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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의 인물, 사건, 장소, 유물, 문헌, 작품 등을 유형별, 시대별, 지역별로 검색하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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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10 민주항쟁
    사건
    6.10 민주항쟁
    1987년 6월 대통령 직선제와 민주화를 요구하면서 일어난 범국민적 민주화 운동이다. 1987년 전두환 정부가 「4‧13호헌조치」를 발표하면서 사회 각계 인사들의 비난이 이어졌다. 한편,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조직적으로 조작‧은폐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져 온 국민의 분노를 일으켰고,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는 목소리가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고려대학교 역시 마찬가지였다. 1987년 6월 10일 고려대학교에서는 2천여 명의 학생들이 참가하여 출정식을 개최한 뒤 민주광장에서 시청 앞까지 가두시위를 전개하며 6‧10 대회에 참가하였다. 한편 교수들도 민주화에 대한 연좌시위를 교내에서 전개하고, 성명을 발표해 개헌을 요구하였다. 6월 내내 이어진 항쟁의 결과, 전두환 정권은 직선제 개헌과 제반 민주화조치 시행을 약속하는 「6·29선언」을 발표하였다.
  • 유신헌법 반대 학생운동
    사건
    유신헌법 반대 학생운동
    1972년 10월 선포된 유신체제에 반대하여 일어난 학생운동이다. 1973년 서울대 문리대에서 유신 선포 이후 최초의 학생시위가 발생한 이후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동맹휴학, 시험거부 등 다양한 방법으로 계속되었다. 정부는 1974년 긴급조치 1호를 발표하였다. 같은 해 긴급조치가 해제되었으나 복역 중인 사람들에게는 적용되지 못하였고, 고려대학교 학생회는 이들의 석방을 요청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하지만 학생들이 경찰에 잡혀가는 사태가 발생하였고, 교문에서 학생들과 경찰의 투석전이 전개되었다. 시위가 계속되자 1975년 4월 정부는 긴급조치 7호를 발동하여 고려대학교의 휴교와 동교내 집회ㆍ시위금지 등을 명하였다. 민주화 운동의 기세를 꺾으려는 의도가 담긴 조치였으나 이후 대학가의 연합으로 유신체제 반대운동은 지속되었다.
  • 3선개헌 반대시위
    사건
    3선개헌 반대시위
    1969년 대통령 박정희가 3선을 목적으로 추진하였던 제6차 개헌에 반대한 민주화 운동이다. 1967년 박정희 정권은 6.8 부정선거를 통해 개헌에 필요한 의석을 확보하였다. 1969년 개헌을 위한 움직임이 본격화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한 반대 시위가 연일 전개되었다. 고려대학교 학생들도 헌정 수호를 내세우며 3선 개헌 반대 운동을 벌였다. 6월 19일 고려대학교 법대학생 7백여 명은 3선개헌 성토개회를 열었고, 28일에는 교내 배구장에서 시작된 시위가 안암동 로타리 부근까지 진출했으나 기동경찰의 최루탄 발사 등의 제지로 교내로 되돌아갔다. 결국, 정부는 휴교령을 내렸으며, 고려대학교는 조기 방학에 들어갔다. 3선개헌 반대투쟁은 학생운동을 촉발하는 동시에 민중의 관심과 연대를 확산하는 계기가 되었다.
  • 한일협정 반대운동(6.3 학생운동)
    사건
    한일협정 반대운동(6.3 학생운동)
    1964년 박정희 정권이 국외자본을 유치하기 위해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진행한 것에서 촉발된 항쟁이다. 1964년 3월 24일 시위로 고려대, 서울대, 연세대 학생들이 참여한 시위가 시발점이었다. 고려대학교 학생 1,000여 명은 교내와 안암동, 신설동 로터리 일대 등에서 시위를 벌였다. 6월 3일 시위가 확산되자, 박정희 정권은 계엄령을 선포하였고, 고려대학교는 시내 대부분 학교와 함께 무기한 휴교에 돌입하였다. 1965년 6월 22일 한일회담이 정식 조인된 후에도 회담 철회를 주장하며 반대 시위를 이어 갔지만, 무장군인이 학교에 난입하여 학생들을 구타하거나 교내 강의실 및 실험실을 파손 등의 탄압이 계속되었다. 6.3 학생운동은 비록 그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하였으나 박정희 정권에 대한 최초의 민중에 의한 반정부운동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 4.18 고대학생 의거
    사건
    4.18 고대학생 의거
    1960년 4월 18일 고려대학생들이 자유당의 독재에 항거하면서 벌인 평화시위이다.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에서 온갖 부당한 일이 자행되었고, 자유당과 경찰의 반민주적이고 억압적인 행위를 규탄하는 시위가 산발적으로 진행되었다. 주로 지방도시의 고등학생들이 시위를 전개하던 가운데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대학생으로서는 최초로 서울에서 시위를 감행하였다. 18일 오후 1시 3천여 명의 고려대학생들이 교문을 나섰고, 국회의사당 앞에 도달하여 농성하였다. 시위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가던 고려대학생들은 정치깡패들의 습격을 받아 10여 명이 중상을 입었다. 하지만 김주열 열사의 죽음과 고려대학생들의 피습사건은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 미아리 전투
    사건
    미아리 전투
    한국전쟁 중 1950년 6월 26일부터 27일 사이에 미아리고개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적인 전면 남침으로 38도 분계선에 인근한 전선이 무너졌고, 수도 서울이 위협받게 되었다. 6월 27일 북한군을 방어하기 위해 이응준 소장이 이끄는 국군 제5사단과 유재흥 준장이 이끄는 제7사단이 미아리고개의 좌측과 우측 방어를 나누어 맡았으며, 6월 27일 오후부터 북한군과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국군은 적군의 진출을 지연시키기 위해 길음교 폭파를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전차가 미아리고개를 넘어 돈암동으로 진입하면서 미아리저지선이 무너졌다. 하지만 일부 부대가 방어진지에서 끝까지 저항하거나 국지적인 시가전을 펼치며 북한군에게 타격을 주기도 하였다.
  • 4.19 혁명
    사건
    4.19 혁명
    1960년 4월 19일 학생들의 시위로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확산된 반정부 민주주의 혁명이다. 성북구 지역은 혁명의 발화점이자 경찰 발포에 의한 희생자가 나온 곳이었다. 4.19혁명은 이승만정권의 3.15부정선거와 독재에 저항하는 운동이었다. 직접적인 계기는 4월 초 마산 앞바다에서 김주열이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시신으로 떠오른 것과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시위를 벌이던 중 경찰의 비호를 받는 반공청년단이 습격하여 많은 학생이 다친 사건이었다. 4월 19일 3만 명의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경찰의 발포로 당일 서울에서만 130명이 죽고 1,00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당시 삼선동에 있는 한성여자중학교 2학년 진영숙(14세)도 불의를 참지 못하고 나갔다가 죽은 어린 희생자였다.
  • 6.8부정선거규탄 학생시위
    사건
    6.8부정선거규탄 학생시위
    1967년 6월 16일에 있었던 학생들의 시위인데, 성북구 내의 고등학생들도 다수 참가하였다. 1967년 6월 8일에 있었던 국회의원 선거에서 많은 부정이 저질러졌고, 여기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시위가 산발적으로 전개되었다. 성북구에서는 오전 내내 고등학생들의 시위가 이어졌는데, 8시쯤에 동시다발로 벌어진 주요 시위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성북고등학교(현 홍익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 학생 1천여 명이 혜화동로터리에서 시위하다 경찰의 제지로 해산되었고, 고명상업고등학교(현 고명경영고등학교) 학생 5백여 명이 돈암동로터리에서 시위하다 경찰의 제지로 해산되었다. 서라벌고등학교(당시에는 돈암동 소재) 학생 8백여 명은 미아리고개에서 시위하다 경찰의 제지로 해산되었다.
  • 6.25 전쟁
    사건
    6.25 전쟁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되어 1953년 휴전할 때까지 약 3년간 한반도에서 전개되었던 전쟁이다. 북한은 성북구 미아리고개를 통해 서울로 들어왔고 후퇴할 때에도 그곳을 통해 많은 사람을 납치해 갔다. 북한은 전쟁 중에 서울을 점령했다가 후퇴하면서 남한의 많은 사람을 미아리고개를 통해 북으로 강제납치하였고, 그중에는 성북구에 살던 사람들도 다수 포함되었다. 조소앙, 안재홍, 조헌영 등은 독립운동가이자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던 인물로 납북 당시 성북구에 거주하고 있었다. 전쟁으로 인한 이산의 아픔과 고통은 반야월이 작사하고 이재호가 작곡한 「단장의 미아리고개」를 통해 대중가요로도 널리 알려졌다.
  • 동백림 사건
    사건
    동백림 사건
    1967년 7월 8일,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형욱이 발표한 대규모 공안사건이다. 서울에서 머물 때 성북동에서 거주했던 음악가 윤이상이 연루되었다. 6.8부정선거로 어수선한 정국에서 중앙정보부는 동백림(동베를린)을 거점으로 한 대규모 간첩단을 적발하였다고 열흘 간 계속 발표하면서 작곡가 윤이상, 화가 이응로, 서울대학교 문리대의 민족주의비교연구회 등을 포함한 194명이 연루되었다고 하였다. 하지만 검찰이 간첩죄나 간첩미수죄로 기소한 것은 23명에 불과했고, 최종심에서 간첩죄가 인정된 사람은 1명도 없었다. 이 과정에서 해외 유학생과 교민들의 강제 연행은 외교적 마찰을 불러 일으켰고, 유럽 국가들의 윤이상과 이응로에 대한 구명운동이 전개되기도 하였다.
  • 대한민국 정부수립
    사건
    대한민국 정부수립
    1948년 8월 15일 제헌 헌법에 따라 정부를 구성하고 대한민국이 출범한 일이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했지만,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 남과 북이 갈라졌고, 통일의 노력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1948년 5월 10일 남한만의 단독 선거를 통해 제헌국회를 구성하고 헌법을 만들었으며, 그 헌법에 따라 정부를 구성하고 국가의 출범을 선포한 것이다. 북한도 단독 정부의 출범을 선포하면서 남과 북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분단이 고착되고 말았다. 제헌의회 선거 때에는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아직 남북의 통일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선거에 참여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2년 뒤 1950년 2대 국회의원 선거에는 본격적으로 참여하였는데, 성북구의 조소앙은 전국 최다득표로 당선되었다.
  • 남북협상
    사건
    남북협상
    한반도의 분단이 가시화되자 1948년 김구, 김규식 등이 마지막까지 통일을 위해 노력한 정치회담이었다. 1948년 1월 UN의 한국통일안에 따라 UN 임시한국위원단이 방문하였는데, 소련과 북한이 입북을 거부함으로서 남북의 통일선거 실시는 불가능하게 되었고 분단의 위기에 내몰리게 되었다. 이에 2월부터 남북협상을 통해 분단을 막고자하는 정치세력이 결집하였고, 4월 19일부터 평양에서 회담을 열고 자주적으로 남북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하였다. 당시 성북구에 살았던 조소앙은 남북의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앞장선 정치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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