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성북구 돈암동에 위치한 흥천사에는 1885년작 신중도를 비롯하여 제석천도, 천룡도 등
19세기말 한 사찰에서 조성된 4점의 신중도가 남아있다. 이 중 천룡도를 제외한 3점의 신중도는 경선응석이 보문사 신중도를 시작으로 완성한 19세기
말 서울 경기지역에서 유행하던 신중도 형식을 계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1885년작 신중
도는 기존 보문사계열 신중도에서는 볼 수 없었던 팔금강을 위태천의 좌우와 화면 곳곳에 묘사
한 특징이 있음을 살펴보았다. 특히 바위를 들고 있는 팔금강 도상이 신중도에 표현되고 있어 주
목되는데 이는 화승 경선응석이 새롭게 창출한 신중도상의 하나로 19세기말 서울 경기지역 불화
의 전통을 잘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시도를 하고자 했던 흥천사 신중도의 수화승 체훈과 화승들
의 노력이 돋보인다고 할 수 있다. 이는 19세기말 다양한 신중도 형식을 시도하던 시대적 상황이
맞물린 것으로 새로운 시도를 하려고 했던 흥천사 신중도만이 가지는 특징이라 할 수 있을 것이
다. 그리고 흥천사에는 시대를 달리하는 다섯 점의 불화 화기에 ‘水月道場空花佛事’ 혹은 ‘空花佛
事’라는 특정 불사를 의미하는 명칭이 적혀있다. 16세기 이후 기록에 보이는 이 불사가 특정한
불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재를 올리는 공간, 그리고 사찰에서 행하는 불사 자체가 부처님의
진리에 비하면 보잘 것 없다는 의미로 쓰인 것으로 해석하였다. 또 화기에는 1890년, 흥천사 불화 제작 시 화승집단 사이에 이루어진 분업과 협업의 형태를 보
여주는 한 예를 살펴볼 수 있다. 1890년의 불화들은 긍조를 수화승으로 각각 ‘模像’이라는 밑그
림을 담당하는 화승을 따로 두고 있었다. 큰 맥락으로는 1890년작 신중도와 1898년의 천룡도 또
한 경선응석이 창출한 전통도상의 영향을 받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890년의 제석천
도는 이와는 전혀 다른 스타일로 이는 1890년의 불화제작시 模像을 맡았던 화승들의 역할이 무
엇보다 중요했다는 점을 알려주는 것으로 생각되어 당시 불사에서 화승집단 사이에 분업과 협업
이 잘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한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