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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의 인물, 사건, 장소, 유물, 문헌, 작품 등을 유형별, 시대별, 지역별로 검색하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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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춘앵
    인물
    임춘앵
    여성국극인으로 판소리 명창이다. 1948년 서울에서 박녹주·김소희 등과 여성국악동호회를 결성하고, 여성 창극인만으로 「옥중화」라는 이름으로 「춘향전」을 창극으로 꾸며 공연하였으며, 1961년에는 여성국악동지사를 조직하여 창극 「공주의 비밀」을 공연하였다. 여성국극의 명인으로 이름이 높았으나 1960년대 이후 여성국극의 쇠퇴로 은거하였다. 1970년대 장위동으로 이사하여 김진진과 함께 ‘임춘앵국악연구소’를 열어 여성국극의 명맥을 잇기 위해 힘썼다.
  • 박남옥
    인물
    박남옥
    영화감독이다. 광복 후 서울로 올라와 조선영화사 광희동 촬영소에 들어가 편집을 배웠다. 1940년대 돈암동에 거주하며 주변에 살던 영화인들과 교류했고, 1953년 극작가 이보라와 결혼하고 이듬해 남편이 쓴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미망인』을 촬영했다. 제작비 부족 등으로 어렵게 완성하여 개봉하였으나 흥행을 거두진 못했다. 1960년 도쿄에서 열린 제7회 영화제에 참가했다. 1997년 제1회 서울 여성영화제가 『미망인』을 상영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의 존재가 알려졌고, 2008년 여성 영화인에게 수여하는 '박남옥상'이 제정되었다.
  • 한운사
    인물
    한운사
    극작가이자 소설가이다. 한운사의 본명은 한간남이며, 1923년 충청북도 괴산 출생이다. 서울로 온 후 한남동 적산가옥에 살다가 1960년대 성북동 언덕에 있는 주택으로 이사하였다. 1948년 「날아간 새」를 시작으로 방송극과 소설을 발표하였는데, 「빨간 마후라」가 1964년 영화화되며 큰 인기를 끌었다. 대표작으로 「현해탄은 알고 있다」, 「하얀 까마귀」 등이 있으며, 대중가요 「잘살아 보세」,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빨간 마후라」 등의 가사를 지었다.
  • 차범석
    인물
    차범석
    극작가이자 연극 연출가이다. 차범석은 1924년 전라남도 목포에서 태어났고, 연희전문대학교에 입학한 후 연극 극본 집필과 연출 활동을 시작했다. 목포에서 교사로 재직하면서도 글을 썼는데, 195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밀주」, 이듬해 「귀향」이 당선되면서 정식 등단하여 서울로 올라왔다. 삼선동에 자가를 마련했다가 좀더 싸고 넓은 정릉(보국문로16가길 80)으로 이사하여 평생을 살면서 많은 문화예술계 사람들과 교류하였다. 1963년 극단 ‘산하’를 창단하여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20년간 꾸준히 연극을 무대에 올렸다. 대표작으로는 「껍질이 깨지는 아픔 없이는」, 「대리인」, 「산불」, 「새야 새야 파랑새야」, 「전원일기」 등이 있다.
  • 김진진
    인물
    김진진
    여성국극을 대표하는 배우이다. 이모이자 여성국극의 창시자로 ‘여성국악동지사’의 대표를 맡던 임춘앵에게 국극을 배운다. 열아홉 살이 되던 1952년 「공주궁의 비밀」의 주연을 맡으며 이름을 알린다. 이때부터 본명 대신 주인공 진진옹주의 이름을 예명으로 삼았다. 1958년 ‘진경여성국극단’을 창립하고 국극의 성황을 이끈다. 그러나 영화가 보급되며 국극 인기가 줄어들고, 활동무대가 점차 좁아진다. 이후 1970년대 장위동으로 이사하여 임춘앵과 함께 ‘임춘앵국악연구소’를 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임춘앵이 세상을 떠나며 국악연구소를 이어받아 아이들을 가르치며, 여성국극의 명맥을 잇기 위해 힘썼다.
  • 이광래
    인물
    이광래
    극작가, 연출가이자 서라벌 예술대학 교수를 지냈다. 1935년에 극예술 연구회에 가입하여 연극인으로서 활동을 시작하는 한편 같은 해에 『동아일보』에 「촌선생」이 당선되어 극작가로도 등단하여 활동하였다. 1949년 한국연극학회의 발족에 참여하고 1953년 서라벌예술대학 초대 연극학과장을 역임했다. 대표작으로는 「견우와 직녀」(1954), 「지옥문을 열어라」(1966) 등이 있다.
  • 나운규
    인물
    나운규
    영화감독이다. 자신이 각본과 감독, 주연을 맡아 아리랑 고개가 배경으로 등장하는 무성영화 『아리랑』을 만들었다. 민족현실과 저항정신을 담은 민족영화의 선구자로 한국영화를 성장시켰고 나운규프로덕션을 조직하여 이태준의 소설 『오몽녀』 등 문예작품을 영화화하는데도 주력하였다. 작품으로는 『잘 있거라』, 『옥녀』, 『사랑을 찾아서』, 『벙어리 삼룡이』 등이 있다.
  • 서항석
    인물
    서항석
    극작가이자 연출가, 독문학자이다. 함경남도 홍원에서 태어나 중앙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일본 도쿄[東京]제국대학 독문과를 졸업하였다. 그는 1931년 극예술연구회를 조직하고 공연정보를 실은 잡지 『극예술』을 발간하며 연극 이해를 도왔다. 1938년부터는 동아일보 학예부 기자를 그만두고 연극 활동에 매진하였다. 그는 해방 전 동선동에 거주하였는데 1947년 성북구 동선남동(東仙南洞) 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또한, 서라벌예대, 성신여자사범대학 등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꾸준한 활동을 하며 우리나라 연극의 발전에 기여했다. 하지만 일제의 침략정책에 적극 참여했으며, 1942년 일제가 주도한 분촌운동을 선전하고 만주 이민을 장려한 연극인 <대추나무>를 연출하는 등의 활동으로 인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목되었다.
  • 박승필
    인물
    박승필
    영화제작자이다. 서울에서 출생하여 한학을 수학하였다. 구미의 신문화가 쏟아져 들어오던 1900년대 초에 이 나라의 전통예능을 공연, 보존하기 위하여 1904년 광무대(光武臺)를 인수하여 판소리와 창극을 공연하였다. 1918년에는 극장 단성사를 인수하였는데 광무대와는 달리 영화 상영을 중심으로 운영하였다. 그는 단성사에서 1919년 10월 27일 한국 최초의 영화로 알려진 <의리적 구토>를 상영하였다. 1924년에는 <장화홍련전>을 제작・상영하였는데, 이 영화의 제작진과 자본주가 모두 우리나라 사람이라는 점에서 명실공히 최초의 우리나라 영화라할 수 있다. 한국영화의 선구자로 평가되는 그는 1932년 사망하였고,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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