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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의 인물, 사건, 장소, 유물, 문헌, 작품 등을 유형별, 시대별, 지역별로 검색하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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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111 지선버스
    장소
    1111 지선버스
    성북구 일대에서 운행되는 지선버스이다. 성원여객과 한성운수에서 공동배차로 운영하며, 강북구 번동에 위치한 한성운수에서 시작하여 장위동, 월곡동, 종암동, 안암동, 보문동, 삼선동 등 성북구 일대를 지나 성북동에 위치한 심우장 부근까지 도달한 후 회차한다. 구 417번 지역순환버스가 그 전신이며, 2004년 7월 1일 서울시 버스 체계 개편 때 번호가 1111로 변경되었다. 배차간격은 8~12분, 운행시간은 첫차가 오전 4시 20분, 막차가 밤 11시 20분이다. 타 지역에서 성북동으로 이동 시 유용한 노선이다.
  • 염인수
    인물
    염인수
    소설가이다. 1912년생으로, 동경에서 유학을 마치고 대전에서 문학운동을 주도했다. 한국전쟁 발발 이후 문학가동맹에서 이념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대전형무소에 체포되었다. 그 이후 대전을 떠나 서울, 군산, 익산 등을 떠돌며 도시의 임금노동자로 살게 되지만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장위고개」는 장위동 건설 현장의 노동자로 살았던 5년여의 기간 중 1968년 한 해를 일기 형식으로 남긴 작품이다. 그 밖에 단편소설 「고구마」(1946), 「시험」(1947), 장편소설 『깊은 강은 흐른다』(1989), 수필집 『남산일기』(1991), 『정』(2003) 등을 발표했다.
  • 이춘명
    인물
    이춘명
    성북구에서 20년 이상 거주하며 시, 동화, 신문 칼럼을 쓰는 작가이다. '시산문(詩散門)' 회원들과 함께 펴낸 시집 『풀씨 하나가 피운 꽃』(2020)을 통해 석관동, 종암동, 장위동 등 자신이 거주했거나 거주 중인 성북구에서의 삶을 담은 시 여러 편을 발표하였다. 한국문인협회 회원이자 어린이 도서 연구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 장위동 화단
    작품
    장위동 화단
    네이버 문학카페 <시산문(詩散門)> 회원들의 시를 모아서 펴낸 시집 『풀씨 하나가 피운 꽃』에 수록되었다. 지명을 소재로 쓴 시들을 엮은 이 시집에서 이춘명 시인은 과거에 거주했던 석관동과 종암동, 그리고 현재 살고 있는 장위동 등 성북구에서의 삶을 노래한다. 시 「장위동 화단」은 장위동에 거주하는 평범한 이웃들의 따뜻하고 활기찬 이야기를 담았다.
  • 장위고개
    작품
    장위고개
    1983년 발행된 소설집 『장위고개』에 수록된 소설이다. 염인수는 동경 유학까지 다녀온 지식인으로 대전의 문학운동을 주도했으나 한국전쟁 발발이후 사상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대전형무소에 체포되었다. 그 이후 염인수는 대전을 떠나 이곳저곳을 떠돌며, 도시의 임금노동자로 살게 된다. 이 작품은 작가 염인수가 장위동 공사현장에서 노동을 했던 5년여의 기간 중 1968년 한 해를 일기형식으로 기록한 것이다. 날씨, 기온, 수입, 집안 대소사 등 당시 작가가 겪은 일상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어, 당시 가난한 도시 노동자의 일상을 엿볼 수 있다. 일기 중간중간에 장위 공사장을 가기위해 장위고개를 오가며 느끼는 감정을 시로 표현하였다.
  • 장위마을
    장소
    장위마을
    서울시 성북구 장위동 232-17번지(318,415㎡)로 1960년대 말~1970년대 초 서울 동북부지역의 주택지 조성사업을 통하여 형성된 전형적인 주거지역이다. 2005년 장위 재정비촉진지구(장위 뉴타운) 지정 이후 2014년 11월 해체되기까지 약10년간 물리적, 사회적 쇠퇴가 진행되어 노후불량 밀집지역에 대한 새로운 도시재생 모델 제시가 필요했으며, 2015년 1월 서울형 도시재생 시범사업에 선정되어 다양한 사업 및 주민공동체 활성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 유봉영 집터
    장소
    유봉영 집터
    장위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 유봉영의 집터 추정 장소이다.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따르면 유보영의 주소지는 '서울 성북(城北) 장위(長位) 219'이다. 현재 북서울꿈의숲 맞은 편의 언덕에 위치한 장소이다.
  • 이윤장 집터
    장소
    이윤장 집터
    장위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 이윤장의 집터이다.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따르면 이윤장의 주소지는 '서울 성북(城北) 장위(長位) 74-54'이다. 돌곶이역에서 북서울꿈의숲으로 가는 대로의 사거리 모서리에 위치해 있다. 현재 이윤장의 집터는 재개발구역으로 지정되어 공사가 진행 중이다.
  • 장기영 집터
    장소
    장기영 집터
    장위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 장기영의 집터이다.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따르면 장기영의 주소지는 '서울 성북(城北) 장위(長位) 246-396'로 월곡산 아래의 높은 언덕 주택가 끝에 위치해있다. 월곡초등학교 뒤편이다. 현재 오래된 단독주택이 건축되어 있다.
  • 정재용 집터
    장소
    정재용 집터
    장위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 정재용의 집터로 추정되는 장소이다. 1919년 3.1운동 당시 파고다공원 팔각정 단상에 올라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정재용은 체포되어 2년 6개월 간 옥고를 치뤘다. 그는 1976년 12월 31일 성북구 장위동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하였다. 자택의 주소는 동아일보에서는 장위동 219-100번지, 경향신문에서는 장위동 219-195번지로 보도하였다. 두 장소를 찾아가 사진 촬영하였다.
  • 장위동 국민주택단지
    장소
    장위동 국민주택단지
    1962년부터 성북구 장위동 일대에 형성된 주택단지이다. 국민주택은 정부시책으로 산업부흥국채발행기금 또는 귀속재산처리적금 중 주택자금융자에 의해 건설하여 분양 또는 임대하는 주택으로, 단독형으로 조성되었다. 대한주택공사(1962년 설립)가 발행한 『대한주택공사 주택단지총람(1954-1970)』을 보면 방이 두 개 이상이며, 욕실의 설치와 화장실을 실내로 들여온 것이 국민주택의 주된 특징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부엌은 재래식이어서 거실과 연결되지 않고 별도의 실(室)로 구성되었다. 국민주택단지 조성 지역에서 많은 건축물이 다세대나 원룸형으로 바뀌고 있으나, 아직까지 단층 주택으로 외벽과 지붕을 개량하면서 주거기능을 지속적으로 이어나가고 있는 곳도 발견할 수 있다.
  • 장위동 동방주택단지
    장소
    장위동 동방주택단지
    1960년대 동방생명보험 주식회사(현 삼성생명)이 장위동에 조성한 주택단지이다. 성북구의 동방주택단지는 정릉동과 장위동에 건설되었는데 장위동이 정릉동보다 4.6배 가까이 규모가 컸다. 장위동 동방주택단지의 정확한 구역 경계를 확인하기는 어려우나, 1967년 동방생명보험주식회사에서 발행한 『동방생명 10년사』에 따르면 장위동 동방주택단지의 총면적이 162,170평에 이르렀다고 한다. 장위1동 주민센터가 위치한 장위로의 북쪽 구역이 동방주택단지라고 볼 수 있으며, 이 구역에 있는 ‘동방어린이공원’과 ‘동방주택’ 정류장을 통해서도 그 범위를 짐작할 수 있다. 1970년대 초에 건설되어 현재까지 남아있는 단독주택들은 동네에서 오래된 주택단지 골목 풍경을 만들어내는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 석관동 한창우 주택
    장소
    석관동 한창우 주택
    건축가 김중업이 설계했던 장위동 주택이다. 이 주택은 성북구 장위동 65-154(현 성북벤처창업지원센터 공영주차장 자리)에 위치했던 것으로 김중업의 초기 주택 작품 중 하나이다. 석관동 한씨 주택, ‘人’자의 집이라고도 불린다. 1958년에 설계하여 1964년에 준공되었으며 집의 위치가 분명하지 않았으나 장위동(월곡) 국민주택단지의 자료에서 그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지하 1층, 지상 1층, 연면적 141.90㎡ 규모의 벽돌조 주택으로 한 작곡가의 의뢰로 지어졌다. 김중업의 초기 작품에서는 지붕의 조형이 강조되는데, 한창우 주택 역시 지붕의 조형을 통해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공을 들인 작품이다. 성북벤처창업지원센터의 주차장 공간 확보를 위해 철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장위리 존안
    유물
    장위리 존안
    조선시대 말 장위리 사람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문서 자료이다. 1994년 5월, 서울시는 정도 600년을 기념하여 ‘토박이 선정사업’의 일환으로 서울의 역사를 보여줄 수 있는 유물과 기록들을 수집하였는데 이때 수집, 공개된 문서 가운데 하나였다. 이 문서는 성북구 장위3동에서 5대째 살고 있던 최무영(崔茂榮) 씨(당시 63세)가 보관해 오던 것으로 조선시대인 1905년 한성부 장위리의 마을대표 선정 규칙을 담은 일종의 마을자치규범서이다. 총 10조로 되어있는 이 문서에는 마을의 대표를 선정하거나 환경보호에 관한 규범들이 실려 있으며 중죄를 저지른 사람은 주민회의를 열어 마을에서 축출하고 풍기를 문란하게 한 사람은 경고를 주며 덕행을 쌓은 자는 표창하는 등 미풍양속 규범도 제시하고 있다.
  • 우이천
    장소
    우이천
    북한산 우이봉 아래에서 발원하여 장위동과 석관동의 동북쪽을 거쳐 석계역 부근에서 중랑천으로 합류하는 개천이다. 성북구 장위동과 노원구 월계동을 가르는 자연적 경계를 이루는 우이천은 예전에는 소근내라고도 불리었다. 중랑천 지류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며, 길이는 8,330m이다. 상류에 우이구곡이라 불리는 명승지가 있다. 우이천과 중랑천이 합류하는 지점 일대에 자리한 장위동은 충적 평야가 발달하여 일찍이 농촌 마을들이 형성되었는데 현재는 그 이름만이 전해지는 명덕동, 웃대, 간대, 아랫대, 활량리가 바로 그 마을들이다. 현재는 많은 주민들이 휴식과 운동을 목적으로 우이천을 찾고 있다.
  • 장기영
    인물
    장기영
    장위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강원도 영월 출신으로 1924년 상해임시정부에서 안창호, 김구의 권유로 미국에 건너가 인디애나대학을 졸업했다. 1932년 이승만의 부름을 받고 워싱턴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위원부의 위원으로 임명되어 독립자금을 모집하고, 교민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키는 등의 활동을 했다. 1943년 미국과 일본의 전쟁이 확대되자 미군에 자원입대하여 충칭[重慶]에 있던 임시정부의 연락원으로 활동했다. 광복 후에는 강원도 영월에서 무소속으로 초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이후 체신부장관, 서울특별시장, 신민당 운영위원, 국민당 사무총장, 민중당 총재 등을 역임했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받았다. 주소는 '서울 성북(城北) 장위(長位) 246-396'이었다.
  • 이윤장
    인물
    이윤장
    장위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충북 청주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광복군으로 활약하며 항일투쟁에 앞장선 애국지사이다. 중국 광시성[廣西省] 류저우[柳州]에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입대하여 항일투쟁에 관한 계몽 및 선전활동을 전개했다. 그후 광복군 제2지대에 편입되어 산시, 허난 지구에서 일본군 와해 공작활동을 전개했다. 정부에서는 1977년에 건국포장을,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하였다. 독립유공자 공훈록의 유공자 정보에 따르면 그의 주소는 '서울 성북(城北) 장위(長位) 74-54'(현 장위동 74-54번지)였다.
  • 유봉영
    인물
    유봉영
    장위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평안북도 철산 출신으로 1919년 철산의 명흥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3.1운동에 앞장섰다. 경찰과 충돌한 후 2,000원을 가지고 상해로 망명했다. 임시정부 재무부에서 일하면서 재정지원을 하다가 여러 차례 수감되어 옥고를 치렀다. 1936년 조선일보 기자로 입사하여 1940년 폐간될 때까지 재직하였고, 광복 이후 조선일보가 복간한 뒤 재입사하여 1971년 퇴사했다. 학교법인 숙명학원 이사장과 제8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정부에서는 1977년에 대통령표창을,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독립유공자 공훈록에는 주소가 성북(城北) 장위(長位) 219(현 장위동 219-3)로 표기되어 있으나, 그의 별세 기사를 통해 자택 주소는 장위동 219-403번지인 것을 확인했다.
  • 월계로
    장소
    월계로
    강북구 미아동(미아사거리)와 노원구 하계동을 잇는 도로로 성북구 월곡동·장위동을 통과한다. 1979년 1월 30일 개설될 당시 노원구 월계동의 동명을 따서 월계로라 이름 붙였으며, 길이는 4.2㎞, 폭은 25m의 왕복4차선 도로였다. 2009년 상습 정체구간이었던 미아사거리일대의 교통체증을 해소하기 위해 장위동 드림랜드 방향에서 미아사거리로 진입하는 월계로 780m 구간을 폭 25m에서 35m로, 왕복 5차선에서 7∼8차선으로 확장했다.
  • 정재용
    인물
    정재용
    장위동에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1886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들이 독립선언 장소를 인사동 태화관으로 변경하며 예정된 시간에 등장하지 않아 파고다공원에서의 독립선언식이 혼란에 빠졌는데, 이때 경신중학교 졸업생인 그가 팔각정 단상으로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같은 해 8월에 체포된 정재용은 평양 감옥에서 2년 6개월 간 옥고를 치뤘다. 출옥 후에는 구국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의용단 활동에 참여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77년 12월 31일 성북구 장위동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하였다. 자택의 주소는 동아일보에서는 장위동 219-100번지, 경향신문에서는 장위동 219-195번지로 보도했다. 정부에서는 1977년에 건국포장,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장위부마축제
    사건
    장위부마축제
    2012년부터 매년 장위동에서 열리는 지역축제이다. 이 축제는 조선 순조의 셋째 딸 덕온공주와 부마 남녕위 윤의선의 혼례를 재현하는 행사이다. 장위2동의 지역 문화재인 부마가옥의 유래를 공유하고 주민들이 마을에 대한 자부심과 애향심을 갖도록 하자는 취지에서 시작되었다. 혼례는 연기자가 아닌 실제 주민의 신청을 받아 진행되는데, ‘장위동 김진흥 가옥’에서 전통 혼례식을 재현한 뒤 가마를 탄 채 취타대, 장위동 예술단체 등과 장위초등학교까지 퍼레이드를 한다. 퍼레이드 행렬이 도착하면 장위초등학교 운동장에서 폐백식을 재현하고, 다양한 전통 공연과 놀이, 체험 프로그램 등이 진행된다.
  • 장위3동 주민센터
    장소
    장위3동 주민센터
    성북구 한천로 657(장위동 117-5)에 위치한 행정기관이다. 동명의 유래에 관해서 마을 뒤에 있는 장위산(獐位山)에서 유래했다는 설, 고려시대 명신이 살았기 때문에 장위(長位)라고 부른데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1949년 성북구가 신설될 때 편입되었다. 1970년 장위동에서 장위제1동과 장위제2동으로 분동되었고, 1977년 장위제1, 2동의 인구수가 2만 5천 명 이상이 되면서 분동하여 장위제3동이 신설되었다. 현재 장위동 중 장위제1, 2동의 담당구역을 제외한 지역을 관할하고 있다. 2020년 6월 기준으로 담당 면적은 0.65㎢, 인구수는 1만 7천여 명, 세대수는 7,224세대이다.
  • 장위2동 주민센터
    장소
    장위2동 주민센터
    성북구 돌곶이로27길 12(장위동 69-54)에 위치한 행정기관이다. 동명의 유래에 관해서 마을 뒤에 있는 장위산(獐位山)에서 유래했다는 설, 고려시대 명신이 살았기 때문에 장위(長位)라고 부른데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1949년 성북구가 신설될 때 편입되었다. 1970년 장위동에서 장위제1동과 장위제2동으로 분동되었고, 1977년 장위제1, 2동의 인구수가 2만 5천 명 이상이 되면서 분동하여 장위제3동을 신설하였다. 1978년 상월곡동 일부가 장위동에 편입되었고, 1985년 장위동 일부가 석관동에 편입되었다. 2020년 6월 기준으로 장위제2동의 담당 면적은 0.67㎢, 인구수는 1만 3천여 명, 세대수는 6,287세대이다.
  • 장위1동 주민센터
    장소
    장위1동 주민센터
    성북구 장위로 61(장위동 225-100)에 위치한 행정기관이다. 동명의 유래에 관해서 마을 뒤에 있는 장위산(獐位山)에서 유래했다는 설, 고려시대 명신이 살았기 때문에 장위(長位)라고 부른데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1949년 성북구가 신설될 때 편입되었다. 1970년 장위동에서 장위제1동과 장위제2동으로 분동되었고, 1977년 장위제1, 2동의 인구수가 2만 5천 명 이상이 되면서 분동하여 장위제3동을 신설하였다. 2020년 6월 기준으로 장위제1동의 담당 면적은 0.70㎢, 인구수는 2만여 명, 세대수는 8,961세대이다.
  • 서울장위초등학교
    장소, 인물
    서울장위초등학교
    성북구 장월로8가길 41(장위동 68-8)에 위치한 공립초등학교이다. 1946년 11월 숭인공립국립학교 장위분교장으로 설립되었다가 1946년 11월 1일 서울장위국민학교로 승격되었다. 2009년 12월 교사 개축 및 복합화 시설을 준공하였다. 2019년 11월 1일 개교 70주년을 기념하여 ‘함께한 70년 장위사랑 한마당’축제를 개최하였고, 교훈을 ‘행복한 오늘 꿈을 이루는 내일’로 재 지정하였다. 같은 해 12월 교육복지 협력 교육장 표창을 받았다. 2020년 2월 제69회 졸업식을 진행하고, 누적 졸업생 32,364명을 배출하였다.
  • 서울장월초등학교
    장소, 인물
    서울장월초등학교
    성북구 한천로101길 66(장위동 316)에 위치한 공립초등학교이다. 2006년 7월 19일 초대 교장이 부임하였고, 장곡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을 인수받아 같은 해 9월 1일 개교하였다. 교훈은 ‘푸른 꿈, 밝은 마음’이며, 꿈과 열정으로 미래를 준비하는 건강한 학생을 기르는 것을 교육 목표로 삼고 있다. 2017년 서울형 혁신학교로 지정되었으며, 같은 해 12월 성북강북교육발전 우수학교 교육장상 표창을 받았다. 2020년 제13회 졸업생들이 졸업하여, 누적 졸업생 1,320명을 배출하였다.
  • 서울장곡초등학교
    장소, 인물
    서울장곡초등학교
    성북구 장월로23길 16(장위동 235)에 위치한 공립초등학교이다. 1978년 2월 22일 설립인가를 받았다. 2000년 3월 교사를 개축 이전하였고, 2006년 서울 장월초등학교로 학생을 분리하였다. 2015년 학부모교육 우수학교 교육부장관 표창을 받았고, 2016년 마을결합형학교 우수학교 성북강북교육지원청 교육장 표창을 받았다. 2017년 2월 제38회 졸업식을 진행하고, 누적 졸업생 15,336명을 배출하였다.
  • 서울월곡초등학교
    장소, 인물
    서울월곡초등학교
    성북구 장월로3길 42(장위동 246-194)에 위치한 공립초등학교이다. 1971년 9월 1일 설립인가를 받고 1972년 7월 14일 개교하였다. 교훈은 ‘건강하게, 슬기롭게, 유익하게’이고, 개개인의 가능성을 발현하는 것을 교육목표로 삼고 있다. 2012년부터 2019년까지 서울형 혁신학교로 지정되었다. 2017년 2017 학교경영 우수학교 교육장 표창을 받았다. 2018년 제45회 졸업식을 진행하여, 누적 졸업생 16,680명을 배출하였다.
  • 광운초등학교
    장소, 인물
    광운초등학교
    성북구 한천로 693(장위동 128)에 위치한 사립초등학교이다. 공학자이자 교육자인 조광운이 설립한 학교로 1965년 10월 25일 월계 국민학교라는 이름으로 설립인가를 받고, 이듬해 3월 광운대학교에서 개교하였다. 1987년 광운초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교훈은 ‘슬기롭고 바르며 건강한 어린이’이며, ‘튼튼한 몸과 참된 마음, 슬기로운 지혜로 미래를 가꾸어 가는 성실하고 유능한 한국인을 기른다’를 교육 목표로 삼고 있다. 학년에 맞는 체육교육과 영어, 중국어 등 외국어 교육에 힘쓰고 있다. 2019년 제50회 졸업식을 진행하여 누적 졸업생 7,103명을 배출하였다.
  • 덕온공주
    인물
    덕온공주
    조선 시대 왕족이다. 조선 23대 왕 순조의 셋째 딸로, 어머니는 순원왕후이다. 1829년(순조 29)에 덕온이라는 작호를 받았으며, 조선의 마지막 공주로 알려져 있다(고종과 명성황후 사이에 딸이 있었으나 정식 공주로 책봉되기 전에 죽었다). 1837년(헌종 3) 윤의선에게 하가하였다. 1844년(헌종 10) 5월 24일 헌종의 계비를 간택하는 행사에 참여했다가 급체로 죽었다. 묘소는 현재의 장위동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승정원일기』를 보면 덕온공주의 묘 봉표(封標, 봉분을 하고 표를 세움)에 관한 기사가 나오는데 사방의 경계표가 서로 명덕동에 이르고, 동으로 장위리(長位里)에 이르며, 남으로는 외백호 산등성마루에, 북으로는 동안평에 이르러 경계가 맞닿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 장위중학교
    장소, 인물
    장위중학교
    성북구 장위로4길 70(장위동 231-623)에 위치한 공립중학교이다. 1984년 12월 08일 15학급 설립을 인가받고 이듬해인 1985년 3월 4일 개교하였다. 1998년 과학교육 우수학교 교육감 표창을 받았으며, 1999년에는 학생 수령활동 우수학교, 특별활동 운영 우수학교로 선정되어 교육감 표창을 받았다. 2018년에는 교육발전 우수학교(자유학기제) 교육부장관 표창을 받았다. 2019년 기준으로 누적 졸업생 13,643명을 배출하였다.
  • 남대문중학교
    장소, 인물
    남대문중학교
    성북구 한천로95길 28(장위동 124-1)에 위치한 사립 중학교이다. 1934년 5월 20일 조광운 박사가 전자공업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기능인 양성을 위해 남대문 인근인 중구 봉래동에 조선무선강습소라는 이름으로 학교를 설립하였다. 이후 1940년 5월 30일 조선무선공과학원으로 교명을 개칭하였고, 1948년 1월 27일 재단법인 조선무선중학교를 인가받았다. 1952년 8월 25일에는 학제 변경으로 인해 남대문중학교와 동국무선고등학교로 분리되었고, 1969년 3월 3일 현재의 교사로 신축 이전하였다. 자유학기제 연구 학교로 지정되어 2014년 12월 ' 2015 서울형 자유학기제 운영 우수교'로 선정되어 교육감 표창을 받았다.
  • 장위행복누림도서관
    장소
    장위행복누림도서관
    성북구 장위로 21다길 53(장위동 224-12)에 위치한 도서관이다. 2018년 9월 장위 구립도서관 TF팀이 조직되고, 2019년 2월 공모를 통해 ‘장위행복누림도서관’이라는 정식 도서관명이 확정되었으며 같은 해 6월 28일 개관하였다. 성북구의 열세 번째 구립도서관으로 지역주민들의 생활스타일에 맞춘 도서관 서비스를 제공하고 모든 이용자가 세상을 넓게바라보고 사유하는 도서관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시설은 지상 2층 규모로 종합자료실, 동아리방, 프로그램실 등이 마련되어 있다. 2020년 2월 기준으로 도서 8천 9백여 권과 연속간행물 15종을 소장하고 있다.
  • 임춘앵
    인물
    임춘앵
    여성국극인으로 판소리 명창이다. 1948년 서울에서 박녹주·김소희 등과 여성국악동호회를 결성하고, 여성 창극인만으로 「옥중화」라는 이름으로 「춘향전」을 창극으로 꾸며 공연하였으며, 1961년에는 여성국악동지사를 조직하여 창극 「공주의 비밀」을 공연하였다. 여성국극의 명인으로 이름이 높았으나 1960년대 이후 여성국극의 쇠퇴로 은거하였다. 1970년대 장위동으로 이사하여 김진진과 함께 ‘임춘앵국악연구소’를 열어 여성국극의 명맥을 잇기 위해 힘썼다.
  • 장위동/역사
    장소
    장위동/역사
    장위동의 역사에 대한 설명이다. 장위동의 이름은 고려의 명신(名臣)들이 이 마을에 살았기 때문에 ‘높은 지위’의 뜻으로 장위(長位)라고도 하고, 마을 뒷산의 이름이 장위산(獐位山)이어서 이 때문에 장위라 했다고도 한다. 혹은 조선 말의 대신 윤용구(尹用求)가 여기에 살았는데 그의 호가 ‘장위산인’이었기 때문에 장위동이 되었다 설도 있다. 장위동은 조선 초 한성부에 속했으며 조선 후기에는 동부 인창방 장위리계였다. 그 후 일제강점기 1911년 경성부 인창면에 편입되었으며, 1914년에는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에 편입되었다. 1949년 8월 성북구가 분리·신설될 때 장위동은 성북구 숭인출장소의 관할이 되었고, 1973년 숭인출장소가 폐지되면서 성북구에 속하게 되었다.
  • 조선문단
    개인/단체 발간물
    조선문단
    1924년 10월 창간된 문예지이다. 1924년 10월부터 1936년 6월까지 통권 26호를 발행하고 종간되었다. 1-4호까지는 이광수가 주재하였고, 1-17호까지는 편집 겸 발행을 맡았다. 『조선문단』은 문단 전체에 지면을 제공하면서 당시 한국문학을 휩쓸던 계급주의적 경향문학을 배격하고, 민족문학·순수문학을 지향하였다. 1천 5백부를 찍은 창간호가 며칠 만에 매진되어 재판을 찍을 정도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광수가 소설, 주요한이 시, 방인근과 전영택이 기타 분야의 원고를 선정하여 잡지에 실었고, 작가에게는 원고료를 지급하였다. 이 잡지의 추천제를 통해 박화성, 최학송, 채만식, 한병도 등 많은 시인과 소설가가 배출되었다.
  • 장위동/인구
    장소
    장위동/인구
    장위동의 인구변화와 관련된 설명이다. 장위동의 인구는 1930년 1,679명으로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농촌지역의 단계였다. 1949년에는 석관동과 함께 5,880명이었고, 6.25 전쟁을 겪으면서 석관동과 합쳐 2,682명으로 감소했다. 1970년대를 전후로 지속적으로 증가세를 나타내면서 1970년에는 장위동으로만 39,600명, 1980년에는 68,505명으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주거환경의 열악성으로 전입을 기피함으로 1988년의 77,190명을 고비로 감소추세로 들어섰고 2018년 기준으로 인구수는 약 4만 7천여 명, 세대수는 약 2만여 세대이다.
  • 장위동 봉제단지
    장소
    장위동 봉제단지
    장위동 일대에 형성된 의복제조업 밀집에 대한 설명이다. 장위동의 의복제조업은 1970년대 준공된 6개 동의 건어물상가에 봉제업체와 자수업체 등 의류봉제업체들이 들어서면서 1980년대에 형성되었다. 2000년대 월드컵 특수를 거치며 패스트패션의 수요가 증가하자 의류제조업체들을 중심으로 한때 활기를 띠기도 하였으나 원자재 가격 인상과 인력 부족, 수요 감소로 침체를 겪었다. 봉제단지는 동대문 패션산업의 배후 클러스터 역할을 수행해온 곳으로, 한때 대한민국 근간산업이었던 섬유의류업의 과거와 현재를 보여주는 장소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서울미래유산의 후원을 받는 봉제양명 프로젝트가 진행되면서 새로운 수익 모델의 발굴, 지역주민들과 봉제 장인들 간 소통의 장 마련 등이 이루어졌다.
  • 장위동 김진흥 가옥
    장소, 유물
    장위동 김진흥 가옥
    성북구 돌곶이로34길 4-11(장위동76-59)에 위치한 조선시대 건축물이다. 순조의 셋째 딸 덕온공주의 남편 남녕위 윤의선의 집이다. 오늘날에는 소유자의 이름을 따서 김진흥가라고 부르고 있지만, 예전에는 부마의 이름을 따서 남녕궁이라고 불렸고, 사랑채에는 남녕궁이라는 현판이 있었다고 한다. 상량문에 을축(乙丑)년에 상량했다는 기록이 전하기 때문에, 이 한옥이 1865년(고종 2)에 건축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건물은 ㄱ자 2개가 합쳐진 모양이며 사랑채 뒤에 있는 집은 나중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1977년 9월 5일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 제25호로 지정되었다. 1998년 12월 가옥의 소유주였던 김진흥의 부인 권옥경이 이곳을 불교재단에 기증하면서 현재는 ‘진흥선원’이라는 이름의 절로 바뀌었다.
  • 장위동 230-49 주택
    장소
    장위동 230-49 주택
    성북구 장위동에 있는 주택이다. 일명 ‘김중업 건축문화의 집’이라 한다. 1966년 동방생명보험회사의 택지조성사업 추진에 따라, 1970년 건축되었으나 노후화가 진행되자 1986년 한국의 근현대 건축의 토대인 김중업과 김수근이 리모델링한 주택이다. 주택은 지하 1층, 지상 2층의 하얀 담벼락을 가진 단독주택으로, 주택 안팎에는 김중업의 건축세계가 그대로 담겨있다. 2016년 12월 성북구와 안양시가 ‘김중업 건축문화의 집’ 조성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하고, 김중업 건축문화자산을 위한 홍보 및 교육의 공동 추진과 지식정보를 교환하기로 하였다. 이 주택은 김중업의 건축세계를 확인할 뿐만 아니라, 1980년대 한국의 중산층 주택이라는 건축사적 의의를 인정받아 2017년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되었다.
  • 장위동
    장소
    장위동
    성북구에 위치한 행정구역인 동의 하나이다. 우이천의 서쪽과 ‘북서울꿈의숲’ 남쪽 일대에 위치한다. 장위동은 마을 뒤에 장위산(獐位山)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는 설과 오래전 명신(名臣), 즉 ‘높은 지위’의 사람이 살았던 것에서 장위(長位)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장위동은 조선 초 한성부에 속했으며 조선 후기에는 동부 인창방 장위리계였다.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에 편입되었고, 1949년 8월 성북구가 분리·신설될 때 성북구로 편입되었다. 장위동에는 민속문화재 제25호 장위동 김진흥 가옥이 있는데, 순조의 부마 윤의선과 그의 아들 윤용구가 살았던 곳이다. 1960년대 이전까지 장위동 농토 대부분이 윤용구와 그 친척들의 소유였으나 윤씨가가 매도하고 택지로 바뀌면서 현재는 주택이 밀집되어 있다.
  • 장위시장
    장소
    장위시장
    성북구 장위동 68번지 일대에 위치한 전통시장이다. 돌곶이역(6호선) 인근의 장위지구대 옆에 ‘장위전통시장’으로 표시된 대형 구조물로 입구를 만들었고, 200m 정도의 긴 골목을 따라 상점들이 밀집해 있어 장위골목시장이라고 부른다. 1960년대 후반부터 시장이 형성되었다고 전하는데, 오래된 전통시장이 그러하듯 노후된 시설이나 환경을 인해 쇠락해가다 2010년대 들어 빗물받이 설치, 하수노후관 교체, 보도블럭과 주차장 설치 등의 환경개선사업을 거치며 다시 활력을 찾고 다른 전통시장 재생사업의 벤치마킹 대상이 되었다. 최근 이 지역에 대한 재개발이 논의 중인데, 시장구역의 반 정도가 대상에 포함되어 이미 철시한 상점들이 다수 있고 규모의 축소는 불가피한 상황이다.
  • 장위교
    장소
    장위교
    종암동과 장위동을 연결하는 다리이다. 장위교라는 다리 이름은 장위동 동명에서 유래되었으며, 1960년에 준공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철거되었다.
  • 장위고개
    장소
    장위고개
    성북구 상월곡동에서 장위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장위고개는 우장현(雨藏峴)이라고도 하며, 장위현, 다릿굴이라고도 하였다. 현(峴)은 고개라는 의미이다. 우장현은 옛날에 기우제를 지낼 때 쓰는 물품을 보관하던 곳이었던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장위현은 장위고개를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장위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인 데서 붙여졌으며, 다릿굴은 월곡을 다릿굴이라고 했던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 붓산
    장소
    붓산
    성북구 장위동에 있었던 산이다. 붓산은 산의 이름으로, 생긴 모양이 붓과 같다고 하여 붓산이라 불렸는데, 현재는 장위동 지역에 특별한 산모양의 지형은 없고 해발고도가 높은 지형만 남아있을 뿐이다. 한편 장위동이 개발되기 전에 나지막한 돌산이 있어 독산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 윤의선
    인물
    윤의선
    성북구 장위동에 있는 김진흥 가옥에 거주했던 인물이다. 김진흥 가옥이라는 명칭은 현재 소유주에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원래는 순조의 셋째 딸인 덕온공주[1822-1844]의 남편 남녕위 윤의선이 1865년(고종 2)에 지은 재사(齋舍)였다. 윤의선은 1823년(순조 23) 태어나 1837년(헌종 3) 덕온공주와 혼인하여 남녕위(南寧尉)로 봉해졌다. 덕온공주와 사이에는 자식이 없어 윤회선(尹會善)의 둘째아들 윤용구(尹用求)를 양자로 삼았다. 1864년(고종 1) 국장도감 하현궁명정서사관과 이듬해 영건도감제조와 대왕대비전 사서관이 되어 일을 했으며, 판의금부사가 되었다. 또한, 1875년(고종 12)에는 왕세자책례도감 서사관, 상호도감익종대왕추상존호 서사관, 빈전향관 등 왕실과 관련된 일을 보기도 하였다.
  • 윤용구
    인물
    윤용구
    조선시대 문신이자 서화가이다. 덕온공주와 윤의선 사이에 후사가 없어 양자로 들어왔다. 고종 8년(1871) 직장(直長)으로서 문과에 급제한 후 벼슬이 예조·이조판서에 이르렀다. 1895년 을미사변 이후로 법부·탁지부·내부 등의 대신으로 10여 회 임명받았지만 모두 거절하고 장위산 밑에 은거하며 ‘장위산인(獐位山人)’이라 자호하였다. 일제가 남작 작위를 수여했으나 거절하고, 두문불출 세사를 멀리하였다. 글씨는 해서·행서를 많이 썼으며 그림은 난과 대를 잘 그렸다. 성북구 장위동의 농토는 대부분이 윤씨 일가의 소유였는데 1960년경부터 윤씨 일가에서 매도하고 또 개척되어 현재는 주택가로 밀집되었다. 그가 살았던 ‘장위동 김진흥 가옥’은 1977년 3월 17일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 제25호에 지정되었다.
  • 사해무역
    인물
    사해무역
    성북구 장위동 36-3에 있었던 의류제조 및 수출업체이다. 1970년대 장위동에 6개 동의 건어물상가에 봉제업체와 자수업체 등 의류봉제업체들이 들어서면서 1980년대에 의복제조업단지가 형성되었다. 하지만 원자재 가격 인상과 인력 부족, 수요 감소, 도시개발 등 여러 요인으로 인해 의류제조업체가 점차 사라지고 있는 추세이다. 이곳 역시 1990년대 말 종업원 50명, 연간 매출액 44억원 규모의 업체였으나 현재 이 지역이 장위4주택재개발지역으로 선정되어 옛 모습을 찾을 수 없다.
  • 방인근
    인물
    방인근
    소설가, 시인이다. 1920년 잡지 『창조』 제6호에 「눈 오는 밤」을 투고하며 등단하였다. 1924년 순수문예잡지인 『조선문단』을 창간하여 문단과 대중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잡지 발간 이전부터 시와 소설을 썼고, 『마도의 향불』(1934), 『방랑의 가인』(1939) 등 대중성 있는 작품을 발표하였다. 영화 제작에도 관여하여 1954년에는 자신의 호를 딴 ‘춘해프로덕션’을 설립하기도 했다. 말년에는 성북동 언덕바지 허름한 집에 살다가 장위동 230번지에서 타계하였다.
  • 내외패션
    인물
    내외패션
    1985년에 설립한 와이셔츠, 잠바 등을 위시한 신사복 전문 제조업체이다. 장위동 238-392에 위치해 있다. 1980-1990년대 성북구 관내에 있는 제조업은 섬유류·피복제조·가발제조업, 그리고 의약품 제조업 등이 주류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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