등이 혼합된 종합계획이다. 지구단위계획과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은 공간의 질을 높이기 위한 목적을 위해 구역을 설정하고 건축행위를 제한하여 구역의 특성을 보존하는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성북동 지구단위계획은 구역 내에 산재된 문화재와 역사적 흔적들을 도시공간에서 보여줄 수 있는 방법에 대하여 도시계획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성북동 지구단위계획구역에는 한양도성, 선잠단지, 성북동 별서, 심우장 등 4개의 지정문화재의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이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문화재 주변에 역사문화적 요소를 극대화할 수 있는 역사환경관리구역을 설정하여 지구의 특성을 보존하고 있다. 역사환경관리구역은 지정문화재의 도입부 및 주변 지역에 경관적 요소를 유지하기 위해 건축물의 높이와 용도, 용적률, 건폐율 등을 제한하여 역사문화적 특성을 보존하고 역사문화공원, 선잠박물관 등 기반시설을 설치하여 양질의 역사문화환경을 구축하고 있는 도시계획적 접근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성북동 지구단위계획구역에서 지정문화재의 특성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이 도시계획대상으로 다뤄지지 않는 별도의 행정구역으로 분류되고 있다. 도시계획의 국토계획법과 문화재 주변의 문화재보호법의 연계성이 미흡하여 문화재 인접구역은 오히려 방치되어 있어 문화재 맥락(context)을 고려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문화재적 가치를 지닌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을 관리할 수 있는 방식과 관리체계가 부족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성북동 지구단위계획에서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이 체계적 관리되기 위해서는 문화재의 역사문화환경이 도시자원으로 인식될 필요가 있다. 문화재 주변의 고유한 환경은 해외사례에서 보듯이 도시자원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특히 영국의 사례에서는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이 하나의 도시자원으로 활용되기 위해서 정책, 디자인, 맥락(Context)조성, 이해관계자 참여 등 다양한 노력이 필요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도 문화재 주변에 창의적인 디자인과 문화재의 맥락을 고려할 수 있는 지속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또한 도시계획체계에서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지구단위계획과 허용기준의 연계, 전문인력 배치, 부서간 소통 활성화, 도시계획방식 활용 등의 방법들이 적용될 필요가 있다.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이 도시계획적 관리방식을 고민하는데 성북동 지구단위계획이 많은 시사점을 줄 수 있다. 국토의 문화적 역량을 높이기 위해서는 문화재와 그 주변을 포함한 역사문화환경을 도시계획에서 도시요소의 하나로 활용이 요구된다. 성북동 지구단위계획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제도의 연계성 강화, 도시계획체계의 전문역량 보완 등 일부 부분이 보완될 점이 많다.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을 효과적으로 연계하는 방법론을 아직 부족하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연구가 필요하다.
  • 학술자료
    도시지역 장소성의 물리적 요소에 대한 연구 -서울시 정릉동 정릉10길 일대 활성화를 중심으로
    (연구배경 및 목적) 오늘날의 도시는 빠르게 변화하며 ‘장소’라는 개념이 점점 약화되어가고 있다. 또한,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3동 정릉 10길 배밭골 일대는 주변 대학의 유동인구와 문화자원을 지니고 있음에도 이러한 장소적 특성을 살리지 못하고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정릉3동 배밭골 일대 지역 활성화를 위한 장소성의 물리적 요소들에 대해 알아보고, 대상지에 맞는 활성화 계획을 제안하기 위한 기초자료를 구축하는 것을 연구의 목적으로 한다. (연구방법) 연구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이론적 고찰로써 장소성의 개념들과 선행연구들을 분석한 후, 국 ·내외의 사례들을 선정하여 지역 활성화를 위한 장소성의 물리적 요소들의 특성을 도출한다. 그리고 대상지의 선정과 분석을 진행하고 도출한 특성들을 대상지에 적용 가능한 요소들과 방향성을 제시한다. (결과) 이에 본연구에서는 사례분석을 통하여 지역 활성화를 위한 물리적 요소들을 도출할 수 있었으며 이에 따라 대상지에 적용할 수 있는 요소들과 방향성은 다음과 같다. 첫째, 도로체계의 정비와 경사를 고려한 합리적인 교통체계를 확립하여야 하며 대상지 주변의 대학자원, 자연자원 활용을 고려해야 한다. 둘째, 구릉지를 고려한 보행환경 조성과 입체 보행로와 경사 극복을 위한 레벨 계획이 필요하다. 셋째, 블록의 구획과 건물들의 배치는 정비가 필요하며 주변환경과 상호 작용할 수 있는 다양한 용도의 프로그램이 배치되어야 한다. 넷째, 구릉지에 적합한 주거단지 계획이 필요하다. 또한, 기존의 골목의 활용방안과 포켓 공원 또는 인공지반을 통한 데크공원 등을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결론) 본 연구는 활성화되지 못했던 지역의 활성화를 위한 방안에 대하여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도시지역의 장소성의 물리적 요소에 관하여 마스터플랜 조성 시 필요한 요소의 선정기준을 제시하는 것에 그 의의가 있다. 또한, 성북구 정릉3동 정릉 10길 일대의 지역 활성화에 필요한 요소들의 방향성을 제시할 수 있었다. 정릉동 배밭골에 한정하여 모든 대상지에 객관화시키기에는 한계가 있으며, 추후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대상지에 적용 가능한 실질적인 마스터플랜과 건축계획에 관한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 학술자료
    예술로 지역 기록하기 : 성북 지역 사례를 중심으로
    이 논문은 기존 지역 기록의 대안적인 방법으로서, ‘예술’로 지역성을 기록하는 것의 가능성과 그 실행 방안을 성북 지역 사례를 중심으로 서술하였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으로 기록 패러다임이 변화를 겪으면서 기록의 범위가 확장되었고, 그동안 소외되거나 배제되었던 지역이나 공동체, 개인의 일상 등이 기록의 관심 영역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또한 기록관리에 있어서도 ‘출처의 원칙’, ‘원질서의 원칙’ 등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고, 평가선별이나 기술에 있어서 아키비스트의 주관성이 인정되는 등의 변화가 있었다. 또, 기록의 수집이나 생산 못지않게 재현이나 활용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구술, 맵핑 등과 같은 다양한 방식이 기록에 활용되기 시작했고, 이런 배경 아래에서 ‘예술’을 기록의 방법으로 가져오는 것에 대한 논의도 가능하게 되었다. 지역을 기록함에 있어서도 적절한 방안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한데, 특별히 지역성(로컬리티)의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특성 때문에 지역기록화는 다양한 관점과 방안이 필요하다. 또한 단순한 과거의 재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금-여기’의 지역성을 생산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논문에서는 기존의 대표적인 지역기록화 방안인 ‘도큐멘테이션 전략(Documentation Strategy)’을 비롯하여, 여기에서 변형된 참여형 아카이브, spanDoc 모형, 서술형 서사 기반 수집 실행지침(S-NAP) 등을 소개하고, 재현의 방안으로 제시되고 있는 구술, 장소가 드러나는 글쓰기, 맵핑 등과 함께 새로운 방안으로 제시될 수 있는 아카이브 아트(Archival Art)에 대해 논의해보았다. 아카이브 아트는 형식이나 방법적인 측면에서 아카이빙 과정을 통해 수집한 아카이브 자료들을 작품 제작에 이용하거나 아카이브의 방식을 이용하는 경향의 예술작품으로, 예술가의 아카이브 재해석 및 임의적 구성 등의 성격 때문에 기존 아카이브에 대항적인 성격을 띠며 대안적 서사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이런 여러 가지 이론 검토를 바탕으로 서울시 성북구의 사례를 통해 예술로 지역 기록하기의 가능성을 살펴보았다. 성북 지역은 근현대 이래로 많은 예술가의 삶의 터전이었고 이와 관련된 문화유산이 풍부한 곳이다. 이를 토대로 지금도 다양한 예술가들이 활동하고 있으며, 동시대 문화예술 네트워크가 활발하게 작동하고 있어 좋은 사례가 될 수 있다. 실제로 다양한 문화예술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예술과 지역을 이으려는 다양한 활동들이 있었고, 이런 활동들은 대체로 기록물로 남겨졌다. 이 중에는 공동체와 예술 관련 기록물이 많고, 특히 지역 예술 분야의 기록물이 지속적으로 생산되고 있다. 또한 예술로 지역을 기록하려는 다양한 프로젝트들이 있었는데, 대표적인 사례로 《성북도큐멘타》(2014-2020, 2022), 《문인사기획전》(2015-2021) 등을 들 수 있다. 그 중《성북도큐멘타》는 시각예술을 통해 지역을 기록하고자 하는 분명한 목적으로 시작한 프로젝트로, 기록의 수집·생산뿐만 아니라 재현과 활용의 측면에도 중점을 두고 있다. 이는 예술을 기반으로 한 지역 자원의 큐레이팅이라는 측면과 다층적 프로세스를 통한 지역성 기록, 예술을 통한 기록물 생산, 지역 네트워크와의 연계성 등 다양한 측면에서 의의가 있다. 예술작품을 통해 소외된 지역성을 미학적으로 재현하고, 장소성을 입체적으로 재조명하고, 종합적인 방법을 통해 지역성을 현재의 기록으로 가져오고, 결국 예술적 실천에도 이른다는 점에서 대항기록으로서의 가능성을 충분히 엿볼 수 있었다. 이와 함께 《성북도큐멘타》 프로젝트의 구조를 정리하여 예술을 통한 지역 기록 방안의 모형으로 제언해보았다. 사전 지역 리서치를 통해 지역성이 잘 드러나는 주제 선정, 기획단의 구성, 주제와 관련한 공동 학습, 참여자 개별 리서치 및 작품 제작, 전시, 도록 제작 및 온라인 아카이브 구축의 과정을 거쳐 지역을 기록할 수 있음을 각각의 과정을 좀 더 자세히 풀어 설명하였다. 다만 전시, 도록 제작, 디지털 아카이브 구축 등 재기록화가 끝난 뒤의 관리나 활용 방안에 대해서는 앞으로 연구가 더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또 이 과정에서 주체가 되는 기관이나 예술가의 역할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성북도큐멘타》의 경우 지역 기록화의 주관 기관인 성북문화재단의 안정적 재정 확보와 인력 배치, 지역 네트워크의 협조로 인해 프로젝트가 지속성을 가지고 진행될 수 있었다. 예술가는 예술가 본연의 역할 외에도 자료 수집 및 생산자로서, 실천가로서, 아키비스트와 유사한 역할을 하거나 아키비스트의 조력자로서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다. 이들은 더 나아가 아카이브 영역을 확장하고 다양화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다. 특히, 재현 불가능한 것들을 시각적으로 재현할 수 있는 것은 예술가들만의 특별한 장점으로, 이는 기록 패러다임의 새로운 국면에서 의미 있게 작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결국 예술로 지역을 기록한다는 것은 소외되고 배제되어 왔던 장소와 그 속에서 만들어진 사람들의 활동과 공동의 기억, 역사 등을 예술가의 해석을 통해 현재의 기록으로 가져온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며, 지역 기록의 하나의 방안으로 무한한 가능성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예술로 지역을 기록하는 것에 대한 연구는 그동안 크게 다루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기본적으로는 지역성을 기록하고 재현하는 방안에 대한 것이지만, 나아가 예술을 통한 기록의 영역 확장과도 이어진 의미 있는 연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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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시화 과정에서 서울 지역 마을 공동체의 지속 요인과 변화 양상 – 성북구 정릉공청회를 중심으로
    본 논문에서는 서울시 성북구 정릉2동이라는 구체적인 지역 사례를 들어 일제 강점기 정친회(정릉친목회)에서 시작하여 해방 후 재산 형성과 재정립 과정을 거친 정릉공청회, 도시화 속에서 공적 체계인 노인회를 수용하고 이주민의 유입에 대처하여 외연을 확장한 정릉대동친목회, 그리고 지방 자치제 실시 후 전통성을 그 특징으로 내세우는 정릉공청친목회를 통하여 일제 강점기부터 현재까지 지속되어 온 정릉2동 마을공동체의 지속 전략과 변화 양상, 그리고 공동 재산과의 관련성을 살펴보았다. 정친회, 즉 정릉친목회는 정릉지역 유지들의 친목계로 일제 강점기인 1915년 9월 2일에 창건되었으나 1930년에 공청을 짓고 점차 정릉리 마을공동체 성격으로 변모한다. 해방 후 한국전쟁으로 전소된 공청을 새롭게 짓고 공청이 세워진 토지를 불하받아 기본 재산을 형성한 정릉공청회는 회칙과 규약을 새롭게 제정하면서 정릉공청회의 재건 작업을 시작한다. 비록 정릉공청회 회칙과 규약에서 회원 자격을 ‘유지’에서 ‘동민’으로 확대하였으나 이 당시 정릉공청회 구성원 자체는 이미 본토 주민, 즉 토박이 위주의 정예 회원으로 구성되었고 이들은 정릉공청회 기본 재산에 대한 재산권을 가지는데 이는 향후 정릉공청회 발전 과정에서 이주민과의 ‘구별짓기’를 형성하는 기제로 작용한다.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이주민들의 대량 유입은 전통 마을공동체 조직인 정릉공청회의 변화를 요구했다. 정릉공청회는 경비 절감을 위하여 공적 체계인 노인회를 수용하였고, 노인회와 같이 공청을 사용하면서 이주민 일부를 수용하여 외연을 확장해 나갔다. 또한 정릉대동친목회를 재정립하여 공동체 조직의 존립을 이어 나갔다. 그러나 정릉대동친목회라고 하더라도 내부에 기본 재산에 대한 재산권을 가지고 있는 정릉공청회 회원, 즉 토박이들과 이주민이 함께 존재하는 한 토박이와 이주민의 차별은 여전히 잠재되어 있었다. 2001년 이후 지역 전통문화에 대한 성북구청의 지원 속에서, 또 2018년을 기점으로 정릉대동친목회 운영진이 세대교체 되면서 정릉대동친목회는 또 한 번의 새로운 변화를 시도했다. 즉 ‘정릉공청대동회’라고 하는 명칭에서부터 예전 정릉공청회의 연속성을 강조하려고 하였고, 회칙과 운영 규칙에 산신제를 추가하거나 별도의 ‘봉제회 회칙’을 만들어 정릉공청대동회의 전통성을 강조하고 노인회에 넘어갔던 산신제 주도권을 다시 찾아와 전통을 바로잡으려고 하였다. 정릉공청대동회의 전통성 강조는 회칙뿐만 아니라 산신제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는데, 이는 정릉공청대동회가 마을의례를 지속하고 이를 제도권에 포함시키기 위한 시도로 이어졌다. 그러나 재개발 논의를 앞두고 공청의 처분 논의에 이르자 회원 내부의 토박이와 이주민 갈등은 표면화되었다. 토박이에 대한 기준도 1959년 공청 준공기를 기준으로 나뉘어 그 이후 들어온 사람들은 아무리 정릉2동 지역에 40년 이상 거주하였다 하더라도 이주민으로 취급되었다. 이는 재산권의 유무와 관련된 것으로 마을공동체에서 공동 재산의 의미가 마을공동체가 지속하게 된 요인으로도 작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측면에서는 재산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아닌 사람의 차별을 만들어 내어 마을공동체 구성원들 내부에 토박이와 이주민의 ‘구별짓기’를 만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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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실천으로서의 공공역사와 지역학의 방향 -서울 성북구 사례를 중심으로-
    본고에서는 역사 실천의 하나로 서울 성북구에서 지난 10여년간 진행해 온 사례를 소개하고 이러한 사업이 지역학과 공공역사의 입장에서 지니는 의의를 살펴보았다. 역사학을 비롯한 인문학이 지역사회와 결합하여 결과물을 만들어낸 사례로서 지역학 내지는 공공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여기서는 이러한 성북구의 역사문화자원조사, 성북마을아카이브 구축, 역사문화자원 해설 어플리케이션 개발 등을 통해 성북학으로서의 지역학과 공공역사의 한 사례가 가지는 의의를 세 가지로 제시할 수 있다. 첫째, 지역 역사문화자료의 수집과 연구를 통한 문화자원화와 스토리텔링을 통해 다양한 지역문화콘텐츠를 제작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둘째, 인문학 분야의 연구가 지역 개발 계획에 적용될 수 있는 사례를 보여주었다. 인문학 연구를 토대로 한 제안이 어떻게 지자체의 도시 개발과 문화 정책 속에서 구현되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인문학 연구의 성과를 일반 시민과 공유하는 창구를 지역사회와 결합해 만들어냈다는 의의가 있다. 향후 지역학과 공공역사의 방향성은 지역에 대한 연구 수행과 성과물의 공유를 넘어 다른 분야의 연구자, 시민, 지방정부를 포섭하고 연결하여 지역의 현안 문제를 다루는 공론 네트워크와 소통의 창구를 만들고 거버넌스를 구축하는 것이다. 이것 역시 공공역사가, 시민역사가의 책무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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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차 개설에 의한 한양도성 문루 주변지역의 도시 변화에 관한 연구
    본 연구는 서울이라는 도시의 변화 과정에서 과거 물리적 경계였던 한양도성이 근대화의 동인 중 하나인 전차로 인해 어떠한 변동의 과정을 겪었는지, 또한 그러한 변동의 과정에서 도시의 조직과 공간, 체계들이 어떻게 변화하게 되었는지를 알아본 것이다. 조선 건국 이후 약 500년 동안 한양도성은 도시의 구조와 영역을 구현하는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바뀌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도 그 형상이 크게 변하지 않고 유지되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들어 한양도성은 도시의 근대화에 있어서 성곽은 골칫거리로 전락하였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새로운 교통기관의 도입은 전통도시 한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500여 년간 성곽도시였던 한양이 전차의 도입으로 변형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지금은 사라졌으나 대한제국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쳐서 1960년대까지 시민의 발이었던 전차는 도로에 궤도를 설치하고 그 위를 운행하는 노면전차로써, 전차를 운행하기 위해서는 궤도의 부설이 선행되어야 했으며, 궤도가 뻗어나가는 범위가 도시화 규모를 결정짓는 요소가 되었다. 전차는 대한제국이 선포된 다음 해인 1898년 설립되었으며, 1899년 개통식 이후 본격적으로 운행하였다. 처음으로 도입된 전차의 노선은 돈의문부터 종로와 흥인지문을 지나 청량리를 연결하였으며, 두 번째 노선은 종로에서 용산에 이르는 것이었다. 세 번째 노선은 철도역과의 연결에 주안점을 맞추어 서대문 정거장과 남대문 정거장을 연결한 의주로선이 개통되었으나 부설 후 2~3년이 지나면서 운행이 중단되었고, 네 번째 노선은 마포로 이어졌다. 전차의 등장은 한양에 큰 변화를 불러 일으켰다. 처음 전차가 개통되었을 때만 해도 한양도성은 훼철되지 않았지만, 전차가 등장하였을 때만 해도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던 한양도성이 점차 훼손되기 시작하였으며, 대한제국시기에 성문을 통해 도성 안과 밖을 연결하던 전차가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부터 훼철을 통해 절개한 한양도성 사이로 신설된 도로로 노선을 이전하면서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한양도성의 경계로서의 기능이 변화하기 시작하였음을 의미한다. 대한제국기의 도시 변화 속에서도 여전히 경계로서 여전히 그 기능을 유지하던 한양도성은 일제강점기에 들어 변동이 일어났다. 경성시구개수사업으로 인해 한양의 전통적인 가로체계를 무시하고 동서와 남북 방향으로 뻗은 직선의 도로가 주를 이루는 가로망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주요 거점을 직선으로 연결하는 격자형 도시에 대한 제안은 기존의 한양도성과 한양도성의 성문이 가지고 있던 도시 구조 형성의 역할이 사라지게 되었음을 확인시켜 준다. 간선도로의 계획과 함께 도성 내 전차 노선의 확장과 전차의 운행 방식은 당시 도성 내 시가지화가 진행되었던 지역이 어느 곳에 집중되어 있는 가를 잘 보여준다. 대한제국기에 신설된 전차노선은 모두 조선인 주거지를 지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지만, 한일 병합 이후에는 경성부의 간선도로 계획과 맞물리면서 노선의 성격이 바뀌게 된다. 이러한 발전 형태는 시구개수사업에서 공사가 진행된 순서와 비슷한 양상인데, 당시 전차노선이 이미 개설된 도로 위에 철로를 놓는 방식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폭원의 정비가 이루어진 도로가 우선적인 노선 확장의 대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전차 교통의 확장 과정을 통해 기존의 한양이 가지고 있던 도시 구조와는 다른 경성이라는 도시의 구조로 변해가는 배경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양도성과 전차의 형성과정을 살펴보는 연구의 과정 속에서 한양도성이라는 도시의 물리적 경계가 전차라는 도시 변화의 동인을 만나 어떻게 변해갔는지를 한양도성의 문루 주변지역에서 나타나는 도시적 변화에 대해 궤도와 지형, 도시조직의 세 가지 시각으로 분석하였다. 세 가지 분석의 시각은 모두 시간과 장소의 개념을 통합하여 도시를 바라보는 관점을 통해 서울이라는 도시의 변화에 대한 해석을 위한 방법으로 사용되었다. 돈의문은 정동 일대의 시구개수사업으로 인한 계획도로의 개설 및 확장으로 인해 훼철되었다. 전차의 개통과 정비된 도로로 인해 돈의문 일대는 교통의 중심지로 전환되었으며, 교통의 발전을 기반으로 하여 1920년대 이후부터 신시가의 창설 및 기성시가가 확장되어 돈의문 밖으로 도심의 영역이 확장되었다. 돈의문 주변지역의 한양도성의 변동을 궤도와 지형, 필지를 통해 살펴보는 과정에서 궤도 혹은 도로의 형성이 권력의 주체에 따라 새로운 도시구조로 이뤄지는 과정과 함께 궤도와 도로의 확장을 통해 한양도성이 가지던 경계로써의 기능이 사라져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또한 궤도의 확장의 과정에서 지역이 가지고 있던 지형이 변하기도 하였으며, 경계가 사라지면서 필지의 이용행태가 변하여 성 안팎이 하나의 도시 영역으로 확장되어 지역의 경관이 변하게 되었다. 광희문은 1913년 왕십리선을 부설하는 과정에 성벽이 훼철되었으며, 1921년 장충동 일대에 문화주택지 개발을 위해 일대가 철거되었다. 경성 시내의 인구 과밀화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경성의 동쪽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광희문 주변지역의 성곽이 훼철된 것이다. 장충단까지의 도로 개통, 전차노선의 연장, 새로운 대중교통수단의 등장과 경성시가지계획에 의한 경성의 확장과 맞물리면서 광희문 주변지역이 도심에 근접한 새로운 주거지로 개발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주택지의 조성을 위해 도시의 중심과 연결되는 간선도로와 주택지에 접근하는 도로를 형성하기 위해 성곽을 훼철했고, 이 과정에서 차량 통행이 가능한 도로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성곽을 절단하고 지형의 변화가 일어났다. 광희문 주변지역은 도시 변화의 과정에서 도로의 개설과 새로운 주택지를 형성하는 과정에 지형적 변화가 크게 동반되었으며, 원래 가지고 있던 지형적인 특성이 모두 사라졌다. 광희문 주변지역은 새로운 필지 형성을 위해 선결되어야 하는 궤도의 형성과 지형의 변화를 수반하고 있는 지역이다. 혜화문 일대의 성곽의 훼철은 도로의 개설로 인하여 일어났는데, 1915년에 형성된 도로로 인해 한양도성의 일부가 절단되었고, 1939년에는 혜화동과 돈암동 사이의 전찻길을 내면서 혜화문 역시 훼철되었다. 혜화문 주변지역은 혜화동까지의 전차 운행으로 필지의 분화 등이 변화를 보이긴 하였지만, 도성 바깥까지 그 영향이 전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돈암정까지 연결되는 교통여건이 개선되고 1940년대 돈암지구가 주거지역으로 형성되면서 이 지역을 통하는 버스와 전차의 노선의 영향으로 자연적으로 도심과 돈암지구를 연결하는 혜화문 주변지역에도 필지의 분화를 통해 도시의 영역이 확장되었다. 혜화문 주변지역은 도로의 형성이나 지형의 변화의 영향으로 지역의 성격이 변했다고 하기 보다는 돈암지구의 형성을 통해 도성 외부 지역의 필지부터 도성의 방향으로 변해왔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돈의문과 광희문, 혜화문의 도시 변화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전차라는 요인이 도시의 변화에 작용하는 과정들을 살펴보았지만, 세 지역에 같은 방식으로 작용하지 않았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돈의문 주변지역의 경우에는 전차가 운행하면서 한양도성의 경계로써의 기능이 흐려져 도시의 영역이 외부로 확장되어 갔고, 그에 따라 필지와 지형의 변화가 수반되었다. 광희문 주변지역은 새로운 주택지라는 도시구조의 변화를 위해 지형과 도로가 선결되어야 하는 요소로 작용하였으며, 혜화문 주변 지역의 경우에는 도로의 형성이나 지형의 변화의 영향으로 지역의 성격이 변한 것이 아니라 도성 외부 지역의 변화로부터 도성 쪽으로 그 변화가 확장되어 왔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같은 변동의 요인인 궤도의 형성, 지형의 변화, 도시 경관의 변화를 중심으로 살펴본 돈의문, 광희문, 혜화문 주변 지역들의 분석 과정 속에서도 그 중심이 되는 요인과 배경이 되는 요인이 있으며, 전과 후, 원인과 결과로 이뤄지는 요인들이 있었다. 또한, 문루 주변지역의 변화는 이전 시대의 흔적을 바탕으로 진행된다는 점 역시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연구의 결과를 바탕으로 도시를 이해하는데 있어 단편적인 시각으로는 한계를 가질 수 있으며, 사료들의 나열을 통해 단면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시각을 통합적으로 적용하여 도시가 가지고 있는 연속성 속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이 연구를 통해 서울이라는 도시를 이해하고, 도시를 인식하는 범위를 확장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데 본 연구의 의의를 찾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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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민지기 경성부 동부 교외지역의 실태와 도시개발 -고양군 숭인면에서 편입된 지역을 중심으로-
    본고는 식민지기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에서 경성부 동부로 편입된 교외지역의 실태와 도시화 과정을 살펴본 것이다. 편입이전의 동부 교외지역은 두드러진 인구 증가에 비해 도시 시설의 부족으로 공간이용도는 낮았다. 전답경작지가 많아 분산적 부락을 형성했으며, 토지 이용, 교통, 상하수도 시설 면에서 도시입접지로서의 역할보다는 농촌적 성향이 강하였다. 더욱이 오물 및 분뇨처리장, 화장장, 공동묘지 등 혐오시설이 설치되어 도시의 사각지대를 형성하였다. 경성부로 편입된 후 교외지역에서는 새로운 도시복합체로서 집중적인 개발이 진행되었다. 도심과의 연결을 위해 도로망이 확층, 개수되었고, 철도가 개설되었으며, 공장 및 주택지구도 형성되는 등 도시의 물리적 복제와 확장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부민으로서의 생활의 편의는 편입이전과 다름이 없었다. 여전히 도심과 달리 도로, 교통, 상하수도 등 도시문화시설이 여세하고 빈약하여 지역적 불균등이 존재하였고, 식가지 계획에 따른 토지구획 정리로 토막민이 번성하는 등 파행적인 도시발전이 이루어졌다. 도시화의 진행 형태 또한 동부 교외 전 지역이 동일하게 진행된 것이 아닌 분산적이고 선택적으로 이루어졌다. 돈암,신설, 용두, 청량리 등 상공업 기반이 있는 지역을 중심으로 도시개발이 치우쳐 있으며, 종암, 답십리 등 경성부 겨계지점의 지역개발은 이루어지지 않아 동부 교외지역 안에서도 개발의 지역적 불균형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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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테로토피아적 장소에 나타난 문화적 기억과 작품연구 -미아리고개와 주변 공간을 중심으로-
    본 연구는 과거 미아리고개라는 장소가 오늘날 어떻게 이질적 공간으로 배척되고 있었는지를 미셸 푸코의 헤테로토피아라는 관점에서 분석해보고, 오늘날 그 터의 의미와 집단의 장소 기억이 변화된 양상을 살펴보기 위함이다. 이를 위해 미아리고개와 주변 공간들에서 영감 받은 순수미술작가들의 작품을알라이다 아스만이 말한 문화적 기억 관점에서 분석하였다. 특히 본 연구에서 중점적으로 다룬 공간은미아리 공동묘지, 미아리 점성촌, 그리고 미아리 고가 하부공간에 형성된 복합문화예술공간 미인도이다. 위 공간들에서 영감 받은 작품과 실제 미인도에서 진행된 기획전시 작품을 토대로 미아리고개와주변 공간이 오늘날 새롭게 정립하고 있는 문화적 기억을 환기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작품분석을 통해서 미아리고개라는 헤테로토피아적 장소가 오늘날 더는 타자화된 공간이 아닌, 생동감 있는 공간이자다양한 실험의 장으로 재생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런 점에서 미아리고개와 주변 공간에서 실시하는 다양한 프로젝트와 작업은 오늘날 대중에게 다양한 문화적 기억을 심어준다는 점에서 과거와 현재를 잇는 연결 다리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과적으로 본 연구는 오늘날 무분별하게상실되어가는 장소 기억에 대한 기록과 더불어 상징적인 장소들을 새로운 매체를 통해 기억하는 작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에 궁극적인 목적을 두고 있다. 따라서 본 연구를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장소들과 그 장소가 가진 기억의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해볼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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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미아동의 문학지리학- 도시개발사와 문학적 재현
    이 논문은 일제하부터 1990년대까지 미아동의 구체적인 지명과 행정구역의 변동을 문학지리학적 관점에서 되짚어봄으로써, 미아동이 실제 행정구역으로서의 미아동과 심상적 지리로서의 미아리가 중첩되고 혼재된 동네였음을 분석하였다. 또한 이광수, 김동명, 서정주, 김소진, 윤대녕 등의 문학텍스트에 재현된 도시공간과 실제 도시공간의 개발사를 연관시키면서, 일제하 공동묘지 형성부터 난민정착지 사업을 통해 만들어진 달동네의 모습까지 도시개발의 역사에 따라 시기적으로 변화해온 미아동의 문학적 재현이 가진 역사적 의미를 보여주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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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수자 배제에서 포용으로의 사회공간적 변화 연구: 서울시 동선동 점복촌의 시각장애인 역학사를 사례로
    본 연구에서는 서울시 성북구 동선동 점복촌을 사례로 시각장애인 역학사에 대한 배제와 포용으로의 관계적 변화의 사회공간적 의미를 해석함으로써 포용도시 구현의 가능성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조선시대 판수라 불렸던 시각장애인 역학사는 국가의 지원 하에 점복·독경을 행하였으나 일제강점기에 미신타파의 대상이 되었다. 6·25 전쟁 후 서울 남산 자락과 종로 3가 등에 점복촌이 형성되었으나 도시정비사업으로 철거되고, 1970년대에 지가가저렴하고 유동인구가 많던 미아리 고개 주변에 점복촌이 형성되었다. 1990년대 말까지 동선동에서 점자도서관설립 반대, 전통거리 조성 사업의 무산, 역학원 운영에 대한 주민과의 마찰과 같은 사회공간적 차별과 배제가 나타났다. 2010년 이후에는 시각장애인의 점복·독경에 대한 법적·제도적 지원이 이루어지고, 도시재생활동을 통해 점복촌이 역사·문화적 가치를 지닌 장소 자산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지역 통합과 포용으로의 관계적 변화는, 배제를 극복하기 위한 공간적 전략으로서의 점복촌 형성 등 시각장애인 역학사 개인 및 집단 차원에서 전개한 주체적노력과 지역공동체 중심의 재생활동에 의한 것으로서, 이는 포용도시의 비전을 공유하기 위한 수행적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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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의 문화유적과 콘텐츠화 방안-성북구 낙산지역을 중심으로-
    본고는 서울시 성북구 낙산지역의 역사적․문화적 위상을 검토하고 이를 토대로 낙산지역의 콘테츠화 방안을 제시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이를 위해 2장에서는 낙산지역의 문화콘텐츠화의 필요성으로서 낙산지역의 역사적․문화적 위상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조선시대 낙산지역은 도성의 동쪽을 방어하는 성곽으로서의 위상뿐만 아니라 뛰어난 경치로 인해 당시 사람들이 경치를 遊賞하던 문화적 공간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3장에서는 낙산지역의 주요 문화유적들을 점검하여 문제점을 지적하고 콘텐츠화 방안을 제시하였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하고 몇 가지 첨언을 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현재 복원하지 못한 역사․문화적으로 의미 있는 낙산지역의 문화유적들은 복원해야 한다. 이와 관련해서는 석양루가 한 예가 될 것이다. 현재 석양루터는 이화동 주민들의 주거공간에 위치하여 복원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듯하다. 하지만 서울시가 창경궁과 종묘 사이를 잇는 복원사업의 맥락에서 생각해 볼 때, 문화재의 복원은 도시의 이미지와 가치를 제고하는 길이라 생각된다. 따라서 효종대 최고의 甲第이자 사대부들의 문화공간이었던 석양루를 복원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판단된다. 둘째, 현재 복원된 문화유적들은 구체적인 의미가 드러날 수 있도록 보완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庇雨堂과 淨業院터가 예가 될 것이다. 비우당의 경우, 비교적 복원이 잘 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비우당의 구체적인 의미와 이수광의 삶과 학문을 좀더 적극적으로 소개할 필요가 있다. 정업원터의 경우는 관람공간도 협소하고 해설이 소략하여 문화유적으로서의 가치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다. 낙산지역을 방문한 관람객들이 대부분 성곽을 돌고 이화동 벽화마을만 구경하고 돌아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문화유적에 대한 구체적인 해설이 담긴 표지석과 영상 안내실 등을 갖출 필요가 있다. 셋째, 낙산공원의 산책로를 비우당․정업원․청룡사․동망봉․삼군부 총무당으로까지 확장할 필요가 있다. 현재 문화유적과 연결된 낙산공원의 산책로는 성곽 안쪽을 중심으로 조성되어 있어서 성곽 바깥쪽인 창신동․삼선동․숭인동의 문화유적들은 관람객들이 접근하기 어렵다. 그 결과 비우당․정업원․청룡사․동망봉․삼군부 총무당 등은 있는지조차 모르는 관람객들이 많다. 따라서 낙산 정상에 있는 놀이광장에서부터 창신동․숭인동․삼선동을 연결하는 역사․문화 탐방코스로서의 산책로를 조성할 필요가 있다. 넷째, 관람객들이 함께 참여할 수 있는 행사를 조직해야 한다. 2장에서 언급했던 ‘巡城놀이’는 현재 서울시에서 프로그램화하여 잘 진행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낙산지역이 조선시대 저명인사들이 많이 거처하였고 별장을 중심으로 酬唱과 풍류 문화가 이루어졌던 공간임을 착안하여 주변 한성대학교와 연계하여 문학 관련 행사를 마련하거나 국악 관련 공연을 개최하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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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文人들이 사랑한 서울의 동북 지역
    조선 시대 文人들은 도성 생활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양의 동북 지역에 별장과 정자를 짓고 노닐었다. 吳泰周와 吳瑗은 鍾巖洞에 별장을 지어 詩酒와 書畵를 즐기며 文友들과 교유하였다. 종암의 별장을 배경으로 한 오원의 시에는 부친인 오태주를 그리워하는 내용이 잘 나타나 있다. 洪良浩는 牛耳洞에 별장을 꾸미고 독서와 사색으로 이루어진 한가한 삶을 영위하였다. 소의 귀가 지니는 의미를 철학적으로 해석하여 安分自足하는 은거를 꿈꾸었다. 石串洞에 東庄이라는 거처를 마련한 金昌業은 손수 농사를 지으며 집과 주위의 모든 사물에 대해 큰 애정을보였다. 나무, 꽃, 풀, 과일, 채소 등에 대한 연작시는 조선 후기에 새로이 나타난 주거의 양상을 보여준다는점에서 소중한 의의를 지닌다. 서울의 동북 지역에 있는 北漢山은 유명한 관광지였을 뿐만 아니라 학업에 힘쓰는 공간 등 다양한 성격을지니고 있었다. 그보다 북쪽에 위치한 道峯山과 水落山은 번잡한 도성을 떠나 은거를 실천하고자 하는 이들이사랑하였던 곳이다. 도봉산에는 趙光祖와 劉希慶, 수락산에는 金時習과 朴世堂의 자취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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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북동 일대 명승 사적을 노래한 한문학 유산
    이 논문은 성북동을 소개한 옛 문헌을 찾아 분석하고 소개한 것이다. 성북동은 도성에서 가까우면서 한적하고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갖춘 나들이 공간이다. 특히 봄철에는 복숭아꽃이 만개하여 도성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였다. 그만큼 많은 시인 묵객이 이곳을 찾았기에 적지 않은 한문학 창작이 이곳에서 이루어졌을 개연성이 크다. 그러나 기대만큼 많은 시문이 발견되지는 않는다. 이곳이 창작 공간이 된 것은 분명하나, 곧장 창작 소재로 활용되지는 않은 것이다. 이런 까닭에 성북동 지역 문화 콘텐츠 개발에 한문학 유산이 적극적으로 활용되지 못한 것 같다. 성북동을 기록한 문헌 자료가 넉넉하지는 못하지만, 과거의 문헌에서 관련 기록을 찾아내어 소개할 필요가 제기된다. 이에 부족하나마 성북동 공간을 시문으로 구현한 한문학 유산을 발굴하여 소개하였다. 먼저 여러 문헌 자료를 분석하여 성북동 일대에 존재하는 명승 사적을 조사하여 인문 지리적 성격을 알아보았고, 이어서 관련 한문학 작품 몇 편을 찾아서 소개하였다. 먼저 蔡濟恭이 1784년 봄에 기록한 「遊北渚洞記」와 나들이에 동행한 睦萬中이 기록한 「與樊巖公會游北屯」을 소개하였다. 이를 통해 성북동이 봄철에 꽃을 즐기는 나들이 공간으로 인기가 높았던 사실을 알아보았다. 이어서 鄭士龍이 1552년에 창작한 시와 尹愭가 1793년에 창작한 시 「上巳遊北渚洞」을 통해 성북동이 修禊의 장소로 활용된 사실을 알아보았다. 아울러 金鑢가 1815년경에 창작한 「晩春游覽 絶句十二首」를 통해 성북동 주변의 여러 명소가 나들이 코스로 묶여 많은 이의 사랑을 받았던 사실을 알아보았다. 여전히 부족하지만, 이를 토대로 관련 있는 소중한 역사 흔적들이 계속 발굴되고 그 속에 깃든 의미 있는 사연들이 복원되어 이 지역의 역사성이 더욱 강화될 수 있기를 바란다. 또 다양한 지역 콘텐츠가 개발되어 현대의 시민들에게도 소중한 공간으로 추억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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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지도로 보는 성북지역의 지정학적 역할과 기능
    본 논문은 조선후기와 일제시기의 지도를 바탕으로 지도 제작 당시 성북구 공간의 명칭, 자연 및 인문정보, 지역적 특성, 지역 사람들과 이 지역을 바라본 사람들의 인식을 연구하였다. 이러한 성북은 한양도성의 북쪽 방어 지역이었으며, 한양에서 출발하여 동북지역으로 나아가는 길이 시작되는 곳이었다. 성북구는 한양도성의 600년 역사와 함께 축척된 시공간적 역사・문화성, 그리고 가치를 공유해온 가장 밀접한 공간이다. 특히 수도의 배후지로서 물자와 휴식공간을 제공하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으며 일제강점기 도성 내부의 인구 증가로 제일 먼저 확장되어 나아간 곳도 성북구 지역이었다. 서울 도심과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현재의 성북구는 옛 모습을 그대로 기억하고 간직하고 있으며 또한 닮아있다. 그리고 역사 도시 서울의 역사성을 간직하고 있으며, 발전하는 현대의 모습이 중첩되어 있다. 되너미고개를 통해 중국의 동북부 지역으로 나아갔으며, 미아리고개를 통해 북쪽의 사람들이 남하해왔고, 돈암현을 통해 도성 안으로 물자를 공급하기도 했다. 이 고개를 통해 새로운 역사가 오고 갈 것이며, 역사와 함께 발전해 나아갈 미래의 성북이 그려질 지도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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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정릉리 주민들의 6·25전쟁 경험-김성칠의 일기자료 『역사 앞에서』를 중심으로
    이 연구는 서울 성북구 정릉리(현 정릉동) 주민들의 6・25전쟁 경험을 다룬 것이다. 기본 자료는 김성칠이라는 인물이 남긴 일기자료이다. 이외에 추가로 지역 주민의 구술자료를 활용하였다. 김성칠은 역사학자이자 서울대학교 교수였다. 그는 서울 성북구 정릉동에서 1947년부터 1950년까지 거주하였다. 1950년 12월에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으며 1952년 가을에 사망하였다. 해방 이후부터 사망 직전까지 작성된 그의 일기는 유명하다. 그렇지만 마을 연구 자료로 활용된 적은 없다. 이 연구는 김성칠이 거주했던 정릉리 손가장 마을이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작성된 일기를 면밀하게 검토한 것이다. 그리고 인민군 통치 하의 서울지역 마을 주민사회의 경험을 미시적으로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밝히고 있다. 첫째, 정릉리는 6・25전쟁 발발 당시 인민군의 서울 진입로서 개전 초기부터 인민군에 의해서 점령되었다. 미아리고개뿐만 아니라 북한산이 인민군의 이동로가 되었고 일제시기 이곳으로 이전된 경신학교 건물이 인민군의 주둔지가 되었다. 둘째, 인공은 점령 직후부터 일사분란하게 마을에서 통제력을 행사하였다. 이러한 통치의 효율성을 보장했던 것은 일제시기 생활공간에 구축된 동회・애국반이라는 주민동원・통제조직이었다. 셋째, 인공의 점령은 마을의 이데올로기 지형을 변화시켰다. 인공은 마을 내의 협력자들로 마을 권력을 재구성하였다. 이들을 중심으로 인민공화국 백성 되기가 추진되었으며 의용군 입대가 강요되었다. 넷째, 인공 점령 하 마을 민심의 향배에 중요하게 영향을 미친 것은 식량문제였다. 인공 정책에 대한 주민들의 복종은 정보에 대한 기만이나 공포감의 조성과 함께 식량문제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 식량위기는 정릉리 주민사회의 민심이 이반되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다섯째, 수복은 정릉리 주민사회에 새로운 이념대립 구조를 만들었다. 잔류한 주민들은 잠재적 ‘빨갱이’로 취급되었으며, 정부와 함께 피난을 떠났다 돌아온 소수의 도강파 주민들은 마을 내의 가장 도덕적인 집단이 되었다. 정릉리 주민들의 전쟁 경험은 한국전쟁 시기 사회변동과 관련해서 중요한 내용들을 말해주고 있다. 첫째, 막연하게 이야기되었지만 구체적으로 전쟁이 정릉리의 주민구성을 변화시킨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둘째, 전쟁은 마을을 對共투쟁의 장으로 변화시켰다. 셋째, 전쟁 경험은 정릉리 주민들에게 ‘나라’에 대해 극도의 냉소주의와 피해의식을 심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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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역문화자원 아카이빙 모형 설계와 적용 : 성북구를 적용 사례로
    본 연구는 지역문화콘텐츠가 지역의 고유한 문화를 반영하며 지역에 차별성을 부여하는 문화적 소통 창구가 되지 못하는 상황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지역문화콘텐츠가 그 가치를 발현하고 지속가능한 문화적 소통 창구가 되기 위해 지역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한 자원화 체계가 필요함에 착안하여, 그 체계의 모형을 설계할 것이다. 먼저 지역문화와 지역문화콘텐츠의 가치를 제시하고 지역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한 백오피스(Back-office) 체계로서의 지역문화자원 아카이빙 체계가 필요함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지역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한 지역문화자원 아카이빙의 각 단계를 제시하고, 기존의 연구와 사례를 바탕으로 각 단계별 주요한 활동을 서술하였다. 이때 각 단계별로 유동적인 거버넌스 협력체계에서 주도적인 수행 주체와 역할을 설정하였고, 조직구성시 필요한 조직 기능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제시한 아카이빙 모형을 실제로 성북구의 문화자원을 조사하고 관리체계로 편입하는 일련의 아카이빙 과정에 적용해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지역문화자원의 활용까지 이어질 수 있음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아카이빙은 지역의 문화자원을 대상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동안 지역 기록화를 주제로 한 연구에서는 기록화의 대상이 모호하였는데,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 실무적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지역의 문화자원이라는 실체를 아카이빙 대상으로 제시한 것이다. 지역의 문화자원에 대한 정보와 맥락에 대한 수집과 지역문화자원을 재현할 수 있는 기록과 정보를 생산·수집하는 두 측면에서의 접근이 필요한 것이다. 이는 지역문화콘텐츠라는 문화자원의 활용적 측면과 아카이빙이라는 보존적 측면이 배타적 관계가 아니며, 지역문화자원 아카이빙과 지역문화콘텐츠 개발이 별도의 영역이 아니며 선순환적 관계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아카이빙 모형을 제안한 것이다. 그리고 지역민의 보조적 참여가 아닌 주도적인 역할 수행이 필요한 단계를 제안하면서 지금까지 지역민 참여에 대한 선언적인 제안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궁극적으로 본 연구는 지역에서의 기록화는 지역문화콘텐츠 개발의 지원체계로서 기능해야 한다는 것으로 바탕으로 지역문화자원 아카이빙의 기초적인 실무를 제안할 것이다. 지금까지의 연구들은 지역 혹은 마을의 아카이브나 기록화의 필요성만을 주장하고 그 목적과 실무적 접근이 미흡했었는데 이를 넘어 지역에서의 기록화 활동과 지역문화콘텐츠 개발의 관계를 설정하고 실무적인 접근을 하고자 한 것이다. 이를 기반으로 향후 각 지역의 상황에 맞는 세부적인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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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릉 교수단지의 정원가꾸기를 통한 커뮤니티 의식 형성 연구
    노후 주거지의 환경개선을 위한 재건축사업의 진행 과정에서 발생하는 크고 작은 소송과 법적공방은 주민들의 주거권과 재산권에 대한 불안감을 고조시키며 그 과정에서 정신적, 경제적 피해와 손실을 일으키기도 한다. 재건축 진행 여부가 확정되기까지 주민들은 노후 주택의 보수와 관리 시점을 미루게 되고, 주거로 인한 행복을 현재가 아닌 미래 시점으로 유예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궁극적으로 주민 삶의 질을 저하시킨다. 이러한 배경에서 새로운 도시재생의 패러다임은 거주민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커뮤니티와 지속 가능한 마을에 대한 논의를 형성했다. 커뮤니티의 발굴과 유지를 통한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기 위한 마을 사업의 일환으로‘정원 가꾸기’가 활용되기도 한다(박재민 외, 2016). 정원을 통해 발생하는 사회적 활동과 접촉, 이웃과의 상호작용은 개인의 만족과 삶의 질을 높이며 궁극적으로는 공동의 연대와 커뮤니티 의식을 형성하게 하는 기초가 된다. 서울시 성북구 소재의 단독주택지인 정릉 교수단지 주민들은 재건축이라는 공동의 문제를 바탕으로‘마을과 커뮤니티’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으며, 미래가치에 대한 기대보다는 현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고자 하는 바람에서 정원이라는 환경요소를 활용하였다. 재건축 반대 의사를 표명하기 위해 대문에 내걸었던 화분이 정원을 가꾸는 행위로 확장되고, 이웃과 함께 소통하는 마을 정원으로, 주기적인 축제로 확대되는 과정을 겪는다. 이러한 정원 가꾸기 활동은 환경개선의 측면 뿐 아니라 주체들의 인식과 사회적 관계의 변화를 경험하게 했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개인 정원과 마을 정원에 물리적 변화가 생기게 된 계기와 과정, 주체적으로 정원 활동에 참여한 주민들의 인식과 사회적 교류의 변화를 고찰한다. 이로써 지속적인 정원 가꾸기가 개인과 가족 단위의 미시적 관계 변화로부터 이웃과 근린에 대한 애착을 형성하고 유대를 강화해온 커뮤니티 의식의 형성 과정을 정리하였다. 시간적 범위는 재건축이 논의되어 마을 커뮤니티가 생기기 시작한 2008년부터 2020년 12월까지를 다룬다. 연구 흐름은 첫째, 단독주택지에서 발생하는 커뮤니티 활동의 양상과 정원 활동을 통한 사회적 효용을 이론적으로 고찰하고 커뮤니티 의식을 파악하기 위한 이론적 틀을 설정한다. 둘째, 현장답사를 통해 개인 정원과 마을 정원의 물리적 변화를 파악한다. 셋째, 개인 정원을 개방하고 마을 정원을 적극적으로 가꾸는 연구 참여자를 선정하여 심층 인터뷰를 진행한다. 마지막으로, 수집된 인터뷰 자료를 분석하여 정원 가꾸기를 통한 주체들의 인식과 관계 변화를 바탕으로 한 커뮤니티 의식을 고찰한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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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VID-19 아카이브를 위한 기록 수집 방안 연구
    본 연구의 목적은 국내외 기록관과 도서관을 중심으로 COVID-19 아카이브 현황을 파악하고 국내 COVID-19 아카이브에서 적용할 수 있는 기록 수집방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문헌연구와 해외 재난 아카이브의 수집 정책 분석을 수행하였다. 더불어 14개 해외 COVID-19 아카이브 담당자의 설문 응답과 국내에서 COVID-19 아카이브를 구축하고 있는 2개 기관 담당자 인터뷰를 바탕으로 COVID-19 아카이브의 수집 정책과 현황을 분석하였다. (중략) 본 연구에서는 문헌연구와 해외 재난 아카이브 수집 정책 분석 및 국내외 COVID-19 아카이브 현황 조사를 통해 향후 COVID-19 아카이브를 위한 기록 수집 방안을 제안하였다. COVID-19라는 전대미문의 감염병으로 인한 사회현상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기록물관리기관이 수행해야 하는 중요한 역할 중 하나이다. 본 연구는 향후 도서관과 기록관, 지방자치단체를 비롯한 기관에서 COVID-19 아카이브를 구축하고자 할 때 기록 수집을 위한 기초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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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예술생태계 조성을 위한 지역문화공동체 사업 활성화 방안 : 성북문화재단 예술마을만들기 사업을 중심으로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로 공동체가 해체된 오늘날 문화예술을 중심으로 한 지역문화 공동체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여러 지자체에서는 지역발전 전략으로 문화예술과 공동체의 가치를 활용한 사업을 적극적으로 실 행하고 있으며, 이는 지역을 기본단위로 해체된 문화공동체를 문화예술을 통해 복원하는 시도로 보인다. 그러나 문화공동체 사업은 기본적으로 문화민주주의 이념에 맥락을 두는 만큼, 지역주민과 예술가의 자발적 참여와 함께 지역별 문화재단이나 행정단위와의 거버넌스가 효율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요구가 있다. 대부분의 지역사업에서 거버넌스를 통한 지속가능성과 문화생태계 조성을 목표로 내세우고 있지만, 구조적으로 어려움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이에 따라 본 논문은 지역의 문화공동체 사업에서 주민과 지역 예술가, 지역문화재단과 행정 단위들이 어떻게 생태계적 구조를 갖도록 노력하는지를 밝힘에 따라, 지역의 문화 진흥과 활성화 방안을 제시하는 데 연구의 목적이 있다. 특별히 성북문화재단 지역문화공동체 사업의 예술마을만들기를 대상으로 하여 사업의 활성화 방안을 도출하였다. 연구방법은 학술연구 논문을 비롯하여 각종 자료집 등을 통한 문헌연구와 사례연구로 진행하였다. 그 결과 국내외 사례의 경우 무엇보다도 주민과 예술가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면서 사업의 방향을 잡아갔고, 행정단위와의 거버넌스를 실천하면서 창작-향유-시장에 준하는 선순환적 구도를 유지함에 따라 지속가능성을 확보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물론 문화예술 공동체의 성격을 감안한다면, 시장성이란 본격적인 문화산업 구도는 아니며, 오히려 사회적 경제 개 념이거나 작은 단위의 지속가능성을 실행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와 더불어 본 연구의 대상인 성북문화재단 예술마을만들기 사업 사례를 분석함으로써 시사점을 도출하였다. 기본적으로 성북구는 문화, 교육, 복지의 통합적인 정책체계를 구축하고, 지역주민의 참여에 따른 공동체 형성에 주력해 왔다. 특히 문화정책 과제 구상과 실행체계를 혁신적인 거버넌스 구축을 통해 구현하고자 하면서 지역의 문화예술생태계 재구성과 새로운 주체 형성에 집중해 왔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지역주민과 예술가, 행정단위에서의 주체들이 생산자-지지자/소비자-매개자의 역할로 지역문화공동체 사업에 참여하고 있으며, 성북 문화예술생태계를 창작-향유-시장의 선순환 환경으로 조성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하지만 부족한 사업예산과 양적 위주의 운영은 사업 활성화 측면에서 걸림돌이 되고 있었다. 이러한 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방안으로 성북의 강점인 문화 거버넌스를 더욱 확장하여 주민들이 문화예술을 향유하는 자발성을 높일 수 있는 매개활동을 활성화 하고 공동체를 조직화하여, 사회자본이 형성되는 관점에서 사업의 질적 경쟁력을 확보해야 할 것이다. 또한 문화예술생태계의 핵심주체인 지역주민을 잠재적 소비자의 중요한 주체로 인식하여 예술의 후원 등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문화예술의 향유주체로 성장시키는 환경의 기반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향후 삶과 공동체를 둘러싼 지역 문화예술생태계 가치와 관계를 능동적으로 고려한 종합적인 정책과 사업이 개선·실행되어 문화예술 생태계가 창의적으로 조성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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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성북동 에코뮤지엄 조성방안 연구 : 지역정체성을 중심으로
    박물관은 시대의 흐름에 부응하며 끊임없이 변화해 왔고 박물관을 주도하는 주체나 시대적 상황의 변화에 따라 박물관이 무엇을 중요하게 여겼는지의 양상도 거듭 변해왔다. 국민주권이 실현되고 시민사회가 형성된 20세기 이후에는 박물관도 개인의 문화 향유와 또 사회적 문제에 대한 대안 제시라는 사회적 기능이 중요해 지면서 이를 신박물관학에서 다루게 되었고 에코뮤지엄은 이러 한 논의 속에서 형성된 개념이다. 시대의 변화에 따른 박물관의 변화 양상을 살펴보면 에코뮤지엄에서 특히 두드러진 요소는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박물관적 대안으로 등장한 ‘지역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개인의 삶과 사회 문제에 직면하며 지역주민이 주체가 되어 지역을 변화시키는 매개체로서의 에코뮤지엄은 지역이란 공간을 범위로 하여 자연환경과 건축물을 비롯한 유형적 자산과 무형적 자산(역사와 풍습, 생활방식, 이야기 등)을 보존, 활용하며 지역 전체를 하나의 박물관 개념으로 조성해 가는 것을 의미한다. 즉, 에코뮤지엄은 지역정체성을 기반으로 지역주민의 참여(Participation), 지역유산(Heritage), 박물관 활동(Museum)의 세가지 요소가 균형을 이루며 긴밀하게 상호작용하는 일체의 과정과 결과가 에코뮤지엄의 이상적인 모습이라고 정의한다. 본 연구는 서울시 성북구 성북동이라는 지역을 대상으로 성북동의 지역정체성을 중심으로 에코뮤지엄 조성 방안을 논의해 본다. 성북동은 북악산과 연결된 봉우리인 구준봉과 응봉 아래 산자락에 위치하며 중심에 성북천이 흘러 빼어난 산수를 지닌 지역이었다. 역사 속에서 성북이라는 지역은 한양도성의 사소문(四小門) 중 하나인 혜화문 밖을 나서면 도보거리로 연결되는 지역으로 조선시대 전기에 국가의 중요한 제단(선잠단)이 설치된 곳이었고, 18세기에 본격적으로 인구가 유입된 이래 산과 물이 어우러진 수 려한 자연경관으로 가진 명승지로 각광을 받으며 문인들의 문학작품을 비롯한 여러 문헌에 기록된 지역이었다. 현재 성북동에는 한양도성(사적 제10호), 선잠단(사적 제83호), 서울 성북동 별서(명승 제118호) 등 조선시대의 역사문화 자원이 많이 남아있다. 그러나, 서울의 많은 지역이 산업화와 도시화의 과정에서 효율과 편의의 가치 위주로 원래의 모습을 잃은 채 획일적으로 변모되어 왔듯이 성북동 지역도 유사한 과정을 거치며 18-19세기 문헌이 증언하고 있는 역사성과는 단절된 채 ‘지역의 고유한 특성’을 잃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에 성북동의 변천과정과 현재 모습을 고찰해 보고 지역주민을 대상으로 설문조사와 인터뷰를 실시하여 성북동의 지역정체성을 분석해 본다. 나아가, 본고는 ‘지역정체성’ 을 ‘지역의 고유한 특성’과 '지역주민의 자기 지역에 대한 인식’으로 정의하며 ‘지역정체성’의 현재적 의의를 살펴본다. 논의 방법은 크게 선행이론 및 문헌자료, 현장 조사와 더불어 서울시청과 성북구청의 정책자료 분석을 통해 성북동의 고유한 특성과 현재의 상황을 살펴본다. 아울러 성북동 주민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하여 성북동 지역 주민들의 성북동에 대한 인식을 분석해 보며, 성북동 주민센터 담당관과 주민자치위원회 자치위원, 전문가와 문화기관 담당자 및 지역 주민에 대한 심층 인터뷰를 통해 성북동 에코뮤지엄의 조성방안을 고찰하고자 한다. 본 연구는 성북동의 지역정체성을 기반으로 지역 내에 현재 존재하지만 단절되고 고립되어 있는 역사문화유산과 자연생태환경에 연결성과 확장성을 부여하고, ‘복원’하고 ‘재현’하는 방식으로 현재성을 부여하는 성북동 에코뮤지엄 의 모델을 제시한다. 이를 통해 지역정체성과 공동체의식을 고취하며, 대외적으로는 지역의 경쟁력을 높이며 지역경제에 기여하는 기반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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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북 지역의 설화 : 삼선평과 옥녀봉 설화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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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의 고밀화에 따른 도시형태 변화에 관한 연구 - 20세기 초부터 현재까지 돈암지구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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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암지구 소형필지의 도시한옥에 대한 연구
    본 연구는 서울 성북구의 돈암지구에 지어진 도시한옥을 대상으로 삼았다. 특히 그 중에서도 소형필지 내부에 지어진 도시한옥을 대상으로 삼았다. 돈암지구는 일제에 의해 계획, 실행, 완료된 유일한 계획 주거지역이라는 독특한 시대적 배경을 가진다. 또한 전쟁이라는 시대적 상황 역시 돈암지구의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요소들은 돈암지구의 주거지 구조에 영향을 주어, 돈암지구 내 가구의 형태와 필지의 소형화로 나타났다. 또한 주거지 구조는 소형필지 내의 도시한옥에 영향을 주며, 이들의 채의 구성과 실의 구성에 있어 일관된 특징이 있음을 확인하였다. 본논문은 돈암지구 내 소형필지가 다수 분포하는 6곳을 선정하여 소형한옥의 배치, 실의 구성, 구조형식까지 연구하였으며,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 째, 일제에 계획, 실행된 유일한 주거지역인 돈암지구는 이후에 조성된 다른 주거지구와 비교되는 특징을 가진다. 이런 특징은 돈암지구 내 개별 필지의 가구의 형태와 필지의 소형화로 나타난다. 둘 째, 돈암지구 내 소형필지의 면적과 세장비를 조사한 결과, 가로에 면하는 부분의 필지의 폭은 일정한 범위의 치수를 가진다. 소형필지의 면적은 45 ~ 90m² 까지 다양하게 분포하지만, 필지의 폭은 6 ~ 7.5m의 일정한 폭을 유지한다. 필지의 가로 폭이 6 ~ 7.5m로 정해져 있으므로 필지 면적이 커지려면 필지의 깊이방향이 길어져야 한다. 돈암지구 내 소형필지는 필지면적이 커질수록 세장해진다. 대상지역 6곳의 필지면적과 세장비를 조사해본 결과, ‘필지면적 90m²이하, 세장비 1.5 내외’의 좁고 세장한 소형 필지와 ‘필지면적 60m²이하, 세장비 1.2 내외’의 정방형 소형 필지가 높은 빈도로 나타난다. 셋 째, 일정한 조건의 필지에서는 동일한 채의 구성이 이루어진다. ‘필지면적 60 m² 이하, 세장비 1.3내외’ 의 필지에는 ㄱ자형 도시한옥이 자리한다. 보문동에서 볼 수 있는 연립한옥은 위 유형의 변형으로 볼 수 있다. ‘필지면적 90 m² 내외, 세장비 2내외’ 의 필지에는 가로에 문간채가 접하고 필지 안쪽에는 ㄱ자 안채가 있는 ㄷ자형 도시한옥이 자리한다. 삼선동5가에서 볼 수 있는 이층한옥은 이러한 유형의 변형으로 볼 수 있다. ㄷ자형 도시한옥에서 채의 구성은 필지로의 진입방향과 상관없는 것으로 보인다. 본 연구에서는 대상지역 여섯 곳을 동서가로, 사선 가로로 나누어 채의 구성을 분석하였다. 그 결과 필지의 진입방향과 상관없이, 채의 구성은 일정하며 중정이 동쪽으로 열리는 경향이 강함을 확인하였다. 이러한 채의 구성은 좁고 세장한 필지 공간을 효율적으로 점유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넷 째, 소형 필지에 위치하는 ㄷ자형 도시한옥의 실의 구성이 일정한 경우가 많다. 중요한 실인 대청, 안방, 부엌의 구성을 살펴본 결과, 각 실은 방위와 상관없이 일정한 위치에 자리 잡는다. 즉 가로에 문간이 위치하고, 문간의 맞은편에는 부엌이 위치하며 그 사이에는 대청이 위치하는 구성이다. 필지의 진입방향과는 관계없이 이러한 구성이 반복됨으로써, 실이 관습적으로 꺼려지는 방위에 위치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는 작은 면적의 필지라는 조건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실의 방위에 대한 중요성이 줄어들었음을 보여준다. 다섯 째, 같은 분류에 속하는 도시한옥이라도 목구조형식에서는 차이를 가진다. 성북동1가 105-10번지와 동소문동6가 75번지의 기둥과 보의 위치, 기둥상부 결구방식, 지붕 구성 방식을 통해 두 도시한옥의 목구조 구성의 차이를 비교하였다. 특히 동소문동6가 75번지에서, 좁고 세장한 필지에 대응하여 기둥과 보의 위치 변화, 기둥상부 결구방식에서의 볼 수 있는 목구조 형식의 간략화, 지붕구성 방식에서 편의에 따른 변형적인 구성을 확인하였다. 이는 소형화된 필지라는 특수한 조건과 건립 시기의 사회적 상황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돈암지구 내 도시한옥의 채의 구성과 공간 구성, 구조형식을 살펴본 결과 일관된 특징들이 존재함을 확인하였다. 특징들은 채와 실의 구성에서 관습적 원리의 중요성 약화, 토지의 효율적 점유 추구, 구조형식에서 볼 수 있는 간략화와 편의에 따른 변형으로 정의할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은 돈암지구 내 소형필지의 도시한옥에서 주로 볼 수 있는 것으로써, 돈암지구의 형성과정과 당시의 시대적 상황 그리고 돈암지구의 도시조직이 반영된 흔적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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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문학 : 이태준, 김동리, 최정희 소설에 나타나는 성북동,낙산 일대의 공간 연구
    서사문학인 소설에서 공간 문제는 시간의 문제와 함께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여기서 공간은 일반적인 장소의 개념을 넘어 작가의 주제의식 표현의 매개로 이해할 수 있다. 이태준, 김동리, 최정희는 각각 일제 강점기, 해방기, 6.25전쟁기 동안 성북동, 낙산 일대를 형상화한 소설을 발표했다. 세 명의 작가가 한국 근현대사에서 의미심장하다고 볼 수 있는세 시기를, 일정 지역을 소설의 공간으로 삼았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로운 관점을 제공한다. 즉 공간을 상수로 고정시킨 뒤 시대와 작가를 변수로 놓았을 때, 작가의 시대정신을 더 면밀히 관찰할 수 있을 것이며, 더 나아가 지정된 공간의 속성을 다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살펴볼 작품은 이태준의 < 달밤 >, < 손거부 >, < 색시 >, 김동리의 < 혈거부족 >, 최정희의 < 인정 >, < 정적일순 >, < 찬란한 대낮 >이다. 각각의 작품은 성북동 그리고 삼선교와 동숭동에 해당하는 낙산 일대를 소설의 공간으로 삼고있다. 이태준의 < 달밤 >, < 손거부 >, < 색시 >에서 성북동은 기본적으로 성 밖의 공간성을 지니고 있다. 작품의 핵심 인물인 황수건, 손거부, 색시는 모두성 밖의 공간적 속성을 상징하는 인물들이다. 그러나 이 성 밖의 공간성은 성 안의 공간성이 침투함에 따라 변하게 되고 작품의 인물들은 외면받고 추방당하게 된다. 여기서 성 밖의 공간성은 반근대를, 성 안의 공간성의 침투는 근대화를 내포한다고 볼 수 있다. 작가는 성북동의 반근대적 속성이 근대화를 통해 사라지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여기면서도작가 특유의 상고주의적 성향을 통해 애잔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김동리의 < 혈거부족 >에서 낙산은 해방 이후 귀국한 동포들과 극빈자들을 통해 형성된 달동네로 그려진다. 해방만 되면 모든 일이 잘 될 거라는 막연한 기대와는 다르게 해방 당시의 조선의 상황은 매우 비참했다. 해방이전 꿈꿔온 공간이 ‘고향’으로 나타난다면 해방 당시는 가난, 무지, 죽음이 뒤섞인 공간인 낙산으로 형상화된다. 최정희의 < 인정 >, < 정적일순 >, < 찬란한 대낮 >은 낙산 일대를 배경으로 6.25 전쟁기의 가족 상실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최작가, 노파, 길수 어머니는 모두 여성 인물로 각각 전쟁통에 사라진 남편과 아들을 기다리고 있다. 여성 인물인 이들은 상대적 약자로서 비인간적인 다른 인물들의 횡포에 고통 받게 된다. 여기서 나타나는 낙산은 전쟁터도 피난처도 아닌 공간이며 작가는 이런 허공에 뜬 공간에서의 전쟁 체험을 소설화한다. 여성인물들의 고통은 점차 가중되며 낙산 일대는 죽음의 공간으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그러나 작가는 파종이나 결혼 같은 행위를 통해 죽음의 공간에서 희망적 공간으로의 공간 치환을 시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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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근현대소설에 나타난 성북동, 낙산 일대의 형상화 고찰
    한국 근현대 소설 가운데 서울 도심지가 배경인 소설이 상당수 있다. 그 가운데 성북동 낙산 일대가 배경으로 그려진 소설은 얼마나 있을까. 1936년 돈암지구로 형성된 성북천 일대는 한양도성의 동소문인 혜화문과 서울성곽의 동측에 있고 선잠단, 성락원 등 중요한 유적들이 있어서 현재는 역사문화 컨텐츠와 함께 한옥밀집지역으로 가치가 높다. 성북천과 이어진 삼청동이나 삼선교는 모두 도교적 명칭인데 이러한 신선 사상이 워낙 산악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만큼, 성북동 뒤의 북한산과 삼선동에서 이어지는 낙산이라는 지리적 환경이 중요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 일대에는 예술가들이 많이 살면서 당시의 모습을 그린 작품들도 있는 만큼 이 일대, 즉 한성대학교 근처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찾아 구체적으로 지역이 언급되어 있는 성북동 일대와 삼선교 일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중심으로 한성대 근처가 어떻게 형상화 되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성북동 일대를 배경으로 한 이태준의 소설과 삼선교 낙산 일대를 배경으로 한 최정희의 <인정> 연작, 김동리의 <혈거부족>이 대상이 되겠다. 이태준의 성북동이 배경인 소설들은 일제 강점기에 발표된 작품들로 1930년대 작가가 성북동에 살았던 시기가 그려져 있고, 낙산 일대가 배경인 김동리의 <혈거부족>은 해방 이후 정부 수립 전이 배경이며, 최정희의 <인정> <정적일순>은 6.25가 시대적 배경이다. 이태준은 성북동에 십여 년 이상 살면서 성북동을 배경으로 한 서민들의 삶을 그린 작품이 여러 편 있고 그의 대표작들이 대개 이때 쓰여졌다. 작가 이태준이 살았던 시절인 1930년대 성북동 일대가 그렇게 넉넉하지 않았던 서민들이 살던 곳, 아직 인정이 남아있는 성 밖 마을이었고, 작가는 배우지 못해 어리석지만 악하지는 않은 하층민들에게 애정을 느끼면서 주로 자전적인 면들을 바탕으로 관찰자의 시각에서 그리고 있다. 김동리의 <혈거부족>은 해방 후 삼선교 한성 여중 일대에 산 위에 뚫려 있는 굴에 모여 사는 사람들이 제목으로 강조되고 있는데, 이 굴은 일제말기에 미군의 공습을 피하기 위해 조선총독부에서 판 것으로, 작품 모두(冒頭) 에 공간적 배경이 삼선교 돈암교 일대라고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최정희의 <인정>은 6.25 와중의 낙산이 배경이고, <정적 일순> 은 <인정>과 연작으로 보이는 작가의 자전적인 면이 그려져 있는데 낙산의 지형적 사회적 특징이 6.25의 혼란과 함께 잘 그려져 있다. 낙산은 경복궁을 중심으로 좌청룡 우백호에서, 좌청룡에 해당하는 산으로 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내사산-북악산(백악산), 남산, 인왕산, 낙산-가운데 가장 지대가 낮아 산 주변에 서민 주거지가 쉽게 형성된 곳이다. 현재 성북동이나 낙산 일대는 과거와는 매우 다른 만큼 이곳의 변모 양상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관련 작품을 찾아보는 일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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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선잠제(先蠶祭) 정비와 시행 의미
    선잠제는 양잠의 신 서릉씨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제사는 선잠단에서 지냈다. 그 시기는 매년 3월 첫 번째 巳日이었다. 선잠제는 제사의 대상이 여성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선잠제를 지내는 것은 백성들에게 양잠을 권장하기 위한 것이며, 이를 통해 풍요롭게 살기를 바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선잠제는 조선왕조에서 국가의 의례로 정비되었다. 조선의 의례는 크게다섯 가지로 분류하고 ‘오례’라고 했다. 제사를 지내는 의례는 ‘길례’였다. 선잠제는 그 제사의 규모가 중간에 해당했고, 제사의 대상은 사람, 곧 인귀였다. 그러므로 길례의 중사로 정해졌다. 선잠제에 대한 논의는 태종대부터 시작되어 세종대 『세종실록』 「오례」에 정리되었다. 이후 수정을 하여 『국조오례의』로 법제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선잠제의 의미와 의식은 강화되었다. 선잠제를 지냈던 선잠단의 위치는 지속적으로 이동하는 것이 논의되었다. 그렇지만 옮기지 않고 현재 성북동의 ‘先蠶壇址’에서 제사를 지냈다. 선잠제는 제사의 대상은 여성이지만 제사를 지내는 주체는 국왕이었다. 그러나 제사의 규모가 중사였기 때문에 관료를 보내어 대신 지내게 하였다. 이런 것을 섭사라고 한다. 선잠제는 매년 지내야 하겠지만 기록을 보면 그렇지 못하였다. 다만 세조와 명종은 상대적으로 자주 선잠제를 지냈다. 세조는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19세기에는 선잠제가 거의 매년 시행되었다. 왕권이 약한 대신에 의례를 강화하였기 때문이다. 선잠제 시행에서 큰 변화는 1767년(영조 43)에 있었다. 이 해에는 왕비가 친잠례를 치르게 되었다. 이때 영조는 왕비가 직접 선잠제를 치르도록하였다. 이것은 조선에서는 유일한 일이었다. 이때 왕비였던 정순왕후는 직접 술을 올리는 선잠작헌례를 시행하였다. 조선시대 선잠제는 백성을위하는 민본정치를 반영한 것이다. 또한 백성들의 의생활을 걱정하고 장려하였던 정책이 의식으로 완성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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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시기 도시문제와 지역주민운동 : 경성(京城)지역 성북동의 사례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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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태준의 성북동 : 이태준의 단편소설 및 『무서록』에 나타난 ‘교외’와 “구석진 곳”의 의미에 대하여
    이태준은 1930년대 성북동이라는 교외의 변화 및 인정세태와 풍속의 다양한 양상을 소재로 한 다수의 소설과 수필을 썼으며 그 구체적 재현의 질과 양에 있어서 독보적이었다. 그는 성북동에 거주하고 있는 어리숙한 빈민과 반편 등의 친밀한 주민이 급속한 도시화에 따라 도태될 운명에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해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한편으로 그의 소설은 문화주택에 거주하고 있는 속물적 인간상에 대한 냉소적 시각을 유지했다. 전자에 대한 애착은 고완품에 대한 이태준 자신의 각별한 의미 부여와 무관하지 않았다. 그런 만큼 몇몇의 수필에서 성북동의 풍경과 사물을 고완품으로 간주하고자 하는 생각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한 관점은 결국 단편 「장마」에서 수연산방에 거주하는 소설가 자신과 가족 전체로 향하게 되었다. 이 소설에서 소설가와 가족은 오랜 장마 속에 녹과 곰팡이 슬어가며 운무 속에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도시화․세속화의 시류로부터 낙오되거나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는 존재로 묘사된다. 스스로를 포함한 성북동의 주민들에 대한 이와 같은 관점은 그러나 식민지 조선의 대도시 경성으로 출퇴근하는 교외 주택민 즉 도시의 생활인으로서의 감각으로부터 연유한 위계질서와 미적 거리에 의해 가능해진 것이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시골이나 전원으로만 간주되던 성북동을 다양한 부류의 주민이 유입된 신흥 주거지로서의 변모에 주목하도록 했다. 이태준의 소설과 수필에서 성북동은 민간업자들에 의해 불수의적으로 조성된 시골이면서 도시이고, 도시도 시골도 아닌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의 공간으로 재발견된다. 이태준 자신의 의도와는 별개로 그것이 성북동이라는 교외에 복합적으로 공존하고 있었던 과거와 현재, 시골과 도시, 정지와 변화의 양쪽 모두 및 그 사이의 간극을 부지불식간 의식하도록 한다. 그리고 후자로부터 전자로 소급하고자 하는 상상적 단절과 거리가 시차(時差/視差)를 발생시키고 있었다. 이태준은 성북동의 “구석진 곳”에서 역사적 유효성을 상실했거나 앞으로 그렇게 될 것(죽음)임에 틀림없는 옛 도성에 비친 석양으로 비유되는 자기동일성의 세계에 천착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그것은 애초 소멸과 파국의 운명을 내포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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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락원(명승 제35호) 주변지역 필지 변화과정에 관한 연구 - 성북동 문화재 주변을 중심으로 -
    본 연구는 서울시 성북구 성북동을 대상으로 근대 이후 문화재와 주변 경관 변화과정 및 원인을 사회·문화적인 측면에서 설명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1962년부터 2010년까지 사용한 폐쇄지적도를 이용하여 필지를 분석하고, 문헌자료를 참고하여 연구하였다. 시대별 변화과정 확인이 가능한 성락원, 마포최사영고택, 서울선잠단지, 서울한양도 성을 위주로 변화과정을 추적하였으며, 문화재의 소경관(素景觀)을 검토하고 필지 변화와 함께 경관변천을 분석하였다. 성락원은 1954년에 송석정과 연못이 조성된 모습을 소경관이라 볼 수 있으며, 마포최사영고택은 2003년 이후 성북동으로 이전·복원한 것, 서울선잠단지는 1960년대 개발로 현재의 터만 남게 된 모습을, 서울한양도성은 숙종30년에 석성으로 개축한 것을 각 문화재의 소경관으로 정의하였다. 성락원은 제도적 요인에 의해 변화가 생겼고, 마포최사영고택과 주변 경관은 사회경제적 요인에 의해 변화가 생겼으며, 서울 선잠단지와 그 주변은 사회경제적·제도적 요인에 의해, 서울한양도성과 그 주변은 기술적·제도적 요인에 의해 변화가 생겼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성북동의 문화재와 그 주변경관은 대체로 제도적 요인과 사회경제적 요인에 의해 변화가 생기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근대 이후 서울의 도시계획이 성북동에도 영향을 미쳤으리라 예상되며, 자본주의 경제체제 확립이 그 배경이 된 것이라 판단된다. 따라서 문화자원으로서의 잠재적 가치를 인식한 바람직한 경관변화가 이루어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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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소문 밖의 사람들― 미아리일대의 역사ㆍ공간ㆍ삶
    이 글은 20세기 도시의 역사를 저장하고 있는 미아리 일대의 역사적 시간과 공간의 변화과정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 사회적 약자가 도시공간구조 속에서 어떻게 배제되고 타자화 되어 왔는지를 규명하는데서 출발하고자 한다. 조선시대까지 미아리 지역은 한성부의 성저십리에 속하는 지역으로 국왕 호위와 도성보호의 역할을 한 도심의 허파와 같은 곳이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공동묘지로 지정되면서 지역의 명암은 바뀌어 갔고 미아리 고개 넘어 지역은 산자의 공간 보다는 죽은 자의 공간으로 인식되기 시작했었다.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피난민과 전재민들은 공동묘지 근처에 살기 시작했고 1950년대 후반부터 정부는 4대문 안의 간선도로변 판잣집 강제철거를 시작으로 수재민 화재민들을 이주정착지라는 이름으로 도심 외곽으로 집단이주정책을 펼쳤다. 첫 번째 대상지역이 미아리 지역이었고 그로 인해 자연스레 달 동네가 형성되게 되었다. 1960년대 시작된 미아리 지역개발은 이 지역 경관에 새로운 변화의 상징이었다. 길음교와 미아로 확장공사 정릉천 복개구조물 공사로 인하여 정릉천과 월곡천은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로 뒤덮게 되었다. 이 공간의 한쪽에 속칭'미아리텍사스촌'도 자리를 잡게 됐다. 1990년대 재개발로 들어선 아파트는 길음동 미아동 하월곡동일대를 주거지로 만들어 놓았으며 조망권이 높아질수록 속칭'미아리텍사스촌'의 재개발문제와 더불어 환경공해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었다. 2002년 시작된 뉴타운 사업의 확대로 근현대시기 동안 미아리 지역을 살아온 서민들의 역사 공간 문화들이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져가고 있다. 도심재생사업의 본격화로 인해 원주민과 도시 빈민들은 더 열악한 곳으로 밀려나기 시작했고 또한 수십 년 동안 가부장제와 공모하여 성문화의 대명사로 각인되어 온 속칭'미아리텍사스촌' 재개발 논쟁이 본격화되면서 성북구와 강북구는 미아리라는 지명을 강제말소 함으로써 균형 잡힌 도시의 역사와 도시의 정체성을 세울 수 있는 기회는 사라져버렸다. 미아리공동묘지 원조 달동네 미아리텍사스촌이라는 감추고 싶은 부끄러운 삶의 흔적이 된 채 도시화의 상처로 남아있다. 그러나 미아리는 근현대시기 동안 도시가 만들어낸 사회적 약자들의 삶의 터전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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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년대의 문화지형과 한용운의 삶
    본 논문은 서울이라는 특정한 공간과의 상관관계와 교우관계를 중심으로 한용운의 사회활동과 삶의 의미를 고찰했다. 정치적·사회적 지향이 강했던 한용운에게 서울은 사회적 실천의 무대이자 핵심적 공간이었다. 한용운의 서 울에서의 활동은 심우장 시기를 전후로 두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북촌시 대 한용운은『유심』이나『불교』발간을 통해 여러 방면의 저명인사와 교류하 면서 3·1운동 참여, 불교청년운동, 신간회 참여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이 기간 동안 한용운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사회활동에 매진했고, 그 결과 몸 과 마음이 극도로 쇠약해졌다. 1933년 한용운은 결혼을 계기로 성북동 심우장이라는 곳에 난생 처음으로 자신의 명의로 삶의 공간을 소유하게 되었다. 심우장에 거처를 마련하면서 한용운은 처음으로 주거공간과 사회활동(업무) 공간을 분리시킬 수 있었다. 불교도로서 초심을 잃지 않고 끊임없이 참된 구도를 통해 사회적 실천을 이 어가겠다는 의지의 표명이 심우장 이사의 중요한 동기였다. 성북동 심우장은 한용운의 주활동 무대였던 북촌지역과 도보로 왕래가 가능할 정도로 서울 도 심과 가까우면서도 참선 수행이 가능한 조용하고 인적이 드문 곳이라서 한용 운은 지론인 생활선의 실천공간으로 안성마춤이었다. 심우장시대는 한용운의 자유로운 영혼을 더 이상 허락하지 않았다. 일제의 협박과 회유로 많은 민족지도자들이 변절하고 전향했으나 한용운은 일제의 어떠한 유혹이나 협박에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지조를 지켰다. 한용운은 변절자들과 공개적으로 절교를 선언하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한 김동삼의 유해를 모셔와 장례를 지내는 등 소극적인 저항을 계속했다. 그런가 하면 일 제의 온갖 회유와 협박에도 민족의 지조를 지킨 소수의 지사들과 마음을 열 어놓고 교류하면서 엄혹한 시기 민족의 앞길에 희망을 던져주었다. 그런 의 미에서 심우장은‘전시총동원체제기’라고 불리는 일제의 마지막 수탈과 발 악의 시기에 민족지조의 상징적 공간으로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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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40년대 성북지역의 학생운동
    1930~40년대 학생운동은 주로, 1937년 중일전쟁 이전에는 사회주의운동의 일환으로서 ‘학생반제동맹운동’이라는 형태로 전개되었고, 중일전쟁 이후에는 다양한 형태의 ‘소규모 비밀결사운동’이라는 형태로 전개되었다. 학생들의 동맹휴교나 문화계몽운동이 1930년대 중반 이후 양적ㆍ질적으로 감소되었던 반면, 비밀결사를 통한 학생운동은 1945년까지 지속되었다. 오히려 1940년대 전반기 들어 양적ㆍ질적으로 더 확대되고 강화되어간 면이 있었다. 경성부 내 지역과 경기도 고양군 일대에 걸쳐 있었던 성북지역의 경우, 1930년대 중반 무렵까지는 학교 설립이 다소 미미한 편이었으나, 1934년 보성전문학교의 안암동 이전 이후 각급 학교들이 서울 중심부와 가까운 성북구 관내에 교사를 신축해 이전하는 사례가 늘어났다. 또한 성북에 인접한 지역에는 원래부터 각종 관공립 학교와 사립학교들이 많이 있어서 성북지역은 이 학교 학생들의 하숙촌, 즉 그 배후지로서 기능하고 있었다. 1930년대 중반 이후의 학교 이전 등으로 인해 이러한 ‘학도촌’으로서의 역할도 더욱 강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앞의 사례들에서 살펴보았다시피 이와 같은 성북지역의 조건은, 1930~ 40년대 청년학생 중심의 반제항일민족운동 과정에서도 성북지역이 그 배후지 역할을 하는 것으로 연결되었다. 1930년대 학생반제동맹운동에 참여했던 다수의 학생들이 성북지역에 거주하고 있었고, 이는 1937년 중일전쟁 이후의 소규모 비밀결사운동 참여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성북지역 내의 여러 곳, 특히 성북동과 돈암동은 이러한 결사들의 설립 장소, 모임 장소 등 활동의 근거지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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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민참여형 주거재생사업의 추진과정에 관한 연구 : 서울시 성북구 장수마을을 중심으로
    그 동안 서울시는 주택공급을 위하여 뉴타운, 재개발 등의 대규모 정비사업을 진행하였다. 이로 인해 우수한 자연경관의 훼손과 주민공동체가 파괴된다는 등의 문제점을 발생하였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최근 서울시에서는 뉴타운, 재개발 진퇴를 주민의사에 따라 결정하겠다는 “뉴타운․재개발 출구전략”을 발표하였다. 이는 주민 과반 이상이 반대하면 뉴타운․재개발 사업을 취소할 수 있으며, 기존 주민들의 정착을 어렵게 하는 전면철거의 주택재개발방식이 아닌 공동체 마을 만들기 중심의 주민참여형 재생사업 방식으로 기존 주거지를 유지하면서 주거환경을 개선하는 방식으로 전환된 것이다. 이에 본 연구는 2004년 주택재개발예정지역 선정되었으나, 주택재개발의 어려움을 인지한 주민들의 의해 2013년 주택재개발예정지역에서 해제되고 주민참여형 지구단위계획 구역 지정되는 등의 변천사가 있는 성북구 삼선동1가 300번지 일대의 장수마을을 대상으로 한다. 또한, 연구의 목적은 마을에 거주하고 있는 주민이 중심이 되어 마을의 물리적 환경과 사회․경제적 환경을 개선하여 지속적으로 살아 갈 수 있도록 공동체를 형성하는 주민참여형 재생사업의 진행과정에 관한 사례를 분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발생했던 문제점 및 고려사항을 도출하여 사업완료 이후에도 주민에 의해 관리, 운영될 수 있는 방안을 제안하는 것이다. 장수마을 주민참여형 재생사업은 준비단계, 계획수립, 사업추진, 관리운영단계로 추진된다. 주민참여형 재생사업의 진행과정을 분석한 결과, 사업의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참여주체는 주민이라 할 수 있다. 장수마을은 지구단위계획구역이 지정되기 전에 주민협의회 및 골목별 주민모임을 중심으로 마을 커뮤니티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는 준비단계에서는 계획수립단계까지 주민간의 갈등이 최소화되었고, 주거환경관리사업 방식에 대해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리고 계획수립 단계에서의 주민의 참여도에 따라 사업추진과정의 인지 및 주민간의 이해와 사업의 만족도가 달라짐을 알 수 있다. 이는 사업이 완료 된 이후 마을 내 조성된 시설의 관리, 운영과 주민주도의 다양한 활동의 지속여부로 연결된다. 본 연구는 장수마을의 주민참여형 재생사업의 단계별 추진과정을 정리하고, 그 과정 속에서 발생했던 문제점과 고려사항을 도출하여 사업완료 이후에도 주민에 의해 관리, 운영될 수 있는 방안을 제안하였다는데 의의가 있다. 향후 관리운영단계에서 주민이 스스로 기획하고 운영할 수 있도록 주민의식과 역량 제고를 위한 지속적인 교육과 전문가의 지원, 주민공동시설의 관리운영을 위한 자발적인 재원마련 등의 구체적인 지원방안에 대한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사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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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선교 시장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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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만들기에 있어서 로컬거버넌스 형성요인에 관한 연구 : -서울시 성북구 장수마을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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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시형한옥의 내외부공간구성 변화에 관한 연구 : 서울시 성북구 동소문동, 삼선동,안암동을 중심으로
    1930년대 중반 이후 만주사변을 계기로 일제의 식량수탈정책으로 인해 농촌으로부터의 이농인구가 도시로 몰려들게 됨으로 당시 경성의 인구는 급격한 증가를 겪게 되고 주택문제가 심각히 대두되었다. 따라서 당시에 당면한 도시의 주택문제를 완화하기 위해 새로운 도시주거지의 개발이 필요하게 되었고 이때 등장한 것이 도시형 한옥이었다. 이런 역사를 갖고 등장한 도시형 한옥은 그 형식이 과거 우리나라의 주거문화를 지니고 있으면서 좁은 대지에 밀도를 높일 수 있도록 마련된 도시형 주거라는 점에서 그리고 새로이 근대화된 주거지 구조 체계 내에서 형성된 주거환경이란 측면에서, 이전의 전통한옥과 비교해서 도시적 특성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현재까지도 우리의 주거문화를 담아 이어오고 있다. 그러나 이런 도시형한옥은 근대화와 도시화를 거쳐 많은 문화적․경제적 변화를 겪어왔다. 이런 사회구조 속에서, 기존한옥은 변화하는 사회적 상황과 주거환경에 대응하여 증개축․신축을 통해 주공간 변형과 주생활변화가 이루어 졌다. 이런 일련의 변화는 사회․경제적 요인과 물리적 환경요인에 의해 발생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거주자의 내적 요구뿐만 아니라 외부환경도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의 도시형 한옥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현거주자들이 주공간을 개조하고 변형하는 요인을 다음과 같이 분석할 수 있다. 첫째, 내부공간의 변화요인으로는 해방이후 서구식 주의식, 주생활의 도입으로 서구식 공간규범이 유입되었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주생활양식이 변화하여 설비의 근대화, 주의식의 변화, 생활의 합리화 의식 고조로 주거공간을 크게 바꾸어 왔다. 또한 주생활양식이 점차 다양해져 다양한 주택평면유형이 생겨나고 이는 결국 주거형태의 개성화로 표출된다. 이런 변화를 수용하기에 공간이 부족하다면 거주자들은 공간확장을 통해 주요구를 실현시키려고 한다. 게다가 오랜 定住性으로 가족주기가 바뀌고 생활수준도 바뀌어 거주자의 욕구와 능력에 맞게 현주거공간을 적절히 융통성 있게 변화한다. 둘째, 외부공간의 변화요인은 공간과 생활방식 사이의 갈등으로 주공간에 대응하여 처마선이 있는 외부공간까지 실로 확장․활용하였다. 그리고 공간부족으로 마당을 내실화하는 적극적 개조행위가 이루어져 거실중심의 공간이 형성되어 주생활양식이 바뀌어 갔다. 또한 이런 변화로 인해 출입구의 변화가 일어나는데 이로 인해 단계적 영역흐름이 급진적 진입으로 형성되어 다소 불안한 주거입지를 갖고 있다. 또한 생활의 서구화로 인해 마루(거실)중심의 공간이 형성되고 각 실이 개실화됨에 따라 마당 중심의 기능이 축소되어 현재 마당은 동선통로 위주로 바뀌었으며 길과 향에 대응하여 공적공간에서 주거내 진입에 변화가 발생하여 대문이 이중화되거나 진입방향이 변경되는 등의 변화가 일어났다. 게다가 경제적 사정으로 용도변경이나 부분적 공간 임대를 통해 출입방식의 변화가 발생한다. 셋째, 한옥의 증개축 등 주거조정행위가 골목형에 따라 차이를 보이며 일어났으므로 그 요인은 다음과 같이 분석할 수 있다. 1) 필지면적에 따라 한옥의 증개축의 정도가 차이가 났는데 좁은 필지의 한옥은 적극적 증개축 행위가 많이 일어났고 좁은 주공간을 확장하는 방법이 벽을 따라 가는 확장과 마당을 실로 만드는 적극적 행위의 증개축 행위가 일어났다. 그리고 큰 필지의 한옥은 유지관리 및 보수행위가 더 많이 일어났다. 2) 길의 특성과 한옥의 증개축 행위간의 관계를 살펴보면, 막힌 골목형과 루프형이 뚫린 골목형에 비해 더 활발한 증개축이 일어났다. 막힌 골목형과 루프형은 장소적 개방감이 커서 상호교류가 이루어져, 생활양식을 잘 알고 서로 비슷한 상황을 유지해나간다. 그에 반해 뚫린 골목형은 통과도로의 경향이 강해 개인화 및 집단적 영역성이 약해 밖으로 나와 서로 대화를 나누는 경우는 거의 없고 집안이나 마당에서 활동이 더 활발하였다. 이는 막힌형이나 루프보다 골목의 영역성이 보다 내부로 들어와 마당에서 개성적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길의 물리적 특성이 이웃 간의 커뮤니티에 영향을 미치며 교류의 활성화를 통해 공유된 기치관과 경험이 주택의 개보수 행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상에서 나타난 도시형 한옥의 내외부공간과 주생활의 변화특성을 분석한 결과, 여러 가지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속되는 특성을 살펴볼 수 있다. 안방의 가족생활중심공간으로서 지속성, 마루공간의 생활기능의 지속성, 한옥의 실구성방식의 지속성, 향에 대한 선호, 외부공간으로부터 대문간의 단계적 접근의 지속성을 들 수 있다. 이상과 같이 한옥주거공간의 변화특성과 지속성은 우리의 전통성을 반영한 주거계획시 그 특성을 반영할 수 있고 다양한 생활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여 주공간을 융통성 있게 변화해온 행위들은 주거공간의 적절한 사용의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으며 주거지계획시 일괄적인 街區와 길의 계획보다는 거주자들에게 보다 나은 주거환경을 제공하고 커뮤니티가 형성될 수 있는 도로의 특성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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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아리 점성촌 재개발 계획안 : 시각장애인을 위한 외부공간 조성을 중심으로
    서울의 도시는 인구의 집중이 극대화되면서 도시의 확대가 필수 불가결하였다. 하지만 급속 성장으로 인한 결과 서울은 불균형한 발전이 이루어지면서 소외된 계층의 지역은 점점 슬럼화 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러한 서울에 슬럼화 된 지역이 몇 군데 존재하지만 그 중에서도 미아리 점성촌은 60년대 말에 남산에 집단거주하고 있던 맹인 점술가들이 이곳 논밭에 집단 거주하게 되었고, 택지개발사업으로 인해서 그 지역 주변의 낙후된 건물들이 개발되면서부터 미아리 점성촌은 도시 주변과 고립이 되기 시작하였다. 미아리 점성촌 지역의 슬럼화는 다른 지역과는 또 다른 특성은 두 가지 점이 두드러지고 있다. 첫 번째는 점성촌이라는 특이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 두 번째는 점성촌을 형성하고 있는 사람이 대부분 시각 장애인이라는 점으로 나누어진다. 또한 우리 사회는 시각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보통의 사람들과는 다른 계층으로 인식되면서 시각 장애인은 고립된 소외계층으로 고립되어있는 상황이다. 이와 같은 상황은 미아리 점성촌이 돈암동 일대에 아이덴티티(identity)의 한 요소로서 지금까지 자리 잡고 있다고 본다. 본 연구에서는 이 지역의 독특한 문화라고 말할 수 있는 시각장애인이 거주하는 점성촌의 외부공간을 건축적으로 계획하여 주변 도시지역과 연계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그 방법으로는 이 지역의 재개발을 통해서 시각 장애인들과 도시 주변과 교류할 수 있도록 방안을 제시하는 것으로 한다. 특히 이 계획안의 주안점은 시각 장애인과 주변의 지역주민들이 단절되어있는 것을 연계하는 방법으로서, 자연스럽게 만나서 교류할 수 있는 외부공간을 제공함으로써 상호 교류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계획안을 제시 하였다. 미아리 점성촌 재개발 계획에서 외부공간을 활성화시키는 방법으로서 시각장애인이 방향감을 가장 쉽게 인지 할 수 있는 후각, 촉각, 청각을 이용하여, 데마별 공간 개념으로 후각공간, 촉각공간, 청각공간을 계획하였다. 첫번째 후각공간에서는 간접적 치료 효과가 있는 특색 있는 향기(아로마 향기)로 구성된 식물 재배장을 계획하였다. 두 번째 촉각공간에서는 점자도서관, 지역주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도서관 및 바닥의 재질을 촉각적으로 분류하여 펀칭 메탈·나무·자갈로 구성된 길을 걸으면 다른 공간과 다른 바닥 재질로 인해 현채 공간을 인지할 수 있도록 계획하였다. 세 번째 청각공간에서는 미아리 고개에서 발생되는 소음을 감소시킴과 동시에 시각 장애인에게 공간 유도를 하는 방법으로 사운드 스케이프(sound scape)를 이용하여 소음을 해결하고, 행사장에 행사를 홍보하는 역할을 하도록 계획하였다. 각각의 외부공간은 시각장애인이 철학관으로 혼자서 진입할 수 있도록 함과 동시에 지역주민들도 외부공간을 이용하게 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상호교류(intermix)가 이루어지도록 함으로 이 지역의 슬럼화, 고립화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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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1980년대 길음동, 북아현동의 서민주택의 현황 및 공간구성방식에 관한 연구 : 길음뉴타운, 북아현뉴타운을 중심으로
    서울은 구한말 개항과 갑오개혁 및 기독교의 유입으로 본격적으로 근대화가 시작된다. 근대화로 인한 도시로의 인구 집중은 한옥의 밀집화와 대량생산에 대응한 도시형한옥을 만들어 냈다. 인구 집중에 대한 주택 정책은 계속되었지만 주택공급량은 인구증가량을 따라가기에 역부족이었고, 이에 따른 불량주거지는 계속 존재해왔다. 집을 짓는 것은 단순한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 전체적인 사회, 경제, 기술, 정치와 같은 관념들이 상호작용에 의하여 특징 지워지는 문화적 특성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또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는 서민주택은 자본가들이 서구의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하는 반면, 생활방식 자체에 전통적인 요소들은 한 번에 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평면배치라든가 형태 등이 거의 변하지 않는다. 이런 서민주택은 일제강점기라는 역사적 단절을 극복해 전통민가와의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본 논문에서는 이러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불량주거지와 노후주거지에 남아있는 서민주택을 중심으로 사회&#8228;문화적 변화에 주거환경이 대응한 공간구성방식을 분석, 이를 비교하고, 분포와 현황을 파악하였다. 2장에서는 구한말, 일제강점기, 해방이후로 시기별로 나누어 서울의 근현대 건축의 역사의 흐름을 살펴보았다. 구한말 개항부터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공간구성방식으로 전환과 공공건축에 외세가 우리나라에 준 영향에 대해 살펴보았다. 또 산업화 도시화로 인한 도시인구 밀집에 정부와 민간의 주택 대응에 대해 알아보았다. 또 조사대상인 서민주택의 특징에 대해 서술하였다. 도시형한옥은 그 원형인 전통한옥과 도시형한옥의 전반적으로 기본이 되는 상품화, 중부형민가, 문간채의 차가(借家)등의 특징을 숙지하였고, 서민주택은 그 원형이 되는 토막집과 토막집과 같은 불량주거지에 대한 영단주택의 정책을 알아보았다. 3장에서는 “길음뉴타운“ 과 ”북아현뉴타운“에 남아있는 조사대상 주택의 분포를 통해 서민주택의 도로와의 관계, 주택정책이 미치지 못한 서민주택지역의 현황과 건축물 대장, 토지대장, 실측을 통한 무허가 정도를 분석하였다. 이에 앞서 노후주택에 대한 서울시의 정책적 대응과 시책 그리고 이를 추진하기 위한 행정&#8228;재정적 조치들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가를 간략하게 기술하였다. 4장에서는 서민주택을 도시형한옥과 간이주택으로 나누어 사회&#8228;문화적 변화에 주거환경이 대응한 공간변화특성을 분석, 이를 비교하였다. 이상과 같이 현재 대장상에 남아 있는 기록과 실측을 통한 조사를 비교 분석해 보았다. 서민주택의 대부분은 무허가이거나 무허가 면적을 포함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공간구성방식의 변화는 대부분 평면확장이나, 부수입을 위한 셋방이나 상점 등으로 용도를 변경하여 사용하고 있었다. 이 연구는 건축물 조사 대상에서 일반적으로 제외되고 있는, 재개발정책의 지구수복화로 그 기록도 제대로 남기지 못한 채 무차별적인 철거에 직면한 서민주택에 관한 연구이다. 주류가 아닌 비주류 또한 이 시대를 나타내고 있는 지표로 인식되어 계속적인 연구가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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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천사의 조선후기 불교조각
    본 논문은 서울 돈암동에 소재한 흥천사의 조선후기 불교조각을 연구한 것이다. 조선 초에 조성된것으로 추정되는 천수관음보살좌상은 별도의 논문에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제외하였다. 흥천사의 주불전(主佛殿)인 극락보전에는 목조여래좌상, 목조보살좌상, 천수관음보살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목조본존불상과 우협시로 봉안된 목조보살좌상은 16~17 세기에 서로 다른 곳에서 조성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천수관음상은 조선 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본존불로 봉안된 여래좌상은 경상북도 문경에 있었던 오정사(烏井寺)에서 옮겨온 불상으로 추정된다. 관음전에 봉안된 목조관음보살좌상과 남순동자상 및 해상용왕상은 1701 년에 조성된 것으로, 전북 임실 사자산 적조암이 원 봉안처이고, 조선후기에 흥천사로 옮겨진 상들이다. 남순동자상과 해상용왕상은 관세음보살상과 함께 조선후기 불화로도 조성될 만큼 유행했던 도상이기 때문에, 관음보살의 협시로 동시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명부전에는 지장삼존상과 시왕을 비롯한 명부 권속이 총 27 구 봉안되어 있는데 1873 년의 개채기(改彩記)가 남아 있다. 조각의 기법으로 보아 17 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했으며, 현 명부전이 1855 년에 건립되었기 때문에 1701 년작 관세음보살상과 함께 적조암 또는 전라북도의 어느 사찰에서 이안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진다. 흥천사 노전(爐殿)의 석조 약사여래좌상·아미타여래좌상·지장보살좌상은 왕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을 밝혀냈다. 약사여래좌상은 1829 년에 조성되었으며, 아미타여래좌상과 지장보살좌상은 1829 년에서 1847 년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본 논문에서는 노전에 봉안된 3 구의 석조 불교조각상의 명칭과 조성 연도를 복장(腹藏) 조사를통해 밝힐 수 있었다. 또한 흥천사는 조선초기부터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왕실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었음을 조선후기 불교 조각을 통해서 밝혀냈다는 데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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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의 집을 찾아서: 어머니 박완서의 문학적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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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만들기의 추진단계별 로컬거버넌스 형성에 관한 연구: 성북구 장수마을 사례를 중심으로
    본 연구는 성북구 장수마을을 사례로 마을만들기 추진단계별 로컬거버넌스의 형성과정을 살펴보고, 마을만들기 실천을 위한 정책적 함의를 도출하였다. 이를 위해서 마을만들기의 추진과정을 초기단계, 성숙단계, 발전단계로 구분하고, 마을만들기의 로컬거버넌스 분석요소를 사회적 요인, 지역적 요인, 제도적 요인 등의 환경요인과 주요 행위자, 상호작용, 연계구조 등의 네트워크로 구성하였다. 분석결과, 주요 행위자들이 마을만들기 추진단계에 따라 급격하게 증가되며, 주도집단이 추진단계마다 지속적으로 변화하였다. 또한, 마을만들기가 추진되면서 행정과 마을주민과의 관계구도가 상호갈등 관계에서 상호협력의 관계로 변화되었다. 그리고 마을만들기가 추진되면서 협력적 거버넌스의 관계를 형성하는 주요 행위자들이 증가되었다. 마을만들기의 추진과정에서 주요 행위자간 로컬거버넌스 형성과 마을만들기의 실천을 위한 정책적 시사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마을만들기 및 마을주민에 대한 행정의 변화가 마을만들기에서의 로컬거버넌스 형성에서 중요하 다. 둘째, 지역에서 마을리더 및 주민협의회를 적극적으로 발굴 및 양성하기 위해 지방자치단체의 재정적 지원과 주민역량강화 교육이 필요하다. 셋째, 지방자치단체장의 마을만들기에 대한 관심과 의지는 마을만들기에서 참여주체간 로컬거버넌스 형성에 중요하게 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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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대문 밖 돈암지구 주거지의 형성과 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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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암지구(1940-1960) 도시한옥 주거지의 도시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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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시형 한옥의 내외부공간구성 변화에 관한 연구 : 서울시 성북구 동소문동, 삼선동, 안암동을 중심으로
    1930년대 중반 이후 만주사변을 계기로 일제의 식량수탈정책으로 인해 농촌으로부터의 이농인구가 도시로 몰려들게 됨으로 당시 경성의 인구는 급격한 증가를 겪게 되고 주택문제가 심각히 대두되었다. 따라서 당시에 당면한 도시의 주택문제를 완화하기 위해 새로운 도시주거지의 개발이 필요하게 되었고 이때 등장한 것이 도시형 한옥이었다. 이런 역사를 갖고 등장한 도시형 한옥은 그 형식이 과거 우리나라의 주거문화를 지니고 있으면서 좁은 대지에 밀도를 높일 수 있도록 마련된 도시형 주거라는 점에서 그리고 새로이 근대화된 주거지 구조 체계 내에서 형성된 주거환경이란 측면에서, 이전의 전통한옥과 비교해서 도시적 특성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현재까지도 우리의 주거문화를 담아 이어오고 있다. 그러나 이런 도시형한옥은 근대화와 도시화를 거쳐 많은 문화적․경제적 변화를 겪어왔다. 이런 사회구조 속에서, 기존한옥은 변화하는 사회적 상황과 주거환경에 대응하여 증개축․신축을 통해 주공간 변형과 주생활변화가 이루어 졌다. 이런 일련의 변화는 사회․경제적 요인과 물리적 환경요인에 의해 발생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거주자의 내적 요구뿐만 아니라 외부환경도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의 도시형 한옥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현거주자들이 주공간을 개조하고 변형하는 요인을 다음과 같이 분석할 수 있다. 첫째, 내부공간의 변화요인으로는 해방이후 서구식 주의식, 주생활의 도입으로 서구식 공간규범이 유입되었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주생활양식이 변화하여 설비의 근대화, 주의식의 변화, 생활의 합리화 의식 고조로 주거공간을 크게 바꾸어 왔다. 또한 주생활양식이 점차 다양해져 다양한 주택평면유형이 생겨나고 이는 결국 주거형태의 개성화로 표출된다. 이런 변화를 수용하기에 공간이 부족하다면 거주자들은 공간확장을 통해 주요구를 실현시키려고 한다. 게다가 오랜 定住性으로 가족주기가 바뀌고 생활수준도 바뀌어 거주자의 욕구와 능력에 맞게 현주거공간을 적절히 융통성 있게 변화한다. 둘째, 외부공간의 변화요인은 공간과 생활방식 사이의 갈등으로 주공간에 대응하여 처마선이 있는 외부공간까지 실로 확장․활용하였다. 그리고 공간부족으로 마당을 내실화하는 적극적 개조행위가 이루어져 거실중심의 공간이 형성되어 주생활양식이 바뀌어 갔다. 또한 이런 변화로 인해 출입구의 변화가 일어나는데 이로 인해 단계적 영역흐름이 급진적 진입으로 형성되어 다소 불안한 주거입지를 갖고 있다. 또한 생활의 서구화로 인해 마루(거실)중심의 공간이 형성되고 각 실이 개실화됨에 따라 마당 중심의 기능이 축소되어 현재 마당은 동선통로 위주로 바뀌었으며 길과 향에 대응하여 공적공간에서 주거내 진입에 변화가 발생하여 대문이 이중화되거나 진입방향이 변경되는 등의 변화가 일어났다. 게다가 경제적 사정으로 용도변경이나 부분적 공간 임대를 통해 출입방식의 변화가 발생한다. 셋째, 한옥의 증개축 등 주거조정행위가 골목형에 따라 차이를 보이며 일어났으므로 그 요인은 다음과 같이 분석할 수 있다. 1) 필지면적에 따라 한옥의 증개축의 정도가 차이가 났는데 좁은 필지의 한옥은 적극적 증개축 행위가 많이 일어났고 좁은 주공간을 확장하는 방법이 벽을 따라 가는 확장과 마당을 실로 만드는 적극적 행위의 증개축 행위가 일어났다. 그리고 큰 필지의 한옥은 유지관리 및 보수행위가 더 많이 일어났다. 2) 길의 특성과 한옥의 증개축 행위간의 관계를 살펴보면, 막힌 골목형과 루프형이 뚫린 골목형에 비해 더 활발한 증개축이 일어났다. 막힌 골목형과 루프형은 장소적 개방감이 커서 상호교류가 이루어져, 생활양식을 잘 알고 서로 비슷한 상황을 유지해나간다. 그에 반해 뚫린 골목형은 통과도로의 경향이 강해 개인화 및 집단적 영역성이 약해 밖으로 나와 서로 대화를 나누는 경우는 거의 없고 집안이나 마당에서 활동이 더 활발하였다. 이는 막힌형이나 루프보다 골목의 영역성이 보다 내부로 들어와 마당에서 개성적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길의 물리적 특성이 이웃 간의 커뮤니티에 영향을 미치며 교류의 활성화를 통해 공유된 기치관과 경험이 주택의 개보수 행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상에서 나타난 도시형 한옥의 내외부공간과 주생활의 변화특성을 분석한 결과, 여러 가지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속되는 특성을 살펴볼 수 있다. 안방의 가족생활중심공간으로서 지속성, 마루공간의 생활기능의 지속성, 한옥의 실구성방식의 지속성, 향에 대한 선호, 외부공간으로부터 대문간의 단계적 접근의 지속성을 들 수 있다. 이상과 같이 한옥주거공간의 변화특성과 지속성은 우리의 전통성을 반영한 주거계획시 그 특성을 반영할 수 있고 다양한 생활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여 주공간을 융통성 있게 변화해온 행위들은 주거공간의 적절한 사용의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으며 주거지계획시 일괄적인 街區와 길의 계획보다는 거주자들에게 보다 나은 주거환경을 제공하고 커뮤니티가 형성될 수 있는 도로의 특성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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