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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의 인물, 사건, 장소, 유물, 문헌, 작품 등을 유형별, 시대별, 지역별로 검색하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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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곡산
    장소
    월곡산
    성북구 장월로3길 93-27(상월곡동 산 1-1) 일대에 있는 오패산 지맥의 남쪽 끝 봉우리이다. 월곡동에 위치하여 월곡산이라고 한다. 고종의 장남 완화군의 묘(애기릉)와 고종의 귀인들의 묘가 위치해 있었으나 지금은 고양시 서오릉 경내로 이전되었다. 월곡산 일대는 오동근린공원으로도 불리는데, 1966년 2월 5일 건설부고시 제2181호로 처음 근린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1985년 2월 16일 서울특별시고시 제72호로 최종 고시되었다.
  • 성북동 익청로
    장소
    성북동 익청로
    성북동 우정의 공원에서 팔정사까지 이어지는 성북로31가길 일대 길이다. 공식 명칭은 아니지만 길 중간 즈음에 '익청로(益淸路)'라는 표지석이 있어 길을 오가는 주민들은 그렇게 부른다. 이 표지석 글은 문인화계의 거목인 중봉 이가범이 쓴 것으로 보인다. 주변으로 숲이 우거져 있고 개울이 흐르는 이 길은 숙정문과 약수터로 이어진다.
  • 민영숙 집터
    장소
    민영숙 집터
    안암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 민영숙의 집터이다. 위치는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기록되어 있는 주소지를 토대로 현재 위치를 추정한 것으로 현주소는 안암동1가 48번지이다. 민영숙의 집터는 성신여자대학교와 성북천 사이의 골목에 있으며, 현재 빌라 건물이 들어서 있다. 대학 번화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이며 상가와 빌라, 원룸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 유봉영 집터
    장소
    유봉영 집터
    장위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 유봉영의 집터 추정 장소이다.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따르면 유보영의 주소지는 '서울 성북(城北) 장위(長位) 219'이다. 현재 북서울꿈의숲 맞은 편의 언덕에 위치한 장소이다.
  • 이윤장 집터
    장소
    이윤장 집터
    장위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 이윤장의 집터이다.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따르면 이윤장의 주소지는 '서울 성북(城北) 장위(長位) 74-54'이다. 돌곶이역에서 북서울꿈의숲으로 가는 대로의 사거리 모서리에 위치해 있다. 현재 이윤장의 집터는 재개발구역으로 지정되어 공사가 진행 중이다.
  • 장기영 집터
    장소
    장기영 집터
    장위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 장기영의 집터이다.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따르면 장기영의 주소지는 '서울 성북(城北) 장위(長位) 246-396'로 월곡산 아래의 높은 언덕 주택가 끝에 위치해있다. 월곡초등학교 뒤편이다. 현재 오래된 단독주택이 건축되어 있다.
  • 이정선 집터
    장소
    이정선 집터
    상월곡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 이정선의 집터 추정 장소이다.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기록된 주소 '서울 성북(城北) 상월곡 6-24'를 근거로 현재의 위치를 추정하였다. 그의 집터는 월곡중학교 바로 뒤편에 위치해 있으며, 그 자리에는 현재 단독주택이 건축되어 있다.
  • 정만산 집터
    장소
    정만산 집터
    월곡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 정만산의 집터 추정 장소이다. 정만산은 1919년 3월 26일 숭인면사무소에서 만세시위를 하다가 체포되었다. 정만산의 판결문에는 그의 주소가 '경기도(京畿道) 고양군(高陽郡) 숭인면(崇仁面) 월곡리(月谷里) 24번지'로 기록되어 있다. 이 위치는 동덕여자대학교 바로 앞에 위치한 장소로, 현재 상가 건물이 지어져 있다. 이 건물에는 월곡1동 우편집중국과 미용실, 카페 등이 운영 중이다.
  • 김여재 집터
    장소
    김여재 집터
    길음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 김여재의 집터로 추정되는 장소이다.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따르면 김여재의 주소지는 '서울 성북(城北) 길음동(吉音洞) 595-61'이다. 계성고등학교와 접해 있는 이 장소는 재개발이 진행되어 현재 공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 최철 집터
    장소
    최철 집터
    정릉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 최철의 집터이다. 최철은 1938년에 형과 함께 뤄양[洛陽]으로 건너갔다. 1940년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 입대했고, 이후 광복군으로 활동하였다. 이 집터는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기록된 주소지를 근거로 추정한 것이다. 현재 최철의 집터는 서경대학교 캠퍼스의 일부가 되었다.
  • 이동화 집터
    장소
    이동화 집터
    성북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 이동화의 집터이다.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기록된 주소지 '서울 성북(城北) 186-5'를 근거로 위치를 추정하였다. 경신중고등학교 부근의 가파른 언덕에 위치한 이동화의 집터에는 현재 단독주택이 건축되어 있다.
  • 권태휴 집터
    장소
    권태휴 집터
    성북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 권태휴의 집터이다. 독립유공자 공적조서에 따르면 그의 주소지는 '서울 성북(城北) 성북동(城北洞) 131-55'로 나와있다. 경신중고등학교 근처에 위치한 이 장소에는 현재 빌라 건물이 들어서 있다.
  • 길영희 집터
    장소
    길영희 집터
    성북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 길영희의 집터 추정 장소이다. 독립유공자공훈록의 유공자 정보에 따르면 길영희의 거주지는 "서울 성북(城北) 44-44"였다. 성북동 언덕에 위치한 이 추정 장소에는 단독 주택이 들어서 있다.
  • 조재옥 집터
    장소
    조재옥 집터
    성북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 조재옥의 집터이다. 공훈전자사료관의 유공자 정보에 따르면 그의 주소지는 '서울 종로(鍾路) 성북(城北) 286'이었는데, 이는 그가 거주했던 성북정의 하숙집 주소인 것으로 보인다. 현재 조재옥의 집터 자리에는 1972년에 건축된 주암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 성동준 집터
    장소
    성동준 집터
    정릉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 성동준의 집터 추정 장소이다. 성동준은 독립유공자 공훈록의 유공자 정보에 따르면 '서울 성북(城北) 정릉(貞陵) 17-22'에서 거주하였다. 집터 추정 장소는 현재 도로에 편입되었다. 길음교 사거리에서 정릉역으로 향하는 대로이다.
  • 강윤국 집터
    장소
    강윤국 집터
    정릉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 강윤국의 집터이다. 독립유공자 공훈록의 주소 '서울 성북(城北) 정릉(貞陵) 16-29'를 토대로 집터를 추정한 것이다. 집터는 길음교 사거리의 대로변에 위치해 있으며, 현재 이 장소에 지어진 건물에는 음식점과 PC방 등이 운영되고 있다.
  • 박승호 집터
    장소
    박승호 집터
    동선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 박승호의 집터이다. 독립유공자 공훈록의 유공자 정보에 따르면 박승호의 거주지는 '서울 성북 동선 84의 41'이었다. 성신여자고등학교 바로 뒤편에 위치해 있다.
  • 최승우 집터
    장소
    최승우 집터
    안암동 출신의 독립운동가 최승우 집터이다. 최승우는 안암동에서 태어나고 거주했다.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따르면 본적과 주소 모두 '서울 동대문 안암정 228번지'였다. 집터로 추정되는 위치에는 현재 다가구용 단독주택이 들어서 있다.
  • 피한봉 집터
    장소
    피한봉 집터
    안암동 출신의 독립운동가 피한봉의 집터이다. 1919년 5월 8일 경성지방법원의 판결문에 따르면 피한봉은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안암동 164번지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이를 토대로 현 주소지를 추정하면 고려대로7다길 29이다. 집터 추정 장소에는 2020년 현재 다가구용 단독주택이 들어서 있다.
  • 이강 집터
    장소
    이강 집터
    정릉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 이강의 집터로 추정되는 장소이다. 이강은 1964년 10월 13일 자택인 성북구 정릉동 재건주택 88호에서 별세하였다. 정릉1동에 지어진 재건주택은 주민들 사이에서 ‘영단주택’으로 불리고 있으며, 현재 정릉1동 힐스테이트아파트에서 우성아파트 사이에 위치하였다고 한다. 추정 지역의 중심부를 사진 촬영하였다.
  • 정릉동/주거
    장소
    정릉동/주거
    정릉동 주거 형태에 관한 내용이다. 정릉동은 북한산으로 가는 주요 길목 중 하나로 조선시대에는 한가로운 농촌 마을이었으며, 성 안 사대부의 유람처 또는 별서지였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부터 서울 인구가 급증하면서 서울 외곽이었던 정릉리에도 사람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1930년대 중반에는 정릉리가 경성부의 토막민을 수용하기 위한 장소로 선정되면서, 이주민들이 식수와 생활용수를 얻기 쉬운 정릉천에 토막을 지었다. 해방 후에는 그 자리를 무허가 판잣집이 대신했다. 6.25전쟁 휴전 이후, 급격히 늘어나는 서울 인구를 감당하기 위해 정릉동 등의 외곽 지역에 공영주택 건설이 추진되었다. 공영주택은 '문화주택'으로 불리며 1960~1970년대 크게 확산되었고 정릉동은 고급주택단지로 부상했다. 1979년에는 정릉천을 덮는 복개 공사가 시작되면서, 정릉천의 토막집과 판잣집은 완전히 사라졌다. 현재는 재개발로 정릉동에 아파트 단지가 많이 들어섰지만, 일부 지역에 도시형 한옥과 공영주택이 여전히 남아있다.
  • 중랑천
    장소
    중랑천
    경기도 양주시에서 발원하여 의정부시, 서울특별시 노원구 성북구 등을 지나 한강으로 유입하는 하천이다. 유역면적 299.6㎢, 유로연장 34.8㎞로 우이천·청계천 등 모두 13개의 지류를 거느리고 있다. 과거 중랑천은 도봉동 부근에서는 ‘서원천(書院川)’, 상계동 부근에서는 한강의 새끼 강이라는 뜻으로 ‘샛강’이라고 불렸다. 그리고 한강의 위쪽에 흐르는 냇물이라는 뜻으로 한천(漢川), 한내라고도 불렀는데 현재 석관동의 동쪽 중랑천과 접한 도로가 한천로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중랑천 주변은 과거 농경지였으나 1970년대 초 택지로 조성되어 아파트·단독주택·다세대주택 등이 혼재해 있다. 중랑천변의 하천부지는 주민들의 체육공간과 휴식장소로 널리 이용되고 있다.
  • 우이천
    장소
    우이천
    북한산 우이봉 아래에서 발원하여 장위동과 석관동의 동북쪽을 거쳐 석계역 부근에서 중랑천으로 합류하는 개천이다. 성북구 장위동과 노원구 월계동을 가르는 자연적 경계를 이루는 우이천은 예전에는 소근내라고도 불리었다. 중랑천 지류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며, 길이는 8,330m이다. 상류에 우이구곡이라 불리는 명승지가 있다. 우이천과 중랑천이 합류하는 지점 일대에 자리한 장위동은 충적 평야가 발달하여 일찍이 농촌 마을들이 형성되었는데 현재는 그 이름만이 전해지는 명덕동, 웃대, 간대, 아랫대, 활량리가 바로 그 마을들이다. 현재는 많은 주민들이 휴식과 운동을 목적으로 우이천을 찾고 있다.
  • 손가정 노인회
    장소
    손가정 노인회
    성북구 솔샘로18길 72 주변 정릉천 옆에 있었던 건물이다. 정릉 밀양 손씨 집성촌인 손가정의 노인회 건물은 하천공유지에 지어진 무허가 건물이었다. 제방에서 하천 쪽으로 삐죽이 나와 교각 위에 지어졌는데, ‘손가정노인회’ 문패가 걸려 있었고 두 개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천의 복원과 정비 사업이 진행되면서 무허가 건물에 대한 철거가 이루어져 노인회 건물도 사라지고 말았다.
  • 쌀바위
    장소
    쌀바위
    성북동에 있었던 관련 전설이 있는 바위이다. 도성의 북문인 숙정문 밖에 바위 하나가 있었는데, 이 바위에서는 아침, 점심, 저녁 세 차례에 걸쳐 꼭 한 되씩의 쌀이 나왔다고 한다. 이를 발견한 나무꾼이 매일 여기에서 쌀을 가져가 걱정 없이 지냈지만, 욕심이 생겨 매일 지키면서 쌀자루에 쌀을 가득 채워서 집으로 내려오곤 했다. 이렇게 한 달을 하자 쌀이 나오던 바위틈에서는 더 이상 쌀이 나오지 않고, 대신 끈적끈적한 물이 흘러나오게 되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이 바위를 쌀바위, 즉 미암(米岩)이라 했다고 한다. 17세기 실학자 이수광(1563-1628)은 『지봉유설』에 “숙정문 밖 한 바위틈에서 액체가 흘러나오는데 맑을 때는 마치 막걸리같고 진할 때는 떡과 같아서 사람들이 다투어 먹는다”라고 기록하였다.
  • 성북천(성북동 구간)
    장소
    성북천(성북동 구간)
    성북천의 상류 구간으로 성북천이 성북동을 지나는 구간을 말한다. 성북천은 북악산에서 발원하여 성북동과 안암동을 지나 청계천으로 합류한다. 성북천의 상류 구간은 조선시대부터 1960년대까지 생업의 수단인 마전터, 아낙네들의 빨래터, 아이들의 놀이터 등으로 이용된 성북동 사람들의 중심 생활공간이었다. 또한, 이태준, 조지훈 등 근현대 예술인들이 성북동 개천 주변에 거주하였다. 1970-1980년대 성북천 복개 공사가 이루어지면서, 성북천 상류 구간의 물길 대부분은 성북로로 이용되고 있다.
  • 길음교
    장소
    길음교
    동소문로의 미아리고개를 넘어 돈암동과 길음동을 연결하는 다리이다. 처음 만들어진 시기는 1934년으로, 시멘트로 만들어진 교량이라는 의미로 ‘양회다리’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의정부나 포천 등지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연결로인 미아로를 따라 건립되어 서울입성관문으로서의 역할을 했으며, 미아리에 공동묘지가 있던 시절에는 상여가 다니는 길목으로도 이용되었다. 이후 1976년 한 차례 보수되었고, 통행량이 많아짐에 따라 전면 확장공사를 벌여 폭 35m, 길이 45m로 1989년 준공되었다.
  • 길음동 돌산
    장소
    길음동 돌산
    채석장이 있던 길음동의 돌산이다. 길음동의 돌산은 큰 돌산과 작은 돌산으로 나뉘는데, 큰 돌산은 신안아파트 자리에 위치했던 것으로 신안아파트 뒤편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돌산은 70년대 후반까지 채석장으로 이용되었다. 길음동 산동네에 살았던 김소진의 소설에는 이 돌산이 주요 배경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 김광균 집터
    장소
    김광균 집터
    성북구의 작가 김광균이 살았던 집터이다. 김광균은 1977년부터 1992년까지 성북동 깊은 골짜기에 거주하였다. 집터의 위치는 우리옛돌박물관 근처로 지금은 고급주택단지가 들어서 있는 곳이다. 건물 없는 빈터였던 곳에 2019년 현재 개인주택을 건축하는 공사가 진행 중이다.
  • 미아사거리
    장소
    미아사거리
    남북으로 종암로, 도봉로, 동서로 동소문로, 월계로가 만나는 교차로로, 성북구 길음동과 강북구의 경계에 위치한다. 월계로가 나중에 생겨 원래는 삼거리였기 때문에 사거리가 된 이후에도 관습적으로 미아삼거리를 지명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 배나무골
    장소
    배나무골
    성북구 상월곡동에 있던 마을이름이다. 배나무가 많이 있던 데서 유래된 것으로 일제강점기 때만 해도 서울 북공고 주위에 배 밭이 형성되있었다고 한다. 배나무골이라는 명칭외에도 배골・배나뭇굴・이동(梨洞)으로도 불렸다.
  • 성북동 송림
    장소
    성북동 송림
    성북동 쌍다리불백 식당 뒤쪽으로 울창한 소나무숲이 있었다. 지금은 주택이 들어서 소나무는 몇 그루가 보일 뿐 소나무숲의 모습은 찾을 수 없다.
  • 안감내
    장소
    안감내
    보문동 대광초등학교부터 성북구청, 돈암동성당 쪽까지 안암동을 지나가는 성북천의 일부를 부르는 이름이다. 안암천이라고도 불렸다. 안감천변을 따라오는 지선도로는 안감내길이라고 불렀다. 한편 ‘안감내’라는 이름과 관련한 설화가 전한다. 조선시대 안암동에 살던 채소장수 안감이란 사람이 도성 안에 살던 대감에게 선행을 베풀었고, 감동한 대감이 소원을 들어준다고 하였는데, 안감이 안암천을 건널 수 있게 다리를 놓아달라고 하여 소원대로 다리를 놓고 그 이름을 ‘안감내다리’라고 부르고 하천을 ‘안감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 인수천
    장소
    인수천
    북한산 줄기에서 발원하여 성북구 길음동을 거쳐 정릉천과 합류되는 개천이다. 지금은 복개되어 도로(인수로)로 사용되고 있다. 인수로는 동소문로에서 길음초등학교까지 이어지는 1,370m의 보조간선급 소로이다.
  • 서울 흥천사 대방
    유물
    서울 흥천사 대방
    돈암동 흥천사에 있는 건축물로 염불과 수행을 할 수 있는 공간이다. 흥천사 대방은 1865년(고종 2) 흥선대원군의 지원으로 절을 중창할 당시 중수된 것으로, 대원군이 직접 쓴 편액이 걸려있다. 조선 후기에는 정토 염불 사상이 크게 성행하여 접대를 위한 공간이 필요해지면서 누각 형태의 건축물이 큰 절과 왕실 원찰을 중심으로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흥천사의 대방은 수행, 공양, 법회 등 다양한 활동을 수행할 수 있도록 구성된 복합건물로, 이러한 시대적 상황이 반영되어 있어 건축사적·불교사적 의의를 가진다. 2013년 12월 20일 등록문화재 제583호로 지정되었다.
  • 취선대
    장소
    취선대
    성북구 아리랑로19길 116에 위치한 정릉 안에 있는 약수터이다. 취선대는 정릉의 마지막 능참봉이었던 서재국 참봉과 조선시대 최후의 화원화가 출신인 조석진의 외손(外孫)이자 근대 전통화단의 실경산수화 대가였던 변관식 화백이 함께 만든 약수터로, 정릉 능침 뒤편의 언덕 정상부에 있다. 정릉 주위에 조성된 산책로는 2.5㎞ 정도의 길이로 주위에 백록담, 정심약수 등 8곳의 옹달샘과 쉼터가 있는데, 취선대도 그 중의 하나이다.
  • 정릉시장
    장소
    정릉시장
    성북구 보국문로11길 일대에 있는 전통시장이다. 정릉천변에 위치한 정릉시장은 1960년대 초부터 자리잡았는데, 1990년대 이후 대형마트의 등장으로 시장 상권이 쇠퇴하던 중 다시 활기를 찾기 시작한 것은 2014년 무렵부터이다. 서울시와 성북구가 적극적으로 전통시장 살리기에 나서, 서울형 신시장으로 지정되었고 배달서비스를 시작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매달 둘째, 넷째 주 토요일마다 정릉천변을 따라 마을장터인 개울장을 여는데, 벼룩시장인 ‘팔장’, 직접 만든 물건을 사고파는 ‘손장’, 그리고 정릉시장의 소문난 먹을거리를 배달해주는 ‘먹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체험, 공연, 먹을거리 등 다채로운 주제가 어우러진 복합문화 공간으로 각광받고 있다.
  • 정릉동 한옥단지
    장소
    정릉동 한옥단지
    성북구 정릉동 31길과 솔샘로 6길 일대의 한옥이 있는 지역이다. 2009년 정릉 일대의 재개발이 이루어질 때 한옥의 보존 가치가 인정되어 ‘한옥보존 재건축단지’의 조성이 결정되어 현재까지 유지될 수 있었다. 이 지역의 한옥들은 조상들의 주거문화 특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사계절이 뚜렷이 구별되는 한반도의 기후 특성을 감안해 지방에 따라 서로 다른 주거 형식을 이룬 것이 한옥인데, 기본적인 가장 큰 특징은 난방을 위한 온돌과 더위를 피하기 위한 마루가 균형 있게 결합된 구조를 갖추고 있는 점이고, 이 지역의 한옥들에서도 생활편의를 위한 개량이 이루어졌지만, 기본적인 특징들이 잘 살아있다.
  • 정릉골
    장소
    정릉골
    성북구 솔샘로17가길(정릉동 757번지) 일대의 마을이다. 정릉천을 따라 북한산 방향으로 좁은 골목길을 따라가면 낡은 대문, 구불구불한 길, 다듬어지지 않은 계단이 이어지는 정릉골이 나온다. 정릉천에서 마을 입구로 들어가는 초입에는 정릉골 팻말을 대신하는 ‘정릉골’ 문자와 소설가 박경리의 대표작 『토지』 그리고 그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토지』 『김약국의 딸들』 등의 소설로 유명한 소설가 박경리가 1965년부터 1980년까지 정릉골에서 살았고, 소설 『토지』 1~3권이 이곳에서 집필되었기 때문이다. 정릉골은 여전히 재개발이 화두가 되고 있고, 마을을 떠난 이들도 많고 빈집도 늘어났지만, 지역 주민들은 인근 학교의 학생들과 마을에 벽화도 그리고 다양한 축제도 여는 등 따뜻한 마을을 가꾸어가고 있다.
  • 앵두마을
    장소
    앵두마을
    성북구 성북동 1가 105번지 일대의 마을이다. 조선시대 성북동 일대에는 복숭아나무와 앵두나무가 많았다고 하는데, 현재의 경신중학교에서 ‘한양도성 혜화동 전시안내센터’ 사이의 마을은 속칭 앵두마을이라 불렸다. 이 마을이 주목받게 된 것은 성북동 일대에 한옥이 남아있는 집들이 많아서 이를 보존하고 지원할 방안을 추진하면서부터이다. 2014년 성북구청이 신청하여 사대문 밖에서는 처음으로 선잠단지 일대와 앵두마을이 서울시의 한옥밀집지역을 지정되었다.
  • 아리랑고개
    장소
    아리랑고개
    성북구 돈암동에서 정릉동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의 이름이다. ‘아리랑고개’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홍봉진이 1929년 ‘상춘원’이라는 요리집의 위치를 홍보하기 위해 ‘신흥사(흥천사) 옆 아리랑고개’라는 문구를 사용한 데서 시작되었다는 설, 1930년대 일본인들이 정릉 일대의 아름다운 경치를 이용하여 고급 음식점을 꾸미고 사람들이 많이 알고 있는 ‘아리랑’이라는 이름을 길목에 붙여 널리 알렸다는 설, 1926년 나운규가 발표한 영화「아리랑」의 배경이 되어 널리 알려졌다는 설 등이 있다. 성북구에서는 1997년에 아리랑고개를 ‘영화의 거리’로 조성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기념가로수와 테마공원을 조성하는 등 영화의 거리로 특화함으로써 전통과 역사, 문화가 살아 숨 쉬는 명소로 탈바꿈시켰다.
  • 심곡암
    장소
    심곡암
    성북구 정릉동 북한산에 있는 사찰이다. 정릉골 초입에서 비밀스런 관문을 통과하듯 길을 오르면, 이름 그대로 깊은(深) 골짜기(谷) 속의 암자(庵)에 다다른다. 북한산 형제봉 아래 제1사찰로 개창한지 100여 년 된 것으로 추정된다. 깊은 산 속에 위치하여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경내에는 기도처인 관음굴, 너럭바위, 굴참나무, 관음바위 등이 있다. 관음바위는 원래 ‘물개바위’라고 불렸으나 정릉 ‘김 참판댁’이 이 바위에서 관세음보살을 보고 대를 잇게 되었다는 설화가 전해 내려오면서 관음바위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심곡암에서는 너럭바위 주변을 산사음악회와 같은 각종 문화행사 장소로 사용하고 있으며, 템플스테이도 운영중이다.
  • 소리마을
    장소
    소리마을
    성북구 길음동에 있는 동네 이름이다. 소리마을은 경제적 타당성 등의 여건으로 길음 뉴타운 사업에서 빠진 존치구역으로 남은 곳이다. 따라서 주변 사방은 온통 뉴타운 지대로서 아파트로 구성되어 있고, 소리마을은 일반 주택지로서, 마치 높은 산(아파트)에 둘러싸인 낮은 분지와 같은 모습을 띠고 있다. 따라서 도시슬럼화를 방지하고 아파트와는 다른 방식의 삶의 질 향상이 필요하였고, ‘주민참여형 재생사업’을 통해 서울시 및 성북구청과 함께 천편일률적인 아파트 단지 조성과는 다른 살기 좋은 저층주거지 마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 삼태기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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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태기마을
    성북구 화랑로 18길(상월곡동) 일대의 마을 이름이다. 성북구 상월곡동과 석관동에 걸쳐 있는 천장산에서 내려다본 마을의 모양이 삼태기를 닮았다고 하여 예로부터 삼태기마을이라 불려 왔다. 2012년 서울시 건강친화마을만들기 시범사업지로 선정되어, 삼태기 마을주민협의체를 중심으로 보다 살기 좋고 건강한 마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지역이다. 마을에 있는 서울국유림관리소 앞에는 삼태기 숲 입구가 있어 걷기 좋은 산책로를 갖추고 있다. 또한 ‘마실사랑방’이 있는데 각종 의료 측정기를 구비하여 주민 건강 관리와 소통과 화합의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 미아리고개/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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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아리고개/명칭
    성북구 돈암동에서 길음동으로 넘어가는 미아리고개에 대한 여러 이름과 유래이다. 현재의 강북구 미아동에 ‘미아사’라는 절이 있어서 미아리라는 이름이 생겼고, 이 고개가 미아리로 넘어가는 고개인 데서 미아리고개로 불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조선시대에는 함경도 쪽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중요 도로였기 때문에 여진인들이 이 길로 왕래하였고, 그래서 오랑캐가 넘어오는 고개라는 의미에서 ‘되너미고개’, 한자로는 적유현(狄踰峴) 혹은 호유현(胡踰峴)이라고 불렸다.
  • 미아리고개/6.25전쟁
    장소
    미아리고개/6.25전쟁
    1950년 6월 25일 발생한 한국전쟁 당시의 미아리고개 상황에 대한 기록들을 모은 것이다. 6.25전쟁 당시의 미아리고개는 북한군의 서울 침투 경로이자 후퇴 경로였다. 서울 침투시에는 격전이 벌어졌고, 후퇴시에는 많은 사람들을 납치하여 끌고 갔다. 그러한 상황에 대한 동아일보와 경향신문의 기록들인데, 동아일보는 주로 납북자들의 증언을 특집으로 다룬 것이고, 경향신문의 기사는 전쟁 당시 미아리고개의 상황을 다룬 특집 기사이다.
  • 미아리고개/4.19혁명
    장소
    미아리고개/4.19혁명
    1960년 4.19혁명 시기 미아리고개와 관련한 신문 기록들의 모음이다. 동아일보의 기사들인데, 4.19 직후인 4월 20일자 「데모대원을 실은 트럭, 미아리고개를 넘어 창동으로」라는 제목의 기사부터 시작하여, 미아리에서 있었던 총성과 군중의 집결 등을 다루었고, 5월 17일자 「4.19 당시 미아리의 총성/한양대학 공과대학 정현식의 수기」라는 제목의 4.19 당시 총격을 겪은 사람들의 증언을 채록한 기사까지 수록하고 있다.
  • 미아리고개
    장소
    미아리고개
    성북구 돈암동에서 길음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의 이름이다. 미아리고개는 조선시대 이후 수도로 들어가는 중요한 진입로였기 때문에 시기별로 많은 역사상이 녹아 있다. 조선시대에는 함경도 쪽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중요 도로였기 때문에 여진인들이 이 길로 왕래하였고, 그래서 오랑캐가 넘어오는 고개라는 의미에서 ‘되너미고개’, 한자로는 적유현(狄踰峴)이라고 불렸다. 일제강점기에는 미아리고개 너머 현 길음2동 일대에 총독부에 의해 공동묘지가 조성되었다. 한국전쟁 때에는 북한군이 서울로 침투했던 길이자 후퇴했던 길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북한군에 의해 납치되었던 곳으로 이산의 아픔과 고통이 서린 곳이기도 하였다. 1970~80년대에는 역학촌이 성행하였는데, 도로의 확장과 주변 재개발로 옛 모습은 찾기 힘들다.
  • 미륵당
    장소
    미륵당
    성북구 성북로 28길 60(성북동 292-1)에 있었던 사찰이다. 미륵당은 작은 절이었는데, 그 옆에는 정자가 있었고, 정자 옆에는 폭포와 오래된 느티나무가 있었다. 미륵당 안에는 1700년대에 왕실에서 봉안한 석조미륵불좌상이 있었다. 독립운동가이자 문인인 임규가 말년에 10년간 거주하면서 『북산산고』를 탈고하였다. 미륵당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한국전쟁을 거치며 이곳의 주인이 몇 번 바뀌었는데, 1987년 운산스님이 한국불교태고종 총무원을 유치하면서 태고사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현재는 한국불교태고종 총무원과 종립기관인 동방대학원이 들어와 있으며, 미륵당 자리에는 현대식 동방대학원 건물이 들어서 있고, 법당에 석조미륵불좌상이 모셔져 있다.
  • 돈암동 산신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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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암동 산신당
    성북구 돈암동 606-56에 있었던 산신당이었는데, 현재는 재개발로 사라졌다. 전통사회에서는 산을 끼고 있는 마을에 대부분 산신당과 같은 민속신앙의 장소들이 있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 유래는 오래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다만 없어지기 전에 조사·보고된 기록들은 산신당 건물이 벽돌로 쌓고 슬레이트로 지붕을 덮었다고 하니, 해방 이후에 새로 만들어진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생활의 편의를 위한 정비·개발, 그리고 그러한 흐름과 공존하지 못하고 사라져간 전통 문화의 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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