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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의 인물, 사건, 장소, 유물, 문헌, 작품 등을 유형별, 시대별, 지역별로 검색하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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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일남
    인물
    최일남
    소설가이자 언론인이다. 1932년 전북 전주에서 태어나 서울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고려대 국문과 석사과정을 수료하였다. 1953년 《문예》에 「쑥 이야기」, 1956년 《현대문학》에 「파양」이 추천되어 등단하였다. 만국일보, 경향신문, 동아일보에서 문화부장을 지낸 그는 언론인 다운 예리한 시각으로 현실을 비판하되, 그것을 해학과 풍자의 언어로 풀어낸 소설을 다수 발표하였다. 개인주의화된 서울의 세태를 짚은 「돈암동」(2004)을 비롯하여 『만년필과 파피루스』, 「서울의 초상」, 「흐르는 북」 등의 작품이 있다. 월탄문학상, 한국창작문학상, 이상문학상 등을 수상하였으며 2001년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 정지용
    인물
    정지용
    시인이다. 1902년 충청북도 옥천에서 태어나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시인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대표작 「향수」는 일본 유학시절인 1927년 『조선지광(朝鮮之光)』에 발표한 시인데, 대중가요로 만들어져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 시는 우리말을 사용하는 것조차 억압받던 때 순수한 우리말로 생생하게 고향을 그려내 새로운 시 언어를 개척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김영랑, 이하윤 등과 동인지 『시문학』을 내고, 이태준, 박태원, 유치진 등과 ‘구인회’ 활동을 하였고, 청록파 시인을 발굴하기도 하였다. 해방 이후 성북구 돈암동에 살았는데 사회주의 계열 문인들을 중심으로 결성한 조선문학가동맹에 관여한 바람에 6.25전쟁이 발발하자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북한군에 의해 납북되던 도중에 사망하였다.
  • 이어령
    인물
    이어령
    문학평론가, 언론인이다. 1956년 『한국일보』에 평론 「우상의 파괴」를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다. 『경향신문』 『중앙일보』 『한국일보』 등에서 논설위원, 잡지 『문학사상』의 주간을 맡았다. 대학 졸업 후 처음 성북고등학교에 취직하여 학교 근처에서 살다가 삼선동으로 이사하였다. 경기고등학교 교사가 되며 성북구를 떠났으나 십여 년 뒤 다시 성북동으로 이사를 왔다. 신문에 연재한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에서는 우리 문화론을 펼쳤고, 1982년 발간한 『축소지향의 일본인』에서는 일본의 역사와 문화를 다뤘으며 그 외에도 20여 권의 저서가 있다.
  • 이길용
    인물
    이길용
    성북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자 기자이다. 1936년 동아일보 체육부 기자 재직시절에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선수의 사진에서 일장기를 제거한 후 사진을 보도하였다. 이 사건으로 동아일보에서 강제 퇴직당한 후 집회에서 반일 가요를 부르거나 반일 발언을 하고 창씨개명도 거부했다. 이길용은 1930년대 초부터 전쟁 이후 납북 직전까지 성북동 56번지에 거주했다. 그는 성북동 조기회 활동도 했는데 일본은 이를 항일운동단체라고 트집잡아 그를 투옥시키기도 했다. 성북동에서는 심우장을 찾아 한용운과 법담을 나누며 위로를 받기도 했고, 이웃인 이태준, 전형필, 배성룡 등과 교류하였다. 1989년 한국체육기자연맹은 이길용체육기자상을 제정하여 매년 수여하고 있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 안재홍
    인물
    안재홍
    돈암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 사학자, 언론인이다. 그는 1910년 일본 도쿄로 건너가 1911년 9월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에 입학하였고, 10월 조선인유학생 학우회를 조직하였다. 1914년 여름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비밀결사인 대한민국청년외교단에 가담하여 임시정부의 연통부 역할을 수행하였다. 귀국 후 『시대일보』 와 『조선일보』에서 약 10년 동안 언론인 생활을 하였다. 해방 후 돈암동 산 11-152번지에서 거주하였다. 미군정기에 민정장관을 역임하였고,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하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6.25전쟁 때 납북되어 1965년 평양에서 사망하였다.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 최정희
    인물
    최정희
    소설가이다. 1906년 함경북도 성진에서 태어난 최정희는 잠시 일본에 건너가 활동하다 1931년 귀국하여 『삼천리』사의 기자로 일하면서 단편소설 「정당한 스파이」를 발표하여 문단에 데뷔했다. 1936년 시인 이은상의 소개를 받아 조선일보사에 입사한 뒤 쓴 「흉가」 이후 본격적인 작가의 길을 걸었다. 작품의 경향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여성문제와 가부장제에 대한 문제의식을 반영한 것이었다. 노천명, 모윤숙 등과 1세대 여류작가로 문단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70년대 정릉 4동 산장아파트로 이사했는데, 이곳에서 오정희, 이제하, 딸 김채원 등 ‘정릉그룹’이라고 불린 소설가 모임을 열고 책을 펴내기도 하였다. 1940년대에 일제의 전쟁 동원을 독려하는 강연이나 글을 써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었다.
  • 염상섭
    인물
    염상섭
    소설가이다. 1921년 한국 최초의 자연주의 문학으로 평가받는 「표본실의 청개구리」를 『개벽』 에 발표하며 등단하였다. 『삼대』, 『만세전』 등 식민지 현실과 반일감정을 작품 속에 그려냈고, 해방 후에는 좌·우익에 치우치지 않고 사실주의 문학을 선보였다. 만선일보 편집국장으로 10여 년 동안 만주와 신경에서 생활하였다. 1946년 귀국한 후 경향신문 창간 편집국장을 지냈다. 돈암동 295-3번지에 살던 중 6.25전쟁이 일어나 부산으로 피난하였고, 서울로 올라와 상도동, 삼양동 등 몇 차례 이사를 한 끝에 1962년 자리 잡은 성북동 145-52번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 안동림
    인물
    안동림
    음악평론가이자 소설가, 번역가이다. 1957년 20대에 쓴 소설 「지옥도」가 『신태양』에 실리며 문단에 등단하였다. 영문학을 전공하여 1960년대 펄 벅, 노먼 메일러 등 외국 작가의 작품을 번역해서 발간하였다. 서양고전음악을 듣고 수집하는 취미가 있어서 『레코드음악』에 음반의 감상과 평가를 연재하기도 하였다. 독학으로 한학을 공부하여 우리나라 최초로 『장자』를 완역하고, 『벽암록』을 번역하였다. 동소문동 자택에서 말년을 보냈다.
  • 서범석
    인물
    서범석
    제4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민주당의 중진 정치인이다. 그는 정릉동 산 1번지에 거주하였다. 그는 10대 후반에 3·1운동에 참가하였으며 중국 북경대학 정경과 2년 중퇴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일보· 시대일보·동아일보 등에서 신문기자 생활을 했다. 1950년에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에 경기도 옹진군에서 무소속으로 입후보하여 당선된 경력이 있다.
  • 박진목
    인물
    박진목
    성북동에서 활동한 언론인, 통일운동가이다. 한국전쟁 당시 박진목은 최익환과 함께 민간인 신분으로 비공식적으로 서울시 인민위원회 위원장 이승엽을 만나 전쟁 종결과 평화를 촉구하였다. 북한군의 퇴각 후에는 미군의 주선으로 평양을 방문하였으나 북측 지도자들을 만나지 못하고 억류되었다가 1953년 초에 남쪽으로 돌아왔다. 박진목은 간첩죄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고, 최익환은 큰 피해를 입지는 않았지만 이승만 정권의 핍박 속에 불우한 일생을 마쳤다. 성북동은 그들이 활동한 종전평화운동의 중심 공간이었다.
  • 조연현
    인물
    조연현
    문학평론가이자 출판인이다. 1933년 중동중학교에 편입하여 김광섭 시인을 담임으로 만난다. 1938년 한글동인지 『아(芽)』, 1939년 『시림』을 만들고, 이를 계기로 문학의 길을 걷는다. 1942년 창씨명으로 「동양에 대한 향수」를 발표하였고, 몇 편의 친일 관련 글을 남겼다. 유치환,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 등과 교류하며 1946년 청년문학가협회를 만들어 문단 활동을 함께 하였고, 1949년 『예술부락』을 주재하면서 본격적인 비평활동을 전개했다. 1955년에는 순수 문예지인 『현대문학』의 주간을 맡는다. 1972년 정릉동에 이층 양옥을 마련해 이사하였다. 1981년 해외여행 도중 갑자기 죽음을 맞이하였다. 한국문인협회에서는 ‘조연현문학상’을 제작하여 신진작가들을 양성하고 지원한 그의 뜻을 잇고 있다.
  • 김자혜
    인물
    김자혜
    기자이다. 1930년 이화여자전문학교(현 이화여자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1932년 월간 여성교양잡지 『신가정』의 기자로 활동하였다. 그는 일제의 감시를 피해 베이징[北京]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주요섭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 1936년 베이징 YWCA회관에서 결혼하였다. 1943년에는 주요섭이 일본의 대륙 침략에 협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중국에서 추방되어 귀국하였다. 귀국 후 김자혜와 주요섭은 돈암동 254-1번지에 자리 잡았다. 1945년 김활란 박사를 중심으로 창립된 한국여학사협회에 참여하여 여성으로서 사회에 봉사하고, 교육과 자기계발을 위한 활동에 펼쳤다.
  • 이종린
    인물
    이종린
    언론인이자 정치인, 종교인이다. 충청남도 서산출생으로 한학을 수학하다가 상경하여 1907년 성균관박사가 되었다. 1909년 오세창·장효근이 『대한민보』를 창간할 때 논설기자로 민중계몽과 국민지식계발에 힘썼다. 1910년 천도교에 입교하여 『천도교월보』의 주필 및 발행인으로 언론을 통한 포교활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 『독립신문』 주필로 활동하다 체포되어 3년간 투옥하였다. 1930년대 성북리(현 성북동)에 거주하였는데 1938년 ‘무인멸왜기도사건’ 이후 천도교 구파가 일제에 타협하였을 때 친일적 활동을 하였다. 해방 후 제헌 국회 의원으로 활동하고, 제2대 국회 의원에 당선되었으나 6.25 전쟁 당시 납북되어 납북 중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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