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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의 인물, 사건, 장소, 유물, 문헌, 작품 등을 유형별, 시대별, 지역별로 검색하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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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영기
    인물
    김영기
    화가이다. 1911년 서울에서 서화가인 해강 김규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 중국 화단의 거장 제백석(齊白石)을 사사하고 북경 보인대학교를 졸업하였다. 귀국 후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여 등단한 이래, 문인화적 필치에 현대적인 기법을 더하여 한국적 수묵화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였다. 특히 ‘동양화’ 대신 '한국화'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을 주장하며 한국 미술의 정체성과 주체성을 강조하였다. 『조선미술사』(1948), 『동양미술사』(1971), 『동양미술론』(1980) 등을 저술하여 미술이론가로도 활동했으며, 이화여대 홍익대 고려대 성균관대 등에서 후진 양성에 힘썼다. 돈암동 전차종점 인근 주택에 거주한 바 있으며 기와집이 어우러지는 돈암동 풍경화를 다수 제작하였다.
  • 한홍택
    인물
    한홍택
    안암동에 거주한 그래픽 디자이너이다. 동경도안전문학교에서 디자인을, 제국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였다. 귀국 후 1940년부터 유한양행에서 근무하며 광고 제작과 디자인을 담당했다. 1946년 ‘대한산업미술가협회’의 전신인 ‘조선산업미술가협회’를 결성하고 1975년까지 회장직을 지냈으며, 홍익대 공예과와 덕성여대 응용미술과 교수를 역임하였다. 그의 디자인 작품의 특징으로는 회화성, 한국적 소재 등을 꼽을 수 있다. 개인전을 꾸준히 개최하며 디자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확장한 그는 한국 그래픽 디자인사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 김만형
    인물
    김만형
    화가이다. 1916년 개성에서 태어나 일본 제국미술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였다. 1937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하면서 등단한 그는 색채와 질감을 강조한 그림들을 주로 그렸다. 안암동에 거주한 바 있으며, 조선미술동맹에서 활동을 하다가 한국전쟁 중에 월북했다. 손응성 등과 함께 친일미술단체인 단광회(丹光會)의 일원으로,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 이인성
    인물
    이인성
    1912년 대구에서 출생한 서양화가이다. 1929년 제8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처음 입선한 후, 수채화와 유화 작품으로 입선과 특선을 거듭하였다. 1931년 일본으로 건너가 1935년까지 다이헤이요미술학교에서 유학하였다. 1934년 9월 7일 동아일보의 실린 이인성의 글 '향토를 찾아서'를 보면 일본에서 학교를 다니던 그가 여름방학을 맞아 잠시 귀국하여 서울을 찾았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북한산 일대를 돌며 스케치를 했던 그는 현 정릉동의 아리랑고개를 보고 「아리랑고개」라는 작품을 남기기도 하였다. 또한 1947년 9월 12일 경향신문 기사를 통해 성북회화연구소 설립 당시 지도교사로 활동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손응성
    인물
    손응성
    화가이다. 강원도 평강 출생으로 배재고등보통학교(현 배재대학교) 재학 시절인 1934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정물화를 입상시키며 등단하였다. 일본 다이헤이요[太平洋] 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공부하였다. 귀국 후, 1943년 2월 친일미술단체인 단광회(丹光會)에 가입해, 조선징병제시행기념 집단 창작에 참여하였다. 1944년 9월에는 첫 개인전을 가지며 양화계의 신예작가로 부상하였다. 해방 이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전임강사를 지냈으며, 조선미술문화협회와 목우회에 참여했다. 손응성은 1948년부터 1979년 사망할 때까지 약 30여 년간 보문동 한옥에서 살면서 작품활동을 하였으며, 사망 후 위패는 보문사에 안치되었다. 1974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미술상을 받았고, 친일행적으로 인해 2008년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 황염수
    인물
    황염수
    화가이다. 황염수는 1917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1934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고, 평양에서 이중섭, 한묵 등과 6인전을 열었다. 이후 일본에 유학하여 박고석, 이중섭과 함께 공부하였고, 한국전쟁 때에 월남하였다. 1957년 한묵, 천경자, 박고석과 모던아트협회를 창립하고 창립동인전에 참여하였다. 돈암동 집에 아틀리에를 두고 작품 활동을 하였는데, 1960년대 우연히 간 장미원에서 장미에 매혹된 뒤로 40여 년 동안 장미를 소재로 한 작품을 발표하여 ‘장미의 화가’라는 애칭으로 널리 알려졌다.
  • 표승현
    인물
    표승현
    화가이다. 1929년 황해도에서 태어났지만, 한국전쟁 때 월남하여 춘천에 정착했다가 서울대학교 회화과에서 공부하였다. 1957년 국전에서 작품 「석교」가 특선함으로써 미술계에 등단했고, 성신여자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다. 1960년대에 국내 화단에 들어온 추상표현주의 흐름은 표승현에게도 영향을 미쳐 본격적인 추상의 조형 형태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980년대에는 투병생활을 하게 되면서 신앙을 통한 새로운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구도하는 듯한 작품세계를 보이며, 서양의 추상과는 달리 인간과 영성에 대해 천착하면서 독특한 종교적 ‘도’의 작품세계를 추구해 나갔다. 대표작은 「음양」, 「적(跡)」, 「적송」 등이 있다.
  • 정탁영
    인물
    정탁영
    동양화가이다. 1937년 횡성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하고, 모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면서 작품활동을 활발히 하였다. 1970년대 성북동으로 이사하였는데, 마당에서 30여 종의 야생화를 가꾸고, 큰 매화나무에서 매실을 수확해 이웃들에게 나눠주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1980년 들어 여주의 산자락에 화실을 두고 작업을 이어갔는데, 1990년대 「잊혀진 것들」과 2000년대 「영겁 속에서」 시리즈를 통해 수묵 판화의 번짐 기법과 투명함이 더해진 독특한 수묵화의 세계를 만들어 냈다. 2000년대 시도한 칼 그림 드로잉 작품은 두꺼운 마분지를 칼로 섬세하게 오려내 무용수들의 움직임을 담아낸 것이다. 2010년 집과 화실을 경기도 여주로 옮기고 작품 활동을 이어가다 세상을 떠났다.
  • 전성우
    인물
    전성우
    성북동에서 활동했던 화가이다. 호는 우송(雨松)으로 간송 전형필의 장남이다. 1934년 서울에서 출생하였고, 어릴 때부터 보화각(현 간송미술관)을 찾는 예술가들을 통해 그림을 보는 안목과 지식을 익히고 교육받았다. 서울대학교 미대에 입학했다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현대미술을 접하고 추상화의 세계에 빠져들어, 해방 후 1세대 추상화가가 되었다. 부친의 사망을 계기로 귀국하여 1966년 전형필의 지인들과 함께 한국민족미술연구소를 설립하고 보화각을 간송미술관으로 새롭게 개편시켰다. 서울대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의 교수를 역임하고, 보성고등학교 교장을 맡기도 하였다. 퇴직 후에는 미국 유학 시절부터 주제로 삼았던 「만다라」를 이어 「청화만다라」 연작을 발표하였고, 국내외에서 많은 개인전과 초대전을 하였다.
  • 임송희
    인물
    임송희
    동양화가이다. 한국 산수화의 현대화에 있어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그는 눈에 보이는 자연의 사실적 모습과 눈에 보이지 않는 자연의 기운을 조화롭게 융합시킨 산수화를 통해 독자적 예술세계를 구축했다. 1978년 성북동에 집을 짓고 당호를 '취석헌(醉石軒)'이라 붙였다. '돌이 좋아 그 기운에 취했다'는 의미이다. 마당 끝에 커다랗게 누워 있는 자연석에는 '취석(醉石)' 두 글자가 새겨져 있다. 대학에서 은퇴한 뒤 작업에 매진하며 실경산수, 파묵, 문인화, 추상화 등 다양한 분야의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 이쾌대
    인물
    이쾌대
    서양화가이다. 휘문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이던 1933년 일본의 제국미술학교로 유학하였다. 1938년 도쿄에서 열린 제25회 이과전(二科展)에 〈운명〉을 출품해 입선한 이후 3년 연속 입선하였다. 1941년 도쿄에서 이중섭, 진환 등과 신미술가협회를 조직하고, 1944년까지 도쿄와 서울에서 동인전을 가졌다. 이시기 그는 인물상에 주력하며 표현주의적 수법으로 인물의 개성을 강하게 포착해냈다. 해방 직후에는 어지러운 사회상과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사람들의 희망을 역동적으로 그려냈다. 1946년 봄부터 성북회화연구소(현 성북구 보문로39길 34)를 창립하여 학생들을 가르쳤고, 1948년 명륜동으로 이사했다. 동소문동에 있던 연구소는 이쾌대의 사재로 임대한 40평의 공간이었다. 한국전쟁 발발 이후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에 강제부역을 하다가 연합군의 서울 수복후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갇혔다. 1953년 남북 포로교환때 자의로 북한으로 넘어간 후 조선미술가 동맹 소속 화가로 활동하였다. 이쾌대는 한국미술사에 있어서 한국적 전통을 서양화폭에 담으려고 시도한 화가이자, 한국 현실주의 미술의 선구자로 평가되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군상〉, 〈걸인〉, 〈송아지〉 등이 있다.
  • 이규선
    인물
    이규선
    동양화가이다. 수묵과 담채, 전통적인 동양의 종이와 기법을 토대로 추상화풍의 한국화를 개척하였다. 작품초기에는 강렬한 색채와 기하학적 구조를 보였으나, 후기에는 추상수묵화에 집중하였다. 성북동은 젊은 시절을 보낸 공간이다. 서울대학교 화우들이 모여 있는 성북동에서 서세옥, 송영방, 신영상, 임송희 등과 이웃하였다. 대장암 투병 중에 죽음을 경험하며 얻은 영감으로 마음의 창문이란 「시창청공」, 서재의 창문이란 「서창청공」 시리즈를 발표했다.
  • 윤중식
    인물
    윤중식
    서양화가이다. 1931년 숭실중학교 재학 당시 제2회 녹향회(綠鄕會) 공모전과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면서 화단에 진출하였다. 일본 도쿄제국 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배우고, 1941년에 귀국하여 평북 선천 보성여자고등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쳤다. 1953년 제2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 특선을 수상한 이래 서양화단의 중진으로 자리잡아갔고 1970년부터 1977년까지 홍익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다. 한국전쟁으로 고향과 가족을 잃은 뒤 평생 고향을 상징하는 소재인 저녁노을, 비둘기, 돛단배, 시골풍경을 작품에 담았다. 1963년 성북동으로 이사하여 마을 풍경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화실에서 〈교회와 비둘기〉, 〈귀로〉, 〈성북동 풍경〉 등의 작품을 창작했다. 성북구립미술관에서 100세 기념전을 연 뒤 같은 해 성북동 집에서 타계하였다.
  • 신영상
    인물
    신영상
    전통 수묵을 현대화하는 작업을 해 온 화가이다. 해, 달, 별, 구름과 같이 우주와 자연의 질서와 흐름을 담은 「조(潮)」, 「문살」, 「율(律)」 등은 비구상적 추상화를 표상해 온 그의 작품들이다. 스승 서세옥과 서울대 동료들과 함께 1970년대 성북동에 자리를 잡았는데, 마당에는 아이들이 태어날 때마다 기념으로 목련과 후박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서울대에서 후학들을 양성하였고, 퇴임 이후에는 성북동 자택의 화실에서 작품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 송영방
    인물
    송영방
    동양화가이다. 서울대학교에서 우리나라 화단을 이끄는 노수현, 장우성, 서세옥 등에게 가르침을 받고, 서세옥을 중심으로 결성된 ‘묵림회’와 동문들이 모여 만든 ‘한국화회’에 참여한다. 『새벗』, 『새소년』과 같은 아동지와 신문연재소설의 삽화, 문인들의 책 표지화를 그리기도 했다. 1984년에 첫 개인전을 연 이후 꾸준히 작품활동을 이어나갔고, 국전이나 여러 미술제의 심사위원을 맡거나 동국대 미술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하기도 하였다. 대표작으로는 「완당선생 적거도」, 「사미승」, 「승무도」 등이 있다. 그는 1960년대 중반 성북동에 터를 잡았는데 돌과 매화를 아주 좋아한다는 뜻으로 집에 ‘매석취호(梅石醉豪)’라는 당호를 붙였다.
  • 서세옥
    인물
    서세옥
    동양화가이다. 1950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를 제1회로 졸업한 그는 동양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가 가운데 가장 혁신적이고 핵심적인 인물로 평가된다. 1960년 ‘묵림회(墨林會)’를 창립하였고 전통수묵 기법을 현대회화에 도입해 한국화의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데 중심 역할을 하였다. 1973년에는 소나무 숲이었던 성북동 언덕에 창덕궁 연경당을 본 뜬 열네 칸 사랑채를 지었다. 뒤편에는 화실을 따로 두고 다양한 인간 군상을 서예 필법으로 그린 <인간시리즈>, <군상>, <춤추는 사람들> 등 작품을 발표했다. 서세옥은 지역 문화예술 발전에도 많은 공헌을 하였다. 1978년 성북동에 사는 문화예술인들과 함께 성북장학회를 조직하여 작품을 팔아 지역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하였다. 또, 2009년 성북구립미술관 건립에 힘을 보태면서 명예관장으로 위촉되었고, 그의 사후 유족들은 서세옥의 작품 2,300점과 미술 컬렉션 990여 점을 성북구에 기증하였다.
  • 변종하
    인물
    변종하
    서양화가이다. 대구 계성중학교 재학시절 서진달을 만나 서양화의 기초를 배웠다. 1942년 일본군 해군 하사관으로 뽑히자 만주로 피신 후 서진달의 추천으로 만주 신경시립미술원 서양화과에 편입하였다. 1956년 제4회 국전에서 〈포푸라〉로 부통령상을 수상하는 등 1954년부터 1957년까지 연속 특선을 하며 추천작가가 되어 미술계에서 입지를 다졌다. 1960년 프랑스로 건너가 공부하였는데 이 시기의 대표적 작품은 일그러진 인물상을 해학적으로 표현한 〈우화〉와 〈돈키호테〉 등이다. 성북동으로 들어온 이후인 1980년대에는 ‘서정적 풍경’을 주제로 작품 활동을 하였다. 성북동 330-48번지 집의 2층에 화실을 두었고, 꽃, 새, 나무, 달, 잠자리 등을 소재 삼아 간결하고 소박하게 묘사하여 주목을 받았다. 그의 집은 생전에 큰 돌거북이 있는 집이자 성북동 구석에 있는 집이라고 해서 ‘구석당’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 변관식
    인물
    변관식
    동양화가이다. 1923년 서화미술원 출신의 이용우, 노수현, 이상범 등과 동연사(同硏社)라는 서화단체를 조직하고 전통회화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려고 하였으나 본격적인 활동을 하지 못한 채 해체되고 말았다. 1925년 이당 김은호와 함께 일본 도쿄로 건너가 새로운 동양화풍을 익혔다. 1937년부터는 금강산을 비롯한 전국을 돌아다니며 실경을 직접 사생하면서 새로운 화풍에 심혈을 기울였다. 1954년 새로 터를 잡았던 ㄷ자형 돈암동 한옥 당호를 ‘돈암산방’이라 이름 짓고 한편에 위치한 화실에서 고유 기법인 ‘소정 양식’을 완성했다. 말년에는 정릉골짜기에 있는 대성사에 머물며 그림을 그려 1975년 회고전을 개최했고, 이듬해 돈암동 집에서 타계하였다.
  • 박래현
    인물
    박래현
    동양화가이다. 일본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초기에는 사실묘사를 기초로 한 화조, 인물, 산수 등을 그렸으나 1950년대부터 동양화의 전통적 관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조형실험을 전개하였다. 운보 김기창과 결혼한 후 1954년 성북동 55-1번지(현 운우미술관)에 집을 마련하였다. 1962년에는 성북동 집에 30여 평인 화실을 짓고 작품 활동에 전념하며, 10여 차례의 부부전과 개인전을 가졌다. 1966~1967년 성신여자사범대학(현 성신여자대학교)의 교수를 역임하였다. 19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중반까지 판화 수업 등으로 뉴욕 등에서도 활동하였다. 1976년 성북동 자택에서 타계하였다. 작품으로 「부엉이」(1953), 「노점」(1956), 「작품 19」(1965) 등이 있다.
  • 박고석
    인물
    박고석
    화가이다. 일본대학 예술학부를 졸업하였다. 1955년 정릉동에 자리 잡고 서라벌예대와 홍익대에 출강하였다. 박경리, 천승세 등 작가들의 신문 연재소설에 삽화를 그리기도 하였다. 돈암동 전차 종점 근처에 작업실을 두고 북한산, 도봉산, 설악산, 지리산을 다니며 산을 주제로 한 작품을 제작하여 ‘산의 화가’라고도 불리웠다. 1978년 정릉동에서 동소문동으로 이사하고, 1983년에는 처남인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하여 지은 명륜동 집 아틀리에에서 활동을 이어갔다. 작품으로는 〈범일동 풍경〉(1951), 〈가족〉(1953), 〈외설악〉(1981) 등이 있다.
  • 김환기
    인물
    김환기
    한국 추상미술의 1세대 화가이다. 1933년 동경 니혼대학 예술과 미술부에서 공부하고, 1937년 귀국 이후 ‘신사실파’를 조직하여 모더니즘 운동을 주도하였다. 자연을 통하여 한국적인 감성을 담고자 노력했던 그는 항아리, 달, 별, 학, 구름, 밤하늘 등 문학적이고 음악적인 소재를 다루었다. 1944년 김향안과 결혼하여 김용준의 ‘노시산방’을 이어받아 자신의 호와 아내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을 따 ‘수향산방’이라 이름 붙였다. 1948년 종로구로 이사하였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성북동으로 돌아와 집을 마련했다. 그의 수필 「산방기」에는 이곳에서의 생활과 성북동에 대한 애정이 잘 나타나 있다. 현재 ‘수향산방’은 성북동 274-1번지 수월암 부근이며, 두 번째 집은 성북동 32-1번지 부근으로 추정되고 있다.
  • 김종하
    인물
    김종하
    초현실주의 화풍을 개척한 화가이다. 1932년 최연소로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여 주목을 받으며 화단에 데뷔했으며, 일본 도쿄제국 미술대학을 졸업했다. 1956년 우리나라 최초의 상설화랑인 반도화랑이 개관할 당시 ‘김종하, 박수근’ 2인 전시를 개최하였다. 동소문동과 보문동 일대에서 생활하며 고등학교 미술교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1964년에는 삼선교에 홈아트연구실을 열어 생활미술을 가르치기도 했다. 직접 가봉한 옷으로 국내에서 처음으로 패션쇼를 열었고 디자이너 앙드레 김이 그의 제자이다. 2002년 생존화가로는 최초로 정부로부터 문화훈장을 받았다. 말년까지 자연과 여인을 소재로 한 환상적인 누드연작을 선보였다.
  • 김용준
    인물
    김용준
    한국미술사학자, 화가, 평론가, 수필가이다. 1920년 중앙 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자 통학을 위해 성북동으로 이사하면서 이곳과 인연을 맺었다. 도쿄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였으나 오원 장승업의 병풍을 보고 동양화로 전향하였다고 한다. 1934년 노시산방(성북동 274-1)로 이사하여 이태준 등 문인들과 활발한 교류를 하였다. 1944년 노시산방은 김환기·김향안 부부에게 넘기고 의정부로 이사하였다. 1949년 출간한 『조선미술대요』는 한국의 미술사를 다루면서 대화하듯이 쉽게 읽히도록 구어체를 사용하여 저술하였다. 수필로는 1948년에 출간한 『근원수필』이 있다. 6.25 전쟁 이후 9.28 서울수복 때 월북하였다.
  • 김성환
    인물
    김성환
    만화가, 화가이다. 1955년부터 신문에서 4컷 시사만화인 〈고바우영감〉을 연재하면서 현대사의 크고 작은 사건들을 담아낸 현대사의 산증인이다. 한국전쟁 때 정릉동 집 다락에 석 달 가까이 숨어 지내며 전쟁의 참상을 스케치했고, 인물캐릭터 200여개를 만들었다. 〈고바우영감〉은 1950년부터 『사병만화』·『만화신문』 등의 기관지와 『월간희망』 등에 수록하다가 1955년부터 『동아일보』에서 장기연재하였다. 이후 『조선일보』·『문화일보』 등을 거치며 자리를 옮기다 2000년 9월 끝맺는다. 〈고바우영감〉은 14,139회에 걸쳐 연재한 한국 최장수의 시사만화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13년 생존작가의 작품으로는 최초로 원화가 등록문화재 제538호로 지정됐다. 박수근 화백, 박고석 화백을 이웃으로 두고 명동 모나리자 다방에서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정릉 입구 오두막 선술집에서 들러 목을 축이곤 했다는 것이 그의 회상이다.
  • 김만희
    인물, 유물
    김만희
    석관동에 거주했던 서울특별시무형문화재 제18호 민화장 기능보유자이다. 민화란 일상생활과 풍습을 그린 실용적 그림을 말하며 이런 민화를 그리는 사람을 민화장이라 한다. 민화는 한국인의 사상과 신앙, 생활에 관련되는 다양한 소재를 다양한 화법을 통해 그림으로 표현함으로써, 친근한 생활 속의 낙으로 자리잡아 오랫동안 보존되어왔다. 김만희는 1968년부터 민속자료를 수집하고 민화의 작화에 착수한 이래 한국전통미술인회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며 한국 민화의 전통을 계승하였다. 그는 민화장 기능보유자로서 1996년 12월 31일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17호로 지정되었으며, 2017년 4월 13일에 명예보유자로 인정받았다. 성북구 화랑로48길 16번에 거주하였다.
  • 한묵
    인물
    한묵
    화가이다. 본명은 한백유이다. 1914년 서울에서 태어났고 중국과 일본에서 서양화를 공부하였다. 1944년 귀국해서 강원도 고성에 머물 때 이중섭과 교유하였고, 한국전쟁 시기에는 부산으로 피난가서 박고석, 황염수 등과 화단활동을 하였다. 이후 서울로 이주하여 정릉동에 자리잡고 홍익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모던아트협회 창립을 주도하였다. 1961년에는 안정된 생활을 버리고 프랑스로 떠나 작가로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추상미술을 개척한 1세대 작가로서, 이중섭, 김환기, 유영국 등과 함께 현대미술 태동기에 서구 모더니즘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개척한 한국 미술사의 산 증인이다. 한국과 프랑스를 오가면서 전시회를 열었고, 2013년에는 프랑스에서 100세 기념전시회도 개최하였다. 대표작으로 「나선」, 「공간」, 「번개탑」 등이 있다.
  • 장우성
    인물
    장우성
    동양화가이다. 1936년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연구단체인 ‘후소회(後素會)’를 김기창 등과 함께 만들었고, 이후 잇따라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면서 화단의 주목을 받았다. 해방 이후 삼선교 언덕배기에 살다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이 설립되면서 동양화 교수가 되어 서울대 관사로 들어갔다. 1963년 미국 워싱턴에 동양예술학교를 설립하고 동양미술을 가르쳤으며 이듬해 개인전을 열기도 하였다. 1966년 귀국하여 삼선동 4가 45번지에 ㅁ자 구조의 단층집을 마련하여 살다가, 1971년 지역개발로 인해 이사하였다. 주요작품으로는 「이충무공 영정」, 「성모자상」, 「김유신장군 초상화」, 「백두산 천지」 등이 있다. 시(詩)·서(書)·화(畵)를 온전히 갖춘 현대화단의 마지막 문인화가로 평가받는다.
  • 윤용구
    인물
    윤용구
    조선시대 문신이자 서화가이다. 덕온공주와 윤의선 사이에 후사가 없어 양자로 들어왔다. 고종 8년(1871) 직장(直長)으로서 문과에 급제한 후 벼슬이 예조·이조판서에 이르렀다. 1895년 을미사변 이후로 법부·탁지부·내부 등의 대신으로 10여 회 임명받았지만 모두 거절하고 장위산 밑에 은거하며 ‘장위산인(獐位山人)’이라 자호하였다. 일제가 남작 작위를 수여했으나 거절하고, 두문불출 세사를 멀리하였다. 글씨는 해서·행서를 많이 썼으며 그림은 난과 대를 잘 그렸다. 성북구 장위동의 농토는 대부분이 윤씨 일가의 소유였는데 1960년경부터 윤씨 일가에서 매도하고 또 개척되어 현재는 주택가로 밀집되었다. 그가 살았던 ‘장위동 김진흥 가옥’은 1977년 3월 17일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 제25호에 지정되었다.
  • 이중섭
    인물
    이중섭
    정릉동에 거주한 화가이다. 오산고등보통학교와 일본 분카학원[文化學院] 미술과에서 공부하였다. 일본 화단에서 추상미술을 하는 화가들의 모임인 자유미술가협회 회원으로 김환기, 유영국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6.25전쟁 때 부산, 제주도로 피난을 다니며 서양화 단체인 ‘기조전(其潮展)’ 등에 참여하였다. 이 시기부터 캔버스나 물감을 구하지 못하면 송곳이나 연필로 담뱃갑에 붙어 있는 은박지에 그림을 그렸다. 전쟁 후 서울로 올라와 개인전을 열고 작품 활동을 계속하였다. 하지만 영양부족과 신경쇠약 증세로 정신병원에 입원하였고, 돈암동에 있던 성베드로병원에 옮겨졌다. 병원을 나와 잠시 근처 정릉동에 살던 한묵의 집에 머물다가 세상을 떠났다. 대표작으로 〈흰소〉, 〈투계〉, 〈사내와 아이들〉 등이 있다.
  • 장승업
    인물
    장승업
    화가이다. 김홍도, 안견과 함께 조선시대 3대 화가로 꼽힌다. 인물화와 기명절지(器皿折枝, 일종의 정물그림), 화조화(花鳥畵)를 잘 그렸으며, 근대화풍을 받아들인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장승업이 일구어낸 ‘오원양식’은 문인산수화풍과 남종화풍, 일격화풍을 모두 계승하는 한편, 이를 보다 호방하게 구사하면서 기이하고도 환상적 경향을 새롭게 수용했다는 평을 받는다. 장승업이 지내던 작은 초가집이 성북동에 있었는데, 현재 성북치안센터 뒤쪽의 집들이 들어선 곳이다. 화가 서세옥이 20대 시절 그곳을 찾았을 때는 그 초가집이 그대로 남아있었다고 한다. 장승업의 제자들도 스승을 따라 성북동 지역을 출입하였는데, 장승업의 직계제자인 조석진, 안중식의 뒤를 이른 근원 김용준도 ‘노시산방’이라는 이름을 붙인 성북동 집에서 살았다.
  • 오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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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윤
    판화가이다. 소설가 오영수의 장남으로 부산에서 태어났다. 『현대문학』의 초대 편집장을 맡은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올라와 1957년 돈암동으로 이사했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에 다니면서 김윤수, 김지하, 오경환 등과 사회 비판과 민중 운동에 대한 생각을 키웠다. 1976년 수유동에 작업실을 열고 민중 문화나 암울한 세태를 향한 저항적 메시지를 담은 작품을 만들었으며, 현실과 발언 동인전에 작품을 꾸준히 출품하며 민중미술 운동에 참여하였다. 1983년까지는 거의 흑백 목판화로 일관하였으나 1984년부터는 간결한 장식적 색상을 도입한 작업으로 표현 이미지를 새롭게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1985년에는 대형 걸개그림인 「통일대원도」를 제작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지병인 간경화가 악화되어 요절하였다.
  • 박세원
    인물
    박세원
    화가이다. 서울대 미술대학교에서 심산 노수현을 사사, 화맥을 계승하였다. 노수현은 자신의 뒤를 잇는다는 의미에서 심경(心耕)이란 호를 제자인 박세원 화백에게 주었다. 중국 남종화와 북종화를 절충한 양식의 산수화의 세계를 표현한 박세원은 실경산수와 이상경산수화의 특징을 종합시킨 것으로 평가받는다. 원근법과 산뜻한 채색법, 안개를 이용한 합리적인 공간을 표현해 전통을 따르면서도 현대적 느낌의 산수화를 그려냈다. 1954년부터 30여 년간 모교에서 교수를 지내며 미술행정가로 해방 이후 화단의 중추 역할을 하였고, 1970년에는 서울가톨릭미술가회가 창립되면서 성(聖)미술 연구발표 활동에 참여했다. 성북구 정릉2동 206-31번지에 거주하였으며, 1999년 7월 14일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하였다.
  • 김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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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기창
    화가이다. 승동보통학교에 입학한 후 병으로 청각을 잃었다. 이후 이당 김은호의 제자로 들어가 그림을 배웠고, 1931년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해 첫 입선을 하였다. 1946년 우향 박래향과 결혼하였다.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군산으로 피난을 갔다가 1954년에 서울로 돌아와 성북구 성북동 55-1에 자리를 잡게 된다. 1962년에는 성북동 집에 30여 평의 화실을 짓고 1971년까지 다양한 작품활동을 하였다. 민화의 전통에서 영감을 받아 현대적으로 해석하면서 독자적 예술 세계를 완성하였다. 그러나 일제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작품을 출품하고, 또 강제 징집을 고무하는 시화 연재물 「님의 부르심을 받고」의 삽화를 그리는 등 적극적인 친일행위를 한 경력으로 인해 2009년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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