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깃거리

성북구의 인물, 사건, 장소, 유물, 문헌, 작품 등을 유형별, 시대별, 지역별로 검색하는 곳입니다.

검색정보 입력
20건의 자료가 검색되었습니다.

필터

  • 이야기 분류
    • 닫기
    • 펼쳐보기
      • 펼쳐보기
      • 펼쳐보기
    • 펼쳐보기
    • 펼쳐보기
    • 펼쳐보기
    • 펼쳐보기
    • 펼쳐보기
    필터 닫기
  • 시대
    필터 닫기
  • 지역
    필터 닫기
  • 문화재 지정
    필터 닫기
보기: 정렬:
  • 안암동 일한신궁 건축 논란
    사건
    안암동 일한신궁 건축 논란
    일제강점기로 접어들기 전, 안암동에서 '일한신궁(日韓神宮)' 건설이 추진되었던 사건이다. 1905년 일제가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며 '보호정치'를 시작하자 당시 서울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은 친일파를 종용하여 신궁을 축조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신궁건설 사업이 추진되었는데, 신궁 조성 예정지는 당시 명칭으로 '한성부 숭신방 안암동 중리'의 어좌봉(御座峰)으로 현재의 안암동1가에 속하는 지역이다. 면적은 무려 1,608평에 달할 정도로 그 규모가 매우 컸는데, 이곳은 조선 제22대 왕 정조의 후궁이던 원빈(元嬪) 홍씨의 무덤인 원빈묘가 있던 작은 언덕의 서쪽 중턱이었으며며 훗날 돈암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실시된 곳이기도 하다. 신궁은 본전(本殿)으로서 오른쪽부터 ‘단군천황(檀君天皇) 정전(正殿), 천조황(天照皇) 정전,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 정전’을 배치하고, 다음에 신전 앞뜰의 오른쪽에 이안전(移安殿)과 왼쪽에 배설청(排設廳)을 신축하고자 하였으며 전면 우측에는 찰전(札殿)과 왼쪽에 수복청(守僕廳) 그리고 정면에는 세 개의 문을 건립할 것을 계획하였다. 하지만 여러 이유로 어느 시점에 공사가 중단되어 안암동 신궁 건설은 무산되었다.
  • 6.10 민주항쟁
    사건
    6.10 민주항쟁
    1987년 6월 대통령 직선제와 민주화를 요구하면서 일어난 범국민적 민주화 운동이다. 1987년 전두환 정부가 「4‧13호헌조치」를 발표하면서 사회 각계 인사들의 비난이 이어졌다. 한편,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조직적으로 조작‧은폐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져 온 국민의 분노를 일으켰고,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는 목소리가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고려대학교 역시 마찬가지였다. 1987년 6월 10일 고려대학교에서는 2천여 명의 학생들이 참가하여 출정식을 개최한 뒤 민주광장에서 시청 앞까지 가두시위를 전개하며 6‧10 대회에 참가하였다. 한편 교수들도 민주화에 대한 연좌시위를 교내에서 전개하고, 성명을 발표해 개헌을 요구하였다. 6월 내내 이어진 항쟁의 결과, 전두환 정권은 직선제 개헌과 제반 민주화조치 시행을 약속하는 「6·29선언」을 발표하였다.
  • 유신헌법 반대 학생운동
    사건
    유신헌법 반대 학생운동
    1972년 10월 선포된 유신체제에 반대하여 일어난 학생운동이다. 1973년 서울대 문리대에서 유신 선포 이후 최초의 학생시위가 발생한 이후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동맹휴학, 시험거부 등 다양한 방법으로 계속되었다. 정부는 1974년 긴급조치 1호를 발표하였다. 같은 해 긴급조치가 해제되었으나 복역 중인 사람들에게는 적용되지 못하였고, 고려대학교 학생회는 이들의 석방을 요청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하지만 학생들이 경찰에 잡혀가는 사태가 발생하였고, 교문에서 학생들과 경찰의 투석전이 전개되었다. 시위가 계속되자 1975년 4월 정부는 긴급조치 7호를 발동하여 고려대학교의 휴교와 동교내 집회ㆍ시위금지 등을 명하였다. 민주화 운동의 기세를 꺾으려는 의도가 담긴 조치였으나 이후 대학가의 연합으로 유신체제 반대운동은 지속되었다.
  • 3선개헌 반대시위
    사건
    3선개헌 반대시위
    1969년 대통령 박정희가 3선을 목적으로 추진하였던 제6차 개헌에 반대한 민주화 운동이다. 1967년 박정희 정권은 6.8 부정선거를 통해 개헌에 필요한 의석을 확보하였다. 1969년 개헌을 위한 움직임이 본격화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한 반대 시위가 연일 전개되었다. 고려대학교 학생들도 헌정 수호를 내세우며 3선 개헌 반대 운동을 벌였다. 6월 19일 고려대학교 법대학생 7백여 명은 3선개헌 성토개회를 열었고, 28일에는 교내 배구장에서 시작된 시위가 안암동 로타리 부근까지 진출했으나 기동경찰의 최루탄 발사 등의 제지로 교내로 되돌아갔다. 결국, 정부는 휴교령을 내렸으며, 고려대학교는 조기 방학에 들어갔다. 3선개헌 반대투쟁은 학생운동을 촉발하는 동시에 민중의 관심과 연대를 확산하는 계기가 되었다.
  • 한일협정 반대운동(6.3 학생운동)
    사건
    한일협정 반대운동(6.3 학생운동)
    1964년 박정희 정권이 국외자본을 유치하기 위해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진행한 것에서 촉발된 항쟁이다. 1964년 3월 24일 시위로 고려대, 서울대, 연세대 학생들이 참여한 시위가 시발점이었다. 고려대학교 학생 1,000여 명은 교내와 안암동, 신설동 로터리 일대 등에서 시위를 벌였다. 6월 3일 시위가 확산되자, 박정희 정권은 계엄령을 선포하였고, 고려대학교는 시내 대부분 학교와 함께 무기한 휴교에 돌입하였다. 1965년 6월 22일 한일회담이 정식 조인된 후에도 회담 철회를 주장하며 반대 시위를 이어 갔지만, 무장군인이 학교에 난입하여 학생들을 구타하거나 교내 강의실 및 실험실을 파손 등의 탄압이 계속되었다. 6.3 학생운동은 비록 그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하였으나 박정희 정권에 대한 최초의 민중에 의한 반정부운동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 일제강점기 학병거부 운동
    사건
    일제강점기 학병거부 운동
    1943년 일제의 강제 징병에 저항한 학도지원병 거부운동이다. 일제는 태평양전쟁 이후 학생들을 각종 노역에 동원 시켰고, 조선인 학병 해당자들은 일제의 갖은 강압과 회유에 여러 형태로 저항하였다. 보성전문학교 법과·상과 학생들은 경성제국대학 학생 등과 함께 조선총독에게 학병거부 이유서를 작성하여 보내거나, 총독 관저에서 학도병지원제와 식민정책의 부당성에 대해 의견을 내세우는 등의 학병 거부운동을 전개하였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1944년 평양사단 보병 42부대에 배속된 보성전문 상과 학생 손희용 등은 소속 부대 및 다른 부대의 학생을 규합해 탈출과 무장투쟁을 계획하였다. 이 계획은 비록 실패로 돌아갔지만, 학병으로 차출된 학생들의 지속적인 군대 이탈과 대일 투쟁 전개는 일제에게 위기의식을 안겨주었다.
  • 고려대학교-연세대학교 정기전
    사건
    고려대학교-연세대학교 정기전
    고려대학교와 연세대학교가 친선을 도모하기 위해 운동경기를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서 승부를 겨루는 행사이다. 두 학교가 공식적으로 운동경기에서 만난 것은 1925년 열린 제5회 전(全) 조선 정구대회였다. 이후 일제 강점기 대표적인 사립 전문학교인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 )와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가 자주 맞붙게 되면서 두 학교의 학생뿐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큰 화제가 되었고, 이들의 경기는 식민지라는 암울한 시대상 속에서 민족의 혼을 살리는 민족적인 경기로 인식되었다. 1945년 12월 양교 OB구락부와 조선 축구협회의 공동 주관으로 열린 축구전은 고려대와 연세대의 정기전의 시발점이 되었고, 1956년 현재의 정기전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1957년부터는 고려대가 주관시에는 고·연전으로, 연세대가 주관시에는 연·고전으로 부르기로 양교가 합의하였다.
  • 보성전문학교의 안암동 이전
    사건
    보성전문학교의 안암동 이전
    보성전문학교는 수송동을 시작으로 낙원동, 송현동으로 교사를 이전하였다. 1932년 김성수는 보성전문을 인수할 당시 새로운 부지 선정과 신교사 건립을 약속한 바 있다. 안암동의 부지가 적합하다고 판단하여 1933년 중앙학원을 통해 6만 2천여 평의 넓은 부지를 매수하였다. 송현동 교사의 부지 6백여 평에 비하면 1백여 배 넓은 면적이었다. 안암동 신교사는 최대 550명의 학생을 수용할 것을 예상하고 교장실, 사무실, 응접실, 회의실, 교실, 중강당 등으로 구성된 본관이 설계되었다. 신교사의 설계는 조선총독부에서 건축기수로 일하고 있던 박동진에 의해 이루어졌다. 1934년 새로운 교사로 이전하던 날 교수·직원·학원은 송현동 구교사에서 고별식을 갖고 행렬을 갖추어 안암동으로 이전하였다.
  • 성북지역 쇄포 업자와 경성포목상조합의 임금분쟁
    사건
    성북지역 쇄포 업자와 경성포목상조합의 임금분쟁
    1933년 발생한 경성부 내 포목상인과 성북동표백업자들간의 임금분쟁이다. 1932년 경성포목상조합과 고양군 숭인면 성북리(현 성북동) 및 연희면 일부에 거주하는 쇄포(晒布)업자 간에 표백 값 인하문제는 두고 발생한 분쟁이다. 표백 값 인하를 둘러싸고 양측이 수개월간 팽팽하게 대립하면서 6월 15일에는 이 문제가 경성지방법원에까지 보고되었다. 이 갈등의 표면적 이유는 금전 문제였으나 표백업자들이 조합을 만든 뒤부터 임금 형식의 보수를 요구하자 포목상들이 그들의 태도를 불공하게 느낀 것도 큰 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갈등은 포목상들이 쌍문리(현 도봉구 쌍문동)에 직속 표백장을 설치하면서 일단락되었다.
  • 이수흥 사건
    사건
    이수흥 사건
    1926년 7월 10일 이수흥이 동소문파출소의 일본인 순사를 총격한 사건이다. 이수흥이 순사를 죽이고 북한산 쪽으로 달아나자, 일제는 경찰력을 총동원하여 범인 색출에 나섰다. 그런데 방향이 현재의 성북구 일대인 바람에 성북동, 돈암동, 정릉동 지역의 주민들은 범인수색이라는 명목으로 가가호호 방문하고 수시로 검문하고 신문하는 폭압적인 일제 경찰의 만행을 견뎌야만 했다. 이수흥과 그 일행이 안성과 이천, 종로에서 총격을 이어가자 성북 지역이 계엄을 방불케 하는 상황에서 헤어날 수 있었다. 임시정부 인물로 밝혀진 이수흥은 11월 17일 체포되어, 사형을 언도받고 교수형을 당하였다.
  • 일제강점기 성북지역의 학교설립
    사건
    일제강점기 성북지역의 학교설립
    성북 지역에 최초로 설립된 근대적 학교는 삼산학교(현 성북초등학교)였는데, 1908년 발의하여 1909년 3월에 성북리에서 개교하였다. 이어 숭인공립보통학교(현 종암초등학교)가 1922년 6월 8일에 숭인면 종암리(현 종암동)에 설립되었고, 1922년 사립 인창의숙이 설립되어 1924년 인창보통학교(현 인창고등학교)로 변경되었는데 숭인면 미아리(현 미아동)에서 설립되었다. 이후 1934년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를 안암동 현재 위치로 옮겨왔고, 1939년에는 경성고등상업학교(해방 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가 현재의 종암동으로 옮겨왔다.
  • 전염병원 설치 반대 운동
    사건
    전염병원 설치 반대 운동
    1938년 성북구 지역 주민들이 벌였던 결핵요양소 설치 반대 운동이다. 1930년대 후반 조선총독부는 중일전쟁 발발 이후 전시체제로 돌입하자, 후방지원 및 병력 공급을 위해 건강한 인력의 확보와 관리가 긴급해졌다. 그에 따라 대표적인 전염병인 결핵을 억제하기 위해 검사를 강화하고 전문요양소를 각지에 설치하려고 했다. 1938년 2월 현재의 성북동 지역에 결핵환자 치료를 위한 요양소가 설치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지역 주민들이 상하수도 시설이 없는 성북동에 요양원이 들어서면 주민 건강에 위협이 될 것이라며 병원 설립 반대 운동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병원이 영업을 강행하자 같은 해 4월 정북정회의 주요 인물들이 재차 진정을 요구했다. 이 사건은 일제강점기 성북정회의 역할을 알 수 있는 대표적 사건이다.
  • 아리랑시장 상가마을공동체 활성화 사업
    사건
    아리랑시장 상가마을공동체 활성화 사업
    2013-2014년 성북구 정릉동에서 진행되었던 아리랑시장과 지역 활성화를 위한 주민들의 운동이다. 2012년 ‘성북구 마을만들기 공모사업’을 통해 정릉동 주민들이 동네 사람들의 소모임과 문화생활을 엮는 커뮤니티 카페를 구상하였고, 구청의 도움을 받아 아리랑시장에 ‘행복한 정릉 카페’를 열었다. 그리고 2013년 서울시가 운영하는 ‘청년일자리허브’에서 청년들을 성북문화재단에 파견해 지역의 일을 경험하게 하였는데, 카페를 매개로 주민들과 청년들이 ‘서울시 상가마을공동체 활성화사업’을 추진하게 된 것이다. 이 사업을 통해 아리랑시장 지도와 잡지를 만들었고, 상인들의 도움을 받아 아침을 거르고 출근하는 직장인과 학생들에게 아침을 제공하는 ‘아침 도깨비 간이식당’을 운영했으며, 프리마켓 형태의 축제와 같은 ‘와글와글 장터’를 열었다.
  • 신설리 여성노동자 파업
    사건
    신설리 여성노동자 파업
    1933년 발생한 경성제사공장의 파업 사건이다. 9월 21일 숭인면 신설리(현 성북구 보문동, 동대문구 신설동 일대)에 있었던 종연방직 경성제사공장의 여성노동자들이 총파업에 돌입했다. 일제 경찰과 회사 측은 강경하게 진압하면서 파업참가자들을 체포했고 파업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파업을 통해 당시 매우 열악한 상황에 놓인 조선인 여성노동자들의 처지를 볼 수 있다. 1929년 기준 하루 임금이 일본인 남성노동자가 2.32원, 일본인 여성노동자가 1.01원, 조선인 남성노동자가 1원을 받았던 것에 비해 조선인 여성노동자들의 임금은 0.59원에 불과했다. 그리고 1920년대부터 확산된 사회주의 진영의 영향도 있었는데, 이효정, 이병희, 허마리아 등이 주도한 당시의 파업에 이재유 등의 사회주의자도 연계되어 있었다.
  • 손가정 토지 분쟁
    사건
    손가정 토지 분쟁
    1789년(정조 13) 현재 정릉동 손가정 마을 사람들과 이 지역에 별장을 가지고 있던 김계연 사이에 토지 소유권을 둘러싸고 발생한 분쟁이다. 손가정은 북한산 아래에 있어서 풍광이 빼어나 많은 사대부들이 찾는 명소였다. 사대부 중 손가정의 토지를 사들여 별장을 만들고 그 안에 정자를 꾸미는 사람도 생겨났는데, 이들과 해당 지역의 주민들이 극심한 마찰을 빚는 경우도 있었다. 1789년에 정조가 능행을 다녀오는 길이었는데, 손가정 마을의 손봉덕 등이 길을 막고 억울함을 하소연하면서 사정이 드러나게 되었다. 별장과 정자를 소유한 김계연이 주민들이 개간하여 경작한 토지를 자신의 소유로 주장하며 노비들을 풀어 위협하고 강제로 세를 걷어갔다는 것이었다. 정조가 직접 조사를 지시한 후 손가정 주민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 성북천 복개공사장 사고
    사건
    성북천 복개공사장 사고
    1985년 성북천 복개공사장에서 일어난 축대 붕괴 사고이다. 성북천은 1960~1970년대까지 구간을 나눠 복개하였고, 복개한 자리에는 상가아파트를 지었다. 1985년 7월 11일 오후에 성북천 삼선교 상류에서 하천 바닥을 파내는 공사를 하다가, 주택의 축대 밑부분을 깊게 파내는 바람에 축대가 한꺼번에 무너져 버렸다. 이 사고로 주택이 붕괴되고 집안에 있던 모녀가 흙더미에 깔려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딸은 숨졌다. 주변의 주택 2채도 심하게 금이 갔으나 다행히 빨리 대피하여 더 이상의 인명 피해는 없었다.
  • 서울대 교직원용 택지 말썽
    사건
    서울대 교직원용 택지 말썽
    1967년에 있었던 서울대학교주택조합의 택지를 이사장이 임의로 전매한 사건이다. 1963년 주택이 없는 서울대학교 교직원들이 주택단지를 만들어 자립주택을 세우고자 사단법인 ‘서울대학교주택조합’을 결성하였고, 1965년 문화재보호구역으로 묶여있던 국유림을 대통령 지시에 의해 택지로 불하받았다. 그런데 토지를 불하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집은 짓지 않고 주택조합 이사장이 택지를 임의로 매각한 것이다. 그로 인해 조합원 71명이 이사장을 서울지검에 고소하였다. 이후 우여곡절 끝에 조성된 1970년대의 교수단지에는 입주한 서울대 교직원이 많지 않았다.
  • 교수집에 대낮 강도-파출부 위협 5백만 원 털어-
    사건
    교수집에 대낮 강도-파출부 위협 5백만 원 털어-
    1989년 1월 17일에 윤장섭의 집(정릉2동 559-98)에 강도가 침입한 사건이다. 오전 10시 30분경에 성북구 정릉동 교수단지 안에 있는 서울대 건축학과 윤장섭(당시 64세) 교수의 집에 3인조 강도가 침입하여 파출부 김순이(58)씨를 흉기로 위협하고 넥타이로 손발을 묶은 뒤 밍크반코트 1벌, 은수저 15벌, 카메라 2대 등 5백여만 원어치를 훔쳐 달아났다. 파출부 김씨에 따르면 이날 오전 뒷마당에 쓰레기를 버리고 현관으로 들어오는 순간 방범대원 복장과 비슷한 옷차림을 한 30대 남자 3명이 흉기를 자신의 목에 들이대고 넥타이로 손발을 묶어 안방에 가둬놓은 뒤 장롱과 서랍을 뒤져 달아났다고 하였다.
  • 1922년 성북리 세탁노동자 파업
    사건
    1922년 성북리 세탁노동자 파업
    1922년에 현재의 성북동 지역에서 있었던 노동자파업 사건이다. 조선 영조 때에 농토가 적고 시장이 멀어 살기에 불편했던 현재 성북동 지역 백성들의 생계를 위한 일거리를 주었는데, 그것이 도성 안의 시장에서 파는 포목을 마전질, 즉 세탁하고 표백하는 일에 대한 권리를 주었고, 그로부터 성북동 양쪽 골짜기의 물이 합류되는 부근의 냇가를 마전터라고 부르게 되었다. 1902년에는 성북동에 표백회사가 들어서 현재 성북초등학교 자리에 마전한 광목을 말리곤 했고, 운수교 자리에는 직조공장이 있었다. 1922년 3월 17일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성북리(현 성북구 성북동) 세탁노동자 20명이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15일간 파업을 벌였고, 그 요구는 관철되자 업무에 복귀하였다.
  • 성북동 피병원 건립 운동
    사건
    성북동 피병원 건립 운동
    1921년 성북동에서 추진되었던 피병원을 건립하기 위한 운동이다. 1919년부터 사립 피병원 설립운동이 전개되었는데, 3·1운동에서 폭발한 반일의식이 의료분야에서 특수화된 운동이며, 구체적으로는 조선인 전염병 환자를 조선인에게 익숙한 방법으로 치료하는 피병원을 조선인의 힘으로 설립하자는 운동이었다. 사립피병원기성회에서 1920년 이래로 피병원을 건립하기 위해 기부금을 모집하였다. 모집된 금액이 오만원에 달하자 동소문 밖 성북동에 병원 일부를 건축하기 위한 공사에 착수하였다. 하지만 피병원 건립 운동은 전염병 확산 우려한 주민들의 반대, 기부금의 저조 등의 이유로 실패로 돌아간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