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정릉리 주민들의 6·25전쟁 경험-김성칠의 일기자료 『역사 앞에서』를 중심으로
2021
학술자료 학술지논문
1. 머리말 2. 김성칠 가옥과 손가장 3. 일제시기 마을의 변화 4. 점령과 새로운 질서 5. 인공 지하의 주민생활 6. 수복과 도강파 7. 맺음말
정릉동
국문초록
이 연구는 서울 성북구 정릉리(현 정릉동) 주민들의 6・25전쟁 경험을 다룬 것이다. 기본 자료는 김성칠이라는 인물이 남긴 일기자료이다. 이외에 추가로 지역 주민의 구술자료를 활용하였다. 김성칠은 역사학자이자 서울대학교 교수였다. 그는 서울 성북구 정릉동에서 1947년부터 1950년까지 거주하였다. 1950년 12월에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으며 1952년 가을에 사망하였다. 해방 이후부터 사망 직전까지 작성된 그의 일기는 유명하다. 그렇지만 마을 연구 자료로 활용된 적은 없다. 이 연구는 김성칠이 거주했던 정릉리 손가장 마을이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작성된 일기를 면밀하게 검토한 것이다. 그리고 인민군 통치 하의 서울지역 마을 주민사회의 경험을 미시적으로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밝히고 있다. 첫째, 정릉리는 6・25전쟁 발발 당시 인민군의 서울 진입로서 개전 초기부터 인민군에 의해서 점령되었다. 미아리고개뿐만 아니라 북한산이 인민군의 이동로가 되었고 일제시기 이곳으로 이전된 경신학교 건물이 인민군의 주둔지가 되었다. 둘째, 인공은 점령 직후부터 일사분란하게 마을에서 통제력을 행사하였다. 이러한 통치의 효율성을 보장했던 것은 일제시기 생활공간에 구축된 동회・애국반이라는 주민동원・통제조직이었다. 셋째, 인공의 점령은 마을의 이데올로기 지형을 변화시켰다. 인공은 마을 내의 협력자들로 마을 권력을 재구성하였다. 이들을 중심으로 인민공화국 백성 되기가 추진되었으며 의용군 입대가 강요되었다. 넷째, 인공 점령 하 마을 민심의 향배에 중요하게 영향을 미친 것은 식량문제였다. 인공 정책에 대한 주민들의 복종은 정보에 대한 기만이나 공포감의 조성과 함께 식량문제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 식량위기는 정릉리 주민사회의 민심이 이반되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다섯째, 수복은 정릉리 주민사회에 새로운 이념대립 구조를 만들었다. 잔류한 주민들은 잠재적 ‘빨갱이’로 취급되었으며, 정부와 함께 피난을 떠났다 돌아온 소수의 도강파 주민들은 마을 내의 가장 도덕적인 집단이 되었다. 정릉리 주민들의 전쟁 경험은 한국전쟁 시기 사회변동과 관련해서 중요한 내용들을 말해주고 있다. 첫째, 막연하게 이야기되었지만 구체적으로 전쟁이 정릉리의 주민구성을 변화시킨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둘째, 전쟁은 마을을 對共투쟁의 장으로 변화시켰다. 셋째, 전쟁 경험은 정릉리 주민들에게 ‘나라’에 대해 극도의 냉소주의와 피해의식을 심어주었다.

기본정보

생산정보

  • 생산유형: 기타
  • 입수처: 서울역사편찬원 / KCI
  • 생산자 소속 및 이름: 국민대 한국역사학과, 김영미
  • 생산자 유형: 저자

생산시기

  • 시대: 현대
  • 생산시기: 2021

생산지

  • 생산지: 서울역사편찬원
  • 생산지 유형: 발행처
  • 주소: 서울특별시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로 424)

원문 공개사항

기술통제

  • 작성자: 염현주
  • 작성일: 2022-0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