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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의 인물, 사건, 장소, 유물, 문헌, 작품 등을 유형별, 시대별, 지역별로 검색하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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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악산로
    장소
    북악산로
    종로구 부암동에서 성북구 종암동까지 이어지는 도로이다. 북악산을 지나는 도로로 북악스카이웨이가 이 북악산로의 일부이다. 성북동, 정릉동, 미아리고개, 돈암동, 안암동5가, 종암동을 지나가고 있다. 연장은 9.7km, 큰 도로 폭은 20~35m정도이며 2~4차선으로 이뤄져있다.
  • 2016년 4.19 혁명 56주년 기념 문화제
    사건
    2016년 4.19 혁명 56주년 기념 문화제
    1960년 4월 19일 학생들의 시위로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확산된 반정부 민주주의 혁명인 4.19혁명의 56주년을 기념하여 실시한 문화제이다. 문화제는 2016년 4월 16일부터 18일까지 이루어졌으며 학술회의, 4.19혁명 학생 시위 재현 행사, 4.19기념 마라톤 대회, 특별전시회, 4.19혁명과 함께하는 걷기대회 등으로 구성되어 진행되었다.
  • 개운사 괘불도와 괘불함
    유물
    개운사 괘불도와 괘불함
    개운사에서 소장하고 있는 불화이다. 19세기 후반기 서울, 경기지역의 대표적인 화승인 응석이 수화승으로 제작한 것으로, 당시 유행하던 ‘연꽃을 든 본존’과 ‘관음보살’의 결합이라는 독특한 도상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이러한 형식의 괘불도 가운데 가장 연대가 올라가는 작품이다. 이 괘불자의 시주자는 다섯명의 상궁을 비롯단 다수의 청신녀(여성 재가신도)가 참가하고 있어 왕실과의 관련성을 엿볼 수 있다. <개운사 괘불함>은 1879년에 제작된 <석가불괘불도(釋迦佛掛佛圖)>를 보관하는 용도이다. 명문이나 표식은 없지만 괘불도와 동시기에 제적된 것으로 판단된다. <개운사 괘불도와 괘불함>은 2020년 8월 13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 한국정보통신자격협회 본사
    장소
    한국정보통신자격협회 본사
    안암로5길 40(안암동4가 11)에 위치한 전문자격기구이다. 21세기 정보화시대에 발맞추어 정보통신 관련 분야의 새로운 자격종목 개발 및 제도 연구를 통해 민간자격 검정제도를 활성화하고 국내 정보통신 신기술의 인중연구, 국내 자격중의 국제 공인화, 국제 공인자격 과정 교육 및 시험시행 등을 목적으로 1997년 2월 1일 설립되었다. 민간자격 검정 시행, 국내외 자격제도 연구 및 정책 건의, 신규 민간자격종목 개발, 취업 훈련 및 교육, 연구지 및 관련 서적 발간 등의 사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자격 종목에는 PC정비사, 네트워크관리사, 인터넷보안관리사, 스마트홈관리사, 모바일로보틱스 등이 있다.
  • 한국전기공사협회 서울중부회
    인물
    한국전기공사협회 서울중부회
    안암로 21(안암동4가 41-29)에 위치한 한국전기공사협회 시도회이다. 한국전기공사협회는 1960년 4월 4일에 '대한전기공사협회'라는 이름으로 처음 설립되었으며 1977년 11월 19일에 지금의 명칭으로 개칭하였다. 전기공사업의 발전 및 전기공사 시공방법 개선, 기술 향상 등을 목적으로 하는 이곳은 <한국전기공사업법> 제25조에 근거한 전기공사업의 유일한 법정단체이다. 주요 업무로는 공사업의 경영합리화와 시공기술의 향상을 위한 조사연구 및 지도, 공사업의 발전향상을 위한 홍보활동, 전기공사기술인력의 교육 및 양성, 전기공사업체에 대한 시공능력 평가 및 공시, 기공사 기술자의 등급 및 경력 등에 관한 기록의 유지, 관리 등이 있다.
  • 한국국토정보공사 서울중부지사
    장소
    한국국토정보공사 서울중부지사
    고려대로7다길 8(안암동1가 227-1)에 위치한 한국국토정보공사의 지사이다. 한국국토정보공사는 경지정리 토지구획정리 · 시가지계획 등과 기타 도로개설·하천보수 등의 사업 및 국민의 토지관리에 따른 지적공부(地籍公簿)를 정리하고 이를 통해 국가의 지적 관리에 효율성을 기하고 있는 기관이다. 1977년 7월 1일 재단법인 대한지적공사가 설립되었고 2013년 11월 25일에 본사 사옥을 전주·완주 혁신도시로 이전하였다. 안암동에 위치한 서울중부지사는 종로구와 중구, 성북구 일대의 지적 측량 서비스를 담당하고 있다.
  • 한국여성상담센터
    장소
    한국여성상담센터
    보문로22길 28(안암동3가 86)에 위치한 상담센터이다. 1998년 창립된 이곳은 여성들이 직면할 수 있는 전반적 문제에 대한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심리상담 프로그램과 상담관련 교육사업을 수행한다. 가정폭력 전문상담원, 부부치료지도자, 성폭력 전문상담원 교육 등을 운영하며 가정폭력을 경험 했거나 경험하고 있는 내담자가 참여하며 최소한의 심리적, 신체적 안전을 확보한 내담자를 대상으로 하는 가정폭력 피해자 집단상담, ‘평등한 관계, 성장하는 가정’을 주제로 새로운 대화방식을 훈련하여 긍정적 의사소통 경험을 제공하고 협동 작업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가족캠프 등의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 영암교회
    장소
    영암교회
    성북구 안암로7길 66(안암동3가 130-9)에 위치한 대한예수교 장로회 소속 종교시설이다. 1954년 11월 14일 첫 예배를 시작하였다. 같은 해 12월 현재의 예배당 바로 옆인 안암3가 13으로 이전하여 대한예수교 장로회 영암교회(靈岩敎會)로 명명하였다. 1955년 4월 19평 규모의 가건물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이후 인접 대지를 매입하여 1979년 대지 448.8평 건평 718.3평의 교회당을 신축하였다.
  • 동암교회
    장소
    동암교회
    성북구 고려대로 17가길 12(안암동 2가 96-4)에 위치한 대한예수교 장로회 소속 종교시설이다. 1955년 현 소재지에서 성광교회 창립 예배를 시작으로 교회가 설립되었다. 1957년 69회 경기노회에서 교회 가입 허가를 받고 교회 명칭을 동암교회로 변경하였다. 1960년 4월 안암동 2가 96의 약 250평 대지 위에 30평 교회를 건축하였다. 1981년 10월 교회당을 신축하고, 1983년 4월 증축하였다. 2001년 교육관, 2002년 현재의 교회당을 신축하였다.
  • 숭신방
    장소
    숭신방
    조선시대 초기부터 성 밖에 있던 한성부 동부 12방 중의 하나로, 현재의 성북구 돈암·동선·삼선·성북·안암·정릉·종암동 일대가 이에 속하였다. 한성부의 영역은 도성과 성저십리(城底十里)로 이루어졌는데 그 범위가 매우 넓어 이에 해당하는 영역을 한성부가 단독으로 통치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그렇기에 1396년 한성부를 5부(部) 52방(坊)으로 나누었는데 방은 공식적으로 조선 전기 한성부의 가장 하위 행정 조직이었으며, 이때부터 5부 중 동부(東部)에 숭신방(崇信坊)이 확인된다. 이 명칭은 1911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로 숭신방이 숭신면(崇信面)으로 변경될 때까지 사용되었으며 숭신면은 3년 뒤인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에(崇仁面)에 편입된다.
  • 우신향병원
    장소
    우신향병원
    안암로 99(안암동5가 85-7)에 위치한 병원이다. 1980년에 개원한 척추, 관절 질환과 재활에 중점을 둔 병원으로 현재까지 한 자리에서 약 40년 간 운영되고 있다. 1981년부터 스포츠 의학 연구실 및 운동선수 전용치료실을 운영하였으며 보다 나은 의료 서비스 제공을 위해 지속적으로 의료 장비를 도입하고 있다. 2012년에는 성북구청과 사회적기업 협력을 체결하였으며 고려대학교 안암병원을 비롯한 여러 병원과 협력을 체결하였다.
  • 승가원
    장소
    승가원
    개운사길 76-1(안암동5가 10-1)에 위치한 복지 시설이다. 승가원 사회복지재단이 관할하는 장애아동을 위한 시설로, 대한불교 조계종 중앙승가대학교가 1996년 설립 허가를 받고 1998년 '상락원'으로 개원하였다. 개원 당시에는 정릉동에 위치했으나 같은 해 안암동으로 시설을 이전하였고 2006년에는 지금의 명칭으로 이름을 변경하였다. 무연고 또는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의 대상자로서 양육이 불가능한 장애 아동을 대상으로 교육재활사업, 재활의료사업, 여가지원사업, 자립지원사업, 지역사회네트워크사업, 특성화사업 등의 종합적인 재활 서비스를 제공한다. 승가원 외에도 정릉동에 성북그룹홈 1·2호를 운영하며 장애 아동들의 생활 자립 및 사회 적응을 위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 성북04 마을버스
    장소
    성북04 마을버스
    성북구 동선동, 안암동, 종암동 일대를 지나는 마을버스이다. 운수사는 안암교통이며, 노선은 성신여대입구역을 시작으로 삼선동주민센터, 성북구청, 용문중·고등학교, 고려대학교, 안암역, 종암초등학교 등을 거쳐 신설동역까지 도달한 후 회차한다. 배차시간은 6분 정도이며, 운행시간은 성신여대입구역에서 출발하는 첫차가 오전 5시 20분, 막차가 밤 12시이다. 6번 마을버스가 그 전신이며 2004년 7월 1일 서울시 버스 체계 개편 때 성북04번으로 바뀌었다.
  • 6호선 안암역
    장소
    6호선 안암역
    성북구 안암동에 위치한 지하철역이다. 6호선은 서울시 제2기 지하철 건설계획에 포함되어 1994년 1월 8일 착공하여 1998년까지 완공할 계획으로 추진되었으나 IMF의 여파로 공사 기간이 연장되었다. 이에 따라 봉화산역에서 상월곡역까지의 1차 공사는 2000년 8월 7일에, 상월곡역부터 응암역까지의 2차 공사는 같은 해 12월 15일에 완료되어 개통되었다. 안암역은 2차 개통 구간에 포함되는 곳으로 2000년 12월 15일에 개통되었다. 안암동 일대는 도로가 협소하고 교통 환경이 열악했으나 지하철 6호선의 개통으로 교통 환경이 개선되었다. 안암역은 지하 3층의 규모로 연면적은 8,300.81㎡이다. 설계는 (주)건축사 사무소 시공동인 측에서 담당하였고 시공자로는 (주)쌍용건설과 (주)현대산업개발이 참여하였다. 지하 1층과 2층은 대합실과 상업 용도로 이용되며, 지하 3층에 승강장이 들어서 있다.
  • 1111 지선버스
    장소
    1111 지선버스
    성북구 일대에서 운행되는 지선버스이다. 성원여객과 한성운수에서 공동배차로 운영하며, 강북구 번동에 위치한 한성운수에서 시작하여 장위동, 월곡동, 종암동, 안암동, 보문동, 삼선동 등 성북구 일대를 지나 성북동에 위치한 심우장 부근까지 도달한 후 회차한다. 구 417번 지역순환버스가 그 전신이며, 2004년 7월 1일 서울시 버스 체계 개편 때 번호가 1111로 변경되었다. 배차간격은 8~12분, 운행시간은 첫차가 오전 4시 20분, 막차가 밤 11시 20분이다. 타 지역에서 성북동으로 이동 시 유용한 노선이다.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장소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안암로 145 (안암동5가 126-28)에 위치한 연구기관이다. 고려대학교 부설연구소로, 1957년에 설치되었다. 당시에는 '한국고전국역위원회'라는 이름으로 개소하였으나 1963년 '민족문화연구소'로 개칭되었고 시인이자 고려대학교 교수였던 조지훈이 초대 소장으로 취임하였다. 1997년 11월에 '민족문화연구원'으로 승격되고 6개의 산하연구소 및 한국학도서관·정보센터가 설치되어 현재에 이른다. 한국학 및 한국문화 연구기관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 범바위어린이공원
    장소
    범바위어린이공원
    고려대로8길 7-2(안암동2가 140-3)에 위치한 어린이공원이다. 안암동 주민센터 뒤편, 안암어린이집 옆에 있으며, 면적은 1,514㎡정도이다. 어린이공원이라는 이름에 맞게 시소와 미끄럼틀 등의 각종 놀이기구를 갖추고 있어 어린 아이들의 놀이 시설로서의 역할을 하며 농구장을 비롯하여 다양한 운동 시설들이 배치되어 있어 안암동 주민들의 휴식 공간이 되어준다. 공원 내에 화장실도 갖추고 있다.
  • 극단 날으는 자동차
    인물
    극단 날으는 자동차
    삼선동에서 활동하는 시민 뮤지컬 극단이다. 2005년 1월 8일 '즐거운 하루를 선사하자'라는 모토 아래 창단되었으며 서울 뿐만 아니라 분당과 일산에서도 극단을 운영하며 공연을 하고 있다. 본 극단의 주요 사업은 시민 뮤지컬 극단으로 어린이·청소년·대학생·성인극단 등이 있으며, 비교적 낮은 비용으로 뮤지컬 교육 및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연극놀이와 간단한 뮤지컬 교육을 통해 참여자들이 직접 작품을 제작하는 '새터민 여명학교', 노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치매예방 프로젝트인 '실버 극단',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예술교육을 진행하는 '자유시간' 극단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2022년 현재 약 150여 명의 단원이 활동하고 있으며, 보문로22길 28(안암동3가 86)에 있다가 현재의 주소인 보문로 152(삼선동5가 334)로 이전하였다.
  • 황광은
    인물
    황광은
    안암동 영암교회에서 활동한 종교인이다. 1923년 2월 25일 평안북도 용천군 양하면 시북동의 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성장하였다. 1939년, 16세의 나이로 서울에 자리를 잡은 그는 당시 삼각산에 있던 고아원인 '향린원(香隣園)'에서 생활하며 목회자의 꿈을 키웠다. 1945년 광복 이후에는 한국신학대학에 입학하여 목회자가 되기 위한 본격적인 준비를 시작하였으며 제주도의 한국보육원과 난지도의 보이스타원, 서울 YMCA와 보이스카우트 등지에서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활동을 이어갔다. 1955년부터 1960년까지는 새문안교회의 부목사로, 1960년부터 1961년까지는 대광고등학교의 교목으로 재직하였으며 1961년부터 안암동에 위치한 영암교회의 목사로 활동하였다. 1970년 7월 15일, 심장질환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 박한영
    인물
    박한영
    안암동 개운사에서 활동한 승려이다. 1870년 전라북도 전주에서 태어난 그는 19세에 출가하였으며, 1896년 전라북도 순창에 위치한 구암사를 시작으로 해인사·법주사·백양사·화엄사·범어사 등지에서 불경을 강의하였다. 1908년에는 쇠퇴한 불교를 혁신하려는 뜻을 품고 교단 혁신에 힘을 기울였으며, 1911년 해인사 주지 이회광(李晦光)이 일본 조동종(曹洞宗)과 우리나라 불교와의 연합을 꾀했을 때 한용운(韓龍雲)·성월(惺月)·진응(震應)·금봉(錦峯)등과 함께 이를 저지하였다. 1926년에는 안암동에 위치한 개운사 내 암자인 대원암에서 불교전문강원을 개설하여 많은 석학을 배출하였다. 그가 머무를 당시 개운사에는 그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우리나라 지식사회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대거 모이기도 하였다. 1931년에는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불교전문학교의 교장으로 선임되었으며 광복 이후에는 조선불교중앙총무원회의 제1대 교정으로 선출되어 불교계를 이끌다가 전라북도 정읍에 위치한 내장사에서 입적하였다.
  • 안암동 은행나무 축제
    사건
    안암동 은행나무 축제
    안암동에서 열리는 지역축제이다. 성북천 양쪽 수변에는 은행나무가 많이 있는데, 이를 안암동의 트레이드마크로 삼고 기획한 축제이다. 성북구 주최로 2007년에 시작된 이 축제는 안암동 주민센터 뒤편의 안암어린이집 바로 옆에 위치한 범바위어린이공원에서 10~11월 경에 개최되며 풍물패의 사물놀이 공연, 유명 가수의 축하무대 및 주민노래자랑, 은행 줍기 행사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2016년(제9회)까지 개최되고 축제가 열리지 않다가 3년 후인 2019년 다시 부활하였으나 그 이후로는 열리지 않고 있다.
  • 안암동 일한신궁 건축 논란
    사건
    안암동 일한신궁 건축 논란
    일제강점기로 접어들기 전, 안암동에서 '일한신궁(日韓神宮)' 건설이 추진되었던 사건이다. 1905년 일제가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며 '보호정치'를 시작하자 당시 서울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은 친일파를 종용하여 신궁을 축조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신궁건설 사업이 추진되었는데, 신궁 조성 예정지는 당시 명칭으로 '한성부 숭신방 안암동 중리'의 어좌봉(御座峰)으로 현재의 안암동1가에 속하는 지역이다. 면적은 무려 1,608평에 달할 정도로 그 규모가 매우 컸는데, 이곳은 조선 제22대 왕 정조의 후궁이던 원빈(元嬪) 홍씨의 무덤인 원빈묘가 있던 작은 언덕의 서쪽 중턱이었으며며 훗날 돈암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실시된 곳이기도 하다. 신궁은 본전(本殿)으로서 오른쪽부터 ‘단군천황(檀君天皇) 정전(正殿), 천조황(天照皇) 정전,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 정전’을 배치하고, 다음에 신전 앞뜰의 오른쪽에 이안전(移安殿)과 왼쪽에 배설청(排設廳)을 신축하고자 하였으며 전면 우측에는 찰전(札殿)과 왼쪽에 수복청(守僕廳) 그리고 정면에는 세 개의 문을 건립할 것을 계획하였다. 하지만 여러 이유로 어느 시점에 공사가 중단되어 안암동 신궁 건설은 무산되었다.
  • 장용영 본영도형 일괄 (壯勇營 本營圖形 一括) 정간 기미본
    유물
    장용영 본영도형 일괄 (壯勇營 本營圖形 一括) 정간 기미본
    고려대학교 박물관에서 소유하고 있는 건축화이다. 장용영 본영도형 일괄 (壯勇營 本營圖形 一括)은 정조 재위 시절, 친위부대였던 장용영(壯勇營)이 주둔한 청사의 본영(本營)을 그린 것으로 1799년에 그려진 채색화(도형 기미본) 1점과 1799년, 1801년에 그려진 평면도안(정간 기미본, 정간 신유본) 2점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중 도형 기미본과 정간 신유본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고 정간 기미본만 고려대학교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이 자료는 도성 안에 설치된 장용영 본영에 대한 전반적인 현황과 관청의 변화를 기록하여 왕에게 보고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정확한 축척에 기초하여 건물의 배치를 상세히 그렸으며 건축물을 정교하게 묘사하고 있기에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 고려대학교(시)
    작품
    고려대학교(시)
    1994년 오탁번이 발표한 시집 『겨울강』에 수록된 시이다. 고려대학교의 학생이자 교수였던 시인은 고려대학교 정문에 문패가 없다는 사실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시인은 안암동에 정체성처럼 자리 잡은 고려대학교를 ‘아무 빛깔 없으면서도 모든 맛을 다 지닌’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 그 집의 기억
    작품
    그 집의 기억
    시인 최성수가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교육장편소설이다. 소설은 총 48화로 한 회분이 독립적으로 완결되지만, 전체로 볼 때 같은 공간인 어느 중학교에서 이야기가 이루어지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설의 제1화는 '안암교 다리 아래 제느강은 흐르고'로 중학교 시절 작가가 포착한 안암동은 정릉천과 제기천 사이에 위치한 동네이면서, ‘제느강’이라는 별칭을 가졌던 낭만적인 공간으로 묘사된다.
  • 상수리 나무의 기억
    작품
    상수리 나무의 기억
    2014년 발표한 윤희상 시인 시집 『이미, 서로 알고 있었던 것처럼』에 수록된 시이다. 화자는 개운사 금륜전 앞에서 자칫 지나칠 수도 있는 자그마한 존재를 살펴보고 있다. 화자와 마찬가지로 상수리나무는 뜰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과 사를 살피며 그 기억을 자신의 안에 저장한다. 모든 것을 바라보는 시선 덕에 존재들은 죽어도 완전히 잊히지 않은 채로 살아갈 수 있게 된다는 따뜻한 생각을 시인은 자신이 포착한 사소한 일상을 통해 전달한다.
  • 보타사(시)
    작품
    보타사(시)
    2014년 발표된 윤희상 시인의 시집 『이미, 서로 알고 있었던 것처럼』에 수록된 시이다. 안암동에 위치한 보타사에서의 경험을 소재로 하여, 짤막한 시를 통해 조용하고 고요한 보타사의 모습과 화자가 느끼고 있는 고즈넉한 정취를 드러냈다.
  • 안암동에서
    작품
    안암동에서
    윤희상 시인의 『이미, 서로 알고 있었던 것처럼』에 수록된 시이다. 안암동이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보타사’의 주지 스님과 ‘중국음식점’의 배달원 두 인물을 비교하였다. 일반적인 시각을 초월하여 인간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을 느낄 수 있다.
  • 그 해 안암동
    작품
    그 해 안암동
    1998년 발표된 문경화 시인의 시집 『언 강물에 발을 녹인다』에 수록된 시이다. 시인은 1996년 『창작과비평』 여름호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안암동’이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한 시 ⸀그 해 안암동」에서 화자는 가을에 첫 눈이 오기를 기다리는 심리로 안암동의 풍경을 묘사했다.
  • 국수먹는 꼴뚜기 집에서
    작품
    국수먹는 꼴뚜기 집에서
    2013년 발표된 김재혁 시인의 시집 『딴생각』에 수록된 시이다. '국수 먹는 꼴뚜기 '는 고려대학교 인근에 있는 식당이다. ⸀국수 먹는 꼴뚜기 집에서」에는 가게의 익숙한 풍경 속에서 말없이 위로를 받는 시적 화자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 ‘추억은 햇살의 멜로디에 들어 있다’는 표현에서 화자는 자신이 사랑하던 사람과 함께 했던 날들의 햇살을 가게에서 느끼며 자신의 추억을 잊지 않고 기쁘게 추억한다. 흘러가는 현재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기 위한 시인의 마음이 담겨 있는 시이다. 구체적인 장소를 드러냄으로써 이 시를 읽는 독자들에게도 자신만의 특별한 공간을 생각해보게 한다.
  • 안암동 구두닦이 아저씨
    작품
    안암동 구두닦이 아저씨
    1999년 발표된 김재혁 시인의 시집 『내 사는 아름다운 동굴에 달이 진다』에 수록된 시이다. 언제나 존재하고 있어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일상 속의 대상에 관심을 기울이는 시인의 시선이 잘 드러나 있는 시이다. 안암동에서 구두닦이로 살아가는 중년 남성의 삶의 형태를 그의 직업인 구두닦이에 비유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 백원만 씨 유감
    작품
    백원만 씨 유감
    2004년 발표된 김종태 시인의 시집 『떠나온 것들의 밤길』에 수록된 시이다. ‘백원만 아저씨’는 고려대 앞 지하도에서 ‘백원만’을 외치고 다닌 인물에게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시인은 정처없는 ‘백원만 아저씨’의 존재를 ‘운동이 잦아들던’ 시대 현실과 연결 지어 풀어나간다. 90년대의 흔적들과 자신의 기억, 사람들이 점차 사라지고 있는 공간과 대비되어 유일하게 남아있는 대상인 ‘백원만 아저씨’을 보며 화자는 생각에 잠긴다.
  • 또 백원만 아저씨
    작품
    또 백원만 아저씨
    2007년 발표된 김재혁 시인의 시집 『아버지의 도장』에 수록된 시이다. ‘백원만 아저씨’는 고려대 앞 지하도에서 ‘백원만’을 외치고 다닌 인물에게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붙여준 별명으로, 저자의 시집 『내 사는 아름다운 동굴에 달이 진다』(1999)에 수록된 ⸀백원만 아저씨」에서도 이야기했던 대상이다. 이 작품에서 백원만아저씨는 변화한 세월과 바뀐 풍경 속에서도 여전히 존재하는 대상으로 묘사되어 있다.
  • 백원만 아저씨
    작품
    백원만 아저씨
    1999년 발표된 김재혁 시인의 시집 『내 사는 아름다운 동굴에 달이 진다』에 수록된 시이다. ‘백원만 아저씨’는 고려대 앞 지하도에서 ‘백원만’을 외치고 다닌 인물에게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김재혁 시인이 묘사하는 ‘백원만 아저씨’는 쓸쓸하고 외로운 정서를 깊게 내포하고 있다. 대상 자체가 그러한 속성을 가지고 있기보다는 대상을 바라보는 화자의 심리적인 상태가 이러한 정서 표현을 만들어 내며, 이를 통해 당대 젊은이로서 시인이 느끼고 있는 막막한 감정을 예측할 수 있다.
  • 여대현
    인물
    여대현
    보성전문학교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1941년 4월 보성전문학교 재학 중 일본에서 항일결사 효민회를 조직해 활동한 최홍준을 만나 일본의 민족차별에 대한 실상을 듣고 식민통치에 항거하기로 뜻을 모았다. 이들은 민족문화 향상과 실력양성에 주력하였으며, 조선어 연구를 통한 민중계몽활동을 전개하였다. 1943년 2월 성북동에 있던 여대현의 집에서 최홍준·성장환 등과 함께 독립운동 방안을 토론하며 독립의식을 길렀고, 제2차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할 것으로 판단하고 다가올 독립에 대비하였다. 항일 활동을 지속하던 중 일본 경찰에게 발각되어 1944년 1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았다. 해방 이후 1968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 고려대학교 4.18 기념탑
    장소, 유물
    고려대학교 4.18 기념탑
    1961년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민주정신을 기리며 세운 기념비이다. 탑이 세워지기 1년 전인 1960년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 3천여 명은 자유당 독재에 항거하여 학생대표의 선언문 낭독 후 국회의사당 앞에서 농성하였다. 시위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가던 학생들을 정치깡패가 습격하여 일부 학생들은 중상을 입었다. 이른바 4.18의거는 대규모의 대학생 시위이자 4월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기념비 오른쪽 하단에는 고려대학교 교수였던 조지훈 시인이 쓴 ‘자유! 너 영원한 활화산이여!’라는 제목의 비문이 있고, 왼쪽 상단에는 4.18 의거에 참여했던 학생들의 모습을 기린 부조가 있다.
  • 고려대로
    장소
    고려대로
    성북구 보문동과 안암동 일대의 도로이다. 고려대로는 성북구 보문동 166번지의 보문동사거리에서 성북구 안암동 42번지 고대앞사거리에 이르는 길로 길이는 1,150m, 폭은 15~25m이다. 원래 고려대학교 설립자 인촌 김성수의 호를 인용하여 ‘인촌로’라고 불렸으나 성북구는 친일반민족행위와 관련된 자와 관련된 도로명이 부적절하다고 판단하여 2018년 12월 ‘고려대로’로 도로명을 변경하였다. 이 길은 지하철 6호선 안암역과 보문역을 지나는 보조간선도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 6.10 민주항쟁
    사건
    6.10 민주항쟁
    1987년 6월 대통령 직선제와 민주화를 요구하면서 일어난 범국민적 민주화 운동이다. 1987년 전두환 정부가 「4‧13호헌조치」를 발표하면서 사회 각계 인사들의 비난이 이어졌다. 한편,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조직적으로 조작‧은폐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져 온 국민의 분노를 일으켰고,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는 목소리가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고려대학교 역시 마찬가지였다. 1987년 6월 10일 고려대학교에서는 2천여 명의 학생들이 참가하여 출정식을 개최한 뒤 민주광장에서 시청 앞까지 가두시위를 전개하며 6‧10 대회에 참가하였다. 한편 교수들도 민주화에 대한 연좌시위를 교내에서 전개하고, 성명을 발표해 개헌을 요구하였다. 6월 내내 이어진 항쟁의 결과, 전두환 정권은 직선제 개헌과 제반 민주화조치 시행을 약속하는 「6·29선언」을 발표하였다.
  • 유신헌법 반대 학생운동
    사건
    유신헌법 반대 학생운동
    1972년 10월 선포된 유신체제에 반대하여 일어난 학생운동이다. 1973년 서울대 문리대에서 유신 선포 이후 최초의 학생시위가 발생한 이후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동맹휴학, 시험거부 등 다양한 방법으로 계속되었다. 정부는 1974년 긴급조치 1호를 발표하였다. 같은 해 긴급조치가 해제되었으나 복역 중인 사람들에게는 적용되지 못하였고, 고려대학교 학생회는 이들의 석방을 요청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하지만 학생들이 경찰에 잡혀가는 사태가 발생하였고, 교문에서 학생들과 경찰의 투석전이 전개되었다. 시위가 계속되자 1975년 4월 정부는 긴급조치 7호를 발동하여 고려대학교의 휴교와 동교내 집회ㆍ시위금지 등을 명하였다. 민주화 운동의 기세를 꺾으려는 의도가 담긴 조치였으나 이후 대학가의 연합으로 유신체제 반대운동은 지속되었다.
  • 3선개헌 반대시위
    사건
    3선개헌 반대시위
    1969년 대통령 박정희가 3선을 목적으로 추진하였던 제6차 개헌에 반대한 민주화 운동이다. 1967년 박정희 정권은 6.8 부정선거를 통해 개헌에 필요한 의석을 확보하였다. 1969년 개헌을 위한 움직임이 본격화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한 반대 시위가 연일 전개되었다. 고려대학교 학생들도 헌정 수호를 내세우며 3선 개헌 반대 운동을 벌였다. 6월 19일 고려대학교 법대학생 7백여 명은 3선개헌 성토개회를 열었고, 28일에는 교내 배구장에서 시작된 시위가 안암동 로타리 부근까지 진출했으나 기동경찰의 최루탄 발사 등의 제지로 교내로 되돌아갔다. 결국, 정부는 휴교령을 내렸으며, 고려대학교는 조기 방학에 들어갔다. 3선개헌 반대투쟁은 학생운동을 촉발하는 동시에 민중의 관심과 연대를 확산하는 계기가 되었다.
  • 한일협정 반대운동(6.3 학생운동)
    사건
    한일협정 반대운동(6.3 학생운동)
    1964년 박정희 정권이 국외자본을 유치하기 위해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진행한 것에서 촉발된 항쟁이다. 1964년 3월 24일 시위로 고려대, 서울대, 연세대 학생들이 참여한 시위가 시발점이었다. 고려대학교 학생 1,000여 명은 교내와 안암동, 신설동 로터리 일대 등에서 시위를 벌였다. 6월 3일 시위가 확산되자, 박정희 정권은 계엄령을 선포하였고, 고려대학교는 시내 대부분 학교와 함께 무기한 휴교에 돌입하였다. 1965년 6월 22일 한일회담이 정식 조인된 후에도 회담 철회를 주장하며 반대 시위를 이어 갔지만, 무장군인이 학교에 난입하여 학생들을 구타하거나 교내 강의실 및 실험실을 파손 등의 탄압이 계속되었다. 6.3 학생운동은 비록 그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하였으나 박정희 정권에 대한 최초의 민중에 의한 반정부운동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 김왈영
    인물
    김왈영
    4.19혁명 때 희생된 민주열사이다. 1954년 4월 1일 고려대학교에 입학한 김왈영은 1960년 4월 19일 경무대 앞 시위에 참여하여 경무대 입구 바리케이드를 뚫다가 목에 총상을 입어 사망하였다. 당시 사망자 명단에는 그의 이름이 없었는데, 보도과정에서 김왈영의 왈(曰)을 일(日)로 착각해 ‘김일녕’이라고 오기했기 때문이었다. 1962년 4.19혁명 공로 건국포장 역시 ‘김일녕’이라는 이름으로 수여되었다. 그의 존재가 발견된 것은 2020년 고려대학교 박물관이 ‘4.18의거 60주년 특별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언론에 보도된 고대생 희생자의 존재를 알게 되면서였다, 이후 ‘김일녕’이라는 이름으로 전산화된 학적부의 생년월일과 사진을 국립 4·19민주묘지 안장자 기록과 비교하여 ‘김일녕’이 국립묘지의 ‘김왈영’과 동일 인물임이 확인되었다.
  • 일제강점기 학병거부 운동
    사건
    일제강점기 학병거부 운동
    1943년 일제의 강제 징병에 저항한 학도지원병 거부운동이다. 일제는 태평양전쟁 이후 학생들을 각종 노역에 동원 시켰고, 조선인 학병 해당자들은 일제의 갖은 강압과 회유에 여러 형태로 저항하였다. 보성전문학교 법과·상과 학생들은 경성제국대학 학생 등과 함께 조선총독에게 학병거부 이유서를 작성하여 보내거나, 총독 관저에서 학도병지원제와 식민정책의 부당성에 대해 의견을 내세우는 등의 학병 거부운동을 전개하였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1944년 평양사단 보병 42부대에 배속된 보성전문 상과 학생 손희용 등은 소속 부대 및 다른 부대의 학생을 규합해 탈출과 무장투쟁을 계획하였다. 이 계획은 비록 실패로 돌아갔지만, 학병으로 차출된 학생들의 지속적인 군대 이탈과 대일 투쟁 전개는 일제에게 위기의식을 안겨주었다.
  • 고려대학교-연세대학교 정기전
    사건
    고려대학교-연세대학교 정기전
    고려대학교와 연세대학교가 친선을 도모하기 위해 운동경기를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서 승부를 겨루는 행사이다. 두 학교가 공식적으로 운동경기에서 만난 것은 1925년 열린 제5회 전(全) 조선 정구대회였다. 이후 일제 강점기 대표적인 사립 전문학교인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 )와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가 자주 맞붙게 되면서 두 학교의 학생뿐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큰 화제가 되었고, 이들의 경기는 식민지라는 암울한 시대상 속에서 민족의 혼을 살리는 민족적인 경기로 인식되었다. 1945년 12월 양교 OB구락부와 조선 축구협회의 공동 주관으로 열린 축구전은 고려대와 연세대의 정기전의 시발점이 되었고, 1956년 현재의 정기전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1957년부터는 고려대가 주관시에는 고·연전으로, 연세대가 주관시에는 연·고전으로 부르기로 양교가 합의하였다.
  • 서윤복
    인물
    서윤복
    고려대학교 출신의 체육인이다. 서윤복은 고려대학교 육상부 소속으로 안암동에 있는 손기정의 자택에 합숙하며 손기정의 지도를 받았다. 1946년 5월 제1회 조선마라톤선수권대회, 같은 해 9월 제1회 전국육상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는 등 높은 성적을 거두었다. 이듬해인 1947에는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동양인 최초로 대회에서 우승하였다. 당시 그가 세운 세계 신기록은 2시간 25분 39초였다. 1948년 런던 하계 올림픽에 국가대표로 참가하였고, 이듬해에 은퇴 후 육상 지도자로서 후진을 양성했다.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남자 육상부 감독, 1988년 서울 올림픽 남자 감독 등을 역임하며 한국 스포츠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 손기정
    인물
    손기정
    평안북도 의주 출신의 육상선수이다. 1932년 양정고보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인 마라톤 훈련을 받게 되었다. 그는 1933년부터 1936년까지 13개의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였고, 이중 베를린 올림픽을 포함한 10개의 경기에서 우승하였다.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 수여 당시 꽃다발로 일장기를 가린 것과 국내 언론사에서 일장기를 말소한 사건으로 유명하기도 하다. 1937년 보성전문에 입학한 이후 보성전문 육상부에 가입하여 활동하였고, 해방 이후 안암동에 거주하며 후학을 양성하였다. 그는 자신의 집을 ‘마라톤 선수 합숙소’로 이름 붙이고 마라톤 유망주를 뽑아 훈련시켰는데 1947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한 서윤복, 1950년 보스턴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은·동을 함기용, 송길윤, 최윤칠 등이 모두 손기정에게 가르침을 받은 선수들이다.
  • 보성전문학교 체육부
    인물
    보성전문학교 체육부
    보성전문학교 체육부는 현재 고려대학교 체육위원회의 전신이다. 보성전문학교 체육부에는 축구부, 농구부, 럭비부를 비롯한 15개 운동부가 소속되어 있었는데, 당시 전교생 580명 가운데 300명이 운동부에 가입해 있을 정도로 보성전문 학생들의 생활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보성전문 체육부 소속의 여러 운동부원은 국내 경기뿐 아니라 베를린 올림픽, 일왕배 전일본 선수권 대회 등에서도 여러 차례 좋은 성적을 거두며 식민지 조선 청년들의 울분을 푸는데 일조하였다. 보성전문학교 체육부 출신의 선수들은 이후 대한민국 스포츠의 주축을 차지하게 된다.
  • 유진오
    인물
    유진오
    고려대학교 총장 등을 역임한 교육자이자 문학가·법학자·정치인이다. 1920년대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수석으로 입학해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1932년부터 보성전문학교 법과 강사로 활동하였고, 1937년에는 교수에 임용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대학교육의 근간이 되는 법령 초안을 작성했으며, 대한민국 헌법의 초안을 작성하기도 했다. 그의 헌법 초고는 현재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경성대학 법문학부 교수와 보성전문학교 교수를 겸직하다가 고려대학교의 총장을 지내기도 했다. 이 외에도 문학·법학·교육·정치 등 각 분야에서 활동하였다. 1930-1940년대 중일전쟁을 선전하거나 징병제와 지원병을 독려하는 글을 발표하고 좌담·대담·강연 등 다양한 형태로 일제의 식민정책을 옹호하고 침략전쟁을 미화하는 활동을 하여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었다.
  • 보성전문학교의 안암동 이전
    사건
    보성전문학교의 안암동 이전
    보성전문학교는 수송동을 시작으로 낙원동, 송현동으로 교사를 이전하였다. 1932년 김성수는 보성전문을 인수할 당시 새로운 부지 선정과 신교사 건립을 약속한 바 있다. 안암동의 부지가 적합하다고 판단하여 1933년 중앙학원을 통해 6만 2천여 평의 넓은 부지를 매수하였다. 송현동 교사의 부지 6백여 평에 비하면 1백여 배 넓은 면적이었다. 안암동 신교사는 최대 550명의 학생을 수용할 것을 예상하고 교장실, 사무실, 응접실, 회의실, 교실, 중강당 등으로 구성된 본관이 설계되었다. 신교사의 설계는 조선총독부에서 건축기수로 일하고 있던 박동진에 의해 이루어졌다. 1934년 새로운 교사로 이전하던 날 교수·직원·학원은 송현동 구교사에서 고별식을 갖고 행렬을 갖추어 안암동으로 이전하였다.
  • 양호기
    개인/단체 발간물
    양호기
    고려대학교 총장을 지낸 현민 유진오가 쓴 회고록이다. 1932년 부터 1966년까지 35년동안 보성전문학교와 고려대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회고한 내용이다. 유진오는 「고우회보(高友會報」에 1971년 봄부터 1972년 8월까지, 1974년 1월부터 1975년 10월까지 전후편으로 나누어 회고록을 연재하였는데, 이 글을 모아 『양호기』라는 제목으로 출판하였다. 이 책을 통해 일제지배 하의 수난, 해방 이후 좌우익의 충돌, 6.25전쟁, 4.19의거 등의 역사적 상황을 배경과 보성전문학교와 고려대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파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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