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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의 인물, 사건, 장소, 유물, 문헌, 작품 등을 유형별, 시대별, 지역별로 검색하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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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기정
    인물
    손기정
    평안북도 의주 출신의 육상선수이다. 1932년 양정고보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인 마라톤 훈련을 받게 되었다. 그는 1933년부터 1936년까지 13개의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였고, 이중 베를린 올림픽을 포함한 10개의 경기에서 우승하였다.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 수여 당시 꽃다발로 일장기를 가린 것과 국내 언론사에서 일장기를 말소한 사건으로 유명하기도 하다. 1937년 보성전문에 입학한 이후 보성전문 육상부에 가입하여 활동하였고, 해방 이후 안암동에 거주하며 후학을 양성하였다. 그는 자신의 집을 ‘마라톤 선수 합숙소’로 이름 붙이고 마라톤 유망주를 뽑아 훈련시켰는데 1947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한 서윤복, 1950년 보스턴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은·동을 함기용, 송길윤, 최윤칠 등이 모두 손기정에게 가르침을 받은 선수들이다.
  • 유진오
    인물
    유진오
    고려대학교 총장 등을 역임한 교육자이자 문학가·법학자·정치인이다. 1920년대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수석으로 입학해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1932년부터 보성전문학교 법과 강사로 활동하였고, 1937년에는 교수에 임용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대학교육의 근간이 되는 법령 초안을 작성했으며, 대한민국 헌법의 초안을 작성하기도 했다. 그의 헌법 초고는 현재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경성대학 법문학부 교수와 보성전문학교 교수를 겸직하다가 고려대학교의 총장을 지내기도 했다. 이 외에도 문학·법학·교육·정치 등 각 분야에서 활동하였다. 1930-1940년대 중일전쟁을 선전하거나 징병제와 지원병을 독려하는 글을 발표하고 좌담·대담·강연 등 다양한 형태로 일제의 식민정책을 옹호하고 침략전쟁을 미화하는 활동을 하여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었다.
  • 신상웅
    인물
    신상웅
    소설가이다. 1938년 일본 교토에서 태어나 경북 의성에서 성장하였다. 중앙대 영문과 및 동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한 그는 1968년 《세대》 신인문학상에 중편소설 「히포크라테스 흉상」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주로 시대의 모순을 비판적으로 조명하는 사실주의 소설을 썼다. 서울의 주택난과 투기를 목적으로 한 다주택 소유자들을 꼬집은 「도시의 자전」을 비롯하여 그의 전 작품이 2003년 총 10권의 전집으로 재출간되었다.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및 예술대학원 원장을 지냈으며, 제6회 한국창작문학상(1973)을 수상하였다.
  • 나희덕
    인물
    나희덕
    시인이다. 1966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나 연세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 박사과정을 졸업하였다.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뿌리에게」가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어린 시절 일 년 남짓 숭례초등학교 부근에 살았던 나희덕은 1994년에 발표한 시집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에 종암동 배경의 자전적 이야기인 「못 위의 잠」을 수록하였다. 시집으로는 『그곳이 멀지 않다』, 『사라진 손바닥』, 『파일명 서정시』 등이 있으며 『반통의 물』, 『저 불빛들을 기억해』 등의 수필집을 출간하였다. 김수영문학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문학 부문, 현대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미당문학상, 백석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조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를 거쳐 2019년부터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 황동규
    인물
    황동규
    시인이다. 1938년 평안남도 숙천에서 소설가 황순원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영국 에든버러대학교에서 영문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서울대 영어영문학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19세 때 쓴 「즐거운 편지」 등이 1958년 『현대문학』에 추천되며 등단하였다. 사랑을 향한 서정적 감수성부터 인간 삶의 근원적 문제, 사회에 대한 저항의식까지 한국 현대시의 지평을 넓혔다. 특히 대표작으로 꼽히는 연작시 『풍장』을 비롯하여 「점박이 눈」, 「권진규의 테라코타」 등은 삶과 죽음의 관계에 대한 시적 탐구를 보여준다. 한국 시단의 거장으로 불리며, 미당문학상(2002), 홍조근정훈장(2003), 만해대상(2006), 호암상 예술상(2016) 등을 수상하였다.
  • 이철환
    인물
    이철환
    소설과 동화, 에세이를 쓰는 작가이다. 1962년 서울에서 태어나 대학 졸업 후 수년간 유명 입시학원의 강사였던 이철환은 쌍문동 '풀무야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글쓰기를 시작했다. 학생들과 이웃들에게 들은 실화를 바탕으로 쓴 베스트셀러 산문집 『연탄길』은 2000년 문화관광부 추천도서와 교보문고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으며, 일부 에피소드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교과서에 실리기도 하였다. 이 외에도 『행복한 고물상』, 『위로』, 『곰보빵』, 『눈물은 힘이 세다』 등에서 이웃들의 가슴 뭉클한 이야기를 담아 많은 독자들에게 위로와 감동을 선사하고 있다. 그의 몇몇 작품 속 배경인 길음동(미아리)도 소박하고 따뜻한 분위기를 품은 동네로 그려진다.
  • 김영기
    인물
    김영기
    화가이다. 1911년 서울에서 서화가인 해강 김규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 중국 화단의 거장 제백석(齊白石)을 사사하고 북경 보인대학교를 졸업하였다. 귀국 후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여 등단한 이래, 문인화적 필치에 현대적인 기법을 더하여 한국적 수묵화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였다. 특히 ‘동양화’ 대신 '한국화'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을 주장하며 한국 미술의 정체성과 주체성을 강조하였다. 『조선미술사』(1948), 『동양미술사』(1971), 『동양미술론』(1980) 등을 저술하여 미술이론가로도 활동했으며, 이화여대 홍익대 고려대 성균관대 등에서 후진 양성에 힘썼다. 돈암동 전차종점 인근 주택에 거주한 바 있으며 기와집이 어우러지는 돈암동 풍경화를 다수 제작하였다.
  • 한홍택
    인물
    한홍택
    안암동에 거주한 그래픽 디자이너이다. 동경도안전문학교에서 디자인을, 제국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였다. 귀국 후 1940년부터 유한양행에서 근무하며 광고 제작과 디자인을 담당했다. 1946년 ‘대한산업미술가협회’의 전신인 ‘조선산업미술가협회’를 결성하고 1975년까지 회장직을 지냈으며, 홍익대 공예과와 덕성여대 응용미술과 교수를 역임하였다. 그의 디자인 작품의 특징으로는 회화성, 한국적 소재 등을 꼽을 수 있다. 개인전을 꾸준히 개최하며 디자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확장한 그는 한국 그래픽 디자인사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 신익희
    인물
    신익희
    정릉동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1894년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일본 와세다[早稲田]대학 정경학부에 유학하여, 『학지광』의 발간을 주도했다. 만주와 베이징[北京], 상하이[上海] 등지를 드나들면서 해외독립운동원과의 연락을 맡았고, 안으로는 민족지도자들과 독립운동의 방법을 토의하여 3.1운동의 도화선을 당기는 데 일역을 담당했다. 만세시위에 가담했던 신익희는 1919년 3월 다시 상하이로 떠나 26년 간의 망명생활을 시작했다. 대한민국임시헌법을 기초했고, 임시정부의 초대 대의원과 초대 내무차관 등을 역임했다. 광복 이후 임시정부 요인의 한 명으로 귀국한 신익희는 활발한 정치활동을 전개했다. 초대 국회에서 국회의장으로 활약했고, 1956년에는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출마하였으나, 선거를 앞두고 사망하였다.
  • 차미리사
    인물
    차미리사
    돈암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차미리사는 조국의 자주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교육 구국운동이 시급하며, 특히 여성교육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실천한 근대 민족교육운동가이다. 1900년대 초 외국 유학을 떠난 신여성으로, 미국에서 대동교육회, 대동보국회 활동을 하였다. 1917년 선교사로 귀국한 후 배화학교 사감으로 있었다. 3.1운동 이후에는 여성 교육과 생활개선을 목적으로 하는 조선여자교육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또한 근화여학교를 설립, 교장에 취임하였다. 1950년에는 덕성여자초급대학(현 덕성여자대학교)을 설립하였다. 2002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독립유공자 공훈록의 유공자 정보를 통해 '돈암동 117-1'번지에 거주하였음을 확인하였다.
  • 황현산
    인물
    황현산
    정릉동에 거주했던 문학평론가이자 번역가, 교수이다. 고려대학교 불어불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남대학교, 강원대학교, 고려대학교 등에서 교수를 역임하였고, 한국번역비평학회를 창립, 초대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고려대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10년 이상 정릉에 거주하였다. 2017년 성북문화재단이 마련한 ‘성북문인사기획전’의 세 번째 문인으로 선정되어 전시와 좌담회, 강연 등이 열리기도 하였다. 담낭암 진단을 받고 투병하다가 2018년 8월 8일 별세하였다. 주요작품으로는 산문집 『밤이 선생이다』, 평론집 『잘 표현된 불행』, 『말과 시간의 깊이』 등이 있으며, 번역서로는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의 『파리의 우울』 등이 있다.
  • 최동호
    인물
    최동호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이다.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의 교수로 1988년부터 2014년까지 재직하였다. 1948년 경기도 수원에서 출생하여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지방 도시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고등학생 시절 동급생이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암송하는 것을 듣고 시를 쓰는 문학자가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1976년에 첫 시집 『황사 바람』을 발간한 후 다수의 시집을 펴냈다. 본격적인 문학평론 활동은 1979년 『중앙일보』 신촌문예에 「꽃, 그 시적 형상의 구조와 미학」이 당선되면서 시작한다. 1985년 첫 시론집 『현대시의 정신사』를 간행한 후 다수의 시집과 평론집을 출간했다. 문예지 『서정시학』과 『미래서정』을 창간했다.
  • 박노준
    인물
    박노준
    국문학자이자 교육가이다.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고전문학을 전공하여 『한용운 연구』, 『고려가요의 연구』, 『현대시의 전통과 창조』 등의 저서를 발간하였다. 한양대 명예교수로 국어국문학회, 한국고전문학연구회 등에서 활동하고 한국시가학회 초대 회장을 역임하였다. 조지훈의 제자로 1978년 조지훈의 선비정신을 떠올리며 논객으로서의 조지훈에 대해 쓴 글인 「논객 조지훈의 면모」를 작성하였다
  • 황수연
    인물
    황수연
    조선시대 내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1844년에 경상북도 평해에서 태어나 서울로 와서 양봉협의 양자가 되었다. 1863년 내관시험에 합격하였고, 고종의 호종내관을 지냈다. 본명은 황윤명인데 고종이 수연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호는 춘파이다. 1893년 벼슬에서 물러난 후, 동소문 밖 별장(현 서울 성북동 별서)에 머무르면서 한시를 지었는데, 유고집 『춘파유고』에 수록된 한시 90편 가량이 대부분 성북동 별장에서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1908년에는 삼산의숙(三山義塾)을 설립하고 제반 경비를 부담하였으며 항일의병활동도 지원한 것으로 보인다. 고종과 긴밀한 관계였던 만큼 그의 활동에 고종이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 홍봉진
    인물
    홍봉진
    정치인이자 교육가이다. 1918년 서울로 올라와 선린상업학교에 입학하였고, 경성제국대학 법과·영문과를 졸업했다. 서울대, 고려대, 국민대 등에서 교수생활을 하였고, 해방 후에는 제4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도 경기 제18선거구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사후에 발간된 자서전 『양촌일지』(1986)에는 1929년 정릉에서 가정교사 일을 하면서 신흥사 옆 고갯길에 '아리랑'이라는 이름을 붙인 일, 1944년 주요 도시에 소개령이 내리자 미아리의 초가집을 산 일, 1958년부터 20년간 성북동에 살면서 겪은 일 등이 기록되어 있어 개인사를 통해 성북구의 역사를 알 수 있다.
  • 표승현
    인물
    표승현
    화가이다. 1929년 황해도에서 태어났지만, 한국전쟁 때 월남하여 춘천에 정착했다가 서울대학교 회화과에서 공부하였다. 1957년 국전에서 작품 「석교」가 특선함으로써 미술계에 등단했고, 성신여자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다. 1960년대에 국내 화단에 들어온 추상표현주의 흐름은 표승현에게도 영향을 미쳐 본격적인 추상의 조형 형태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980년대에는 투병생활을 하게 되면서 신앙을 통한 새로운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구도하는 듯한 작품세계를 보이며, 서양의 추상과는 달리 인간과 영성에 대해 천착하면서 독특한 종교적 ‘도’의 작품세계를 추구해 나갔다. 대표작은 「음양」, 「적(跡)」, 「적송」 등이 있다.
  • 최성수
    인물
    최성수
    시인이자 시민활동가이다. 최성수는 1968년부터 50년 넘게 성북동에서 살았다. 30여년을 교사로 재직하면서 『장다리꽃 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사랑은』 등의 시집을 냈으며, 청소년 소설 『비에 젖은 종이비행기』, 『꽃비』 등을 내기도 하였다. 퇴직 후에는 성북동 주민과 지역의 공익ㆍ비영리 활동가, 기획자 및 문화·예술인들이 모여 설립한 모임인 ‘성북동천’에서 활동하며, 성북동에서 50년 넘게 살아온 경험을 토대로 성북동을 주민들이 어울려 행복하게 살아가는 마을로 만드는 데 작은 힘을 보태고 있다.
  • 최만린
    인물
    최만린
    조각가이다. 1935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경기중학교 시절부터 조각 공부를 시작하여 서울대학교 조소과를 졸업하였고, 박사학위를 받은 후에는 모교의 교수로 재직하였다. 살 곳을 선택할 때에도 반포지구의 아파트 분양 혜택을 거부하고, “생명을 찾고 예술로 표현하는 사람은 땅을 밟고 흙을 만지며 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자연이 가까운 곳을 선택, 정릉동에 손수 집을 짓고 살았다. 대표작으로는 「이브」, 「O」 시리즈가 있는데, 생명의 본질을 더욱 단순화된 형태로 승화시키면서 자신만의 방법과 소재로 작품을 만들었다. 자택은 성북구 솔샘로 7길 23(정릉동 716-16)에 위치한다.
  • 주요섭
    인물
    주요섭
    소설가이자 영문학자이다. 1921년 매일신보에 단편 「깨어진 항아리」를 발표하면서 등단하였다. 1935년 『조광』 창간호에 발표한 「사랑손님과 어머니」로 대중의 인기를 받으며 작가로서 명성을 높였다. 1954년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창립동인으로 활동하였고, 『코리아 타임즈』 주필과 한국문학번역협회 회장 등을 지내며 영문학자로 한국문학의 번역에 힘썼다. 1943년에는 일본의 대륙 침략에 협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중국에서 추방되어 귀국하였다. 이때 돈암동 254-1번지에 자리를 잡았는데 1953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길」에선 한국전쟁 전후의 돈암동 모습을 그리기도 하였다.
  • 조지훈
    인물
    조지훈
    시인이자 학자, 교육가이다. 1939년 『문장』에 시 「고풍의상」과 「승무」, 1940년에 「봉황수」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해방 후 성북동에 한옥을 마련하여 ‘방우산장’이라는 당호를 붙이고, 근처에 살고 있던 김기창, 김환기, 윤이상 등과 교류했다. 그는 방우산장에서 박목월, 박두진과 모여 의견을 나누며 『청록집』을 간행하였는데 이 책의 장정은 김용준이 맡았다. 그의 작품은 민족정서와 불교적 색채를 띠고 있으며, 활동 후기에는 혼란한 현실 정치를 비판하며 『지조론』(1962)과 같은 산문집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 정한숙
    인물
    정한숙
    소설가이자 교육가이다. 1947년 전광용, 정한모, 전영경 등과 ‘주막’동인을 만들고 활동했다. 1948년 『예술조선』에 「흉가」가 입선된 이래 많은 단편소설을 발표하였으며, 「전황당인보기」(1955), 「금당벽화」(1955), 「고가」(1956) 등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고향을 떠나 온 뒤 안암동, 성북동, 삼선동으로 옮겨 다니며 살았는데 교수로서 자리를 잡을 무렵 성곽 앞쪽으로 집을 옮겼다. 그는 다양한 소재와 소설기법을 사용하여 새로운 시대 상황에서 살아 갈 한국적 인간상을 창조했다는 평을 받는다.
  • 정한모
    인물
    정한모
    시인이자 평론가이다. 정한모는 1923년 충청남도 부여에서 출생하였고, 서울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모교에서 교수로 재직하였다. 1960년대부터 어머니와 손녀까지 4대가 함께 30여 년을 성북동에 살았다. 195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 「멸입滅入」이 당선되며 본격적으로 활동하였다. 자연과 일상에서 얻는 시상(詩想)을 담은 시집 『카오스의 사족』, 『아가의 방』, 『새벽』 등을 발표하였다. 문학 연구의 대표 업적으로는 「문체로 본 동인과 효석」, 「김영랑론」, 『현대작가연구』 등이 있다. 1988년 문화공보부 장관을 할 때 납·월북 문인 작품에 대한 제한을 풀었다. 한국시인협회상(1971), 서울특별시문화상(1983), 대한민국예술원상(시부문, 1987)을 수상하였다.
  • 정탁영
    인물
    정탁영
    동양화가이다. 1937년 횡성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하고, 모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면서 작품활동을 활발히 하였다. 1970년대 성북동으로 이사하였는데, 마당에서 30여 종의 야생화를 가꾸고, 큰 매화나무에서 매실을 수확해 이웃들에게 나눠주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1980년 들어 여주의 산자락에 화실을 두고 작업을 이어갔는데, 1990년대 「잊혀진 것들」과 2000년대 「영겁 속에서」 시리즈를 통해 수묵 판화의 번짐 기법과 투명함이 더해진 독특한 수묵화의 세계를 만들어 냈다. 2000년대 시도한 칼 그림 드로잉 작품은 두꺼운 마분지를 칼로 섬세하게 오려내 무용수들의 움직임을 담아낸 것이다. 2010년 집과 화실을 경기도 여주로 옮기고 작품 활동을 이어가다 세상을 떠났다.
  • 정지용
    인물
    정지용
    시인이다. 1902년 충청북도 옥천에서 태어나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시인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대표작 「향수」는 일본 유학시절인 1927년 『조선지광(朝鮮之光)』에 발표한 시인데, 대중가요로 만들어져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 시는 우리말을 사용하는 것조차 억압받던 때 순수한 우리말로 생생하게 고향을 그려내 새로운 시 언어를 개척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김영랑, 이하윤 등과 동인지 『시문학』을 내고, 이태준, 박태원, 유치진 등과 ‘구인회’ 활동을 하였고, 청록파 시인을 발굴하기도 하였다. 해방 이후 성북구 돈암동에 살았는데 사회주의 계열 문인들을 중심으로 결성한 조선문학가동맹에 관여한 바람에 6.25전쟁이 발발하자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북한군에 의해 납북되던 도중에 사망하였다.
  • 전형필
    인물
    전형필
    간송미술관(당시 명칭 보화각)을 설립한 문화재 수집가이다. 간송은 그의 호이다. 1906년 종로의 거상 집안에서 태어나 일본 유학시절 민족문화에 관심을 가졌고, 귀국하여 오세창의 도움을 받아 문화재의 수집과 보호에 심혈을 기울였다. 1934년 수집한 문화재를 보존하고 연구할 장소를 물색하다 현재 성북구 간송미술관 자리에 대지를 마련하였고, 오세창은 그곳에 ‘북단장’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1938년에는 북단장 내에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박물관인 보화각을 완공하였다. 그가 수집한 주요 문화재에는 김정희, 정선, 김홍도, 장승업 등의 서화 뿐만 아니라 국보와 보물급의 문화재도 다수 포함되었다. 1962년 사망하였는데, 문화재 수호 행적을 기려 1964년 대한민국문화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 전성우
    인물
    전성우
    성북동에서 활동했던 화가이다. 호는 우송(雨松)으로 간송 전형필의 장남이다. 1934년 서울에서 출생하였고, 어릴 때부터 보화각(현 간송미술관)을 찾는 예술가들을 통해 그림을 보는 안목과 지식을 익히고 교육받았다. 서울대학교 미대에 입학했다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현대미술을 접하고 추상화의 세계에 빠져들어, 해방 후 1세대 추상화가가 되었다. 부친의 사망을 계기로 귀국하여 1966년 전형필의 지인들과 함께 한국민족미술연구소를 설립하고 보화각을 간송미술관으로 새롭게 개편시켰다. 서울대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의 교수를 역임하고, 보성고등학교 교장을 맡기도 하였다. 퇴직 후에는 미국 유학 시절부터 주제로 삼았던 「만다라」를 이어 「청화만다라」 연작을 발표하였고, 국내외에서 많은 개인전과 초대전을 하였다.
  • 전광용
    인물
    전광용
    소설가이자 국문학자이다. 1918년 함경남도 북청에서 태어나 1940년대부터 서울에 살았는데, 안암동과 성북동을 거쳐 1960년대에 동소문동 1가 140-69번지로 이사하여, 부산 피난 시절 외에는 성북구에서 생활하였다. 1939년 동화 「별나라 공주와 토끼」가 동아일보에, 1955년 「흑산도」가 조선일보에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1956년부터 서울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신소설 연구와 한국 근현대 문학 연구에 힘쓰면서 문단과 학계에서 활발히 활동하였다. 대표작 『꺼삐딴 리』(1962)는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까지 혼란스러운 시류에 편승한 주인공을 통해 시대상을 보여준 작품이다.
  • 임송희
    인물
    임송희
    동양화가이다. 한국 산수화의 현대화에 있어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그는 눈에 보이는 자연의 사실적 모습과 눈에 보이지 않는 자연의 기운을 조화롭게 융합시킨 산수화를 통해 독자적 예술세계를 구축했다. 1978년 성북동에 집을 짓고 당호를 '취석헌(醉石軒)'이라 붙였다. '돌이 좋아 그 기운에 취했다'는 의미이다. 마당 끝에 커다랗게 누워 있는 자연석에는 '취석(醉石)' 두 글자가 새겨져 있다. 대학에서 은퇴한 뒤 작업에 매진하며 실경산수, 파묵, 문인화, 추상화 등 다양한 분야의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 이어령
    인물
    이어령
    문학평론가, 언론인이다. 1956년 『한국일보』에 평론 「우상의 파괴」를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다. 『경향신문』 『중앙일보』 『한국일보』 등에서 논설위원, 잡지 『문학사상』의 주간을 맡았다. 대학 졸업 후 처음 성북고등학교에 취직하여 학교 근처에서 살다가 삼선동으로 이사하였다. 경기고등학교 교사가 되며 성북구를 떠났으나 십여 년 뒤 다시 성북동으로 이사를 왔다. 신문에 연재한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에서는 우리 문화론을 펼쳤고, 1982년 발간한 『축소지향의 일본인』에서는 일본의 역사와 문화를 다뤘으며 그 외에도 20여 권의 저서가 있다.
  • 이신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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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신구
    1930년대 성북동 지역사회 운동을 주도한 지역운동가이자 삼산학교 이사장이다. 1931년부터 1934년까지 성북리 구장(城北里 區長)을, 1936년 성북동이 경성부로 편입된 이후에는 성북정 총대(城北町 總代)를 담당했다. 그가 성북리의 구장을 맡을 수 있었던 것은 지역학교였던 삼산학교를 살리기 위해 적극적으로 임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노력은 당시 『동아일보』에도 보도되었는데, 그를 ‘항상 사회사업에 유의하던’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그가 성북동이라는 지역사회에서 주민 대표직을 맡을 수 있었던 데에는 그의 경력(메이지대 출신, 고등보통학교 교사)과 함께 마을의 현안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지역사회에 능력과 공을 인정받았기 때문이었다.
  • 안수길
    인물
    안수길
    소설가이다. 1935년 『조선문단』에 단편소설 「적십자병원장」과 콩트 「붉은 목도리」가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대표작인 『북간도』는 한인들의 북간도 개척사를 다룬 5부작 대하소설로 성북동 어느 암자의 방을 빌려 집필했다고 한다. 빽빽하게 책으로 둘러싸인 서재에서 글을 쓰고, 마당에 파초와 오동나무를 키우던 종암동 123-71번지 집에서 타계하였다. 작품으로 「제삼인간형」, 『북간도』, 『창을 남으로』 등이 있다.
  • 신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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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영상
    전통 수묵을 현대화하는 작업을 해 온 화가이다. 해, 달, 별, 구름과 같이 우주와 자연의 질서와 흐름을 담은 「조(潮)」, 「문살」, 「율(律)」 등은 비구상적 추상화를 표상해 온 그의 작품들이다. 스승 서세옥과 서울대 동료들과 함께 1970년대 성북동에 자리를 잡았는데, 마당에는 아이들이 태어날 때마다 기념으로 목련과 후박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서울대에서 후학들을 양성하였고, 퇴임 이후에는 성북동 자택의 화실에서 작품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 신동엽
    인물
    신동엽
    시인이다. 195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석림이라는 필명으로 쓴 장시(長詩)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로 등단하였다. 대학 졸업 후 돈암동에서 자취를 하면서 헌책방을 차려 생계를 꾸린다. 인병선과 결혼 후 건강악화를 이유로 낙향했다가 1960년 서울로 올라와 다시 돈암동에 집을 마련하였다. 2년 후 동선동 5가 45번지에 작은 한옥으로 이사하였다. 4.19혁명의 정신을 되새긴 「껍데기는 가라」(1967)와 동학농민운동을 주제로 한 장편 서사시 「금강」(1967) 등을 통해 한민족 고유의 역사인식과 민족애, 날카로운 현실인식과 민중의 저항의식을 시로 읊었다.
  • 송영수
    인물
    송영수
    조각가이다. 석고와 돌, 나무를 조각 재료로 쓰는 다른 조각가들과 달리 철과 생활 주변에서 얻을 수 있는 재료로 새로운 추상조각을 선보여 ‘철 조각의 선구자’라고도 불린다. 성북고등학교(현 홍익대학교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와 모교에서 학생을 가르쳤다. 1965년 동숭동에 있던 학교와 가까운 성북동으로 이사를 했다. 느티나무 마을이라 불릴 정도로 주변에 나무가 많은 곳이었다. 1970년 서울, 추풍령, 부산 세 군데에 추상조각을 세워 달라는 건설부의 주문을 받아 작품을 만들던 중 갑작스럽게 세상을 뜬다. 주요작품으로 「이준열사상」(1963), 「가족」(1964), 「대립」(1967), 「원효대사상」(1969) 등이 있다.
  • 송영방
    인물
    송영방
    동양화가이다. 서울대학교에서 우리나라 화단을 이끄는 노수현, 장우성, 서세옥 등에게 가르침을 받고, 서세옥을 중심으로 결성된 ‘묵림회’와 동문들이 모여 만든 ‘한국화회’에 참여한다. 『새벗』, 『새소년』과 같은 아동지와 신문연재소설의 삽화, 문인들의 책 표지화를 그리기도 했다. 1984년에 첫 개인전을 연 이후 꾸준히 작품활동을 이어나갔고, 국전이나 여러 미술제의 심사위원을 맡거나 동국대 미술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하기도 하였다. 대표작으로는 「완당선생 적거도」, 「사미승」, 「승무도」 등이 있다. 그는 1960년대 중반 성북동에 터를 잡았는데 돌과 매화를 아주 좋아한다는 뜻으로 집에 ‘매석취호(梅石醉豪)’라는 당호를 붙였다.
  • 손진태
    인물
    손진태
    사학자, 민속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23일 밤 안암동·안감천(성북천)의 만세시위에 참여할 당시 안암리 11번지에 거주하고 있었다. 1932년 송석하·정인섭과 함께 조선민속학회를 창설하고 1933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민속학회지 『조선민속』을 창간하였다. 1934년 안암동으로 이전한 보성전문학교의 사서로 고용되고, 이후 보성전문학교의 문명사 교수와 도서관 관장직을 맡았다. 1949년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학장을 거쳐 문리대학장에 재직 중 6.25 전쟁으로 납북되었다. 저서로는 『조선신가유편』 『조선민담집』 『조선민족설화의 연구』 『조선민족문화의 연구』 『조선민족사개론』, 『국사대요』 등이 있다.
  • 박고석
    인물
    박고석
    화가이다. 일본대학 예술학부를 졸업하였다. 1955년 정릉동에 자리 잡고 서라벌예대와 홍익대에 출강하였다. 박경리, 천승세 등 작가들의 신문 연재소설에 삽화를 그리기도 하였다. 돈암동 전차 종점 근처에 작업실을 두고 북한산, 도봉산, 설악산, 지리산을 다니며 산을 주제로 한 작품을 제작하여 ‘산의 화가’라고도 불리웠다. 1978년 정릉동에서 동소문동으로 이사하고, 1983년에는 처남인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하여 지은 명륜동 집 아틀리에에서 활동을 이어갔다. 작품으로는 〈범일동 풍경〉(1951), 〈가족〉(1953), 〈외설악〉(1981) 등이 있다.
  • 김진걸
    인물
    김진걸
    무용가이다. 황해도 군수인 백부의 집에서 자라다가 백부가 성북동으로 이주할 때 같이 서울로 왔다. 1943년 돈암동에 있던 조택원무용연구소에 들어가 무용을 배웠다. 1955년 동양극장에서의 첫 공연을 시작으로 총 11회의 개인발표회를 가졌다. 그는 대규모 무용극보다 감정 표현을 강조한 예술무용인 무용시(舞踊詩)형태의 작품을 주로 발표했는데, 대표작 「산조散調」(1957)는 가야금 선율에 맞춰 마음의 흐름을 정리한 춤이다.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1959년 김진걸 무용연구소를 개설하였고, 1992년까지 한성대 교수로도 재직하였다. 1989년 발행한 『김진걸산조춤 무보집』에 산조춤의 기본 형식과 동작, 호흡 등을 기록하여 자신의 산조무보를 총정리하였다. 1955년부터 생을 마감할 때까지 돈암동 지역에 거주하였다.
  • 김동리
    인물
    김동리
    소설가, 교육가이다. 1935년 『조선중앙일보』에 「화랑의 후예」, 이듬해 『동아일보』에 「산화」가 거듭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무녀도」(1936), 「황토기」(1939) 등을 잇달아 발표하며 작가로서 입지를 굳혔다. 1945년 서울로 올라와 돈암동 210번지 13호에 살았는데, 소설 「혈거부족」(1947)에서 해방 직후 성북동과 돈암동 등지의 풍경을 자세히 묘사하였다. 서라벌예대 교수와 문학 관련 협회를 이끌며 박경리를 포함해 수많은 문인들을 문단에 추천하고, 양성하였다.
  • 김구용
    인물
    김구용
    시인, 한학자이다. 1949년 『신천지』에 시 「백탑송」 「산중야」 등을 발표하고 문단에 등단하였다. 해방 전 동학사에 머물렀던 경험으로 불교적인 시를 남겼고, 산문 형태의 긴 시가 특징이다. 1960년대 초 성북동을 거쳐 동선동2가 142번지에 있는 ㄷ자 구조의 한옥에서 살았다. 서재에는 ‘보연재’라고 쓴 편액이 걸려있었다. 미아리고개 너머에 있던 서라벌예술대학에서 강사로 재임하였던 그는 20여 년 동안 대학에 재직하며 학생들을 가르쳤다. 고전과 한문에도 능해 『삼국지』, 『수호전』 등 중국 고전을 번역하였다.
  • 강진구
    인물
    강진구
    성북동에 있던 삼산학교를 운영한 교육가이다. 1908년 삼산의숙(三山義塾)에서 출발한 삼산학교는 성북구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이다. 1939년 1월 29일자 동아일보에 의하면 무산아동의 유일한 교육기관삼산학교의 교주(校主) 강진구가 오랫동안 숙원이었던 학교 승격 신청을 위해 경성부 학무과를 방문했음을 보도했다. 기사에 따르면 강진구는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고 연 3,000원씩을 부담하기로 했으며, 삼산학교유지후원회에서는 교사를 책임지고 건축하기로 했다. 이 때 삼산학교는 6년제 사립심상소학교로 승격이 된 것으로 보인다.
  • 한묵
    인물
    한묵
    화가이다. 본명은 한백유이다. 1914년 서울에서 태어났고 중국과 일본에서 서양화를 공부하였다. 1944년 귀국해서 강원도 고성에 머물 때 이중섭과 교유하였고, 한국전쟁 시기에는 부산으로 피난가서 박고석, 황염수 등과 화단활동을 하였다. 이후 서울로 이주하여 정릉동에 자리잡고 홍익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모던아트협회 창립을 주도하였다. 1961년에는 안정된 생활을 버리고 프랑스로 떠나 작가로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추상미술을 개척한 1세대 작가로서, 이중섭, 김환기, 유영국 등과 함께 현대미술 태동기에 서구 모더니즘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개척한 한국 미술사의 산 증인이다. 한국과 프랑스를 오가면서 전시회를 열었고, 2013년에는 프랑스에서 100세 기념전시회도 개최하였다. 대표작으로 「나선」, 「공간」, 「번개탑」 등이 있다.
  • 장우성
    인물
    장우성
    동양화가이다. 1936년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연구단체인 ‘후소회(後素會)’를 김기창 등과 함께 만들었고, 이후 잇따라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면서 화단의 주목을 받았다. 해방 이후 삼선교 언덕배기에 살다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이 설립되면서 동양화 교수가 되어 서울대 관사로 들어갔다. 1963년 미국 워싱턴에 동양예술학교를 설립하고 동양미술을 가르쳤으며 이듬해 개인전을 열기도 하였다. 1966년 귀국하여 삼선동 4가 45번지에 ㅁ자 구조의 단층집을 마련하여 살다가, 1971년 지역개발로 인해 이사하였다. 주요작품으로는 「이충무공 영정」, 「성모자상」, 「김유신장군 초상화」, 「백두산 천지」 등이 있다. 시(詩)·서(書)·화(畵)를 온전히 갖춘 현대화단의 마지막 문인화가로 평가받는다.
  • 양원달
    인물
    양원달
    번역가이자 수필가이다. 1953년 서울대학교 음악 강사, 1956년 성균관대학교 강사, 서라벌예술대학 교수, 1959년 펜클럽 한국본부 사무국장,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사무처장 등을 역임하였다. 그의 저서로는 수필집 『13월』(공저, 1960)과 번역서 『모파상선집』(1955),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55) 등이 있다. 1962년 모친과 1963년 맏형의 장례를 정릉동 자택에서 치렀다는 신문 기사를 통해 1960년대에 정릉동에 거주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안동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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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림
    음악평론가이자 소설가, 번역가이다. 1957년 20대에 쓴 소설 「지옥도」가 『신태양』에 실리며 문단에 등단하였다. 영문학을 전공하여 1960년대 펄 벅, 노먼 메일러 등 외국 작가의 작품을 번역해서 발간하였다. 서양고전음악을 듣고 수집하는 취미가 있어서 『레코드음악』에 음반의 감상과 평가를 연재하기도 하였다. 독학으로 한학을 공부하여 우리나라 최초로 『장자』를 완역하고, 『벽암록』을 번역하였다. 동소문동 자택에서 말년을 보냈다.
  • 박명환
    인물
    박명환
    성북동에 있었던 삼산학교의 교사이다. 1925년 3월 9일자 동아일보에 삼산학교를 도울 것을 호소하는 글이 실릴 정도로 당시 학교의 운영사정은 좋지 않았지만 숭인면 면장과 일부 지역 사람들이 동분서주하며 학교를 운영하기 위해 애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삼산학교의 선생이었던 박명환은 무급이거나 매우 적은 봉급을 받으며 학생들을 가르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 김기택
    인물
    김기택
    일제강점기 고양군 숭인면 면장이다. 삼산학교의 운영과 유지를 위해 노력하였다.
  • 하윤실
    인물
    하윤실
    성북동에 있던 삼산학교의 교장이다. 만해 한용운을 따르던 불교청년들이 조직한 항일 비밀결사체인 만당(卍黨)의 당원이기도 하였다. 1928년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보성고보의 선생으로 있었던 그는 1929년 8월 문인이자 신여성으로 알려진 김일엽과 결혼하였다. 1930년 삼산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하면서 삼산학교의 운영을 위해 노력하여 성북리에 있던 일부 유지들의 후원을 이끌어 내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삼산학교를 보통학교로 승격시키고, 6년제로 개편하고자 노력하였으나, 결국 보통학교로 승격되지 못하였고 6년제 학교로도 개편되지 못했다.
  • 최종태
    인물
    최종태
    조각가이다. 1932년 대전에서 태어나 1958년 서울대 조소과를 졸업하고 60여 년째 조각가의 길을 걷고 있다. 그는 미술사조나 유행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추구하여 모델을 쓰지 않고 작품활동을 하는 작가로도 유명하다. 독실한 가톨릭신자로 명동성당, 연희동성당, 돈암동성당과 바오로 수녀원 등 20여 곳에 성모마리아상 등 성상조각을 제작하였다. 그의 작품세계에는 종교의 벽이 없어 법정스님의 요청을 받고 길상사의 관세음보살상을 만들었다.
  • 정태용
    인물
    정태용
    문학평론가이다. 성북구 돈암동에 있었던 서라벌예술대학에서 교수를 역임하였다. 1939년 『시림』창간호에 시 「무등(無燈)의 터널」을 발표하면서 등단하였다. 광복 후 『예술부락』 동인으로 「문학의 대중성」을 발표하며 평론활동을 하였고, 1957년부터 『현대문학』에 「현대시인연구」를 연재하여 주요 시인들의 작품세계를 조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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